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5:5)

 

AC.492

 

여기서도 ‘날’(days)과 ‘해’(years)는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더라’는 말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 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해설

 

이 짧은 문장은 창세기 5장, 더 정확히 말하면 태고교회의 종말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여러 글에서 ‘(days)과 ‘(years)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증해 왔고, 여기 AC.492에서는 그 논의를 한 지점으로 수렴시킵니다. 이제 더 이상 숫자나 기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태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과 ‘’가 상태를 의미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었더라’는 표현 앞에 자연스럽게 생물학적 죽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호하게 방향을 바꿉니다. 창세기 5장에서 말하는 ‘사람의 죽음’은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퍼셉션의 소멸’을 뜻한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를 특징짓던 즉각적이고 분명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이 점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정의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퍼셉션을 통해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고, 그 퍼셉션이 그들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퍼셉션이 사라지는 순간, 성경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육체는 여전히 존재하고, 사회와 문화도 지속되었겠지만, 교회의 생명은 그 시점에서 끝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태고교회의 종말을 어떤 갑작스러운 재앙이나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죽음’은 한순간에 일어난 붕괴가 아니라,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고 흐려진 끝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창세기 5장은 바로 그 과정을 ‘’과 ‘’라는 언어로 천천히 보여 주다가, 마침내 ‘죽었더라’는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것은 연대기의 마침표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의 종결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절망의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이미 앞에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셨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셋의 교회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주님의 섭리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한 형태의 교회가 끝나고 다른 형태의 교회가 시작될 준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구절은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서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은 단순히 활동이 줄어들거나 제도가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곧 진리와 선을 살아 있는 것으로 느끼고 분별하는 내적 능력이 사라질 때, 성경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규모가 작고 외적으로 미약해 보여도, 퍼셉션이 살아 있다면 그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태고교회의 죽음은 외형의 붕괴가 아니라, 퍼셉션의 소멸이었고, 오늘날 교회의 생명 역시 같은 기준으로 판단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5장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 중 하나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개인의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도 태고교회적 상태가 있을 수 있고, 그 상태는 퍼셉션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러나 그 퍼셉션이 사라지고,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살아 있는 현실로 느껴지지 않을 때, 그 상태는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다른 방식의 인도, 다른 단계의 신앙이 시작됩니다.

 

결국 AC.492는 창세기 5장의 한 절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죽음의 기준을 분명히 합니다. 생명은 퍼셉션이며, 죽음은 퍼셉션의 상실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우리는 족보의 끝에 나오는 ‘죽었다’는 말을 더 이상 두려운 말로 읽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한 상태의 완결’을 알리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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