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목사님, 이 질문은 단순히 ‘고행이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회개란 무엇인가’, ‘자기를 벌하는 것이 과연 거듭남인가’라는 핵심 문제로 들어가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반, 특히 『Arcana Coelestia』와 『True Christian Religion』의 회개론을 종합하면, 그는 외적 고행과 자학을 매우 신중하게, 때로는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몇 덩어리로 나누어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죄에 대한 슬픔’과 ‘자기 처벌’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참된 회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식하고, 그것이 주님을 거스르는 것임을 인정하며, 그 악을 실제로 끊어내려는 결단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을 괴롭히거나 일부러 불편을 자초하는 행위는 외적 행위일 뿐, 그것이 곧 악을 끊는 것은 아닙니다. 악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때리거나 굶는다고 해서 사랑하는 악이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둘째, 외적 고행은 오히려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강화할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벌하면서도 은근히 ‘나는 이렇게까지 회개한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 고행은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은밀한 영적 교만의 자양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을 낮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 사랑’이 더욱 미묘하게 살아날 수 있음을 여러 곳에서 경고합니다. 겉으로는 재를 뒤집어쓰고 있으나 속으로는 ‘나는 경건하다’는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기를 부인함’은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욕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곧,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은 충동이 올라올 때 그것을 끊는 것, 정욕이 일어날 때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제어하는 것, 명예욕과 이익욕을 내려놓는 것—이것이 진짜 고행입니다. 그는 이것을 ‘영적 전투’라고 부릅니다. 이 전투는 남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천사들이 보는 참된 고난이며, 주님이 보시는 참된 속죄의 길입니다.

 

넷째, 과거 수도원 전통의 자기 처벌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거듭남의 본질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금욕’ 자체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결혼한 사람도, 세상 직업을 가진 사람도, 일상 속에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행하면 동일하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악을 이기는 것이 더 깊은 시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행을 이상화하는 태도는, 자칫하면 거듭남을 ‘특수한 종교적 행위’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섯째, 그렇다면 전혀 자기를 절제하거나 훈련하지 말라는 뜻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절제와 자기 통제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몸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식욕을 절제하는 것은 몸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차이는 매우 큽니다. 전자는 외적 형식이고, 후자는 내적 변화입니다.

 

여섯째, 목사님께서 보신 그 수도원장의 메시지—‘우리도 그렇게 살자’—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벌하지 말고, 자기 안의 악을 끊으라. 몸을 때리지 말고, 자아 사랑을 거절하라. 외적 고행을 자랑하지 말고, 주님께서 싸워 주시도록 겸손히 기도하라.’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고행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악한 사랑을 거부하는 지속적 선택’입니다. 수도원의 채찍이나 굶주림보다 훨씬 더 어렵고, 훨씬 더 깊은 싸움입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은 상한 심령을 원하시지, 상처 난 등을 원하시지 않는다.’

 

목사님께서 이런 주제를 성도들에게 설명하신다면, 외적 고행을 무조건 정죄하기보다, 그 한계를 조용히 짚어 주시고, 대신 ‘일상 속 영적 전투’의 길을 제시하시는 것이 스베덴보리적 균형에 가까울 것입니다.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