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2:11, 12)

 

AC.112

 

더욱이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혜라는 건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으며, 그러므로 역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성이라는 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선은 없고,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선도 없으며,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진리는 없고,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진리도 없습니다.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 곧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들도 비록 이러한 이름들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가짜입니다. Be it known moreover that there is no wisdom which is not from love, thus from the Lord; nor any intelligence except from faith, thus also from the Lord; and that there is no good except from love, thus from the Lord; and no truth except from faith, thus from the Lord. What are not from love and faith, and thus from the Lord, are indeed called by these names, but they are spurious.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이어진 모든 설명을 ‘원천의 문제’로 단정 짓는 매우 강한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혜, 지성, 선, 진리라는 네 가지를 나열하지만, 그 요지는 단순합니다. ‘출처가 주님인가 아닌가’입니다. 무엇이 얼마나 고상해 보이는지, 얼마나 정교한지,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는 기준이 아닙니다. 기준은 오직 하나, 사랑과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나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먼저 지혜와 지성의 구분이 다시 한번 분명해집니다. 지혜는 사랑에서 나오고, 지성은 신앙에서 나옵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기능이지만, 근원은 같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지혜와 지성 또한 주님에게서 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율적 생산 영역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받아들이는 그릇이지, 원천이 아닙니다.

 

이어 선과 진리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선은 사랑에서 나오고, 진리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이는 앞서 ‘생명나무’가 사랑과 그로부터 나온 신앙을 의미한다는 설명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선과 진리는 인간의 도덕적 성취나 지적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한발 더 나아가, 매우 불편할 수 있는 말을 합니다.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도, 세상에서는 지혜, 지성, 선, 진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가짜’라고 단언합니다. 이 말은 지적 능력이나 도덕적 행위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원의 왜곡’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가짜라는 말의 핵심은, 그것들이 ‘생명을 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겉으로는 지혜처럼 보일 수 있고, 진리처럼 말할 수 있으며, 선처럼 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 곧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유입이 없다면, 그것들은 지속되지 않고,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결국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으로 되돌아갑니다.

 

이 글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근원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신앙에서 지성이 나오며, 그 모든 것이 다시 사랑의 선으로 돌아갑니다. 이 순환이 살아 있을 때, 그것은 참된 것입니다.

 

AC.112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나오느냐이며,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주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은 이름만 같을 뿐, 생명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AC.113, 창2:11-12, 말씀에서 '금'이 표상하는 것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3 말씀에서 지혜의 선,곧 사랑의 선을 ‘금’으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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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 창2:11-12, '왜 이런 설명이 오늘날 이해되기 어려운가'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내적 의미에서 어떠한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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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와 찬64, ‘기뻐하며 경배하세입니다.

 

오늘은 창1 두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20번에서 23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3-5)

 

 

이 본문을

 

빛이 있으라’, 거듭남의 시작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1:3)

 

 

AC.20, 창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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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4, 5)

 

 

AC.21, 창1:4-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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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5)

 

 

AC.22,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C.22-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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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거듭 권하지만, 주중에 이 원고를 계속 읽고 또 읽고 하시기 바랍니다. 스마트폰은 꼭 필요할 때에만 하시고 말입니다. 말씀과의 거리가 나와 하나님 사이 관계를 알게 해준다는 것처럼 스마트폰 역시 그렇습니다. 스마트폰과 가까우면 주님은 멀고, 반대로 스마트폰에서 물러나면 주님은 곁에 계십니다. 스마트폰으로 말씀과 원고 보는 걸 제외하고는 여러분, 가급적 스마트폰을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SNS도 가급적 절제하시고, 이런저런 알림도 웬만하면 다 끄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가급적 한발 물러나시기를, 그래서 그 빈자리를 주님이 오셔서 곁에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2-22(D1)

 

2639, 2. 창1.2, 2026-02-22(D1)-주일예배(창1,3-5, AC.20-23), ‘빛이 있으라’, 거듭남의 시작.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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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3/08, 창1:6-8), '둘째 날, 두 번째 상태'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0, ‘큰 영광 중에 계신 주’와, 찬65, ‘내 영혼아 찬양하라’입니다. 오늘은 창1 세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6절로 8절, AC 글 번호로는 24번에서 26번입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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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2/15, 창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와 찬63, ‘주가 세상을 다스리니’입니다. 오늘부터 해설 버전 누락분 창세기 1장부터 3장입니다. 창3 마치면 창6으로 원래대로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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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2:11, 12)

 

AC.11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내적 의미에서 어떠한지 그대로 설명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인간들은 거의 기억 지식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지성과 지혜, 그리고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많은 이들은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각각의 것들은 서로 구별되며, 참으로 매우 명확하게 구별됩니다. 그리고 온 하늘은 주님에 의해, 수없이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가장 정밀한 질서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It is however a very difficult matter to describe these things as they are in the internal sense, for at the present day no one knows what is meant by faith from love, and what by the wisdom and intelligence thence derived. For external men scarcely know of anything but memory-knowledge, which they call intelligence and wisdom, and faith. They do not even know what love is, and many do not know what the will and understanding are, and that they constitute one mind. And yet each of these things is distinct, yea, most distinct, and the universal heaven is ordinated by the Lord in the most distinct manner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love and faith, which are innumerable.

 

 

해설

 

이 글은 앞선 AC.110의 설명을 잠시 멈추어 세우며, ‘왜 이런 설명이 오늘날 이해되기 어려운가’를 정직하게 밝히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개념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설명의 난해함이 아니라, 듣는 귀의 상실입니다.

 

그가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온 신앙(faith from love)이라는 개념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을 교리의 동의, 혹은 생각의 확신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생명의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가, 오늘날 거의 인식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 그는 오늘날의 인간을 ‘외적 인간(external men)으로 규정합니다. 외적 인간은 기억 지식, 곧 정보와 경험의 축적만을 알고, 그것을 지성, 지혜,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지성은 사고 능력이 되고, 지혜는 노하우가 되며, 신앙은 의견이나 신념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지성, 지혜, 신앙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와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나 애착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원리입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을 단일한 ‘생각하는 주체’로만 이해하는 현대적 사고에 대한 근본적 비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은 서로 섞인 개념이 아니라, ‘각각 구별되며 매우 명확하게 구별된다’고 말입니다. 이 구별이 사라질 때, 인간 내면은 흐려지고, 영적 질서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단락의 무게를 하늘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온 하늘은 주님에 의해,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가장 정밀하게 배열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늘은 획일적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의 질적 차이에 따라 질서 지어진 생명의 우주’입니다. 그 차이는 몇 가지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다’고 표현됩니다.

 

이 말은 곧,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가 ‘그 자체로 고유하며 대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와 지성을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질서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AC.111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설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을 감각하고 분별하는 내적 구조 자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그 잃어버린 구별 위에 완전한 질서로 서 있습니다.

 

 

 

AC.112, 창2:11-12, 사랑, 신앙, 선, 진리... '원천이 어디인가'가 중요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2 더욱이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에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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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0, 창2:11-12,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AC.110-115)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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