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창1:28)
AC.55
태고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 곧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 했기 때문에, 그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의 모든 것은 ‘생육’(fruitfulness)이라 했고, 진리의 모든 것은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표현들이 사용되는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입니다. As the most ancient people called the conjunction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or of faith and love, a marriage, everything of good produced from that marriage they called “fruitfulness,” and everything of truth, “multiplications.” Hence they are so called in the prophets, as for instance in Ezekiel: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겔36:11, 12)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yea,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even my people Israel (Ezek. 36:11–12).
여기서 ‘사람’(man)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를, ‘처음’(beginnings)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이 본문에서 진리에 속한 ‘수가 많음’(multiplication)이 먼저 언급되고, 선에 속한 ‘번성’(fruitfulness,앞에서는multiplications을 ‘번성’으로 번역,서로 다른 영어를 같은 한글 단어로 번역한 바람에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이 그다음에 언급되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이제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By “man” is here meant the spiritual man who is called Israel; by “ancient times,”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The reason why “multiplication,” which is of truth, is first mentioned, and “fruitfulness,” which is of good, afterwards, is that the passage treats of one who is to become regenerated, and not of one who is already regenerated.
[2]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결혼한 땅’(a married land)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united with the will, or faith with love, the man is called by the Lord “a married land,” as in Isaiah: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사62:4) Thy land shall be no more termed waste, but thou shalt be called Hephzibah [my delight is in her], and thy land Beulah [married], for Jehovah delighteth in thee, and thy land shall be married (Isa. 62:4).
이 결합에서 나오는 진리의 열매들을 ‘아들’(sons)이라 하고, 선의 열매들을 ‘딸’(daughters)이라 하는데, 이는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The fruits thence issuing, which are of truth, are called “sons,” and those which are of good are called “daughters,” and this very frequently in the Word.
[3] 땅이 ‘가득 차게 된다’(replenished)는 것은 진리와 선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곧 그에게 역사하실 때, 선과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The earth is “replenished,” or filled, when there are many truths and goods; for when the Lord blesses and speaks to man, that is, works upon him, there is an immense increase of good and truth, as the Lord says in Matthew: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1, 32)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 (Matt. 13:31–32).
‘겨자씨 한 알’(grain of mustard seed)은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의 선을 뜻하는데, 그것이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다’(the least of all seeds)고들 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가 하는 선을 자기한테서 난 거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한테서 나는 건 실상 악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거듭남의 상태 중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선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가장 작은 선,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일지라도 말입니다. A “grain of mustard seed” is man’s good before he becomes spiritual, which is “the least of all seeds,” because he thinks that he does good of himself, and what is of himself is nothing but evil. But as he is in a state of regeneration, there is something of good in him, but it is the least of all.
[4] 마침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것은 크게 자라 ‘풀’(herb)이 되고,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tree)가 됩니다. 그리고 이 나무의 가지에 ‘공중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 곧 진리들,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데(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이 가지들은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입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일 때, 그리고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에는 전투 상태에 있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는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At length as faith is joined with love it grows larger, and becomes an “herb”; and lastly, when the conjunction is completed, it becomes a “tree,” and then the “birds of the heavens” (in this passage also denoting truths, or things intellectual) “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which are memory-knowledges. 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he is in a state of combat, and therefore it is said, “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해설
이 글은 앞선 AC.54에서 말한 ‘결혼’ 개념을 한 단계 더 확장합니다. 결혼은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었고, 이제 이 결합에서 ‘무엇이 나오는가’가 주제가 됩니다. 태고의 사람들은 이 결합에서 나오는 결과를 매우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것은 ‘생육’(fruitfulness), 곧 열매 맺음이라 했고, 진리에서 나오는 것은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했습니다. 즉 열매 맺음은 질의 문제이고, 번성함은 양의 문제입니다.
이 구분은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라, 인간 내적 과정에 대한 정밀한 통찰에서 나온 것입니다. 선은 사랑에 속하고, 사랑은 생명을 낳는 근원입니다. 그래서 선은 ‘열매’로 표현됩니다. 반면 진리는 이해에 속하고, 이해는 분별하고 확장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번성’으로 표현됩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지만, 작용 방식은 다릅니다.
에스겔의 본문에서 ‘수가 많음’(multiplication)이 먼저 나오고, ‘번성’(fruitfulness)이 뒤에 나오는 이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글이 이미 거듭난 상태가 아니라, ‘거듭나고 있는 상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진리가 먼저 늘어납니다. 사람은 먼저 알아야 하고, 분별해야 하며, 진리의 틀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다음에야 선이 그 진리 안에 들어와 생명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과정의 언어에서는 진리가 먼저, 선이 나중에 나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서로 결합했을 때, 그 사람을 ‘결혼한 땅’이라 합니다. 여기서 땅은 언제나 인간을 뜻하며, 특히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곧 겉 사람과 속 사람이 하나로 정렬된 상태를 뜻합니다. 땅이 결혼한다는 표현은, 더 이상 갈라진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때 인간은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처가 됩니다.
이 결합에서 나오는 산출물의 명명법도 매우 일관됩니다. 진리에서 나온 것은 ‘아들’, 선에서 나온 것은 ‘딸’이라 합니다. 이는 성별 개념이 아니라, ‘출처의 차이’를 말하는 언어입니다. 이해에서 나온 것은 아들이고, 의지에서 나온 것은 딸입니다. 말씀에서 교회가 딸이나 처녀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 이전에 선의 애정으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 비유는 이 전체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처음의 선은 가장 작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은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작은 선은 자랍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풀로, 나무로 자라고, 마침내 그 안에 수많은 진리, 이해의 내용들이 깃들게 됩니다. 기억 지식은 이때 비로소 살아 있는 가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영적 인간의 상태를 ‘전투’로 규정합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은 지배욕이나 권력의 언어가 아니라, ‘내적 질서 회복의 언어’입니다. 아직 완전한 천적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외적인 것들과의 긴장과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이 싸움 속에서 진리와 선은 점점 더 결합하고, 인간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심화
1. ‘겔36:11-12’
AC.55, 심화 1, ‘겔36:11-12’
AC.55.심화 1. ‘겔36:11-12’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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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62:4’
AC.55, 심화 2, ‘사62:4’
AC.55.심화 2. ‘사62: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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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13:31-32’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1, 32)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 (Matt. 13:31–32).
이 비유는 AC.55의 문맥에서 ‘거듭남의 시작은 매우 작고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자라게 하실 때 결국 사람 전체를 변화시키는 큰 상태로 확장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겨자씨 한 알은 사람 안에 처음 심어지는 아주 작은 진리와 선의 시작을 의미하고, 그것이 자라 나무가 된다는 것은 그 작은 시작이 점점 자라 사람의 전 존재를 덮는 질서로 확장되는 거듭남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먼저 ‘천국은 마치 겨자씨 한 알 같다’입니다. 여기서 ‘천국’은 바깥 어딘가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 안에 세워지는 주님의 나라’, 곧 거듭남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은 그 시작이 얼마나 작고 미미한지를 보여 줍니다. 실제로 거듭남은 처음부터 크고 확실한 변화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깨달음, 아주 미약한 선한 의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변화로 시작됩니다.
이제 ‘사람이 자기 밭에 심는다’입니다. ‘밭’은 사람의 마음과 삶, 곧 진리가 뿌려지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심는다’는 것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받아들여 자기 안에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거듭남의 시작은 어떤 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내 안에 어떤 진리가 자리 잡는 것’입니다.
그다음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 주어지는 진리는 크고 분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고 연약해서 쉽게 무시되거나 잊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사람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은 것이 시작입니다.
이제 전환이 일어납니다.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이것은 거듭남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던 것이 점점 자라, 이제는 사람 안에서 가장 큰 것이 됩니다. 즉, 처음에는 진리가 주변적인 것이었지만, 점점 중심으로 올라와 사람의 생각과 삶 전체를 이끄는 상태가 됩니다. ‘풀’은 일시적이고 낮은 것을 의미하고, ‘나무’는 뿌리와 줄기, 가지를 가진 안정된 구조, 곧 확립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매우 중요합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새’는 생각과 이해, 곧 다양한 진리의 인식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이제 사람 안에 진리가 자리 잡아, 그 위에 더 많은 생각과 이해들이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즉, 처음에는 하나의 작은 진리였지만, 이제는 그 위에 수많은 진리들이 연결되고,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상태가 됩니다.
이제 AC.55의 흐름과 연결하면 더욱 또렷해집니다. 앞에서 ‘사람과 짐승이 많아지고’, ‘자식들을 잃지 않는다’, ‘결혼된 땅이 된다’고 했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이 비유의 상태로 이어집니다. 즉, 처음에는 작고 쉽게 사라지던 선과 진리가, 이제는 자라서 안정된 구조를 이루고, 더 이상 사라지지 않으며, 그 위에 더 많은 것이 쌓이는 상태가 됩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아주 작게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것을 붙잡고 조금씩 실천하다 보면, 점점 그 생각이 커지고,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그 하나의 진리가 중심이 되어, 다른 생각과 판단들도 그 기준 위에서 정리됩니다. 바로 그 상태가 ‘겨자씨가 나무가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단순한 성장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으신 작은 시작이 어떻게 전체를 변화시키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그 시작을 심고 지키는 역할을 할 뿐이고, 실제로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마13:31–32의 겨자씨 비유는 거듭남이 아주 작은 진리의 시작에서 출발하여, 결국 사람 전체를 지배하는 질서로 성장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4. ‘풀’(herb)
위 AC.55 본문 중 ‘마침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것은 크게 자라 ‘풀’(herb)이 되고,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tree)가 됩니다.’를 보고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식물, 특히 ‘풀’을 하찮게 여겼거든요. 그런데 그 ‘풀’조차 사실은 ‘신앙이 사랑과 결합, 그것이 크게 자란 것’이라 하니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지점이 바로 AC.55가 노리는 핵심입니다. ‘풀’은 하찮은 단계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실제로 결합하여 이미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상태’, 다시 말해 ‘단순한 앎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결코 낮게 보지 않고, 오히려 ‘이미 생명이 작동하고 있는 단계’로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씨(진리)만 있을 때는 아직 ‘가능성’입니다. 아무리 좋은 진리를 많이 알아도, 그것이 사랑과 결합되지 않으면 아직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면, 비로소 밖으로 드러나는 생장이 시작됩니다. 그 첫 모습이 바로 ‘풀’입니다. 그러니까 ‘풀’은 작은 것이 아니라, ‘진리가 실제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이 점에서 ‘풀’은 오히려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갖는 오해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크고 단단한 ‘나무’를 높게 보고, ‘풀’을 낮게 봅니다. 그런데 AC의 시선은 다릅니다. ‘풀’은 이미 ‘결합이 일어난 상태’이고, ‘나무’는 그 결합이 ‘완전히 안정되고 확장된 상태’일 뿐입니다. 즉, 둘의 차이는 ‘가치의 차이’가 아니라 ‘성장의 정도’입니다. 그래서 ‘풀’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라, ‘이미 본질이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나무는 그 본질이 더 넓고 깊게 펼쳐진 모습입니다.
이걸 신앙적으로 풀어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 사랑과 결합되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씨’ 단계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아는 것은 많지 않지만, 그 아는 바를 사랑으로 살아내고 있다면, 그는 이미 ‘풀’입니다. 이때 스베덴보리의 기준에서는, ‘많이 아는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살아내는 사람’이 더 앞선 상태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풀’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여기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충격이 아주 중요한 통찰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찮게 여기던 ‘풀’조차, 영적 의미에서는 ‘신앙과 사랑이 결합된 결과’라면, 그렇다면 우리가 하찮게 여기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매우 깊은 상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겉으로 작고 연약해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이미 결합이 이루어진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걸 더 깊이 들어가면 이렇게까지 볼 수 있습니다. ‘풀’은 낮고, 부드럽고, 쉽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성질이 ‘사랑과 결합된 신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억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라고, 강하게 버티기보다 부드럽게 움직이며, 자기 주장보다 생명을 드러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풀’은 단지 작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의 성질’을 가장 잘 보여 주는 형상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성장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짜 생명인가’를 다시 보게 합니다. 크고 단단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작더라도 실제로 살아 있는 것’, 곧 신앙과 사랑이 결합된 상태가 훨씬 본질적이라는 것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AC.55에서 ‘풀’은 하찮은 단계가 아니라,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이미 실제 생명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내는 매우 본질적인 단계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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