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개신교, 심지어 블교 집회에서도 집회 중 각종 질병과 장애가 치유되는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또 방언이라 하여 다른 사람들, 심지어 본인도 그 뜻을 알 수 없는 말들을 하고 말이지요. 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혹시 무슨 기록들이 있나요? 교인들이 이런 것에 대해 질문하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목사님. 실제로 개신교 포함, 기독교, 불교 또는 비기독교 종교 집회에서조차 기적, 치유, 방언 같은 현상들이 일어나는 이유,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또 교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매우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 주제입니다. 아래에서 스베덴보리의 명확한 기록, 그 신학적 결론, 그리고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답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지혜로운 방식을 차례대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핵심 원칙
외적 기적은 신앙 자체를 절대 만들지 못한다 (AC 7290, 7291, 7337 등)
스베덴보리는 다음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기적은 신앙을 만들지 못하며, 오히려 억지로 믿게 하는 강압(coercion)의 성질이 있어 시간이 지나면 신앙을 더 약하게 하거나 없애버리기까지 한다라고 말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내적 자율성을 깨뜨리기 때문에 참된 신앙을 만들지 못한다’(AC 7290–7291 요약)
외적 기적은 영적 진리가 아니라 감각적인(sensuous) 것에 속한다 (AC 7337, 8348, AE 706)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은 내적 신앙이 아니라 감각적인 신앙(sensuous faith)입니다. 이 신앙은 감각적 자극에 의존하고, 계속 새 자극(기적)이 없으면 유지되지 않으며, 삶에서 선(愛)이 없기 때문에 마음 속 깊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적 자체는 거룩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고, 단지 외적 감각 차원의 현상일 뿐입니다.
외적 기적은 거짓된 종교들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다 (AC 3887, 7012 / TCR 501 등)
스베덴보리는 아주 신랄하게 말합니다. 거짓된 종교의 사제들, 우상숭배하는 이들, 심지어 악령들이나 지옥의 영들조차 사람들 앞에서 기적 같은 현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즉, 기적의 출처는 다양하며, ‘기적이 일어났으니 그 집회가 참이다’라는 사고방식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매우 위험합니다. ‘악령들도 기적 같은 일들을 보이지만, 이는 감각을 속이는 현상에 불과하다’ (AC 3887 요약)
기적 치유가 일어나는 이유는 내적 신앙이 아니라, 다른 요인 때문일 수 있다 (AC 10083, TCR 501)
스베덴보리는 다음 네 가지를 명확히 구분합니다. 첫째, 심리적, 정신적 반응(affectional states)입니다. 강한 감정이나 염원, 집단적 분위기, 혹은 마음의 변화에 의해 몸의 증상이 완화되는 경우들이 있겠습니다. 둘째, 일시적인 영적 영향(influx)인데요, 천사들이 순간적으로 마음을 위로하거나 평정을 주는 그런 영향입니다. 셋째, 자연적 질서(natural causes)입니다. 스트레스 감소나 호르몬 변화, 신체 자연 회복력, 혹은 악한 영들에 의한 거짓 치유처럼 일시적으로 증상을 멈추게 하고, 나중에 더 큰 혼란을 가져오게 하는 방식(AC 7039, 7317) 등이 있습니다. 즉, ‘치유가 일어났다 →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같은 논리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방언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입장
스베덴보리는 현대 은사운동의 방언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천국에서는 ‘영적 의미에 따라 말이 변한다’ (HH 234–240)
천국의 영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대화는 내면의 의미에 따라 자동으로 통역됩니다. 이것이 오순절의 기적(각자 자기 언어로 들음)의 본질인데, 그것을 감각적 방언과 혼동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의 외형이 아니라 내적 의미가 중요하다 (AC 1635)
방언이라고 하면서 의미가 없고, 이해가 되지 않으며, 생활의 선(善)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영적 언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의 방언이 참된 방언이 되려면, 방언과 함께 나의 삶과 생활에 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은 감각적 흥분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스베덴보리는 외적 감각의 흥분(sensuous excitement)에서 나오는 종교적 광열(fanaticism)을 자주 경계합니다. 특히 외적 열광이 내적 선과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영적 현상이 아니라 감정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즉, 이해할 수 없는 말 자체는 거룩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적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기적은 참된 교리의 증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힌두교 집회에서도 일어나고, 심지어 이단, 무당집, 무속 행사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니까 맞다’는 논리는 기독교적으로도, 스베덴보리 신학적으로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기적보다 더 확실한 기준은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이다 (TCR 501)
스베덴보리는 거듭 말합니다. “기적이 아니라, 삶의 선함이 진짜 증거다.” 곧, 주님 사랑으로 마음이 변화되는가? 이웃 사랑으로 행동이 달라지는가? 교만과 분노, 욕망이 줄어드는가? 하는 증거들 말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믿음)의 유일한 증거입니다.
기적은 사람에게 유익할 수도, 해로울 수도 있다 (AC 7039)
유익할 때는 괴로움과 두려움이 일시적으로 진정될 때, 새로운 의지가 시작될 여지를 줄 때 등이 있겠고, 해로울 때는 그 현상 자체에 집착하게 될 때, 혹은 교만, 우월감, 영적 자만을 낳을 때라든지, ‘현상’이 ‘진리’보다 앞설 때 등이 있겠습니다. 한때 치유 은사가 너무도 분명하여 소문이 나서 교세가 제법 흥했던, 그러나 그러더니 평소 언행에 있어 슬그머니 그 공을 자기에게 돌리면서 그만 그 은사가 떠나고,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서 다시 교세가 줄어드는 바람에 그 은사가 계속될 줄 믿고 전에 벌려놓았던 여러 규모 있는 일들로 오랜 세월 크게 곤란을 겪고 있는 분을 제가 알고 있는데요, 바로 이런 경우가 되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그러나 결국 주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그 목사님을 향하신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목사님, 힘내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에게 이렇게 답하시기 바랍니다
기적은 어디서나 일어납니다.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불교·힌두교·무속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은 기적이 참된 신앙의 증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변화는 사랑과 삶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열매가 중요합니다
그 집회를 다녀온 사람이 더 겸손해지고, 더 사랑하고, 더 성실해졌습니까? 자신에게 찾아온 은사와 기적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참된 열매입니다.
방언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도 말했듯,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공동체에 유익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의미 없는 말은 영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기적을 구하는 신앙은 감각적 신앙입니다. 주님은 내적 신앙을 원하십니다
외적 현상보다 진리와 사랑, 삶을 깊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적·방언·치유를 ‘참된 신앙의 증거’로 보지 않았습니다. 기적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이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되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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