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9.심화

 

1.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신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신다(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는 이 문장은 저를 정말 놀라게 하며, 그래서 깊이 감동하게 합니다. 저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저의 지난날을 곰곰 생각해 보면, 과연 주님이 나에게도 저런 사랑과 자비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해집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놀라움’과 ‘아찔함’은 사실 AC.39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체험적으로 붙드신 반응입니다. 이 문장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주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의 깊은 비밀’, 곧 자비의 실제 작용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온 시간 속에 이미 조용히 작동해 왔던 것입니다.

 

이 문장의 뜻을 조금 더 또렷하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만약 그 상태에서 그것을 그대로 들이대면, 사람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혹은 반발하여 더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처음에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것이다라고 느끼도록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속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와 자발성을 지켜 주시는 방식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행한다고 느낄 때만, 그 행위가 그의 것이 되고, 그 안에 책임과 사랑이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고백하신 것처럼,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때 내가 했던 것들이 정말 다 내가 한 것들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선택, 어떤 깨달음, 어떤 돌이킴 등, 그 순간에는 내가 한 것 같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인도와 보호가 있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AC.39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처음에는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시지만, 점점 빛이 밝아질수록 우리는 알게 됩니다. ‘, 이것이 내 것, 내가 한 것이 아니었구나. 주님이 나를 이끌어 오신 거구나.’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허락(permit)이라는 표현입니다. 주님이 적극적으로 사람을 착각하게 만드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그 생각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단계에서는 그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처음 걸을 때, 부모가 손을 놓아 주면서도 뒤에서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내가 걷는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보호 속에서 걷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가 완전히 개입해 버리면, 아이는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반대로 완전히 내버려두면 넘어져 다치게 됩니다. 주님은 그 사이에서, ‘자유를 주시면서도 보호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만일 저런 자비가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감정은 매우 깊은 영적 통찰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주님의 보호가 한순간만 거두어져도 사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 보호가 너무 자연스럽고, 너무 조용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자비의 특징입니다.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러나 끊임없이 지켜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문장은 또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를 이끕니다. 처음에는 ‘내가 한다’고 생각하게 하시지만, 점점 빛이 밝아지면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나는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는다는 상태’, 곧 ‘마치 자기로부터인 것처럼(as if from oneself)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진짜 균형입니다. 완전히 자기로 돌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으면서도, 내가 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감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더 깊어집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단순히 우리의 선택과 노력만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와 자비가 엮여 만들어진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겸손해지고, 동시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이 AC.39의 한 문장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스스로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는 걸 허락하시면서, 실제로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조용히 인도하고 보호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될 때, 신앙은 의무가 아니라 ‘감사와 사랑의 관계’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아찔함’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실은 ‘자비를 알아볼 때 생기는 경외와 감사의 감각’입니다. 그리고 그 감각이야말로, 이미 넷째 날을 지나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고 계시다는 하나의 아름다운 ‘징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AC.39, 심화 2, ‘마13:37’

AC.39.심화 2. ‘마13: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이 구절이 AC.39에 인용된 이유는, 사람 안에서 생겨나는 모든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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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 창1:20, ‘비로소 살아나는 신앙 : 주님이 행하심을 알 때 시작되는 생명’(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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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심화

 

3. ‘3:19, 21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이 구절이 AC.38에 인용된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낮과 밤’, ‘빛과 어둠’의 의미가 단순한 상징적 해석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영적 진리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38에서 스베덴보리는 ‘’은 선을, ‘’은 악을, ‘’은 진리를, ‘어둠’은 거짓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응이 단순한 해석자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요한복음 3장의 주님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빛은 단순한 자연적 빛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있는 대상이므로 영적 의미의 빛, 곧 진리를 뜻합니다. 반대로 어둠 역시 단순한 밤의 어둠이 아니라 거짓과 영적 무지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사람이 진리를 몰라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악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진리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38의 관점에서 보면, 빛과 어둠의 차이는 단순히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에 관한 문제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악에서 돌이키게 하며, 주님을 향해 살도록 요구합니다. 그래서 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불편하게 여기고, 결과적으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에 있는 것입니다.

 

반면 21절에서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에서는 ‘진리를 행하는 자’라는 의미가 더욱 강합니다. 이것은 진리가 단순히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될 때, 비로소 참된 진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를 아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가 빛으로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은 AC.38의 핵심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 ‘낮의 일’, 악을 ‘밤의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도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오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어둠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빛은 진리와 선의 영역이고, 어둠은 거짓과 악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요3:19, 21 AC.38에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의 ‘’과 ‘어둠’이 각각 진리와 거짓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사람의 영적 상태는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행하는가에 의해 드러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빛으로 나온다는 것은 단순히 진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며, 어둠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무지한 것이 아니라 거짓과 악을 붙드는 삶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 구절은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38, 창1:18-19, ‘낮과 밤의 분별 : 행위로 드러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기준’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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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 심화 2,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 요약, 정리’

AC.38.심화 2.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 요약, 정리’ 그리고 더 나아가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 역시 요약, 정리, 그 흐름 속에서 이 넷째 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세요.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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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안에서 ‘몸의 부활’에 대한 입장은 생각보다 다양하지만, 큰 틀에서는 대부분의 전통 교회들이 ‘최종적인 몸의 부활’ 자체는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몸이 어떤 몸인가, 현재 죽은 자들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그리고 부활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에 따라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러나 흔히 오해하듯이 ‘지금의 육체가 그대로 복원된다’고 단순하게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죽은 뒤 영혼이 먼저 하느님 앞에 가며, 마지막 심판 때 ‘영화된 몸’과 다시 결합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몸은 현재의 육체와 연속성은 있지만, 썩지 않고 죽지 않으며 제한을 받지 않는 상태입니다. 가톨릭의 대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도 부활체를 ‘동일한 인격의 몸이지만 변화되고 완성된 몸’으로 설명했습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다만 법적 구원론보다는 ‘신화(神化, Theosis)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인간 전체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이므로, 영혼만이 아니라 몸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최후에 몸이 부활한다는 점에서는 가톨릭과 비슷하지만, 이를 더 신비적이고 존재론적인 변화로 이해합니다. 정교회 신학자들은 종종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이나 부활 후의 영광스러운 몸을 예로 듭니다.

 

루터교, 개혁교회, 장로교, 감리교 등 전통 개신교 역시 기본적으로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다만 현대에 올수록 ‘현재의 원자와 세포가 그대로 재조립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신학자는 많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존 칼빈은 부활체가 현재 몸과 동일 인격의 몸이지만, 전혀 새로운 영광의 상태를 입는다고 설명했습니다. 많은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도 고린도전서 15장의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을 구분하며, 부활체를 변형된 존재로 이해합니다.

 

성공회는 전통 신조를 유지하면서도 해석의 폭이 비교적 넓습니다. 몸의 부활을 고백하지만, 그것을 물질적 복원으로 이해할지 영광스러운 존재의 변형으로 이해할지는 신학자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반면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몸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그들에게 부활은 ‘하나님 안에서 인격이 보존된다’거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공동체 안에서 계속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가톨릭, 정교회, 보수 개신교 모두로부터 전통적 신앙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로는 전통 교회들 사이에도 스베덴보리와 부분적으로 만나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톨릭과 정교회도 사람이 죽은 뒤 의식 없는 상태로 수천 년을 기다린다고 보지 않습니다. 죽는 즉시 영혼이 살아 있다고 봅니다. 또한 부활체가 현재의 육체와 전혀 동일한 물질 구조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죽은 뒤 곧바로 영적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어느 정도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 있습니다. 전통 교회들은 ‘죽은 뒤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과 ‘마지막 때 몸도 다시 부활한다’는 것을 둘 다 믿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이미 완전한 인간 형상을 가진 영적 몸으로 부활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추가적인 육체 부활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가톨릭, 정교회, 전통 개신교는 ‘죽은 뒤 영혼은 살아 있으며, 마지막 때 몸도 부활한다’고 믿고, 스베덴보리는 ‘죽은 뒤 즉시 영적 몸으로 부활하며, 그것이 이미 완전한 부활이다’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자연적 육체 자체가 신성으로 영화되어 부활했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 점이 스베덴보리의 부활론이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 가장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입니다.

 

 

 

SC.88, ‘식사 초대를 받을 때’

자신의 글이나 생각,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리를 두지는 않으시는 분의 식사 초대가 있을 시,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했나요? 스베덴보리의 생애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의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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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6, ‘몸의 부활은 오직 주님 한 분한테만’

개신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 곧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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