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도록 하십니다 (25). And innocence from the Lord is instilled into this own,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 (verse 25).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 전체의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봉인’과 같습니다. 앞에서 인간에게 ‘프로프리움’(proprium, own)이 허락되고, 그것이 천적, 영적 생명과 결합, 하나처럼 느껴지게 되었다고 말한 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바로 그 프로프리움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주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이노센스’(innocence)는 도덕적 무결성이나 경험의 부족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노센스란, ‘모든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내적 인정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을 느끼며 살되, 그 프로프리움 안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방향성이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프로프리움은 아직 ‘용납될 수 있습니다’. 프로프리움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정향(定向)을 갖고 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노센스가 주입된 프로프리움은 주님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유연함과 부드러움을 지닙니다. 이 상태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을 느끼며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하되, 그 자유가 아직 자기주장으로 굳어지지 않습니다.

 

창2:25에서 ‘둘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는 말씀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노센스가 있는 상태에서는, 자기 자신이 드러나 있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감추어야 할 자기주장이 아직 없고, 비교와 판단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성(自己性), 곧 프로프리움은 있으되, 그것을 방어하거나 과시할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 단락은 동시에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평형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노센스가 프로프리움 안에 있는 동안에는, 인간은 아직 주님과의 결합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노센스가 사라지거나, 프로프리움이 중심으로 올라오는 순간, 같은 프로프리움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은 바로 이 이노센스가 시험받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AC.136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프로프리움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살아 있는 한에서는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으며, 그 이노센스야말로 천적 인간 상태의 마지막 보루라고 말입니다.

 

 

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위 해설에 계속 반복적으로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 등이 나오는데 이를 모두 ‘프로프리움’으로 치환해도 될까요?

 

 

네,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AC.136 해설에서 반복되는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 등은 모두 결국 proprium의 여러 측면을 풀어 설명하는 표현들입니다. 다만 완전히 동일한 단어로 기계적으로 치환하기보다는, 각각이 proprium의 어느 측면을 강조하느냐를 살려 읽으시면 훨씬 정확해집니다.

 

예를 들어 ‘자기의 것’은 proprium의 가장 직접적인 의미, 곧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귀속의 문제입니다. ‘이 생각은 내 것이다’, ‘이 선은 내가 행한 것이다’, ‘이 지혜는 내 것이다’라고 느끼는 방향입니다.

 

반면 ‘자기성’은 proprium이 단순한 소유 개념이 아니라, 사람 안에 형성된 어떤 ‘자기중심적 성향’ 혹은 ‘자기다움의 방향성’이라는 점을 강조할 때 더 어울립니다. 곧, 사람이 무엇이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자기중심으로 해석하려는 성질입니다.

 

그리고 ‘자기감’은 가장 섬세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proprium의 ‘느낌’ 차원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점은, 인간은 실제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기처럼 느끼는 감각’이 바로 자기감입니다. 이것 자체는 반드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와 사랑의 조건입니다. 문제는 그 자기감을 ‘진짜 독립된 자기’로 굳혀 버릴 때입니다.

 

그래서 셋 다 proprium과 연결되지만, 약간씩 강조점이 다릅니다. ‘자기의 것’은 ‘귀속’, ‘자기성’은 ‘방향성과 성질’, ‘자기감’은 ‘체험되는 느낌’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AC.136 해설 전체 흐름에서는 이 셋이 결국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곧,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며 살아가도록 허락된 상태’, 그리고 그 상태가 주님께 열려 있느냐 아니면 자기중심으로 굳어지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큰 틀에서는 모두 proprium의 설명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오히려 목사님처럼 AC를 계속 읽어 가실 때는, ‘프로프리움’이라는 원어 개념을 중심축으로 잡아 두시고, 문맥에 따라 그것이 지금은 ‘자기감’을 말하는지, ‘자기 중심성’을 말하는지, ‘내 것이라 여기는 귀속 의식’을 말하는지 분별해 읽으시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이실 것입니다.

 

정리하면, 네, AC.136의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은 모두 proprium의 변주들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다만 각각은 proprium의 다른 얼굴, 곧 ‘소유됨’, ‘자기 중심성’, ‘자기처럼 느껴지는 감각’을 조금씩 다르게 비추는 표현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2. ‘not be unacceptable’

 

위 본문 영역에,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이라고 ‘부정을 부정’했어요. 그냥 간단하게 ‘긍정’ 표현해도 될 걸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뭔가요?

 

 

아주 예리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문장에서는 이런 ‘부정을 통한 표현’이 꽤 자주 나오는데, 그냥 단순 긍정보다 훨씬 미묘한 상태를 전달하려 할 때 그렇습니다. AC.136의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을 단순히 ‘acceptable’(받아들일 만한)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아닌’ 식으로 표현한 이유는, 그 상태가 완전히 긍정적이거나 완전히 안전한 상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여기에는 어떤 ‘긴장’이 남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proprium, 곧 자기감과 자기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인간에게 이것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한 요소라는 사실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좋다’, ‘완전히 허용된다’라고 강하게 긍정하지 않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래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 뉘앙스는 우리말로 하면 이런 느낌에 가깝습니다.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니지만, 질서 안에서는 허용될 수 있다.’

 

‘본래 위험 요소를 포함하지만, 올바르게 놓이면 거부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자체로 절대 선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하고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

 

즉, 이 표현은 proprium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미묘한 태도를 드러냅니다. 그는 proprium을 단순히 ‘악’이라고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무조건 긍정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감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자유와 사랑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proprium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언제든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상태는 ‘적극적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질서 안에서 허용되는 상태’입니다.

 

이런 경우 영어에서는 단순 긍정보다 ‘부정을 부정하는 방식’이 훨씬 섬세한 중간 지대를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not impossible’, ‘not unreasonable’, ‘not unacceptable’ 같은 표현들은, 단순히 가능, 합리, 수용 가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보와 긴장을 남긴 채 제한적으로 인정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굳이 이렇게 쓴 이유는, proprium이 바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것도 아니고, 그대로 믿고 맡겨도 될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만, 동시에 끝없이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긍정 대신, 조심스러운 ‘부정을 통한 제한적 긍정’을 사용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문체의 문제가 아니라, proprium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태도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곧, proprium은 위험하지만 필수적이며, 본래적으로 안전하지는 않지만,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AC.135, 창2:18-25 개요,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사람의 프로프리움에 결합, 그것들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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