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경험한 ‘손님 대접의 영성’을 소개하면서, ‘주는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도 잊지 말라’는 메시지로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과 조금 다른 의미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수도자의 극단적인 금욕이나 기이한 일화보다 ‘타인을 향하여 열리는 ’이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토스를 바라보는 시선부터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는 ‘마리아의 정원’, 여성 출입 금지의 기원, 황후의 방문 등에 관한 여러 전승이 등장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동방정교회의 오랜 수도 전통과 신심을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전승의 신성함이나 기적성 자체가 영적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장소가 천 년 이상 보존되었고, 수많은 성물과 고문서를 간직하고 있으며, 수많은 수도자가 그곳에서 기도했다는 사실은 존중할 만하지만, 그것이 곧 그 장소 자체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함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며, 사람이나 장소, 그리고 물건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나타내는 만큼만 거룩함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정원’이라는 전승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 후반부의 ‘손님 대접’ 이야기가 오히려 이번 영상의 영적 중심에 가깝습니다. 가뭄과 흉년 때문에 수도원 자신들의 먹을 것조차 부족해지자 수도사들은 방문객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던 관행을 중단하기로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결정입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방문객이 찾아와 ‘ 가지를 잊지 말라. 주는 것과 받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것을 믿으라’는 취지의 말을 남깁니다. 이후 수도원은 다시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에게 음식을 나누었고, 그것이 이비론 수도원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매우 아름답게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삶은 근본적으로 ‘받아서 주는 ’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 모든 사랑과 생명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기 위해 받는 존재가 아니라, 받아서 다시 이웃에게 흘려보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의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은 단순한 자선의 격언보다 훨씬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받음’과 ‘’은 서로 반대되는 두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순환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그렇게 흘려보내는 가운데 다시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주의점도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 남에게 하나를 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열을 주신다’는 식의 보상 원리로 이해하면 금세 본래 의미에서 벗어납니다. 주는 행위가 더 큰 물질적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겉으로는 체어리티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자기 사랑이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었으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갚으실 것이다’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부터가 주님에게서 것이므로 필요한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가 더 깊은 질서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주시는 것도 반드시 돈이나 재산의 증가를 뜻하지 않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볼 수 있는 눈, 더 깊은 평안과 지혜,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훨씬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손님이 오지 않는 집에는 천사도 오지 않는다’는 수도원의 말도 문자 그대로 어떤 신비한 법칙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가리키는 정신은 아름답습니다.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식탁을 열고, 자기에게 속한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행위는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서 밖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말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운동이라면, 체어리티는 받은 선을 이웃에게 유용하게 흘려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환대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잘 행해질 때 ‘use’, 곧 쓰임의 한 형태가 됩니다.

 

영상에서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 천사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연결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읽으면 좋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 앞을 지나가는 이들을 보고 먼저 달려나가 맞이하고, 물과 음식과 쉼을 제공합니다. 속뜻에서 더 깊은 의미들이 있겠지만, 겉으로도 이 장면에는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있습니다. ‘먼저 대접하고, 나중에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상대가 천사인 줄 알았기 때문에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환대했습니다. 바로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가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한 사랑하는 ’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따라 필요한 쓰임을 행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도원이라는 장소를 넘어 우리 일상으로 곧바로 이어집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아도 식탁 하나를 여는 것이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고, 어려운 사람에게 시간과 물질을 내어주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으며, 자기 능력과 지식을 필요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생활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하게 보는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얼마나 세상에서 멀리 떨어졌는가?’보다 ‘얼마나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선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가?’가 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영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천 년 된 박물관도, 아토스의 신비로운 전승도, 여성의 출입이 제한된 독특한 수도 전통도 아닙니다. 오히려 굶주림이 닥쳤을 때 닫으려 했던 ‘창고를 다시 여는 장면’입니다. 수도원의 거룩함이 박물관 속 오래된 성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에게 내어주는 한 조각의 빵에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 성물은 과거의 거룩한 삶을 기억하게 할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사랑을 살아 있게 합니다.

 

다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스베덴보리는 ‘주는 ’ 자체도 분별 없이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실제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지혜롭게 살피는 사랑입니다. 악을 돕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니며, 상대의 잘못을 강화하는 도움 역시 참된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환대와 나눔에는 사랑과 함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자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사이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아토스의 웅장한 역사와 희귀한 보물들을 한참 이야기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끝까지 따라가 보면 결국 가장 빛나는 보물은 다른 데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조금 더 깊게 바꾸어 읽어볼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았음을 잊지 말고, 받은 것을 이웃에게 흘려보내기를 잊지 말라.’ 그렇게 읽는 순간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환대 이야기는 특정 수도원의 미담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일상 전체를 비추는 말이 됩니다.

 

결국 참된 수도는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외적 고요가 내적 고요를 도울 수 있고, 외적 청빈이 자기 사랑을 돌아보게 할 수도 있으며, 수도원의 규율과 전통이 영적 훈련에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기 것으로 가두지 않고, 삶의 쓰임으로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어쩌면 이것일 것입니다. ‘받은 것은 것이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나를 지나 다른 사람에게까지 흘러가도록 받은 것입니다.’ 그 흐름이 막히지 않는 곳,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그곳에서 천국의 질서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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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1,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의 티혼 수도사, 금욕과 거듭남’ (202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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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2

떼의 처음 (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새끼’)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표상교회에서 처음 , 장자에 관한 규례에서 분명합니다. 처음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 장자(firstborn)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입니다.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장자이십니다. 이것은 고대교회들에서 사람과 짐승의 처음 것을 여호와께 거룩한 것으로 드림으로써 표상되었습니다(13:2, 12, 15). That thefirstlings of the flocksignify that which is of the Lord alone is evident from the firstlings or firstborn in the representative church, which were all holy, because they had relation to the Lord, who alone is thefirstborn.”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re thefirstborn.” All love is of the Lord, and not one whit of it is of man, therefore the Lord alone is thefirstborn.” This was represented in the ancient churches by the firstborn of man and of beast being sacred to Jehovah; (Exod. 13:2, 12, 15)

 

2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모든 것은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것이니라 하시니라, 12너는 태에서 처음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것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5그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것까지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모든 수컷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아들 중에 모든 처음 자를 대속하리니 (13:2, 12, 15)

 

또한 속뜻으로 사랑을 의미하는 레위 지파가, 비록 속뜻으로 신앙을 의미하는 르우벤과 시므온보다 나중에 태어났지만,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받아들여지고 제사장직을 맡게 것으로도 표상되었습니다(3:40-45; 8:14-20). and by the tribe of Levi, which in the internal sense signifies lovethough Levi was born after Reuben and Simeon who in the internal sense signify faithbeing accepted instead of all the firstborn, and constituting the priesthood. (Num. 3:4045; 8:1420)

 

4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하여 명수를 기록하라 41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42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계수하니 43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처음 태어난 남자의 총계는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 4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5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3:40-45)

 

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자라 이스라엘 자손 모든 초태생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19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20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이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으되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 (8:14-20)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에 관하여 모든 것의 장자이심을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f the Lord as the firstborn of all, with respect to his human essence, it is thus written in David:

 

26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내가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89:26-27) He shall call me, my Father, my God, and the rock of my salvation. I will also make him my firstborn, high above the kings of the earth. (Ps. 89:2627)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ohn: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5) Jesus Christ the firstborn of the dead, and the prince of the kings of the earth. (Rev. 1:5)

 

예배에서 처음 것들은 주님을 의미하고, 교회의 처음 것은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Observe that the firstborn of worship signify the Lord, and the firstborn of the church, faith.

 

해설

AC.352는 앞의 AC.350에서 떼의 처음 이 왜 오직 주님께만 속한 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처음 난 것, 곧 장자가 거룩한 까닭은 자연적인 출생 순서에서 첫째라는 사실 자체에 어떤 신성함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표상교회에서 처음 난 것은 궁극적으로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에 거룩했습니다. 그래서 출13:2, 12, 15에서는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하여 돌리라고 합니다. ‘이는 것이니라라는 말이 반복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의 거룩함은 인간이나 짐승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실재, 곧 모든 거룩함과 생명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번호의 중심 문장은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입니다라는 말과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거기서 비롯된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에서 신앙은 사랑과 독립된 별개의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으로 알았으며, 그러므로 신앙은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을 통하여 살펴본 문제와도 정확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존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하고 점차 사랑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을 인간에게 실제 사랑이나 체어리티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선을 행합니다. 다만 그 사랑의 최초 근원과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사랑과 선을 끊임없이 주시며,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마치 자기에게서 사랑하고 행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참된 체어리티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수동성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내가 이만큼 사랑했고 이만큼 선을 행했다는 자기 의보다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라는 인정이 깊어지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벨이 떼의 처음 을 드렸다는 말도 단순히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도덕적 교훈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그가 드린 처음 난 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안의 참된 사랑과 선을 자기 고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주신 것을 우리가 소유했다가 다시 주님께 돌려드린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선을 실제로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이 처음부터 주님께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 것은 여호와의 이라는 표상이 가르치는 중요한 내적 질서입니다.

 

AC.352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레위 지파에 관한 설명입니다. 자연적인 출생 순서에서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이고, 그다음이 시므온이며, 레위는 셋째입니다. 그런데 속뜻에서는 레위가 사랑을, 르우벤과 시므온이 신앙에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주님께서는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시고 그들에게 성막 봉사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3:40-45; 8:14-20). AC.352가 이 말씀들을 인용하는 이유는 단순히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출생 순서와 영적인 내적 질서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내적인 생명의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먼저다라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언제 사랑을 느끼고 언제 신앙의 진리를 배우는가 하는 시간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중요한 길이 됩니다. 그러나 진리가 먼저 의식에 들어온다고 해서 진리가 선보다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적·생명적 질서에서는 선과 사랑이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이것이 르우벤과 시므온보다 나중에 태어난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는 표상을 통하여 드러나는 핵심입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 순서를 하나의 시간 공식으로 섞기보다, ‘외적으로 먼저 나타나는 내적으로 생명을 주는 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42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르우벤이 신앙을, 시므온이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가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서를 신앙 행위 체어리티라는 자동적인 세 단계 공식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AC.35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적인 출생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이 먼저이지만, 사랑을 의미하는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참된 신앙으로 살아 있으려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서로 경쟁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다만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신앙에 생명을 주고, 신앙의 진리는 그 사랑이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알고 바르게 행하도록 섬깁니다.

 

이제 AC.352 마지막의 중요한 주의 사항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배에서 처음 것들은 주님을 의미하고, 교회의 처음 것은 신앙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상응을 고정된 암호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장자라는 말이 나온다고 언제나 기계적으로 하나의 의미만 대입할 수 없습니다.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거룩하게 드리는 표상에서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주님을 가리킵니다. 반면 교회에서 생겨나는 처음 이라는 측면에서는 신앙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AC.338에서 가인을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신앙이라고 한 것도 이 두 번째 의미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처음 난 것이 신앙이라고 해서 신앙이 사랑보다 독립적이거나 우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그 오해가 가인의 길입니다.

 

89:26-27과 계1:5의 인용은 이 모든 처음 의 표상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주님의 인성에 관하여 그분이 모든 것의 장자이심을 말합니다. 시편은 내가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라고 하고,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분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 말씀은 각각 별도의 장자론을 전개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니라,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이 왜 궁극적으로 주님을 표상하는지를 확증합니다. 따라서 출13, 3장과 8, 89, 1장의 여러 인용은 모두 처음 것의 거룩함은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하나의 중심을 향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52는 가인과 아벨의 대조를 한층 더 깊게 합니다. 가인의 길은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을 사랑과 분리하여 그 자체로 독립시키는 길이었습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가 드리는 것은 떼의 처음 ’, 곧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에는 안에 있는 참된 사랑과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내적 인정이 들어 있습니다. 가인이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붙들었다면, 아벨의 예배는 선과 사랑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질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두 제물의 차이는 단지 체어리티가 있느냐 없느냐뿐 아니라, 영적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AC 공부와 신앙생활에도 매우 직접적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신앙과 체어리티, 퍼셉션과 거듭남의 질서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붙들 위험에 놓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알수록 자신의 선함과 지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모든 참된 사랑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된다면 그 지식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참된 지식은 인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합니다.

 

결국 AC.352의 중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 처음 것이 거룩한가?그것이 자연적인 첫째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인가?모든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시며 참된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 장자가 아닌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는가?자연적인 출생 순서보다 사랑과 신앙의 내적 질서가 더 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참으로 장자이신가?모든 사랑과 선과 거룩함의 처음과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을 드리는 장면은 결국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선의 생명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주님께 인정하는 예배를 보여 줍니다. AC.352가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도 여기에 있습니다. ‘ 안에서 발견하는 선과 사랑의 근원을 나는 누구에게 돌리고 있는가?

 

 

 

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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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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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1

아벨(Abel)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뜻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ThatAbelsignifies charity has been shown before. By charity is meant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for he who loves his neighbor as himself is also compassionate toward him in his sufferings, as toward himself.

 

해설

AC.351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지금까지 계속 아벨이라고 불러 온 체어리티가 실제로 어떤 사랑인지를 매우 따뜻하고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반복해서 설명했지만, 여기서는 그러면 체어리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자비가 무엇인지를 다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긴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신학 용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선이 나와 무관하지 않게 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체어리티를 단순히 선행이라고 번역하거나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행은 체어리티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이지만 체어리티 자체는 그보다 더 안쪽에 있습니다. 바로 앞 AC.348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가 나올 수 있으며 그러한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외적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내적 성질까지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날 때 살아 있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와 선행은 분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완전히 같은 말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선한 행위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사랑이고, 행위는 그 사랑이 자연계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AC.351은 여기에 자비(mercy)를 곧바로 연결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다른 사람의 모든 감정과 고통을 문자 그대로 똑같이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성격과 감수성은 다르며,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동일하게 체험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일이니 나와 상관없다고 외면하지 않고 그의 어려움과 선을 자신의 관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단순한 감상이나 순간적인 연민과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마음이 아픈 것은 귀한 출발일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가?를 묻게 합니다. 때로는 위로하고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자비이고,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자비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길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의 참된 선을 위한 체어리티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사랑도 아니고, 고통을 없애 주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진리는 무엇이 이웃에게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도록 하고, 체어리티는 그 선을 실제로 바라며 행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은 여기에서도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AC.348-351의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가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외적인 예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AC.350에서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51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체어리티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것을 체어리티 행위 예배라는 기계적인 단계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대조도 훨씬 실제적으로 보게 합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단지 아벨=이라는 추상적인 공식이 아닙니다. 아벨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돌아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속뜻도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소멸시키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라는 신학 용어 하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며 그의 고통 앞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교회의 생명입니다. 교리가 남고 신앙 고백이 남고 예배까지 남아 있으면서도 이웃의 고통과 선에는 무관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 가인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감정을 많이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체어리티가 없다고 할 수 없고, 눈물을 잘 흘리거나 공감을 잘 표현한다고 해서 반드시 더 깊은 체어리티 안에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AC.351의 핵심은 감정 표현의 정도가 아니라 이웃의 고통과 선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랑입니다. 조용히 필요한 일을 해 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더 큰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단호하게 돕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외적인 모습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원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350에서 떼의 처음 이 의미하는 거룩한 것도, ‘기름진 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도 오직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마음을 짜내어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물리치는 거듭남의 과정을 통하여 조금씩 이웃의 선을 자기 일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했을 때에도 나는 원래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자기에게 공로를 돌리기보다 그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신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 체어리티의 질서와도 맞습니다.

 

AC.351은 목회와 교회의 삶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실제적인 기준을 줍니다. 교회는 진리를 가르쳐야 하고 바른 교리를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람을 이웃의 고통에 더 무감각하게 만들고, 교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쉽게 멸시하게 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형편보다 자기 입장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 더 몰두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말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중요하지 않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참된 사랑은 이웃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지를 알아야 하며, 그 분별에는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체어리티를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특히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게만 적용하기 쉽습니다. 가족이나 친한 사람의 아픔에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이지만,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의 고통에는 훨씬 쉽게 무관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연적 호감과 같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뜻도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방을 하나의 영혼을 가진 이웃으로 보고 그의 참된 선을 바라는 데까지 우리를 이끕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체어리티는 자연적인 인정이나 친밀감을 넘어 영적인 사랑이 됩니다.

 

결국 AC.351아벨이라는 이름에 담긴 체어리티를 아주 실제적인 언어로 풀어 줍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감정적 연민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며, 진리의 인도를 받아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위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은 두 신학 개념을 올바르게 배열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가 마침내 다른 사람의 선과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과 삶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AC.351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내게 이웃의 고통은 여전히 남의 일인가, 아니면 그의 참된 선이 나에게도 중요해지고 있는가?입니다.

 

 

 

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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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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