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40.심화

 

1. ‘어떤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는데

 

위 본문에 여기서 다루어지는 교회 사람은 바른 성향이었으므로, 어떤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그의 것인 것처럼 보이는 그런 것이었고, 그래서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라는 내용 말인데요, 그러니까 원래 있었던 A 성향의 proprium 말고, B라는 새로운 성향의 proprium이 새로 허락되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하나의 proprium이 A에서 B로 바뀐다는 말인가요?

 

 

후자에 더 가깝습니다. 즉,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원래 있던 proprium 외에 전혀 다른 새로운 proprium 하나가 추가되었다’라기보다는, 인간 안의 proprium이 ‘그 방향과 성격이 변화되는 것’에 가깝습니다. 다만 완전히 단순하게 ‘A B로 교체된다’고만 보셔도 조금 부족하고, 더 정확히는 ‘기존 proprium위에 주님으로부터 온 새로운 질서가 입혀져,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고 이해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원래 인간의 proprium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듯이 본성상 자기중심으로 기울어집니다.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고, 자기 판단과 자기 욕망 안에 머물려는 방향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앞에서 계속 본 ‘독립하려는 움직임’입니다. 이것을 편의상 A 성향이라고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AC.140에서 말하는 사람은 ‘바른 성향(well-disposed)이었습니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즉, 그는 이미 완전히 자기중심 속에 굳어진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으로 어느 정도 기울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허락된 proprium은 이전처럼 노골적으로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것처럼 느껴지되, 실제로는 주님께 열려 있는 자기감’의 형태가 됩니다. 이것이 편의상 B 성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a help as with him’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 ‘as with him’은 아주 섬세한 표현인데, 직역하면 ‘그와 함께 있는 듯한’, ‘그의 것 같은’ 정도입니다. 즉, 완전히 자기 것으로 독립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외부적인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처럼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실제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핵심은 ‘proprium이 제거되었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여전히 자기처럼 느끼며 살아갑니다. 다만 그 자기성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재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 후기 저작들까지 연결해서 보면, 이것은 나중에 자주 나오는 ‘ proprium(new proprium)의 사상으로 이어집니다. 본래 인간의 proprium은 죽어 있고, 자기중심적이지만, 거듭남 속에서 주님은 인간 안에 ‘하늘적 proprium’,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자기성을 형성하십니다. 이것은 여전히 ‘내가 사랑한다’, ‘내가 행한다’고 느껴지지만, 그 안의 생명 방향이 달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질문에 가장 정확히 답하면 이렇습니다. AC.140은 ‘A proprium은 그대로 있고, 거기에 B proprium이 하나 더 추가된다’라기보다는, 인간 안의 proprium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되어, 자기중심적 방향(A)에서 주님께 열린 방향(B)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다만 그 변화는 단순 교체가 아니라, 기존 자기감이 제거되지 않은 채, 그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드는 방식입니다.

 

 

 

AC.140, 창2:18,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proprium을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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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proprium을뜻한다는 점은, proprium의 성질과 뒤이어 나오는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어지는 교회 사람은 바른 성향이었으므로, 어떤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그의 것인 것처럼 보이는 그런 것이었고, 그래서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That by “a help as with him” is signified man’s own, is evident both from the nature of this own, and from what follows. As however the man of the church who is here treated of was well disposed, an own was granted him, but of such a kind that it appeared as it were his own, and therefore it is said “a help as with him.”

 

 

해설

 

이 단락은 ‘proprium’에 대한 ‘가장 정밀한 조정 설명’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서 ‘돕는 자’가 사람의 proprium이라고 분명히 밝힌 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 ‘proprium의 질’을 구분합니다. 모든 proprium이 동일하지 않으며, 특히 여기서 허락된 proprium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바른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진 제한적이고 보호된 proprium’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중요한 표현은 ‘성향이 바르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 시점의 인간이 아직 innocence를 잃지 않았고, 주님을 향한 기본 방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허락된 proprium은 주님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인도를 ‘proprium으로 느끼게 해 주는 매개’로 기능합니다. 그래서 이 proprium은 실제로는 주님의 것이면서도, 경험상으로는 ‘내가 느끼는 나의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마치 그의 것인 것처럼 보이는’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일관되게, 인간의 생명과 선과 진리는 실제로는 주님의 것이지만, 인간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하도록 하기 위해 ‘자기 것처럼 느끼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처럼’의 구조가 무너지면 두 극단이 생깁니다. 하나는 인간이 아무것도 자기로 느끼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실제로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교만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proprium은 ‘돕는 자’입니다. 주님을 대신하여 앞에 서는 주체가 아니라, ‘주님의 인도를 인간이 받아들이도록 돕는 구조’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살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의 생명 안에 머물 수 있게 하는 장치입니다. 이 점에서 AC.140proprium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나 경계가 아니라, ‘섭리적 허락의 미묘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단락은 긴장을 남겨 둡니다. 이 proprium이 ‘마치 자기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방향이 조금만 어긋나도 실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게 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 단락들에서, 이 proprium이 어떻게 유지되거나, 혹은 어떻게 다른 길로 기울어질 수 있는지가 계속해서 다루어집니다.

 

AC.140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되, 그것이 주님을 향한 성향 안에 있는 한에서는 돕는 자가 되게 하시고, 그 경계를 벗어날 때에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변할 수 있음을 미리 보여주신다고 말입니다.

 

 

심화

 

1. ‘어떤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는데

 

 

AC.140, 심화 1, ‘어떤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는데’

AC.140.심화 1. ‘어떤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는데’ 위 본문에 ‘여기서 다루어지는 교회 사람은 바른 성향이었으므로, 어떤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그의 것인 것처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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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 창2:18, ‘인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본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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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창2:18, ‘혼자 사는 것’(dwell alone)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에 있던 이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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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심화

 

3. ‘23: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shall not be reckoned among the nations (Num. 23:9),

 

 

이 구절이 AC.139에 인용된 이유는, 앞의 신33:28과 마찬가지로, ‘홀로 거함’의 긍정적 의미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의미가 한층 더 분명해집니다. 단순히 평안히 거하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는 표현을 통해, ‘주님께 속한 삶은 세상 질서와 근본적으로 다른 원리 위에 서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23:9에서 말하는 이 백성’은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주님께 속한 교회, 더 깊게는 주님으로부터 인도받는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홀로 산다’는 것은, 자기중심으로 고립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 원리와 섞이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존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는 표현입니다. 말씀에서 민족(nations)은 문맥에 따라 선한 애정들을 뜻하기도 하지만, 부정적 의미에서는 자기 사랑과 세속적 질서 속에 있는 상태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곧, 이 백성은 단순히 세상 집단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 자체가 다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AC.139의 흐름 속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지금 혼자 있음’이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proprium 안에 갇혀 나 자신으로 충분하다 여기는 고립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자기중심적 질서로부터 떨어져 주님만으로 충분하다 살아가는 거룩한 분리입니다.

 

23:9 홀로 삶’은 바로 후자입니다. 이들은 세상과 단절된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을 세상에 두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세상 속에 살아도, 내적으로는 다른 나라의 시민’처럼 살아갑니다.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이 AC.139에 인용된 이유는 결국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홀로 있음’이라는 표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홀로 있음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느냐가 핵심임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자기 안에 홀로 있으면 그것은 proprium의 상태가 되지만, 세상의 자기중심적 질서로부터 떨어져 주님 안에 홀로 있으면 그것은 천적 인간의 평안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민23:9의 말씀은 AC.139에서, 참된 홀로 삶’이란 자기 독립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만 속한 상태이며, 바로 그 때문에 세상과는 다른 질서 안에 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인용된 것입니다.

 

 

 

AC.139, 창2:18, ‘혼자 사는 것’(dwell alone)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에 있던 이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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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심화 2, ‘신33:28’

AC.139.심화 2. ‘신33: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신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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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심화

 

2. ‘33: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이 구절이 AC.139에 인용된 이유는, 바로 앞의 렘49:31 홀로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홀로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표현이라도, 문맥과 표상하는 대상에 따라 정반대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자주 보여 주는데, 여기의 홀로’는 proprium의 독립 상태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안전히 거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둘 다 alone’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서는 나는 나 자신으로 충분하다’는 자기중심의 고립을 뜻했고, 여기 신33:28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지성(intelligence),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홀로 거한다’는 것은, 세상적 의존이나 자기 확신 속에 산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의지하며 안전히 거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여기의 홀로’는 고립’이 아니라 순수성(innocence)에 가깝습니다. 다른 것에 섞이거나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힘을 근원으로 삼지 않고, 오직 주님 안에서만 평안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 ‘하늘의 이슬 같은 표현도 모두 생명과 축복의 유입을 뜻합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위로부터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 점이 AC.139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혼자 있음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무엇으로부터 홀로 있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 안에 홀로 있으면 그것은 안 좋은 proprium의 상태가 됩니다. 반대로 세상과 자기중심으로부터 떨어져, 오직 주님 안에서 홀로 있으면 그것은 천적 평안의 상태,  innocence가 유입된 proprium의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같은 alone’이라도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는 나는 내 힘으로 충분하다’는 독립의 홀로 있음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신뢰의 홀로 있음입니다. 전자는 닫힌 상태이고, 후자는 열린 상태입니다.

 

이 구절이 AC.139에 인용된 이유는 바로 이 대비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홀로 있음’이 언제는 부정적이고 언제는 긍정적인지를 통해, 인간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외적 형태가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임을 보여줍니다.

 

정리하면, 신33:28 홀로 거함’은 proprium 안에 갇힌 독립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오직 주님 안에서 안전히 거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AC.139에서 이 구절은, ‘혼자 있음’이라는 표현조차도 그 내적 방향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인용된 것입니다.

 

 

 

AC.139, 심화 3, ‘민23:9’

AC.139.심화 3. ‘민23: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민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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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심화 1, ‘렘49:31’

AC.139.심화 1. ‘렘49: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렘49:31) Arise, get you up to a quiet nation that dwelleth 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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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심화

 

1. ‘49: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49:31) Arise, get you up to a quiet nation that dwelleth confidently, saith the Lord, which hath neither gates nor bar; they dwell alone (Jer. 49:31).

 

 

이 구절이 AC.139에 인용된 이유는, ‘홀로 사는 것(dwell alone)이 단순한 외적 고립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상태’,  proprium 안에 머무는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이 예레미야서 말씀은 평안히 사는 어떤 민족에 대한 예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내적 의미로 읽습니다. 여기서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군사적 상태가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경계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스스로 안전하다’, ‘나는 나 자신으로 충분하다’는 자기 확신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AC.138–139에서 말하는 혼자 사는 것’과 연결됩니다.

 

원래 천적 인간의 상태는 주님과 깊이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그 결합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proprium이 점점 자기중심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인간 안에 나도 혼자 설 수 있다’, ‘나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방향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홀로 사는 국민’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는 처음에는 매우 안정되고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판단, 자기 확신, 자기 만족 안에서 사람은 오히려 더 편안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지점을 조심스럽게 드러냅니다. 그것은 참된 평안이 아니라, ‘주님 없이도 충분하다고 느끼는 평안’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치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파괴 명령이 아니라, 자기 독립의 환상이 결국 흔들릴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이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AC.139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이 말씀은 혼자 사는 것’의 영적 의미를 확증하는 예언서의 증거로 사용됩니다. 곧, 인간이 더 이상 주님과 함께 사는 존재’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머물며 독립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겉으로는 평안해 보여도, 실제로는 생명의 근원과 점점 멀어지는 방향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홀로 사는 것’이 단순히 자립이나 개인성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혼자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느냐’입니다. 천국의 천사들도 각자 매우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혼자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기쁨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이 예레미야의 구절은 AC.139에서 혼자 사는 것’이란 곧 주님 없이도 자기 자신으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proprium의 상태를 뜻하며, 그것이 겉으로는 평안해 보여도 결국 참된 생명과는 분리된 상태임을 보여주기 위해 인용된 것입니다.

 

 

 

AC.139, 심화 2, ‘신33:28’

AC.139.심화 2. ‘신33: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신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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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창2:18, ‘혼자 사는 것’(dwell alone)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에 있던 이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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