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전제로 삼는 원리에 따라 지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가 아무리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 원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왜냐하면 그 원리를 뒷받침하는 무수한 근거들이 그의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이며, 그 결과 그는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거나 이해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믿지 않겠다는 원리를 전제로 삼는 사람은 결코 믿을 수 없는데, 이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상상으로 파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질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곧 말씀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모든 것이 그 뒤를 따르게 되고, 이성과 기억 지식의 영역에서도 밝힘을 받게 됩니다. 학문을 배우는 것이 결코 금지된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그것들은 삶에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출발 원리는 반드시 이것이어야 합니다. 곧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며, 가능한 한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을 자연적 진리들로 확증하되, 학문 세계에 익숙한 용어들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어야 하는데, 전자는 죽음이요, 후자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Everyone may know that man is governed by the principles he assumes, be they ever so false, and that all his knowledge and reasoning favor his principles; for innumerable considerations tending to support them present themselves to his mind, and thus he is confirmed in what is false. He therefore who assumes as a principle that nothing is to be believed until it is seen and understood, can never believe, becaus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cannot be seen with the eyes, or conceived by the imagination. But the true order is for man to be wise from the Lord, that is, from his Word, and then all things follow, and he is enlightened even in matters of reason and of memory-knowledge [in rationalibus et scientificis]. For it is by no means forbidden to learn the sciences, since they are useful to his life and delightful; nor is he who is in faith prohibited from thinking and speaking as do the learned of the world; but it must be from this principle—to believe the Word of the Lord, and, so far as possible, confirm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s by natural truths, in terms familiar to the learned world. Thus his starting point must be the Lord, and not himself; for the former is life, but the latter is death.
해설
이 단락은 AC.128에서 제시된 두 가지 길, 곧 감각과 기억 지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길과, 주님과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는 길을 ‘‘원리’(principle)라는 개념’으로 정밀하게 정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아느냐보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가 인간 전체를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먼저 매우 현실적인 심리 구조를 지적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세운 전제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그 전제가 거짓이라 해도, 그 사람의 지식과 추론은 놀라울 정도로 그 전제를 지지하는 근거들을 찾아냅니다. 이는 인간이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확증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된 원리를 붙잡은 사람은 점점 더 그 거짓에 능숙해집니다.
이 맥락에서 ‘보아야 믿겠다’, ‘이해해야 믿겠다’는 원리는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감각의 대상도 아니고, 상상의 대상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붙잡는 한, 사람은 신앙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도달할 수 없는 구조 안에 자신을 가두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참된 질서’는 분명합니다. 먼저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출발점을 의미합니다. 이 출발점이 세워질 때, 놀랍게도 이성과 기억 지식의 영역도 함께 밝아집니다. 신앙은 이성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을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균형 잡힌 진술이 나옵니다. 학문을 배우는 것은 금지되지 않았고, 오히려 유익하고 즐겁다고 말합니다. 또한 신앙인이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금지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학문과 이성이 아니라, ‘그것들의 주인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섬세한 질서를 제시합니다. 출발점은 주님의 말씀이고, 그다음에 자연적 진리들, 곧 이성, 지식, 학문이 동원되어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을 확증합니다. 이때 자연적 진리들은 판단자가 아니라 ‘증인’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학문 세계에 익숙한 언어로 말하되, 그 중심은 언제나 말씀에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단락의 모든 것을 한 줄로 요약합니다. 출발점이 주님이면 생명이고, 출발점이 자기 자신이면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영적 구조에 대한 진술’입니다. 생명은 언제나 위로부터 오고, 인간은 그것을 받을 때에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AC.129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원리로 살아가며, 그 원리가 삶 전체를 조직하고 밝히거나, 혹은 닫아 버리는데, 주님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에만 이성과 지식조차 생명을 얻고,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에는 가장 영리해 보일수록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심화
1. ‘라틴어’
본문, ‘학문을 배우는 것이 결코 금지된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그것들은 삶에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것도 아닙니다’ 부분 말인데요, 그래서 스베덴보리도 모든 저술을 당시 학자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기록한 것인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매우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저술을 라틴어로 기록한 것은 단순한 학문적 관습을 따른 것이 아니라, AC.129에서 말하는 원리, 곧 ‘신앙 안에 있는 사람도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는 원리를 실제로 구현한 선택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라틴어는 학문과 신학, 철학의 공통 언어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전하려는 내용이 단지 개인적 체험이나 종교적 감상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검토되고 이해될 수 있는 진리’라고 보았기 때문에, 가장 공적이고 검증 가능한 언어를 선택했습니다. 즉, 그는 일부 신비주의자들처럼 상징적이고 폐쇄적인 언어를 쓰지 않고, 오히려 누구나 접근 가능한 학문 언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 자체가 ‘신앙과 이성의 질서’를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AC.129의 맥락과 연결하면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 이성, 기억 지식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근원이 되느냐, 아니면 도구로 사용되느냐’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학문 언어, 곧 라틴어를 사용하되, 그 안에 담는 내용의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와 지혜에 두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형식은 학자의 언어를 취하고, 내용은 하늘에서 온 것을 담은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라틴어 선택이 단순한 ‘전달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저술이 특정 교파나 지역에 묶이지 않고, 당시 학문 세계 전체를 향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만약 그가 자국어로만 썼다면, 영향력은 훨씬 제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틴어는 국경을 넘는 언어였기 때문에, 그의 저술은 처음부터 ‘보편 교회를 향한 성격’을 갖게 됩니다.
더 깊이 보면,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질서와도 일치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지성, 이성, 그리고 기억 지식을 통해 ‘아래로 흘러가며 표현되는 구조’입니다. 라틴어라는 학문 언어는 그 마지막 표현 단계, 곧 기억 지식의 영역에 해당합니다. 그는 그 영역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온전히 사용하여 위에서 받은 것을 아래까지 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단순한 언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신학적 실천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늘의 진리는 세상의 언어를 통해서도 충분히, 아니 오히려 더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다. 단, 그 근원이 바뀌지 않는 한에서.’
정리하면, 스베덴보리가 라틴어로 기록한 것은 단지 시대적 관습 때문만이 아니라, AC.129의 원리, 곧 신앙과 학문, 계시와 이성이 충돌하지 않고,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함께 작동할 수 있음을 실제로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라고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2.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한 사람’
위 본문에, ‘그 원리가 아무리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 원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왜냐하면 그 원리를 뒷받침하는 무수한 근거들이 그의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이며, 그 결과 그는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거나 이해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믿지 않겠다는 원리를 전제로 삼는 사람은 결코 믿을 수 없는데, 이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상상으로 파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데를 읽으면서 많이 답답했는데요, 지금도 여전히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곧 창1:2에서 말하는 ‘혼돈과 공허, 흑암’ 가운데 있는 사람 같은데, 이런 사람에게 과연 빛이 비친다고 무슨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까요? 시작될 수 있으니까 저 같은 사람도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답답함이 드는 지점이 아주 정확합니다. 그 문장은 ‘이 사람은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 상태의 구조가 무엇으로는 열리지 않는가’를 분명히 하는 말입니다. 곧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전제를 고수하는 한, 그 틀 안에서는 영적, 천적인 것이 스스로 들어올 통로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빛이 전혀 비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빛은 다른 길로, 다른 층위로 먼저 들어옵니다.
창1:2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단순한 무지라기보다, ‘내면의 질서가 아직 열리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때 빛은 먼저 ‘이해를 설득하는 방식’으로 들어오기보다, ‘삶과 양심의 자리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들어옵니다. 사람은 여전히 ‘보아야 믿겠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일상 속에서 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미세한 찔림, 어떤 선택 뒤에 남는 평안과 불편함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초기의 ‘빛’입니다.
중요한 점은, 빛이 처음부터 ‘보이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살게 하면서 나중에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질서에서는 이해가 먼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아주 조금 바뀌면서 그에 따라 이해가 서서히 열립니다’. ‘증명되면 하겠다’가 아니라, ‘아주 작은 선을 한 번 행해 보니, 그다음이 조금 보인다’는 식입니다. 이때 이성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절대성을 내려놓고 섬기는 자리로 옮겨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람 안에는 이미 ‘리메인스’(remains, 남겨진 것들)가 있다는 점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감각, 진실에 대한 정직함, 선을 향한 미약한 기울기 같은 것들입니다. 이 리메인스가 빛을 받아 ‘밖의 강한 논리보다 더 깊은 자리에서 반응’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여전히 회의하고 따지면서도, 속에서는 ‘그래도 이 길이 옳다’는 아주 조용한 동의가 자라납니다. 이것이 변화의 실제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논증으로 설득’이라기보다, ‘작은 순종과 작은 선의 실천’입니다. 아주 사소해 보여도 좋습니다. 진실을 한 번 더 말해 보기, 이익이 적어도 공정하게 선택해 보기, 타인을 한 번 더 배려해 보기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선택을 할 때,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중심’에서 한발 물러서고, 그 틈으로 빛이 더 깊이 들어옵니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아,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이해가 뒤따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이미 경험하신 것처럼, 이 길은 ‘먼저 보고 믿는’ 길이 아니라, ‘조금 살다가 보게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연결되며, 이성이 더 넓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이때 사람은 깨닫습니다. ‘내가 닫혀 있었던 것이지, 빛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정리하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는 사람도 변화는 시작됩니다. 다만 그 시작은 이해의 확증이 아니라, ‘아주 작은 선의 선택과 그에 따르는 미세한 내적 반응’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갈 때, 빛은 점점 ‘보이는 것’이 됩니다. 결국 변화의 문은 이성의 완전한 확신이 아니라, ‘작은 순종과 겸손한 열림’에서 먼저 열립니다.
AC.128,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의 속뜻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 세상적이며 육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보고 믿을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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