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날, 두 큰 광명체’의 속뜻 (창1:14-19)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창1:14-19) 14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15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6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17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18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9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Gen. 1:14-19)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1장, 그 네 번째 시간, 곧 넷째 날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대한 속뜻입니다.
14-17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먼저 셋째 날, 식물 창조와 다섯째 날, 동물 창조 사이에 왜 엉뚱하게(?) 광명체들 창조가 등장하는 걸까요? 아니 우리가 배운 대로라면 광명체들, 특히 해 같은 것은 식물 창조 전에 창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야 광합성 작용을 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만 보더라도 분명, 창세기 1장은 우리가 아는 천지창조의 순서를 단순히 다큐 적듯 기록한 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런 스토리 텔링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뭔가 다른 속뜻이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앞 3주에 걸친 설교를 통해, 이 창세기 1장은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 변화를 대략 여섯 상태로 구분한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상태라 해도 되고, 단계라 해도 됩니다.
그 각 상태를 요약, 정리하면,
첫 번째 상태는, 선행 상태, 곧 유아기 상태와 거듭남의 시작 직전 상태를 말하는데, 본문에서는 이것을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라 하였습니다. 이때 주님 편에서 시작된 자비의 첫 번째 움직임을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하셨지요.
두 번째 상태는, 구분하는 상태입니다. 주님의 것과 사람의 것이 서로 뒤엉켜있는 첫 번째 상태에 ‘궁창’이라는 것을 두어 구분하시는 것인데, 이 ‘궁창’이 바로 속 사람이며, 여기에 구분하여 담아두시는 주님의 것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라 한다 말씀드렸습니다.
세 번째 상태는, 식물 상태, 곧 못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씨를 받은 다음 차근차근 어떤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걸 순서대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라 하였습니다. 이 식물 상태의 특징은 잘난 체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안 하던 제법 그럴듯한 경건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되면서 그걸 자기가 하는 줄로 여기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람이 어떤 선과 진리를 행하면서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린다는 건 그에게 아직 참된 생명이 없다는 뜻인데, 그걸 ‘못 움직이는’(inanimate) 상태, 곧 식물 상태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상태는 나중에 깨닫고 돌이키는 상태라 하여 ‘회개의 상태’라고도 합니다.
네,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그 상태 변화가 일어나며, 오늘은 그 네 번째 날, 곧 상태가 되었습니다.
식물의 창조, 곧 식물의 상태는 못 움직이는 상태, 그러니까 잘난 체하는 상태라 하였습니다. 이때는 자기가 하는 무슨 경건한 말과 행동이 자기한테서 나오는 줄로 아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섯 번째 상태부터는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여섯 번째 상태에 가서는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십니다. 즉 ‘움직이는’(animate) 것들이 시작된 것이지요. ‘못 움직이는’ 상태를 잘난 체하는 상태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움직이는’ 상태는 겸손한 상태, 즉 주님의 공을 주님께 돌리는 상태, 주님을 사랑하는 상태, 주님에 대한 애정이 있는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천국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이런 상태가 ‘생물’(the living soul) 상태, 곧 살아있는 생명의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이 갑자기 처음 식물 상태에서 이런 동물 상태로 나아가게 된 건가요? 바로 이것이 오늘 엉뚱하게(?) 갑자기 중간에 광명체들 이야기가 나오는 그 배경이 되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본문에 대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내용들 중 발췌한 부분들입니다. 영역(英譯) 전문은 별도 첨부를 참조하세요.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의 의미는 먼저 신앙의 본질(the essence of faith)과, 그리고 새롭게 빚어지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그 진행 과정을 알기 전까지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 그 자체이신 분은 한 분 주님뿐이신데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주님 친히 요한복음에서 선언하신 것처럼 생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2] 새롭게 빚어지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신앙의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맨 처음, 그들에게는 생명이라는 게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데요, 먼저는 기억 신앙(faith of the memory)입니다. 일종의 지식일 뿐인 신앙(a faith of mere knowledge[fides scientifica])이지요. 다음은 머리 신앙(faith in the understanding)으로, 일종의 지적 신앙(an intellectual faith)입니다. 끝으로 가슴 신앙(faith in the heart)입니다. 사랑 신앙(the faith of love), 구원 신앙(saving faith)이라고도 하지요. 앞 첫 두 종류의 신앙을 3절로 13절에서는 못 움직이는(inanimate) 것으로, 사랑으로 활기찬 신앙을 20절로 25절에서는 움직이는(animate)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여기서 먼저 다루는 것이며, 이르시기를 ‘광명체들’(luminaries)이라 하시고, 이때 사랑을 ‘낮을 주관하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밤을 주관하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단수로 언급됩니다.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luminaries)의 be 동사의 라틴어 표현을 보면 sit입니다. 복수 표현인 sint가 아니지요.
[3] 속 사람의 사랑과 신앙은 육체를 가진 겉 사람에게 있어서는 열과 빛 같은 건데요, 이런 이유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되며, 이것이 광명체들을 일컬어 ‘하늘의 궁창에 있다’(to be set in the expanse of heaven), 즉 속 사람 안에 있다 하신 이유입니다. 큰 광명체는 속 사람의 의지(will)에, 작은 광명체는 속 사람의 이해(understanding)에 말입니다. 그러나 햇빛은 그 빛의 수용체가 있어야만 볼 수 있듯 이들은 의지와 이해 안에서만 나타납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그리고 이해를 진리, 즉 신앙으로 표현하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입니다. (AC.30)
이 ‘의지를 사랑으로 표현한다’(affects the will with love)는 것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을 보면 그의 의지, 곧 그가 어떤 마음인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신 말씀에 나오는 광명체들, 곧 해, 달, 별들은 거듭나는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사랑과 신앙이라는 불을 켜신 것이며,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함께 겉 사람을 비추게 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남은 거듭남의 모든 여정을 이 사랑과 신앙, 그리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 무사히 안전하게 마치게 하신 것이지요.
다음 글인 AC.31은 해, 달, 별들이 왜 이런 속뜻을 갖는지를 여러 말씀 구절을 인용하며 증명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건 첨부를 참고하세요.
하나만 특별히 보고 가자면, 아래 말씀이 있겠습니다.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출27:20-21)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끊임없이 등불이 타오르게 하신 이유는 바로 이것, 곧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상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교회의 모든 규례는 주님에 관한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었기 때문이지요.
AC.32, 33번 글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라고 하시다가, 그다음엔 사랑은 ‘큰 광명체’(a greater luminary), 신앙은 ‘작은 광명체’(a lesser luminary)라 하시고, 계속해서 사랑에 관해서는 ‘낮을 주관하라’(rule by day), 신앙에 관해서는 ‘밤을 주관하라’(rule by night) 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감추어진, 특히 종말의 때(end of days)인 이때 감추어진 아르카나(arcana, 단수 arcanum, 秘義)인데, 이들에 대한 설명이 지금 이렇게 허락된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인함입니다. 이들 아르카나가 종말인 이때 특히 더 봉인된 이유는, 지금이 시대의 끝(the consummation of the age), 곧 사랑이라는 게 아주 희귀하고, 그 결과 신앙이라는 것 또한 아주 희귀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 친히 복음서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24:29)
여기서 ‘해’(the sun)는 사랑을 의미하는데 어두워지며, ‘달’(the moon)은 신앙을 의미하는데 빛을 내지 않습니다. ‘별들’(the stars)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인데 하늘에서 떨어지며, 이들이 곧 ‘하늘의 권능들’(the 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입니다.
[2]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사랑 그 자체 말고는 무슨 다른 신앙을 인식하지도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天的, The celestial angels) 또한 사랑의 신앙 말고는 신앙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천국 전체가 일종의 사랑의 천국인데요, 천국에서는 사랑의 생명 말고 무슨 다른 생명이라는 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국의 모든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며, 이는 단 한 번도 그 설명이 허락된 적도, 심지어 인류 그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어서 그래서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사랑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선언하고, 지각하기도 하는데요, 그것은 모든 사랑은,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모든 생명은, 이 생명은 오직 사랑에만 속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모든 행복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오며, 자기들한테서는 그 어떤 사랑이나 생명, 행복도 말미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모든 사랑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은 또한 기록된 대로, 주님의 변모, 변형(變形, transfiguration) 관련, 큰 광명체, 즉 ‘해’(sun)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2)
내면 가장 깊은 것들이 얼굴로,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것들은 옷으로 상징되는데요, 그래서 주님의 신성(神性, the Lord’s Divine)이 ‘해’(the sun), 즉 사랑으로, 주님의 인성(人性, his human)은 ‘빛’(the light), 즉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상징된 것입니다. (AC.32)
원래 천국은 천적 천국 하나뿐이었습니다. 처음엔 사랑과 신앙이 한 덩어리였기 때문이었지요. 영적 천국은 나중에 생겼습니다. 점점 사랑과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사랑이라도 없이는 생명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고서는 기쁨(joy)이라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사실, 이 사실을 아주 잘 아는 것, 이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능력이지요. 사랑, 생명, 기쁨이란 이런 것, 곧 이렇게 서로 본질적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한테서 사랑을, 같은 말이지만 무언가 그가 간절히 원하는 걸 제거한다면, 그 순간 그는 그 즉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게 되며, 놀랍게도 무슨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맙니다. 생명에 대해 지금까지 제가 영계, 특히 천국에서 목격했던 장면들처럼 말입니다. 자기 사랑(the loves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s of the world) 안에도 생명이나 기쁨하고 뭔가 닮은 게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둘은 참된 사랑하고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사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움(hatreds)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그에 비례해서 이웃을, 그리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이지요. 참고로, 사람이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 사랑과, 그리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이웃 사랑은 바로 이 참된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이런 까닭에, 참된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요, 참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생명이고,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참된 사랑은 단 하나만 있을 수 있으며, 참된 생명 역시 그런데요, 이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더할 나위 없는 참된 행복(felicities)이 흘러나오지요. 천국에 있는 천사들에게 속한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AC.33)
AC.34번 글은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를 왜 단수 표시(라틴어 [sit], 영어의 be 동사)하셨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즉 주님은 사랑과 신앙의 분리를 허락하신 적이 없다는 말이지요.
사랑과 신앙은 분리가 허락된 적이 없습니다. 이 둘은 하나를 이루며, 같은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명체들’(luminaries)이 처음 언급될 때, 그들은 하나로 여겨졌으며, 그래서 이르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음의 정말 놀라운 세부 내용들을 이런 배경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은 천적 사랑(the celestial love)에 힘입어,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 사랑 안에 있는데요, 신앙 관련 모든 지식에 있어 이 사랑으로 말미암으며, 설명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그런 어떤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신앙의 교리들에 관한 지식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러나 사랑은 없는 그런 영들의 경우, 그들은 천국 마당의 첫 번째 문턱조차 접근은 고사하고 도로 달아날 수밖에 없는, 그런 어떤 냉기 어린 삶이나 희미한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 중 더러는 그분의 계명대로 살지 않았으면서도 말하기를, 자기들은 주님을 믿어왔다고 하는데요, 이것을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1-22, 끝까지)
[2] 그래서 분명한 것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또한 신앙 안에 있으며, 그렇게 해서 또한 천국의 삶 가운데 있는 반면, 말로는 자기들은 신앙 안에 있다 하면서, 그러나 실제 사랑의 삶 가운데 있지는 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볕(열) 없는 빛과도 같습니다. 겨울철에도 물론 햇빛은 있지만, 그 빛 안에 열이 없어 결국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고 만물이 죽은 듯 무기력해지는 그런 계절처럼 말입니다. 반면, 사랑을 동반한 신앙은 봄철 햇빛과도 같아서, 열매 맺게 하는 햇볕 아래 만물이 자라고 번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영적 천적인 것과 관련하여 아주 흡사한데요, 그래서 말씀에서는 보통 지상에 존재하는 것을 가지고 영적 천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시대의 끝, 종말을 예언하실 때, 신앙이 없거나 사랑 없는 신앙을 또한 ‘겨울’(winter)로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입니다.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막13:18-19)
여기서 ‘이 일’(Flight, 비행, 들림, 휴거)은 마지막 때를,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가 죽는 때를 의미합니다. ‘겨울’(Winter)은 사랑이 결핍된 삶을, ‘환난의 날’(the 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 삶의 끔찍한 상태를 말합니다. (AC.34)
사랑과 신앙은 같이 가는 것임을 정말 주님은 강조, 또 강조하시는데요, 그 이유는, 그래야 속 사람이 준비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해도 선과 진리가 같이 가지 않으면 내 것, 곧 나의 속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같이 간 것만 사후에도 살아남기 때문이며, 살아남은 걸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겉과 속이 다르게 사는 건 절대 안전하지 않습니다. 물론 겉과 속이 같되 악과 거짓으로 같으면 안 되고, 오직 선과 진리로만 같아야 합니다. 천국을 가고 싶으면 말입니다.
윗글에 마침 ‘휴거’가 나와 잠깐 부연합니다.
휴거는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했기 때문인데요, 같은 본문의 마태복음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24:31)
AC.4060번 글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갑자기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결정적일 때 쓰신 것입니다.
AC.35, 36번 글은 사랑과 신앙에 대한 좀 더 깊은 고찰입니다. 첨부를 참고하시고요. 한 가지,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해 온 사람들은 사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을 생각할 때, 어떤 사람들은 그건 단지 생각일 뿐이라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건 주님을 직접 향하는(directed toward the Lord) 생각이라고 합니다’라는 내용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할 듯 하여 아래 첨부합니다.
‘주님을 직접 향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왕 앞에 나아가듯 주님을 직접 알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거의 모든 신앙인이 대부분 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천국에서는 근본적으로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천국과 지옥’ 15번 글입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 개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다. 선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을 의도하고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이웃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HH.15)
끝으로 AC.37번 글입니다.
광명체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를 이루게 하라 하십니다. 이들 말씀에는 지금 단계에서 밝힐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들어 있습니다. 글자 상으로는 이런 종류의 아르카나가 전혀 보이지 않아도 말이지요.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 사이에는 교대(alternations), 반복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일반적이든 아니든 말이지요. 날과 해의 변화와도 비교할 수 있겠네요, 네, 이런 사실을 관찰하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하겠습니다. 날의 변화는 아침, 정오, 그렇게 저녁, 밤을 거쳐 다시 아침이지요. 해의 변화도 비슷합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그렇게 가을, 겨울을 거쳐 다시 봄으로 이어집니다. 열과 빛의 교대가 그래서 가능한 것이고, 땅에서 나는 소산물들도 그렇습니다. 영적 천적인 것들 간의 교대를 이들을 가지고 비교할 수 있는데요, 이런 교대와 다양성이 없으면 삶은 천편일률적이 되며, 그 결과, 전혀 삶이라고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선과 진리도 전혀 알아차리지도, 구분, 심지어 지각조차도 할 수 없게 되지요. 이런 교대를 선지서에서는 ‘법도’(ordinances, [statuta])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로 창세기 8장 22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8:22) (AC.930-937) (AC.37)
18-19절,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낮’(day)은 선을, ‘밤’(night)은 악을 의미하며, 그래서 선을 낮의 일, 악을 밤의 일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빛’(light)은 진리를, ‘어둠’(darkness)은 거짓을 의미합니다.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3:19, 21) (AC.38)
오늘 설교 준비는 유난히 좀 힘들었는데요, 그러나 끝까지 저를 권하셔서 붙들어 주고 계시는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안에, 제 안에 이 사랑과 신앙의 불을 켜주신 주님, 제가 끝까지 이 불빛 아래 달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2025-08-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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