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02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 - 주님의 교회는 역사적 계승에 있는가,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 있는가?

 

해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 짧은 문장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교회론적 명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틴어로는 ‘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고 하며, 3세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와 관련하여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명제는 본래 교회의 일치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강조하는 신학적 맥락에서 사용되었지만, 역사 속에서는 종종 눈에 보이는 교회 조직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배타적 주장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천주교에서 이 명제는 교회가 구원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이 교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교리적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여러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가 아닌 개신교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 다른 종교 안에서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라는 제도에 속하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천주교의 배타성을 비판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구원의 근원과 교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묻게 합니다.

 

먼저 오늘날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846항은 이 명제를 긍정적 형태로 설명하면서, 모든 구원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온다고 가르칩니다. 이어 847항은 자기 잘못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은총의 도움을 받아 양심에 따라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들도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밝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14항과 16항 역시 이러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에 필요한 교회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 교회에 들어가거나 그 안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오늘날 천주교의 입장은 모든 비가톨릭 신자를 무조건 배제하는 단순한 제도적 배타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성과 가톨릭교회의 구원적 필요성을 동시에 주장하는 구조입니다. 이 점을 정확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천주교가 실제로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만들어 놓고 비판하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천주교가 자기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구원을 궁극적으로 가톨릭교회의 구원적 질서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과, 그러한 구원이 특정한 역사적 교회의 제도적 질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요14:6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며, 행4:12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에서 ‘주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특정한 역사적 교회 제도와의 관계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보존하고 주님을 증언하며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곧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교회의 제도적 경계에 종속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참으로 주님의 교회라면,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 묶어 두기보다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치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의 숫자나 제도적 권위가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얼마나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에서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고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견해를 소개한 뒤, 그러한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주님의 자비가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주님의 자비가 모든 개인에게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느 나라와 시대에 태어날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떤 종교적 환경에서 성장할지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적 조건이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면, 주님의 사랑과 공의가 인간이 선택할 수 없었던 역사적 조건에 종속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의 본질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은 복음을 직접 접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가진 종교와 양심을 통하여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선하게 살아갈 기회를 마련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동일하게 참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하시는 섭리가 인간의 종교적 환경에 의하여 차단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보편적 구원 섭리는 HH.328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각자의 종교 안에서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선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주님의 교회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교회를 인체의 심장과 폐에, 다른 종교 안의 사람들을 여러 기관과 지체에 비유합니다. 심장과 폐가 온몸의 생명 유지에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듯, 말씀을 가진 교회도 인류 전체의 영적 생명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비유는 교회의 독점적인 구원 권한을 주장하기 어렵게 합니다. 심장과 폐는 몸 전체를 위하여 존재하지, 몸의 다른 기관들을 배제하기 위하여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가진 교회에 특별한 영적 빛을 주셨다면, 그것은 그 교회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배제하라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며 인류 전체를 섬기는 쓰임을 담당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영적 특권은 곧 영적 책임이 됩니다. 더 많은 진리를 받은 사람일수록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그 빛을 자기 우월감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1032에서도 확인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지닌 사람들과 결합하시며, 여기에는 교회 안의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포함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교리적 차이를 근거로 자기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을 부정하려는 태도 역시 경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종교적 명칭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그의 내면에 실제로 어떤 사랑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진리에 대한 이해를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그 방향을 발견하고, 진리는 선과 결합할 때 생명을 얻습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잘못 없이 더 밝은 진리를 배우지 못한 경우, 주님께서는 그가 알고 있는 진리와 선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를 이끄실 수 있습니다. 또한 HH.321–325항은 기독교 밖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사후에 주님에 관한 가르침을 받으며, 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상에서 특정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영원한 배제를 뜻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사후의 가르침이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의 방향을 무조건 뒤집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선을 향한 사랑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종교적 명칭만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르침은 결국 어느 종교를 믿든 선하게만 살면 모두 천국에 간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참된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은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체어리티 역시 단순한 친절이나 자선활동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삶의 성향이며, 실제적인 행동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말은 선과 악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종교적 소속보다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삶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 사랑의 방향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가르침을 통하여 더 밝은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지상에서 어떻게 살아도 죽은 뒤에 얼마든지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구원 섭리는 보편적이지만 인간의 자유와 삶의 책임까지 없애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차이를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양쪽 모두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있으며,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또한 신앙이 실제적인 삶과 결합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러한 구원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관련하여 이해하며, 가톨릭교회 안에 구원의 수단들이 온전히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가 인류 전체에 걸쳐 존재하며, 그 교회에 속한다는 것의 본질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천주교는 배타적이고 스베덴보리는 포용적이라는 정도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교회의 본질을 어디에 두고,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제도적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천주교가 교회의 성사적 질서와 역사적 연속성을 구원론 안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주님과 인간의 실제적인 결합을 중심으로 교회를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교회는 구원의 근원을 소유하는 기관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인간에게 전하고 그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거룩한 수단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천주교 신자가 자신은 참된 교회 안에 있으므로 영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듯이, 개신교 신자도 자신이 정통교회에 속해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므로 구원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은 참된 교리를 알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보다 주님께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는 모두 같은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자신의 종교적 지식이나 소속에 대한 확신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하지만, 자기 자신이 받은 진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밖에 있다는 이유로 그의 구원을 부정하기 전에, 먼저 자신은 교회 안에서 배운 사랑과 진리를 실제로 살아 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교회에 속한 사람의 첫 번째 책임은 다른 사람의 구원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진리를 통하여 더욱 깊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처음의 명제로 돌아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 말은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으며, 모든 구원받은 사람이 궁극적으로 주님의 영적인 공동체에 속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교회’를 특정한 역사적 제도와 동일시하고, 그 제도와의 관계를 구원의 보편적인 조건으로 삼는다면 주님의 교회가 지닌 영적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이 설정한 종교적 경계보다 크고,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하는 구원의 경로보다 깊습니다. 그렇다고 교리와 교회생활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진리를 배운 사람은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교회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인도하는 책임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권위를 갖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진리의 빛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의 사랑을 실제로 살아 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문을 자기 소유로 선언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주님을 증언하고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SL.RC.002 해설)

 

요약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에는 모든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천주교의 공식 교리가 비가톨릭 신자들의 구원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으며, 자기 잘못 없이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러한 구원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원적 질서와 연결하여 설명하며, 가톨릭교회 안에 구원의 수단들이 온전히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교회는 특정한 역사적 조직의 경계보다 넓으며,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존재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교회가 구원의 역사에서 귀중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역할을 특정한 제도의 구원적 필요성이나 독점적 지위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구원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선과 진리의 생명을 이루시고 그 사람을 당신과 결합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근원은 교회의 제도적 권위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시며, 교회의 참된 목적은 인간을 그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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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2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예수님을 영접한 날이 내 영적 생명이 시작된 날이다’ - 회심의 순간과 영적 출생, 거듭남은 언제 시작되는가?

 

해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날’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사람은 부흥회에서 복음을 듣고 눈물로 회개하며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였던 날을 기억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어느 날 말씀을 듣다가 비로소 예수님이 자신의 구주이심을 깨닫고 믿음을 고백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그날 이후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개신교인은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한 날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날, 곧 자신의 영적 생명이 시작된 날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고백에는 인간이 자연적 삶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주님을 믿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한 순간에 인간은 실제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까? 아니면 그 순간은 영적 출생 자체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긴 과정의 중요한 시작일 수 있습니까?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개혁과 거듭남의 질서를 살펴보면, 우리가 흔히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하는 회심과 영적 출생 사이에 반드시 구별해야 할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개신교의 회심 이해를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개신교 안에는 회심을 하나의 분명한 사건으로 경험하는 것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신앙교육과 점진적 변화를 통해 믿음이 자라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도 있습니다. 특히 복음주의와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교회에서는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결단을 강조하며, 그때의 경험을 구원의 중요한 증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유아세례를 시행하는 전통에서는 반드시 성인이 된 뒤 특정한 영접기도를 드려야 영적 생명이 시작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0장은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인간을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이해를 밝히시며 의지를 새롭게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 전체가 영접기도를 드린 날짜를 영적 출생의 필수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회심의 경험이 강렬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이미 완전하게 거듭났다고 가르치는 것도 정통 개신교의 일반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다만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충분히 의식되지 않은 채, 특정한 날의 영접과 결단을 자신의 영적 출생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그 결과 신앙의 중심이 지금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보다 과거에 경험한 특별한 순간에 놓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문제는 그날의 고백이 진실했는가를 의심하는 일이 아니라, 그 고백이 영적인 삶 전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거듭남을 가장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장면은 요3에 나타나는 주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입니다. 요3:3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이를 육체적 출생으로 이해하여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요3:5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설명하시며, 6절에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거듭남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에 가입하거나 특정한 신앙고백을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연적 생명만을 따라 살아가는 상태에서 벗어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아들이는 일을 뜻합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요3:8에서 바람이 임의로 불지만 사람이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영적 출생을 반드시 인간이 정확한 날짜와 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신앙이 변화된 결정적 순간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언제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르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기억하는 능력이 아니라 실제로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173-176에서 영적 출생과 자연적 출생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인간은 부모에게서 자연적 생명을 받아 태어나지만, 영적 생명은 주님에게서 새롭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적 생명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기울기 쉽지만, 영적 생명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말씀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이 단순히 종교적 지식을 새롭게 얻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사실을 배우고, 성경의 교리를 이해하며, 구원에 관한 설명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그의 의지와 사랑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 자연적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충분히 옮겨 가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NJHD.173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NJHD.174는 영적 생명의 본질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에서 찾습니다. 따라서 영적 출생은 단순히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는 지적 결단보다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하는 생명의 방향 자체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571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두 가지 상태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첫 번째는 ‘개혁’(reformation)의 상태이고, 두 번째는 ‘거듭남’(regeneration)의 상태입니다. 개혁의 상태에서는 인간의 이해가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잘못 알고 있던 것을 깨닫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곧바로 그의 모든 사랑과 의지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상태인 거듭남에서는 이해로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억지로 행하던 일을 점차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행하게 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붙들고 있던 악을 죄로 인정하여 멀리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기쁨으로 여기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인간의 내면에서 일종의 역전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앞서서 의지를 이끌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 새롭게 형성된 사랑이 이해를 이끌며, 그 사랑에 따라 진리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한 날에 진리를 처음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결심했다면, 그날은 개혁의 중요한 출발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듭남 전체가 이미 이루어진 날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개혁과 거듭남을 구별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영접기도를 한 뒤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영적 생명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적 변화의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며,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사람이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83-586에서 거듭남을 인간의 잉태와 태중의 성장, 출생과 양육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가 중요한 이유는 영적 출생을 하나의 독립된 순간만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생명도 출생 이전에 잉태와 성장의 과정을 거치며, 출생 이후에는 다시 오랜 양육과 성숙의 과정을 거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생명도 인간이 처음 진리를 받아들이고 변화되기를 원할 때부터 여러 단계에 걸쳐 형성되고 성장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회심이 강렬한 사건으로 경험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오랜 시간에 걸친 깨달음과 회개의 과정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날의 영접 경험을 무의미하다고 말해서도 안 되지만, 그 경험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영적 출생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시는 실제적인 역사이며, 그 역사에 인간이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출생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TCR.576-578에 따르면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고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없애고 일방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입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인정하며, 새로운 삶을 선택하도록 이끄십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고치려 노력해야 하지만, 그 모든 참된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영적 출생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한 순간에도 주님의 은혜가 역사할 수 있으며, 그 이후 사람이 자신의 악과 싸우고 진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도 동일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처음 믿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그 이후의 성장은 인간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식으로 둘을 나눌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인간은 그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한 번의 영접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이 스스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끊임없이 공급하시는 사랑과 진리를 인간이 받아들이면서 실제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회심의 경험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생기는 문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전에 예수님을 영접하며 뜨거운 감동을 경험했고, 그날 이후 자신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전의 이기심과 분노, 교만과 거짓이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때 그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기 쉽습니다. 하나는 과거에 영접한 경험이 분명하므로 현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적 상태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여전히 죄된 성향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과거의 회심이 거짓이었으며, 자신은 처음부터 영적 생명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두 가지 판단 모두 신중해야 합니다. 참된 회심의 경험이 있었다고 해서 모든 악한 성향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이후에 시험과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과거에 받은 모든 영적 감동이 거짓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자신의 악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악을 정당화하며 붙들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멀리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영적 생명의 성숙은 과거의 경험을 반복해서 확인하는 일보다, 현재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삶에서 드러납니다.

 

그런데 회심의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원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니며 자연스럽게 성경을 배우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영접기도의 순간이나 강렬한 회심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영적인 생명이 시작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판단할 근거가 없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회심의 날짜를 기억하는가보다 그가 주님의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가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TCR.571에서 지상에서 개혁의 첫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사후에도 거듭남의 다음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거듭남이 반드시 지상에서 어떤 특정한 날에 완성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상에서 새로운 영적 삶을 시작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에서 그 첫 상태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사후에 다음 상태로 나아갈 수 없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 출생의 정확한 날짜를 찾아내는 데 집착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님을 향하여 자신의 내면을 열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악에서 돌아서는 삶을 시작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영적 생명의 시작은 중요하지만, 그 시작을 인간의 기억 속에 남은 하나의 종교적 사건과 반드시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의 의미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1:12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나 요1:13은 이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영접은 인간이 자신의 결심만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는 행위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일이며, 그 생명에 따라 살아가도록 부름받는 일입니다. 또한 요14:23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말을 지키는 사람에게 아버지와 함께 와서 거처를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한순간 주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주님께서 자신의 내면에 거하시도록 하는 지속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 날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그날의 경험 자체가 영원한 보증서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 시작된 믿음이 지금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 회개와 거듭남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날이 내 영적 생명이 시작된 날입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날이 자신의 삶에서 주님을 향해 돌아선 결정적인 출발점이었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진리와 무관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처음으로 주님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결심했다면, 그 경험은 귀하게 보존할 만한 영적 전환점입니다. 그러나 그날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영적 출생의 필수적인 날짜로 생각하거나, 영접기도를 드린 순간에 거듭남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연적인 생명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개혁과 거듭남의 질서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함으로써 점차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갑니다. 이 모든 과정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이며,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 생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지 ‘나는 언제 예수님을 영접했는가?’가 아닙니다. ‘그날 이후 나는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있는가? 주님의 말씀이 내 이해를 밝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 의지와 선택을 새롭게 하고 있는가? 나는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회심의 순간은 영적 여정에서 소중한 시작일 수 있지만, 그 시작 자체가 여정의 완성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참된 영적 생명은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 안에서 형성되고 성장하며, 인간이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실천할 때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예수님을 영접한 날의 의미와 영적 출생, 그리고 실제적인 거듭남의 관계입니다. (PR.002 해설)

 

요약

개신교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날을 자신의 영적 생명이 시작된 날로 기억하는 데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회심의 순간은 주님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실제적인 전환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날을 영적 출생의 필수적인 날짜로 여기거나, 영접기도를 드린 순간에 거듭남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173-176에서 인간이 부모에게서 받는 자연적인 생명과 주님에게서 새롭게 받아야 하는 영적인 생명을 구별하며, 영적 생명의 본질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에서 찾습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571에서는 영적 변화의 과정을 개혁과 거듭남으로 구별합니다. 개혁은 이해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바라보는 상태이며, 거듭남은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여 사랑과 삶 자체가 변화되는 상태입니다. TCR.583-586은 이러한 과정을 잉태와 태중의 성장, 출생과 양육에 비유하여 거듭남이 하나의 순간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TCR.576-578에 따르면 거듭남은 오직 주님께서 이루시지만,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 역사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강렬한 회심의 경험이 없거나 영접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영적 생명이 없다고 판단할 수 없으며, 반대로 영접의 순간을 기억한다고 해서 거듭남이 완성되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날짜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멀리하며, 이해와 의지가 선과 진리 안에서 새롭게 결합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영접은 소중한 시작일 수 있지만, 영적 출생과 성숙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지속적인 거듭남의 역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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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1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 - 주님의 교회는 역사적 계승에 있는가,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 있는가?

 

해설

천주교는 자신을 수많은 기독교 교파 가운데 하나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교회가 역사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그 교회의 온전한 실재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일치하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교단적 자부심을 넘어서는 신학적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곧 교회는 인간들이 신앙생활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공동체이며, 사도적 계승과 성사, 교도권과 교회적 일치가 그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에게 가톨릭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느 종교단체에 가입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온전한 질서 안에 머물며, 그분께서 맡기신 구원의 수단들에 참여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참된 교회도 역사적 계승과 제도적 연속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어떤 공동체를 당신의 교회로 인정하시는 기준은 사도적 계승과 교회의 외적 일치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에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특정 교단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인정하는 문제를 넘어, 교회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8항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유일한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온전히 존속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표현은 ‘존속한다’(subsistit in)라는 말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역사적이고 지속적인 실재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 말이 가톨릭교회 밖에는 아무런 진리나 은총도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도 성화와 진리의 요소들이 존재하며, 세례받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도 실제적이지만 불완전한 친교가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836–848항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으며, 자기 잘못 없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주교회만이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의 실제 주장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온전한 신앙과 성사, 교회적 질서가 가톨릭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온전한 교회’의 기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마16:18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도적 직무와 그 후계자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해석에서 베드로는 신앙, 특히 주님을 신적 존재로 인정하는 진리를 표상합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AE, 1759) AE.206과 ‘계시록 풀이’(Apocalypse Revealed, AR, 1766) AR.768에서 그는 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와 반석의 의미를 인간 개인에게 독립적으로 주어진 영적 지배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의 진리와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권능에 연결합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교회의 기초는 베드로라는 한 인간의 지위 자체가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주님에 관한 진리에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실을 근거로 주님의 교회 전체에 대한 영적 권위가 특정한 인간 직위에 독점적으로 계승된다고 보는 해석과는 구별됩니다. 교회를 세우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328에서 주님의 교회를 훨씬 넓은 시야로 설명합니다. 그는 주님의 자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며, 말씀을 직접 접하거나 주님의 이름을 알지 못한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HH.328에서는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각자의 종교 안에서 신적인 것, 곧 신성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며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 똑같이 참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에 특별한 영적 역할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그러한 교회를 인체의 심장과 폐에,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인체의 여러 기관과 지체에 비유합니다. 심장과 폐가 온몸의 생명 유지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하듯, 말씀을 가진 교회도 인류 전체의 영적 생명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비유 때문에 어느 한 기관도 몸 전체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심장이 중요하다고 해서 손과 발이 몸 밖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폐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해서 다른 모든 기관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이 설정한 종교적 경계보다 크며, 그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교회 이해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241–248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에 의하여 성립하며, 말씀에서 비롯된 교리가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 인간 안에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의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는 인간에게 무엇이 선하고 진리인지를 가르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확한 교리를 알고 있더라도 그것이 이해 속의 지식으로만 머물고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 교회의 참된 생명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사랑에 관한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악을 행한다면, 그의 이해에는 사랑에 관한 지식이 있을지라도 의지에는 아직 그 사랑이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교리적 이해에 일정한 부족함이 있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역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은 외적 교리 체계와 제도적 연속성 자체에 있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결합하여 살아 있는 생명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적 계승과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을 보존하시고, 신앙의 가르침을 다음 세대로 전하며, 예배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는 말씀을 필사하고 보존한 사람들, 신앙을 가르친 사람들, 이웃을 섬기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본 사람들의 수많은 헌신이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실제적인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공동체적인 예배와 교육과 봉사를 위하여 일정한 질서와 직무를 갖추는 것은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외적인 질서를 교회의 영적 생명 자체와 동일시할 때 발생합니다. 교회의 제도는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돕는 수단이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사제와 주교와 교황이든, 목사와 장로와 교회의 지도자이든, 그들의 직무는 사람들을 자기 권위에 종속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외적인 계승이 아무리 분명하더라도 그 안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사라진다면 계승된 것은 교회의 형식일 뿐, 그 생명이 온전히 보존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외적인 모습이 보잘것없더라도 주님의 진리와 사랑이 살아 있다면 그곳에 참된 교회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가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가 자신이 사도적 계승을 보존한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영적인 우월감의 근거로 삼을 수 있듯이, 개신교 신자도 자신이 성경 중심의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영적인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 진리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변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프로프리움’(proprium)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인 자기 사랑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은 어느 공동체가 더 우월한지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교회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깨닫고, 자신이 그 생명 안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인간에게 종교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인도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천주교의 주장에는 인정해야 할 진리와 다시 검토해야 할 부분이 함께 존재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과 예배와 신앙 공동체를 보존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은 귀중한 진리입니다. 또한 교회에 질서와 직무가 필요하며, 신앙의 가르침이 세대를 넘어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계승과 제도적 일치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전히 존재하는 장소를 결정한다는 주장은, 스베덴보리의 영적 교회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교회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마음과 삶 안에서 실제로 결합하는 곳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특정 교회가 참된 교리를 많이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실제로 참된 신앙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특정 교회의 제도적 경계 밖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람에게 주님의 교회에 속한 영적 생명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거룩한 수단이지만,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독점하는 소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15:5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말씀하시면서 당신 안에 거하는 사람이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가지의 생명은 어느 가지가 먼저 생겼는지, 어느 가지가 더 높은 위치에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모든 가지가 동일한 포도나무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또한 요13:35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알아보게 하는 표지가 그들 사이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준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주님의 진리를 보존하고 가르쳐야 하지만, 그 진리는 결국 사랑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교회는 역사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역사 안에서 주님을 증언해야 하며, 질서를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질서를 통하여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느 교회가 자신을 참된 교회라고 선언하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어느 곳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 생명이 사람들의 사랑과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것은 인간이 자랑하는 역사적 이름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이루어 가시는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SL.RC.001 해설)

 

요약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에는 교회가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낸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께 속하며,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과 예배와 교회 질서를 보존하도록 섭리하신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온전한 실재를 사도적 계승과 교황과의 일치라는 특정한 역사적·제도적 구조 안에 독점적으로 위치시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가진 교회의 특별한 영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교회의 역사와 제도를 존중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외적인 질서를 참된 교회의 영적 본질과 동일시하거나 그 본질을 특정한 제도의 독점적 소유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여져 사랑과 신앙의 생명으로 결합하는 곳에 존재합니다. 결국 교회의 참됨은 역사적 계승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에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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