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1-17
102.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Verse 9.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scientiae] of good and evil.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는 진리에 속한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속한 퍼셉션을, ‘생명 나무’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derived)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what is sensuous)에서 나오는 신앙, 곧 그저 기억-지식에 불과한 신앙을 각각 가리킵니다. A “tree” signifies perception; a “tree desirable to behold,” the perception of truth; a “tree good for food,” the perception of good; the “tree of live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103. 여기 ‘나무들’이 퍼셉션을 가리키는 이유는 천적 인간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며, 주제가 영적 인간이면 또 달라집니다. 주제의 성격에 따라 서술되는 것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rees” 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104. 오늘날, 퍼셉션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At this day it is unknown what perception is.
※ 여기서 말하는 ‘오늘날’은 1750년대 유럽을 말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내적 감각(internal sensation)으로,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으며, 어떤 것이 참이요, 선인지 여부에 관한 것인데, 태고교회에게는 아주 잘 알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It is a certain internal sensation, from the Lord alone, as to whether a thing is true and good; and it was very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이 퍼셉션은 천사들한테는 아주 완벽한데요, 그들은 이것으로 여러 가지, 곧,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또 어떤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자신들로 말미암은 것인지, 또 그들에게 오는 아무개가 어떤 자인지, 심지어 그가 다가오는 것만 가지고도, 그리고 그의 한 조각 아이디어만 가지고도 그가 어떤 자인지 등을 깨닫고 아는 정도입니다. This perception is so perfect with the angels, that by it they are aware and have knowledge of what is true and good; of what is from the Lord, and what from themselves; and also of the quality of anyone who comes to them, merely from his approach, and from a single one of his ideas.
영적 인간한테는 퍼셉션이 없습니다.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The spiritual man has no perception, but has conscience.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습니다. 무척 많은 사람이 이 양심이 뭔지도 모르며, 퍼셉션이 뭔지는 더더욱 모릅니다. A dead man has not even conscience; and very many do not know what conscience is, and still less what perception is.
105. ‘생명 나무’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동산 가운데에는’은 속 사람의 의지 안입니다. The “tree of lives”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in the midst of the garden” is in the will of the internal man.
※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란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다 보니 천국을, 영생을 부차적으로 얻는 것입니다. 보통은 천국 가기 위해, 영생 얻기 위해 주님을 신앙하는데 말입니다...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고 하는 이 의지는 사람 및 천사와 함께 주님의 주된 소유(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입니다. The will,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heart,” is 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with man and angel.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의지나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비록 말들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탐욕(cupidity)이 사람의 것입니다. 사람은 그걸 의지라고 하지만... But as no one can do good of himself, the will or heart is not man’s, although it is predicated of man; cupidity, which he calls will, is man’s.
의지가 ‘동산 가운데’요, 거기는 ‘생명 나무’가 있는 데고, 사람은 의지는 전혀, 대신 오히려 탐욕만 있기 때문에, 이런 정황으로 비추어 볼 때, 이 ‘생명 나무’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랑과 신앙, 곧 모든 생명이 나오시는 분입니다. Since then the will is the “midst of the garden,” where the tree of lives is placed, and man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the “tree of lives” is the mercy of the Lord, from whom comes all love and faith, consequently all life.
106. ‘동산의 나무’, 혹은, 퍼셉션, ‘생명 나무’, 혹은,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지식의 나무’, 혹은, 감각적인 것에서, 그리고 단지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 등 이들의 본성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다루겠습니다. But the nature of the “tree of the garden,” or perception; of the “tree of lives,” or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nd of the “tree of knowledge,” or faith originating in what is sensuous and in mere memory-knowledge, will be shown in the following pages.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2장 9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속뜻)
주님은 천적 인간의 안에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에 관한 다양한 퍼셉션들을 두셨습니다. 특히, 그의 의지 안에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도 두시고, 감각적인 신앙, 지식에 불과한 신앙도 두셨습니다. 사람의 의지 안에 있는 ‘생명 나무’는 주님은 자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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