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AC.216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나뭇잎을 엮어’(sew leaves together)는 스스로를 변명하는 걸 의미합니다. ‘무화과나무’(fig tree)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하며, ‘치마로 삼았더라’(make themselves girdles)는 수치를 느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태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고, 이렇게 교회의 이 후손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누리던 순진무구함 대신 오직 자연적 선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자연적 선으로 자기들의 악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연적 선 안에 있었기 때문에, 수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To “sew leaves together” is to excuse themselves; the “fig tree” is natural good; and to “make themselves girdles” is to be affected with shame. Thus spoke the most ancient people, and thus they described this posterity of the church, signifying that instead of the innocence they had formerly enjoyed, they possessed only natural good, by which their evil was concealed; and being in natural good, they were affected with shame.
해설
이 본문은 창3:7의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는 표현을 해설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단순히 벌거벗음을 가리기 위해 옷을 만들어 입은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 타락 이후의 영적 상태를 읽어 냅니다.
우선 ‘잎들을 엮어 꿰맨다’(to sew leaves together)는 것을 ‘변명한다’(excuse themselves)라고 해석하는 점이 눈에 띕니다. 이것은 매우 깊은 통찰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면 보통 두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합니다. 하나는 주님 앞에 그대로 인정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변명하는 길입니다. 아담이 ‘하와가 주어서 먹었습니다’라고 하고, 하와가 ‘뱀이 꾀어서 먹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 같은 흐름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을 엮는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자신의 상태를 감추고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의미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무화과나무(fig tree)를 ‘자연적 선’(natural good)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자연적 선이란 완전히 악한 상태는 아닙니다. 사람에게 남아 있는 도덕성, 예의, 가족애, 사회적 책임감, 타인에 대한 배려 같은 자연적 차원의 선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여전히 가치가 있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태고교회가 가졌던 순진무구함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전의 순진무구함 대신 자연적 선만 남았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흘러 들어오는 선 가운데 살았지만, 이 후손들은 이미 그 상태를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악해진 것도 아닙니다. 아직 자연적 선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어느 정도는 질서를 지키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무화과 잎은 매우 흥미로운 상징이 됩니다. 무화과 잎은 벌거벗음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합니다. 단지 가릴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적 선도 인간의 악을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단지 외적으로 억제하고 덮어줄 뿐입니다. 사람은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도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의 자기 사랑과 교만이 근본적으로 제거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들이 자연적 선 안에 있었기 때문에 수치를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연적 선마저 없었다면 그들은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자연적 선이 남아 있었기에 자신들의 상태를 어느 정도 의식할 수 있었고, 그래서 수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AC.213에서도 보았듯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영적으로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보고 괴로워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양심과 내적 빛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무화과 잎은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완전한 타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 주는 마지막 보호막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결국 AC.216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순진무구함을 잃었고, 그 대신 자연적 선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주님 앞에서 투명하게 살지 못하고, 자기 상태를 가리며 변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연적 선 덕분에 자신들의 상태를 부끄러워할 수 있었고, 바로 그 점에서 아직 회복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무화과 잎은 인간의 불완전한 변명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한 타락을 막고 있는 마지막 남은 선의 흔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AC.217, 창3:7, ‘포도나무’(vine)와 ‘무화과나무’(fig tree)의 의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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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5, 창3:7, ‘own’을 실제 영계 체험을 근거로 증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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