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창4:7)
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가 상징하는 것은, 네가 선에 대해 호의적이면 너는 이웃 사랑을 가졌다는 것이며,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네가 만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웃 사랑은 전혀 없고, 대신 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 signifies that if thou art well disposed, thou hast charity;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signifies that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ou hast no charity, but evil.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이웃 사랑은 신앙과 함께, 같이 지내는 걸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신앙이 이웃 사랑을 다스리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signifies that charity is desirous to be with thee, but cannot because thou desirest to rule over it.
362. ‘가인’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를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면, 그 결과, 이웃 사랑으로부터도 분리됩니다. 이웃 사랑은 사랑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Cain” 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어디든지 교회가 있는 곳이면 이단들이 일어나는데요, 사람들은 신앙의 어떤 특별한 조항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다가 그만 그걸 메인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게 바로 인간 사고의 본성인데요, 사람은 어떤 것 하나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다가 그걸 다른 것 앞에 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며, 이런 경향은 특히 그가 그걸 자신의 고유한 발견이라고 주장할 때라든지, 그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렇습니다.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다 그것에 들어맞는 것 같고,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는 결국 그것이 맞다 맹세까지 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것이 거짓이더라도 말이지요.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도 더 본질적인 걸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과적으로 사랑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삶에서 비롯된 자아와 판타지 둘 다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확신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 “Cain” 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363. ‘가인’이라 부르는 신앙의 교리의 본질을 이 구절 설명 중 그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그걸 보면, 이웃 사랑은 신앙과 결합할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신앙이 아닌 이웃 사랑이 주가 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he natur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was called “Cain” is seen from the description of it in this verse, from which it appears that charity was capable of being joined to faith, but so that 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이런 이유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를 먼저 거론한 것입니다. 이 표현은 선에 대해 호의적이면 이웃 사랑도 있을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선을 행하다’의 속뜻이 기꺼이 선을 선택하고자 하는 마음인데요,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선한 일을 마음먹는 것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On this account it is first said,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 signifying, If thou art well disposed, charity may be present; for to “do well” signifies, in the internal sense, to be well disposed, since doing what is good comes from willing what is good.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습니다. 행위를 보면, 그 의지를 알 수 있었지요. 그때는 위선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In ancient times action and will made a one; from the action they saw the will, dissimulation being then unknown.
‘낯을 들다’가 이웃 사랑이 있다를 상징함은 얼굴에 대해 이미 말씀드린 내용을 보시면 분명한데요, 거기에 보시면, ‘낯을 들다’가 이웃 사랑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낯을 떨구다’는 그 반대를 각각 상징하고 있습니다. That an “uplifting” signifies that charity is presen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aid about the face, that to “lift up the face” is to have charity, and that for the “face to fall” is the contrary.
364. 두 번째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만일 네가 선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면 이웃 사랑은 전혀 있을 수 없고 대신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준비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악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웃 사랑이 전혀 없는 곳에는 오직 무자비함과 증오, 결과적으로는 모든 악만 있기 때문입니다. Everybody can see that “sin lying at the door” 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보통, 죄를 일컬어 ‘악마’라고 부르는데, 지옥에 있는 이 악마의 동료들은 사람에게 이웃 사랑이 결핍될 때, 그 사람 마음의 문 아주 가까이 와 있습니다. 마음의 문에서 이 악마와 그의 동료들을 쫓아버리는 오직 유일한 방법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Sin in general is called the “devil,” 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365. 세 번째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이웃 사랑은 신앙과 함께, 같이 지내기를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신앙은 이웃 사랑을 다스리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질서에 반(反)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신앙이 주도권을 쥐며, 지배하려고 하는 한, 그런 건 전혀 신앙이 아닙니다. 오직 이웃 사랑이 다스릴 때만 신앙이 됩니다. 위에서 보여드린 것처럼 이웃 사랑이 신앙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이웃 사랑은 불에 비유할 수 있겠는데요, 불은 열과 빛의 본질이지요. 열과 빛이 불에서 나오기 때문인데, 분리 상태에 있는 신앙은 마치 불의 빛은 빛인데 열 없는 빛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빛이 있어도 만물이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겨울철 빛입니다.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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