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함은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을 받는 그릇이기 때문에 천국의 모든 것이 심기는 바탕이 된다.and in innocence all things of heaven can be implanted, for it is a receptacle of the truth of faith and of the good of love. (HH.330)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김은경 역), 37장, ‘천국의 어린이들’(Little Children in Heaven)
이번 신정 연휴를 3세, 0세 손주들과 보내면서 더더욱 위 기술(記述)을 깊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2-6)
※ 2024년 올 한 해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자주 들었던 이름과 키워드들은 아마도 ‘이재명’과 ‘부정선거’, 그리고 ‘탄핵’ 등이었겠고, 가장 많은 시간을 썼던 건 유튜브 정치 클립들 보기이지 싶습니다. 주님과 보낸 시간이 아니고 말입니다. 정말 부끄럽지요... ‘이젠 좀 절제해야지...’ 하다가도 날마다 순간순간 들려오는 소식들, 특히 부정선거 소식과 그로 인한 거짓 국회의원들이 벌이는 이 기가 막힌 상황에 가슴에 열불이 나고, 마음이 정말 힘들었던, 정말 원치 않는 스트레스로 저뿐 아니라 나라를 걱정하는 대다수 보수 우파 국민 모두가 힘들었던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더더욱 한 해의 마지막 달인 이번 달에 터진 윤석열 대통령의 구국의 비상계엄으로 인해 나라가 광란의 도가니로 돌변, 급기야 거대 야당은 이때다 싶어 대통령을 국회 탄핵 소추시키고, 엊그제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애쓰고 있던 한덕수 국무총리마저 탄핵 소추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국내는 물론,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고, 급기야 국내 정세 불안으로 환율 상승, 나라의 경제가 안 그래도 어려운 때, 더욱 휘청거리기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저 거짓의 정당은 탄핵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기도하기를, ‘주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구하러 간 천사들이 롯과 그 가족을 해코지하려던 소돔 백성들의 눈을 어둡게 한 것처럼 지금 이 나라 좌파들의 눈을 어둡게 하사 저들로 스스로 망하게 하옵소서’라고까지 하지 않았겠습니까?
9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10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11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창19:9-11)
이제 사흘 후인 글피면 2025년 1월 1일 새해인데도 지난 성탄절 때도 그랬지만, 송구영신을 앞두고도 온 나라 백성의 주된 관심은 이 나라가 어찌 될 것인가에만 있어 불안, 초조, 암담한 상황입니다. 검찰, 경찰, 공수처를 비롯, 모든 언론, 방송, 심지어 여론 조사 기관들마저 한통속으로 미쳐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며, 심지어 법원과 헌재에도 좌파들의 독버섯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주님 오시던 로마 시대라면 모르겠는데, 그로부터 이천년이 지난 21세기 2024년 말임에도 이런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데요, 지금이 이럴진대, 주님 오시던 이천년 전 상황은 더욱더 어땠을까요? 오래전 모세를 통해 주님은 율법, 곧 지상의 언어로 된 ‘말씀’(The Word)을 주셨고, 이 ‘말씀’에 기반한 교회가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앞선 두 교회 시대인 태고교회, 고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이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 유대 교회라고도 하는 이 교회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 타락, 결국 주님의 모든 선과 진리가 황폐해지는 상태, 곧 종말에 이르게 되자, 이때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항상 새로운 교회는 이전 교회가 생명을 다할 때 일어납니다. 이것이 현 기독교회의 시작입니다. 이런 상황을 BC 8세기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가 미리 예언한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는 그 속뜻으로는 하나의 교회 시대가 교체되는, 그러므로 오늘날 대한민국 상황의 몇 배, 몇십 배나 더 혼란스러웠을 때인데요, 그때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를 보면서, 오늘 이런 나라 안팎 혼란의 때에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깨닫고자 송년 주일예배 본문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말씀으로 주님이 여러분을 위로하시고, 빛을 비춰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 설교 원본은 작년 서울 새 교회 송년 주일예배 원고입니다. 그래서 도입 부분을 올해 사정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여리고 연약한 신앙을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에게 처음 신앙이 생길 때의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우리 인간처럼 신앙이 연한 순 같이 연약할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언젤까요? 주님이 아직 어리셨을 때, 자기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과 그를 통해 자기가 세상에 오신 이유를 처음 아셨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은 그때의 주님의 연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연한 순과 같다는 것은 그 당시 주님에게 있는 진리, 또는 신앙이 그렇게 약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른 땅은 주님의 겉 사람인 인성(human)의 상태를 뜻하는데, 처음에는 주님의 인성 안에 진리가 별로 없었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없는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고운 모양이란 주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말합니다.
※ 우리는 그동안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이해, 실제로 주님의 외모가 그다지 별로였다, 주님은 보잘 것 없는 외모의 소유자이셨다, 그러니 자신의 외모가 맘에 안 드시는 여러분, 힘을 내시라는 식으로 설교도 하고, 또 그런 설교를 들어왔지만, 그러나 이 말씀의 속뜻은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에, 말씀의 속뜻을 모르면 정말 이렇게 정반대의 엉뚱한 풀이와 적용을 하게 되는 걸 봅니다.
그랬던 주님이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몸과 마음이 점점 자랍니다. 그리고 열두 살이 되었을 때는 유월절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난 랍비들과 성경에 대해 토론하기에 이릅니다. 누가복음 2장은 그때 랍비들의 반응을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라고 전합니다. 내면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외모 또한 아름답게 변합니다.
※ 주님의 질서, 곧 주님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출발,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으로, 내면에서 외면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후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주님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이셨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 즉 누가 보더라도 범상치 않았을, 누가 보더라도 예사롭지 않았을, 자기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그래서 그런 내면이 밖으로 드러나는 그런 어린이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아기였을 때에도 이미 몇몇 사람에게는 그러셨는데요, 아래 누가복음 말씀을 보면 말입니다.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2:21-38)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주님에게서 하나님의 신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 모두 영적으로는 맹인이요, 귀머거리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맹인이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 6장 말씀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의 일입니다. 말씀에는 거기 모였던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며 주님을 배척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누군가를 판단할 때, 겉모습으로만 판단합니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집안은 어떤지, 또는 돈은 많이 버는 지로 판단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거룩하고 힘이 있었고, 주님에 의해 많은 병자가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을 업신여기고 멸시했습니다. 나사렛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는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 여기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걸 보면, 이때는 이미 ‘요셉’은 세상을 떠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고 멸시하고 함부로 대할 때, 주님은 말할 수 없이 슬프셨을 것입니다. 분하고 억울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고 모독하며, 그렇게 그런 식으로 영적으로 죽어가는 게 안타까우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죄인처럼 끌고 가 때리고 침 뱉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벌을 받아 고난당하는 것이라고 주님을 비웃었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불법을 저지르거나 신성을 모독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원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 주님의 이런 모습을 저는 참으로 본받고 싶습니다. 이런저런 사람들로 제 마음이 힘들어 조용히 주님 앞에 나아가 말씀드리면, 그때마다 주님은 제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어땠겠니?’ 그럴 때 저는 ‘어휴, 주님...’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다시 제게 ‘너는 나를 사랑하여라. 그래서 누구든지 내가 사랑하면 너도 그를 사랑으로 대하거라.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즉 사랑하기 때문에 하도록 하여라’ 하십니다. 그럴 때, 제 눈빛이 돌아오며, 초롱초롱해집니다. 마음도 가벼워지고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주님은 그런 모욕과 조롱을 스스로 자원하셨을까요? 본문 5절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주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궁극적으로 평화를 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365번 글 31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한 사람들에게 평화란 천국과 영원한 삶을 뜻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천국과 지옥의 모든 것을 당신의 질서 가운데로 끌어내려 굴복시키시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인성 안으로 불러들인 시험을 통해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시지 않았다면 인류는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록 해설 365:31, 이순철 역) Therefore “peace” here signifies heaven and eternal life to those who are conjoined with Him; for the human race could by no means be saved if the Lord had not reduced all things in the hells and in the heavens into order, and at the same time glorified His Human, and these were accomplished by temptations admitted into His Human. (AE.365:31)
주님은 인간의 몸으로 지옥을 이기심으로 당신 안의 신성과 인성을 하나로 만드시고, 그렇게 해서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인 동시에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하신 주님이 살인자와 강도와 같은 인간들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유전 악 인성을 영어로는 human이라 하고, 영화되신 인성을 Divine Human이라 합니다. 이 Divine Human에 담긴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는 그 의미가 무한합니다.
그래서 본문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에서 양은 본래 순진한 사람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입니다. 즉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육신의 욕망을 좇아 마음대로 사는 자들이 양입니다. 주님은 그런 인간들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온갖 멸시와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견디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높고 높은 천국에서 낮고 비천한 땅으로 스스로 내려오셔서 기꺼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오직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주님이 얼마나 인자하고 겸손한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사람들로부터 지독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도 끝내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 앞에 지극히 낮은 자세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롭게 되시기 전 주님의 인성은 무한한 신성이신 아버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얼마나 겸손하셨는지는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또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 끌려가 심문받으실 때는 자신을 위해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 7절은 그것에 대해 예언하기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닮겠다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의 사소한 말에도 쉽게 상처받고 분개합니다. 조금만 불이익이 돌아와도 참지를 못합니다. 모든 게 사랑이 없고 신앙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또한 주님은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 시절이던 때 오셨습니다. 공의의 하나님, 정의의 주께서 이런 나라 안팎 사정에 유대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소위 독립군들에게 힘을 보태시기는 커녕, 오히려 주님은 정치와 군사에는 일체 함구하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만 전파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닮아야 할까요?
한 해를 보내면서 겸손하지 못했던 일, 주님을 믿지 못하고, 그리하여 오래 참지 못했던 일, 이웃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못했던 일을 반성합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 또한 필요하다면 손에 손, 총칼을 들고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워야 하지만, 더 깊은 상대, 곧 저들 식민 지배계급의 사람들 안에서, 인류의 안에서 숨어 활동하며, 무대 뒤에서 조종하여 인류를 자기들 뜻대로 부리는 지옥을 상대하시기 위해 인류를 깨우시고, 각 사람을 그 무너진 기초에서부터 다시 세우시는 일에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신 주님처럼, 우리 중에 누구는 그 형편과 사정에 따라 광화문으로, 또 누구는 골방에서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며, 변화된 삶, 곧 일터와 직장에서 자기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드러내는 생활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구호를 외쳐도 절대 무슨 악한 기운, 그러니까 지옥에서 오는 기운을 일체 배제하며, 비록 마이크를 잡아도 이런 나라 사랑의 마음 주시는 주님께 그 공과 고마움, 영광을 온전히 돌리고, 자기는 뒤로 물러나며 자기를 부인하는, 천사들의 겸손으로 마이크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2024년 송년 주일,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30)
4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사35:4-9)
오늘날 많은 사람이 주님에 대해 자기와 같은 보통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주님의 인성만 보고 동시에 신성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고, 주님 안의 하나님과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한 사람인 것처럼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님에 관한 교리 21, 이순철 역) At the present day many think of the Lord no otherwise than as of a common man like themselves, because they think solely of his human, and not at the same time of his Divine, when yet his Divine and his human cannot be separated. For the Lord is God and man, and God and man in the Lord are not two, but one person, yes, altogether one, just as soul and body are one man, (L.21)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성도들과 함께 찬송과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교회가 빛 그 자체이신 주님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고, 그 결과 세상은 빛이 없는 암흑의 세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는 세상을 말씀에서는 사막과 메마른 땅, 용이 사는 곳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막과 메마른 땅, 용이 사는 곳은 우리 주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작년 이맘때 국내 및 국외 정세입니다. 이 설교의 원본이 작년 성탄절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1년 후인 오늘은 국내적으로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및 초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대통령 탄핵소추, 부정선거 이슈 및 각종 대규모집회, 국외적으로는 다음 달인 2025년 1월, 미 트럼프 대통령 취임과 그에 따른 국제 정세의 급변 등 그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선과 악, 진실과 거짓 간 첨예한 대립 상황은 여전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힘없는 사람들을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쫓아내고,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은 총을 들고 일어나 보복을 꾀하고, 보복은 더 큰 보복으로 이어집니다. 수많은 부녀자와 아이들이 죽어가는 동안 싸움의 당사자들은 자기의 입장과 명분만 고집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동성애자들이 늘어나 전통적인 결혼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최근에는 급기야 어느 종교의 지도자가 동성애자 부부를 축복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그러면 나라 안 사정은 어떨까요? 80년대 말에 참교육을 하겠다고 처음 교사들의 노조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일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나도록 순진한 학생들에게 편향된 사상을 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6.25 전쟁 때 북쪽의 공산주의자로부터 나라를 지킨 지도자를 민족의 반역자라고 생각합니다. 산업화를 통해 이 나라를 빈곤에서 구한 지도자 역시 그들에게는 반역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역사의 진실을 뒤집고 우리 사회의 건전한 권위를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그들 교사의 권위는 자기가 가르친 학생들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교육계뿐 아니라 정치와 사법, 언론 등의 직업군과 산업 현장 곳곳에서 직업윤리가 사라지고 있고, 종교계의 부패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게 사막이요 메마른 땅이며, 용이 사는 곳의 모습일 것입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양심적인 사람들은 사는 게 힘듭니다. 양심을 지키는 사람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두 번 시류에 따라 눈을 질끈 감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처음 가졌던 마음을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두려움에 떠는 선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쁘게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이 바로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과 지옥의 영들은 그들이 괴롭히던 선한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던 애굽의 군대가 모세가 바다를 향해 손을 내밀자 홍해의 깊은 바다에 잠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구원이며 보복입니다.
2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30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있는 것을 보았더라 31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14:26-31)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원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 5절로 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한편으로는 진리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한편으로는 낡은 교회를 폐하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앞의 말씀에서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는 주님의 제자들이 진리를 통해 영적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는 새 교회의 출현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거듭나는 것과 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새 교회는 거듭나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서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우리 모두 맹인이며, 귀머거리이고 절름발이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 이치를 진리로 믿고 따르는데 그것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 것들에 매여 있는 동안에는 영원한 진리에 눈뜰 수 없습니다. 그건 주님에 대해, 사후의 삶에 대해, 영원히 사는 이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맹인의 상태입니다. 진리를 모르면 또 귀머거리라고 했습니다. 귀머거리라는 건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귀는 진리에 순종하는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절름발이는 무슨 뜻일까요? 참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삶 가운데서 세상에 속한 것과 영적인 것의 조화를 이뤄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영적 진리를 모를 때 사람들은 세상 법이나 도덕을 기준으로 행동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건 세상 사람의 눈에 맞춰 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후 육신의 옷을 벗고 영계에 들어갈 때, 속에 감추었던 추악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런 걸 보더라도 진리가 없는 절름발이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진리로 맹인의 눈을 밝히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여시며, 절름발이들을 사슴과 같이 뛰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기존의 교회가 무너진 자리에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앞의 말씀에서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라고 한 것은 새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광야와 사막은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속뜻으로는 진리와 진리에 따른 삶이 없는 황폐한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는 또 그런 교회들을 용이 눕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승냥이’라고 했는데 원문에는 ‘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속뜻으로 용은 무슨 뜻일까요? 기존 교회들이 가르치는 잘못된 교리를 뜻합니다. 즉 입으로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하나님을 믿는 교리입니다. 둘째는 믿음으로부터 삶을 분리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입니다. 그러면 새 교회에서는 주님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한 분 주님 안에 세 본질이 있다고 믿습니다. 즉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지만, 인간 앞에 나타나실 때는 진리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실 때는 진리의 능력, 즉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세 본질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가 사랑 자체이신 분이라면, 아들은 사랑에서 발현되는 진리이고, 성령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본질인 사랑과 진리로부터 발현되는 진리의 능력인 것입니다. 주님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이신 주님과 온전히 결합할 수 있으며, 그때 주님이 주시는 믿음과 사랑은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지막 때 교회들은 신관에 있어서는 한 분 하나님을 셋으로 나누고, 신앙관에 있어서는 믿음으로부터 사랑을 떼어놓음으로써 주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시고, 그를 통해 주님에게서 멀어졌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라고 한 것은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로부터 참된 진리가 샘솟듯 솟아남을 의미합니다. 물과 시내는 참된 진리와 그것에서 비롯한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본문 8절에는 새 교회를 통해 주님이 가르치시는 진리를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또 9절에서는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사자는 본래 악과 거짓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진리의 능력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의 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나운 짐승은 신앙인을 유혹하는 불결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자와 사나운 짐승이 없다는 것은 주님께서 오신 후에는 어떤 거짓이나 추악한 욕망도 새 교회의 신성한 진리를 파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어릴 때는 성탄절과 연말이 되면 카드를 손수 써서 친구들에게 보내곤 했습니다. 카드 속 그림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숲길을 달리고 숲속에 작은 교회로부터 불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림 속의 교회처럼 새 교회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로부터 나오는 불빛과 빛은 온 세상을 밝히는 가장 밝고 힘 있는 진리입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고 지옥을 이기신 능력의 진리로 다시 새 교회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 ‘하나님의 섭리’ 33:2항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주님은 정욕이라고 하는 악한 사랑과 그 애정이 제거되는 만큼만 사람들과 가까이 결합하신다. 이 사랑과 애정들은 자연적 사람 안에 있으며, 사람이 자연적 사람으로부터 하는 일은 뭐든 스스로 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그 사랑의 악을 제거해야 하며, 그런 만큼 주님은 가까이 오셔서 당신 자신을 그에게 결합시키신다. (이순철 역) the Lord can conjoin himself more closely to a man only as the love of evil is removed along with its affections, which are lusts. These lusts reside in the natural man. What a man does from the natural man he feels that he does of himself. For his part, therefore, a man should remove the evils of that love; so far as he does, the Lord comes nearer and conjoins himself to him. (DP.33:2)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과 하나님을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세상 정욕을 멀리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보는 것은 그때 주님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정욕들이 있습니다. 나를 내세우는 것, 다른 사람 위에 올라 지배하려는 것, 이웃의 것을 탐내는 것, 물질적인 쾌락 그 자체를 즐기는 것 등 다양한 욕망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 붙잡혀 있는 동안에는 주님은 우리 안으로 오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사랑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탄식합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하지만, 세상을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말이죠. 그러나 그럴수록 능력의 진리로 오신 주님을 믿고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께서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탄절을 맞아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10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사35:1-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