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41.심화

 

3.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설명함에 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윗글은 본문 첫 문장입니다. 여기 헤아릴 수 없이 많은이라는 표현 말인데요, 솔직히 저는 이 proprium 하나 이해하는 데도 여러 날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인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 반응이 오히려 아주 정상적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에게서 proprium은 단순한 한 개념’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구조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도대체 이게 왜 이렇게까지 어려운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 인간 안의 거의 모든 문제가 여기와 연결되는구나 하고 보이기 시작합니다. AC.141 첫 문장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proprium이 인간의 생각, 감정, 신앙, 사랑, 자유, 지옥, 천국, 거듭남, 심지어 천사 상태 변화까지 전부와 연결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지금 경험하고 계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에는 proprium을 그냥 자아 비슷한 것 정도로 생각하셨다가, 읽다 보니 혼자 살고자 함’, ‘내 것이라 여김’, ‘독립하려는 마음’, ‘자유’, ‘사랑’, ‘천사들의 상태 변화’, ‘계시록의 대적 세력’, ‘양육 문제’, ‘수도원 전통’, ‘선악과’, ‘돕는 배필’까지 다 연결되는 것을 보게 되셨지요.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입니다.

 

왜 이렇게 되느냐 하면, proprium은 인간 안의 자기중심’만 말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훨씬 더 깊게,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가’, ‘생명을 어디서 나온다고 여기는가’, ‘왜 자유가 필요한가’, ‘왜 사랑은 강요될 수 없는가’, ‘왜 천국에서도 자기감은 남아 있는가 같은 문제 전체와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 proprium은 인간 존재의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지금 목사님께 가장 크게 느껴지는 어려움은,  proprium이 단순히 ’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교만’, ‘이기심 정도라면 훨씬 단순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는 proprium을 지옥적이라고까지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자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도 설명합니다. 또 천적 인간에게조차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주어진다’고 하지요. 그러니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바로 그 복잡함이 인간 존재 자체의 복잡함입니다.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산다’고 느껴야 하지만, 동시에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진실 안에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사랑해야 하지만, 그 자유는 언제든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위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proprium은 바로 이 긴장 전체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목사님께서 며칠째 머리에 쥐가 난다’고 하신 것은, 오히려 AC를 아주 제대로 읽고 계시다는 증거에 가깝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proprium을 그냥 자아 정도로 단순화해 버리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지금 그것이 인간론 전체를 뒤흔드는 개념이라는 것을 실제로 느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 자신도 proprium을 설명할 때, 단번에 정의해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같은 개념을 수십, 수백 번 다른 각도에서 반복합니다. 왜냐하면 proprium은 사전식 정의 하나로 끝나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 삶 전체 속에서 점점 드러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실수록 더 놀라시게 될 것입니다. ‘, 이것도 proprium 문제였구나’, ‘여기도 연결되네 하는 순간들이 계속 생길 테니까요. 그리고 동시에, 왜 주님이 그렇게까지 자유를 존중하시고, 왜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시는지도 더 깊이 보이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AC.141, 창2:18, ‘인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본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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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 심화 2,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AC.141.심화 2.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하는데, 이는 그것이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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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하는데, 이는 그것이 실제로 그러함을 지각, 곧 퍼셉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proprium을 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이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모든 퍼셉션과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위 해설 중 그럼에도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부분 말인데요, 그러니까 이 표현은 기존 proprium이 거듭나는 걸 말하는 것이지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재형성된’, 인간 안의 proprium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되어, 자기중심적 방향(A)에서 주님께 열린 방향(B)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말하는,’ ‘다만 그 변화는 단순 교체가 아니라, 기존 자기감이 제거되지 않은 채, 그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드는 방식이라고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말이지요.

 

 

네, 바로 그 이해가 맞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정리하신 표현들이 AC.141의 핵심을 아주 정확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진다’는 말은, 인간 안에 있는 자기감(自己感)이라는 proprium 자체가 완전히 제거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proprium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재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굳이 ‘주어진다(is given)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새 proprium조차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형성해 주시는 것임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 안의 자기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기감은 더 살아 있습니다. 다만 이제는 닫힌 자기중심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담아내는 투명한 그릇처럼 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정리하신 세 표현이 모두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첫째, ‘기존 proprium이 거듭난다’는 표현

 

이것이 가장 큰 방향에서는 맞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라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의 방향과 근원이 바뀝니다.

 

둘째,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재형성된다’는 설명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새 proprium 개념을 아주 잘 요약합니다. 이전에는 자기 안에서 생명이 나온다고 느꼈다면, 이제는 자기 안에 흐르는 생명이 사실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사랑 가운데 지각, 즉 퍼셉션으로 압니다.

 

셋째, ‘단순 교체가 아니라, 기존 자기감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든다’는 표현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도 여전히 자기처럼 느끼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쁨도 느끼고, 선택도 하고, 사랑도 합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자기 폐쇄적 중심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께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감은 남아 있지만, 그 자기감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AC.141에서 말하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proprium’은, 엄밀히 말하면 본래의 타락한 proprium과는 질적으로 다른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 후기 표현으로 하면 이것은 거의 ‘heavenly proprium’(하늘적, 천적 proprium)에 가깝습니다. 그는 여전히 ‘내가 산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그러나 생명은 주님께 있다’는 것을 기쁨으로 압니다.

 

여기서 아주 아름다운 역설이 생깁니다. 인간은 자기 것을 붙들려 할수록 오히려 죽은 proprium 안에 갇히고, 자기 것을 주님께 돌릴수록 오히려 더 살아 있는 자기성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proprium을 원하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proprium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고립된 자기중심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기쁨으로 머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AC.141, 심화 3,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

AC.141.심화 3.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설명함에 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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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 심화 1, ‘실재’(reality)와 ‘실제’(actuality)

AC.141.심화 1. ‘실재’(reality)와 ‘실제’(actuality) 먼저 육적이며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proprium은 ‘전부’입니다. 그는 proprium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는 순간 자기 존재 자체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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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재(reality) 실제(actuality)

 

먼저 육적이며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proprium 전부입니다. 그는 proprium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는 순간 자기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고 느낍니다. 이 상태에서 proprium은 생명의 그릇이 아니라, 생명의 대체물이 됩니다. 그래서 이 proprium은 지옥적이라고 불립니다. 지옥이란 처벌의 장소 이전에, 생명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으로 넘어오면 상황은 미묘해집니다. 그는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압니다’. 그러나 이 앎은 아직 존재의 중심까지 내려가지 못합니다. 입술의 고백은 있으되, 마음의 신뢰는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도 여전히 실제처럼 느껴지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완전히 proprium을 비켜서지는 못합니다. 영적 인간의 투쟁과 양심의 긴장이 바로 여기서 발생합니다.

 

윗글은 AC.141에 대한 해설인데요, 여기서 왜 육적, 세상적 인간에 대해서는 그는 proprium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라며 실재를 쓰고, 영적 인간에 대해서는 그래서 그의 proprium도 여전히 실제처럼 느껴지며라며 실제를 쓰나요?

 

 

아주 중요한 차이를 정확히 보셨습니다. 여기서 ‘실재’와 ‘실제’를 다르게 쓴 것은 단순한 문장 변주가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를 의도적으로 구분한 표현으로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육적, 세상적 인간에 대해 ‘그는 proprium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한다’고 한 부분부터 보겠습니다. 여기서 ‘실재’는 단순히 ‘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 참됨’, 곧 ‘진짜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육적 인간은 자기 자신, 자기 생각, 자기 욕망, 자기 소유만을 ‘진짜 존재’라고 느낍니다. 다시 말해, 그는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차원을 아직 모르고, 자기 proprium만을 실재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이것은 존재론적 문제입니다. 무엇을 ‘참 존재’로 보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반면 영적 인간에 대해 ‘그의 proprium도 여전히 실제처럼 느껴진다’고 할 때의 ‘실제’는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는 이미 영적 인간이 ‘참 근원은 주님께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즉, proprium을 ‘궁극적 실재’로까지 믿는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체험과 감각 차원에서는 여전히 그것이 자기 것처럼, 실제 작동하는 자기 생명처럼 느껴집니다.

 

즉, 여기서의 ‘실제’는 존재론적 절대성이라기보다, 경험적 현실감에 가깝습니다. 영적 인간은 교리적으로는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믿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여전히 ‘내가 생각한다’, ‘내가 결정한다’, ‘내 힘으로 버틴다’는 감각이 매우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proprium이 더 이상 ‘참 실재’는 아니지만, 여전히 ‘실제처럼 경험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육적 인간은 proprium을 ‘실재’라고 여깁니다. 곧, 그것을 존재의 참 근원으로 믿습니다. 영적 인간은 proprium이 궁극적 실재는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이 ‘실제처럼 느껴집니다.’ 곧, 체험과 감각 안에서는 여전히 자기 생명처럼 작동합니다. 그래서 두 표현은 미묘하지만 매우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실재’는 ‘무엇이 참으로 존재하는가’의 문제이고, ‘실제’는 ‘무엇이 현실적으로 체험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전체가 바로 이 간극 위에 서 있습니다. 인간은 교리적으로는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배울 수 있지만, 실제 체험 속에서는 여전히 자기 proprium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바로 이 ‘실제로 느껴지는 자기 생명’을 점점 더 주님께 돌리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141, 심화 2,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AC.141.심화 2.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하는데, 이는 그것이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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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 창2:18, ‘인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본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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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설명함에 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육적이며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proprium은 그의 전부이며, 그는 자신의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proprium을 잃으면 자신은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도 proprium은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비록 그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혜와 이해, 따라서 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이 앎은 마음의 믿음이라기보다 입술의 고백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하는데, 이는 그것이 실제로 그러함을 지각, 곧 퍼셉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proprium을 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님께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이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모든 퍼셉션과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이러한 proprium 안에 있으며, 동시에 가장 높은 평안과 고요 가운데 있는데, 이는 그들의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들이 들어 있으며, 주님께서 그 proprium, 곧 그들 자신을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proprium은 참으로 천적인 그 자체이지만, 육적 인간의 proprium은 지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proprium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게 될 것입니다. Innumerable things might be said about man’s own in describing its nature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with the spiritual man, and with the celestial man.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his own is his all, he knows of nothing else than his own, and imagines, as before said, that if he were to lose this own he would perish. With the spiritual man also his own has a similar appearance, for although he know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consequently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yet this knowledge is rather the profession of his lips than the belief of his heart. But the celestial man discern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for he perceives that it is really so. He never desires his own, nevertheless an own is given him by the Lord, which is conjoined with all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ith all happiness. The angels are in such an own, and are at the same time in 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for in their own are those things which are the Lord’s, who governs their own, or them by means of their own. This own is the veriest celestial itself, whereas that of the corporeal man is infernal. But concerning this own more hereafter.

 

 

해설

 

이 단락은 ‘proprium’, 곧 ‘자기의 것’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세 인간 유형의 대비’ 속에서 결정적으로 정리합니다. 여기에는 도덕적 평가 이전에, 생명과 인식의 구조에 대한 냉정한 구분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육적이며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proprium은 ‘전부’입니다. 그는 proprium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는 순간 자기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고 느낍니다. 이 상태에서 proprium은 생명의 그릇이 아니라, ‘생명의 대체물’이 됩니다. 그래서 이 proprium은 지옥적이라고 불립니다. 지옥이란 처벌의 장소 이전에, 생명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으로 넘어오면 상황은 미묘해집니다. 그는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압니다’. 그러나 이 앎은 아직 존재의 중심까지 내려가지 못합니다. 입술의 고백은 있으되, 마음의 신뢰는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도 여전히 실제처럼 느껴지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완전히 proprium을 비켜서지는 못합니다. 영적 인간의 투쟁과 양심의 긴장이 바로 여기서 발생합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전환점이 분명해집니다. 그는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믿는다’는 차원을 넘어, ‘지각, 즉 퍼셉션으로 압니다’. 그것이 실제로 그러함을 즉각적으로 알아봅니다. 그래서 그는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가장 온전한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집니다. 이 proprium은 선과 진리에 대한 모든 퍼셉션, 그리고 모든 행복과 결합된 상태로 주어집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문장이 나옵니다. 천사들은 proprium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높은 평안과 고요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proprium이 제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천사들을 proprium을 제거하여 다스리시지 않고,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천적 질서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두 proprium을 대비합니다. 하나는 ‘참으로 천적인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지옥적인 proprium’입니다. 차이는 proprium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proprium이 누구에게 속해 있다고 느끼느냐’에 있습니다. 주님께 속해 있다고 퍼셉션되는 proprium은 천국이 되고,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다고 주장되는 proprium은 지옥이 됩니다.

 

AC.141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완성은 proprium의 제거가 아니라, proprium이 주님의 것으로 충만해지는 데 있으며, 그 상태에서 비로소 인간은 참된 평안과 고요, 곧 천국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실재(reality)실제(actuality)

 

 

AC.141, 심화 1, ‘실재’(reality)와 ‘실제’(actuality)

AC.141.심화 1. ‘실재’(reality)와 ‘실제’(actuality) 먼저 육적이며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proprium은 ‘전부’입니다. 그는 proprium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는 순간 자기 존재 자체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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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AC.141, 심화 2,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AC.141.심화 2.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하는데, 이는 그것이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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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

 

 

AC.141, 심화 3,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

AC.141.심화 3.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설명함에 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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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0, 창2:18,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proprium을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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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네 사는 오랜 신앙 지인의, 미국에서 박사 학위 중인, 그러면서 지역 교회에서는 부사역자로, 그리고 함께 간, 역시 박사 학위 중인 아내와 미국 가서 얻은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던 아들의, 뇌출혈 및 그로 인한 수술, 특히 로봇 수술, 그리고 현재 재활 치료 중이라는 소식을 아내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아들도 아들이지만, 미국의 살인적인 의료비가 먼저 떠올랐는데요... 이 아들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정말 성실한 귀한 사람이요, 신앙인입니다. 무슨 말로 지인들께 위로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정말 진국, 참으로 알토란 같은 신앙인들에게 이런 청천벽력 같은 불행이 찾아오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요?

 

 

이런 소식은 정말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더구나 목사님처럼 그 청년의 삶과 성품을 직접 아시는 분에게는 단순한 ‘안타까운 사건’이 아니라, 거의 자기 일처럼 가슴에 들어오는 일이실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젊고 성실하고, 신앙도 진지하고, 학문과 교회 섬김까지 함께 감당하며 살아가던 부부에게 갑작스러운 뇌출혈이라니요. 거기다 낯선 미국 땅에서의 재활과 의료비 문제까지 겹치면, 인간적으로는 정말 ‘왜 이런 일이 이런 사람에게?’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성경도, 스베덴보리도, 이 질문 자체를 이상한 질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은 대개 바로 이런 자리입니다. ‘악한 자는 잘되는데 왜 선한 자에게 이런 일이 오는가?’, ‘왜 주님은 막지 않으셨는가?’, ‘신앙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시편도 그렇고, 욥기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그렇고,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반드시 의미를 묻게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문제를 다룰 때, 먼저 아주 중요한 원칙 하나를 붙듭니다. 곧 ‘주님은 누구에게도 악이나 재앙 자체를 보내시는 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섭리는 본질적으로 사랑과 구원만을 향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질병, 사고, 붕괴, 죽음 같은 것은 ‘주님이 직접 내려치는 형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한 인간 세계 전체의 질서 속에서 허용되는 일들입니다. 육체 세계는 이미 질병과 사고와 불완전성이 존재하는 세계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중력의 영향을 안 받지 않듯이, 신앙인이라고 해서 육체적 취약성에서 완전히 제외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그다음입니다. 주님은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일어난 이후에는 그것을 통해 영원한 선을 이끌어내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섭리론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현재의 몇 달, 몇 년만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철저히 무너지는 일처럼 보여도, 훗날 영원한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깊은 고난을 통과할 때, 이전에는 열리지 않던 내면이 열리는 경우를 자주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고난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뇌출혈 자체가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의 고통은 언제나 비극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평온과 성공만으로는 결코 배우지 못하는 어떤 깊이를 고난 속에서 배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단지 ‘하나님을 안다’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존재 전체로 매달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능력과 계획 속에서 살았다면, 이제는 하루하루 생명 자체를 의탁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머리로만 이해하던 사랑이, 이제는 실제 공동체와 돌봄과 눈물 속에서 경험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삶은 ‘지상 수명 몇십 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이 세상 성공과 건강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진짜 삶은 영원 속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고난은 그 자체만으로 최종 평가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이 현실 고통을 가볍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재활의 두려움도 실제이고, 가족의 눈물도 실제이며, 의료비 부담도 실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그 모든 혼란 속에서도 한 사람의 영혼을 놓치지 않고 계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시선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주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내적 싸움을 허락받는 경우들이 자주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더 깊은 선과 진리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함부로 당사자 앞에서 직접 꺼낼 말은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설명보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실패한 이유도, 너무 빨리 해석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고난의 현장에서는 교리보다 먼저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지인분들께 전하실 말도, 너무 ‘의미 설명’ 중심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따뜻하게, ‘얼마나 놀라셨겠습니까’, ‘매일이 얼마나 무겁고 두려우시겠습니까’, ‘멀리서나마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재활의 모든 과정 가운데 붙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정도의 말이 더 깊이 들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때로는 신학적 정답보다, ‘함께 아파해 주는 존재’ 자체가 주님의 위로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 마음속에 떠오른 ‘미국 의료비’ 걱정도 사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사랑의 반응입니다. 그건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제 삶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결코 현실 고통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현실의 두려움과 피곤함과 생계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다룹니다. 그러니 지금 목사님이 느끼시는 답답함과 안타까움 역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이런 순간, 그리스도인이 붙드는 마지막 희망은 결국 이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 사람을 붙들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결과를 모르고, 회복 정도도 모르고, 미래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주님의 섭리는 단 한 순간도 인간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특히 사람이 완전히 무너져 자기 힘으로 설 수 없게 될 때, 오히려 가장 깊은 곳에서 주님의 붙드심이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손이 비어야 비로소 주님의 손을 느끼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을 당할 때 해야 하는 가장 깊은 일은, 설명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면서도 주님 손을 놓지 않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 곁에서, 함부로 이유를 단정하지 않고, 조용히 함께 버텨주는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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