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1-24)
에녹(Enoch)은 아담(사람, man)부터 시작, 일곱 번째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입니다. 태고교회 첫 번째 교회인 아담부터 셋, 에노스까지, 이 세 교회는 비유하자면, 태고교회라는 방 전체를 한 가운데서 환히 비추는 등과 같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핵은 첫 번째 교회인 아담이지요.
비록 등이 한 가운데서 방을 비추지만 둘레로, 주변으로 갈수록 흐릿, 어두워지는 것처럼 태고교회도 후대로 갈수록 그렇게 어두워지다가 끝에 가서는 홍수로 종말을 고합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와 홍수, 그리고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를 잇는 아주 특별한 교회이지만, 그러나 태고교회에 포함시키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더이상 퍼셉션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 첫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노아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살피겠습니다.
오늘은 점점 어두워져 가던 중 끝에서 두 번째인 이 에녹에 대하여, 평소 우리가 알던 그 경건해(?) 보이는 겉뜻과는 많이 다른, 그 속뜻을 좀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천사들이 읽는 에녹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태고교회는 지금은 사라진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지금은 거의 이해 불가한 내적 커뮤니케이션이 있던 때였으므로, 그리고 주님은 인류를 이런 방식으로 자신과 연결되게 하셨으므로, 태고교회가 어두워져 간다는 건, 점점 그 퍼셉션이 희미해져 간다는, 그러므로 서서히 무언가로 그걸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 곧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은 두 가지, 그러니까 주님 음성을 직접 듣는 방법과, 잘 정돈된 교리를 학습하여 듣는 간접 방법이 있는데, 얼핏 느껴지시는 대로, 이 둘은 그 근본이 아주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퍼셉션, 내적 음성으로 아는 것이고, 후자는 학습을 통해 지식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하여 삼층천을 이루고, 후자는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이층천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태고교회 일곱 번째 후손인 에녹 정도 되자, 아직 주님 음성 듣는 퍼셉션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너무 희미해져서, 두루뭉술 일반적으로는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는 알쏭달쏭 주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고, 이쯤에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 그동안 퍼셉션으로 알던 주님의 신성, 곧 선과 진리를 글로 정돈, 교리화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엄청난 짓(?)을 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이 에녹이라는 교회입니다. 위 본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To walk with God)라는 표현들의 속뜻이 바로 이겁니다.
나름 필요에 의해 이런 짓을 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아직은 퍼셉션으로만 사람들은 주님과 연결되어야 하였으므로, 이들이 만든 교리를 주님은 이때는 사용을 금하시고, 나중을 위해 따로 보관하셔야 했는데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의 속뜻입니다.
인류는 곧 지금 태고교회처럼 하나님과 천사들 간 다이렉트로 하는 퍼셉션 같은 커뮤니케이션을 더 이상 못하게 되고, 홍수 후 주님은 대신 인류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인 ‘양심’으로 주님과 연결되게 하셨고, 이후 인류는 퍼셉션이 아닌, 학습을 통해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를 위해 이 에녹이라는 교회가 수고하여 만든 교리를 따로 보관하신 것이지요.
어떠신가요? 말씀의 겉뜻과 그 속뜻이 참 다르지요? 저 자신,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주석 번역을 하다가 좀 충격을 받은, 그래서 매우 인상적이었던 말씀이어서 이렇게 나누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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