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4.심화

 

3. (flight)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막13:18)에 나오는 (flight)을 기독교, 개신교에서는 휴거라 하여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13:18의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라는 구절은 많은 개신교 전통에서 ‘휴거’나 어떤 물리적 종말 사건과 연결되어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복음서의 종말 담화를 기본적으로 ‘세계의 물리적 종말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종말과 새 교회의 시작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flight’, 곧 ‘도피’ 또는 ‘피함’도 어떤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는 사건이 아니라 ‘영적으로 타락한 교회 상태로부터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벗어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flight’라는 표현부터 보겠습니다. 문자 그대로는 ‘도망’이나 ‘도피’를 의미합니다. 복음서 문맥에서도 예수님은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 같은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문자 그대로 어떤 지리적 이동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도망’은 ‘악과 거짓이 지배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진리를 보존하려는 영적 행동’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가 타락하고 진리가 왜곡될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타락한 상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내적으로 그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겨울’이라는 표현을 보면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계절’이 영적 상태를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은 사랑이 시작되는 상태, ‘여름’은 사랑이 충만한 상태, ‘가을’은 신앙이 성숙한 상태를 의미하고, ‘겨울’은 ‘사랑이 식고 신앙이 거의 남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겨울에 도망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매우 깊은 뜻을 갖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완전히 식어 버린 상태에서 진리를 지키려 하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종말을 항상 같은 패턴으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이 점점 약해지고, 결국에는 교리나 형식만 남게 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겨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진리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능력이 매우 약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겨울에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설명됩니다. 즉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진리를 붙잡으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복음서의 종말 담화를 ‘개인의 거듭남과 교회의 역사 두 가지 차원에서 동시에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로 보면, 이것은 교회가 타락할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타락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거듭남으로 보면, 이것은 사람이 영적으로 시험과 혼란 속에 있을 때, ‘거짓과 악에서 물러나 진리를 지키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구절이 ‘휴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는 신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 세상을 떠난다는 식의 해석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종말과 심판이 ‘주로 영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그의 저서 ‘Last Judgment’에서는 최후의 심판이 이미 영계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가 지상 교회에 점차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막13:18의 말씀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설명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도피’는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영적으로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식어 버린 교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진리를 붙잡고, 타락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영적 권면입니다. 이것은 미래의 한순간에 일어나는 극적인 사건을 예언하기보다, 교회와 인간의 영적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원리를 말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 구절을 단순한 종말 공포나 특별한 사건으로 보기보다, ‘지금 자신의 신앙 상태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강조하신 것은 언제 어디로 들려 올라갈 것인가가 아니라, 사랑이 식어 가는 시대 속에서도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AC.34, 심화 4, ‘마7:21-22’

AC.34.심화 4. ‘마7:21-22’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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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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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2) 말인데요, 이런 사람들, 곧 염소로 분류되는 사람들임에도 어떻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실제로 오늘날도 보면, 많은 이단, 사이비 현장에서도 그런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는 합니다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마7:22의 말씀, 곧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는 사람들이 결국 주님에게서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듣는 장면은 많은 신앙인들에게 당혹스러운 부분입니다. 특히 실제로도 종교 현장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영계 이해를 가지고 보면 이 문제는 비교적 분명한 구조로 설명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하는 외적 행위나 능력이 반드시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주님이 보시는 것은 외적 능력이나 기적이 아니라 ‘사람 안의 사랑’, 곧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언을 하거나 기적 같은 일을 행했다 하더라도, 만약 그의 중심 사랑이 자기 영광이나 권력이나 이익이라면 그 사람의 내적 상태는 여전히 주님과 멀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계의 영향(influx)이라는 개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영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에게는 항상 어떤 영들이 함께 있으며, 선한 영도 있고 악한 영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특정한 능력이나 현상을 보일 때, 그것이 반드시 그 사람 자신의 거룩함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영계의 다른 존재들이 그 사람을 통해 작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서도 이런 일이 이미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이나 복음서에는 귀신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말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귀신들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귀신들이 주님을 사랑하거나 주님께 순종하는 존재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진리를 알고 말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말하거나 어떤 능력을 나타내는 것과, 실제로 그 진리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주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히 발음되는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품과 권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실제로 주님의 성품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로 말한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영적 현상이나 강한 감정적 경험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우를 ‘외적 종교 활동이 내적 사랑과 분리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현대 종교 현장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도 이 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한 기대나 두려움,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 있을 때 심리적, 정서적 현상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영계의 영향이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반드시 천국에서 오는 영향이라는 보장은 없다고 말합니다. 영계에는 선한 영들뿐 아니라 다양한 상태의 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초자연적’이라고 해서 곧 ‘신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강조하신 기준은 능력이나 기적이 아니라 ‘삶의 열매’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열매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사람의 삶 속에 나타나는 사랑과 선’입니다. 즉 그 사람이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며 정직하게 살고 있는가,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진짜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같은 원리를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는 기적이나 특별한 현상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신앙의 중심이 되면 사람은 쉽게 ‘외적 능력에 매료되어 내적 삶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부러 기적을 신앙의 중심으로 두지 않으셨고, 오히려 사랑과 삶을 강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주님과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진짜 기준은 그 사람이 어떤 능력을 보였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랑으로 살고 있는가’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외적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은 우리에게 ‘능력보다 사랑을 보라’는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결국 AC.34에서 이 구절이 인용되는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생명과 지성의 빛이 ‘사랑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신앙 활동이나 능력은 참된 생명이 아니라 외적 현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차이를 말씀하시기 위해 ‘많은 권능을 행했다’는 사람들에게도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AC.34, 심화 3, ‘일’(f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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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심화 1,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

AC.34.심화 1.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 위 AC.34 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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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

 

 AC.34 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말인데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어떤 묘사가 좀 가능할까요? 저렇게만 말하면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해서요...

 

AC.34에서 스베덴보리가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이것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언어가 영적 상태를 충분히 담아내기 어려운 한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도 다른 저작들, 특히 ‘천국과 지옥’이나 ‘천적 사랑과 지혜’ 같은 곳에서 그 상태를 여러 방식으로 묘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조각들을 모아 보면 어느 정도의 윤곽은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 상태의 핵심은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사는 보통의 상태에서는 마음이 자주 둘로 나뉩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을 하기 싫을 때가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따라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해와 의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그 상태에서는 이런 분열이 거의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곧 진리이고, 진리를 아는 것이 곧 기쁨이 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의지 사이에 갈등이 거의 없고, 사람 안에 매우 깊은 평안이 생깁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지성의 빛이 매우 투명하고 즉각적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이해하려면 보통 여러 단계의 사고가 필요합니다. 책을 읽고, 비교하고, 추론하고, 다시 생각하고... 이런 과정을 거쳐야 조금씩 이해가 깊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적 상태에 가까운 사람이나 천적 천사들의 경우에는 진리가 이런 식으로 분석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한 번에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합니다. 마치 햇빛이 비치면 사물이 한순간에 환히 보이는 것처럼, 진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지성의 빛(light of intelligence)이라고 부릅니다.

 

이 상태의 또 다른 특징은 ‘기쁨이 매우 깊고 평화로운 성격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기쁨은 종종 긴장이나 흥분과 함께 옵니다. 성공했을 때의 기쁨이나 경쟁에서 이겼을 때의 기쁨은 순간적으로 강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적 상태의 기쁨은 그런 종류가 아니라 ‘조용하고 깊은 기쁨’입니다. 마치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평안과 같은 느낌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국의 기쁨’이라고 부르며, 그 기쁨은 ‘사랑을 행하는 것 자체에서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면 이런 모습에 가깝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이웃을 돕고 싶어 하고, 실제로 그것을 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도움을 주고 나서 느끼는 따뜻한 만족감이 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누가 보지 않아도 기쁘고, 보상이 없어도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삶이 바로 이런 경험이 훨씬 더 깊고 지속적인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거기서는 사랑이 삶의 중심이기 때문에, 서로 돕고 기쁘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 자체가 행복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모든 것이 질서 속에 있다는 느낌’입니다. 인간이 불안하거나 혼란스러울 때는 세상이 무질서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랑과 진리가 조화를 이루는 상태에서는 세상이 매우 질서 있게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천사들이 모든 것을 ‘주님의 질서 속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깊은 안정감을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마치 복잡한 음악이 완벽한 화음을 이루며 흐르는 것을 들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AC.34에서 말하는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는 여러 요소가 결합된 상태입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진리가 자연스럽게 이해되며, 생각과 의지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그 결과 깊은 평안과 기쁨이 계속 흐르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말한 이유는 이런 경험이 단순한 감정이나 생각의 조합이 아니라 ‘사람 전체가 다른 질서 속에 들어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풍경을 사진으로 볼 때와 실제로 그곳에 서서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사진으로는 윤곽만 알 수 있지만, 실제로 그곳에 가면 공기의 느낌, 빛의 색, 소리와 냄새까지 함께 경험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그 상태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지금 언어로 그 윤곽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 경험은 훨씬 더 풍부하고 깊다는 뜻에서 그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AC.34, 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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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 없는 신앙은 빛이 아니다 : 생명을 가르는 광명체의 본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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