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9.심화

 

3. 리메인스 설명 중 왜곡되거나 오염된다 부분

 

AC.19 해설에 사람의 겉 사람이 활발하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오면 즉시 왜곡되거나 오염되기 때문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제 경우를 보더라도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오랜 세월, 교만, 곧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 먼 길을 돌아와야 했거든요... 저 표현 중 특히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고 싶습니다.

 

윗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remains) 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서면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말은 단순한 도덕적 경고가 아니라, 인간 마음의 구조와 영적 작용 방식에 관한 설명입니다. 이 점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리메인스’가 무엇인지 다시 짚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리메인스는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이 그의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시는 ‘선과 진리의 씨앗들’, 다시 말해 어린 시절의 순진함, 선한 감정, 진리를 향한 기쁨,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존해 두신 것이며,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주님이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하시는 영적 자산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리메인스를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의 씨앗’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의 ‘겉 사람’, 곧 외적 마음입니다. 사람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외적 마음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의해 움직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판단 기준이 대부분 ‘나에게 유익한가’, ‘내 체면과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속 사람 안에 있는 순수한 선과 진리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왜곡’이라는 표현이 이해됩니다. 순수한 진리가 자기 사랑 속으로 들어오면, 사람은 그 진리를 ‘자기 목적을 위해 해석하고 이용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겸손’이라는 진리를 알게 되었는데, 그 진리를 진심으로 살기 위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용한다면, 그 진리는 이미 본래의 의미가 변형된 것입니다. 진리가 여전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중심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에 진리가 ‘자기 확증의 도구’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왜곡’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오염’이라는 표현은 또 다른 차원을 설명합니다. 어떤 선한 감정이나 진리가 자기 사랑과 결합되면, 그 안에 ‘이기적 동기’가 섞이게 됩니다. 겉으로는 선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서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우월해지고 싶은 마음, 남보다 의롭다고 느끼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작동합니다. 그러면 그 선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혼합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오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리메인스를 매우 조심스럽게 보호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 속에 깊이 있을 때는, 그 리메인스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도록 ‘속 사람 깊은 곳에 보존해 두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씨앗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토양에 드러나면 밟히거나 썩어 버리기 쉬운 것처럼, 사람의 외적 삶이 어느 정도 정리되기 전에는 그 씨앗이 보호되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황폐(vastation)라는 과정을 자주 말합니다. 앞서 다룬 바로 그 개념인데, 이것은 사람의 자기 확신과 거짓된 확신이 약화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삶 속에서 여러 경험과 시련을 겪으면서 자기중심적 확신이 조금씩 무너질 때, 비로소 속에 있던 리메인스가 안전하게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의 생각과 사랑을 새롭게 정리하십니다.

 

말씀하신 개인 경험도 사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겪는 과정입니다. 오랜 시간 자기 확신 속에서 신앙을 이해하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무너지고, 더 깊은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으로 보면, 그때 속 사람 안에 오래 보존되어 있던 리메인스가 비로소 ‘겉 사람의 삶 속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말은 단순히 인간이 나쁘기 때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순수한 영적인 것들이 드러나면 그것들이 ‘자기 사랑의 틀 속에서 해석되고 사용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그 위험을 아시기 때문에 리메인스를 깊이 보호하시고, 사람이 조금씩 준비될 때마다 그것을 꺼내어 거듭남의 과정에 사용하신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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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와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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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ove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 brood가 나란히 나와요. 이게 좀 어색한데요, 이 둘이 어째서 나란히 나오는 건가요?

 

영어 문장만 보면 ‘move’와 ‘brood’가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단어인데, 나란히 붙어 있으니 왜 이렇게 설명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단순한 영어 문장 문제가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 성경 번역 전통,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이 함께 얽혀 있는 부분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왜 두 단어가 함께 나오는지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먼저 성경 원문을 보면 창1:2의 히브리어 표현은 ‘merachefet(מְרַחֶפֶת)입니다. 이 동사는 기본적으로 ‘떠 있다’, ‘흔들리다’, ‘진동하다’, ‘맴돌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 번역에서는 ‘the Spirit of God was moving over the waters’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의 move는 단순한 이동이라기보다 ‘부드럽게 움직이며 감싸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물 위를 스치듯이 감싸며 움직이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보면 이 동사가 한 번 더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신32: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보호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바로 같은 동사입니다. 그 장면은 단순히 ‘움직인다’는 뜻이라기보다 ‘새가 알이나 새끼 위를 덮어 보호하며 따뜻하게 품는 모습’입니다.

 

바로 여기서 ‘brood’라는 번역이 나옵니다. 영어 ‘brood’는 ‘암탉이 알 위에 앉아 품어 생명이 자라도록 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래서 일부 성경 해석 전통에서는 창1:2의 장면을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생명을 준비시키는 보호와 따뜻한 덮음’으로 이해했습니다. 마치 암탉이 알을 품듯이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임해 생명의 탄생을 준비한다는 이미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가지 뉘앙스를 ‘함께 살리기 위해 move brood를 나란히 사용한 것’입니다. 즉, 히브리어 단어 하나 안에 두 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움직이며 감싸는 이미지(move)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품어 키우는 이미지(broo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의미를 모두 의식하고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신학과도 잘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the spirit of God을 주님의 자비’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자비가 인간에게 작용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봅니다. 주님의 자비는 단순히 멀리서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는 ‘move’라는 말만 쓰지 않고,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라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 이미지는 창세기 전체의 영적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우주의 창조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거듭남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장면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아직 혼돈 상태에 있는 인간의 마음 위에 주님의 자비가 임하는 장면’입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준비하는 사랑’으로 작용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brood’라는 이미지가 매우 적절해집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번역할 때 한국어로는 보통 이렇게 풀어 설명하면 자연스럽습니다. ‘운행하다’는 단순히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알을 품는 새처럼 생명이 태어나도록 따뜻하게 감싸며 움직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혼돈 상태 위에서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준비하는 사랑으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move brood가 함께 나오는 이유는 영어 표현의 중복 때문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의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는 ‘움직이며 감싸는 작용’, 다른 하나는 ‘생명을 품어 자라게 하는 보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이미지를 함께 사용하여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거듭남을 준비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19, 심화 1, ‘자비’(mercy)

AC.19.심화 1. ‘자비’(mercy) AC.19에도 ‘주님의 자비(mercy)’라는 표현이 나오네요.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을 포함, 보통 ‘자비’보다 ‘은혜’에 익숙합니다. 심지어 ‘자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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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비(mercy)

 

AC.19에도 주님의 자비(mercy)라는 표현이 나오네요.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을 포함, 보통 자비보다 은혜에 익숙합니다. 심지어 자비하면 불교를 떠올리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거의 대부분 자비를 말하네요.  자비 은혜’, 둘 사이 무슨 차이가 있어 그런 건가요?

 

실제로 스베덴보리 저작을 읽는 한국 독자들이 가장 자주 느끼는 낯섦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mercy’를 거의 항상 ‘자비’로 말한다는 점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은혜’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익숙하기 때문에, ‘자비’라는 말을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불교적 어감이 먼저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mercy’를 사용하는 데에는 분명한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언어적 배경부터 보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원문은 라틴어인데, 그가 사용하는 단어는 대부분 ‘misericordia’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연민’, ‘긍휼’을 뜻합니다. 영어 번역에서는 이것을 거의 항상 ‘mercy’로 옮겼습니다. 성경에서도 같은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어 시편이나 복음서에서 ‘주의 긍휼’, ‘주의 자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mercy는 사실 전통적인 성경 언어에 매우 가까운 표현입니다.

 

반면, 한국 교회에서 익숙한 ‘은혜’는 영어로 보통 ‘grace’에 해당합니다. 이 단어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에서 중심 개념이 되었습니다. ‘은혜’는 주로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어떤 공로도 없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용서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두 단어의 뉘앙스 차이가 나타납니다. ‘은혜(grace)는 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을 주신다’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반면 ‘자비(mercy)는 ‘하나님이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쉽게 말하면, 은혜는 ‘주시는 사랑’, 자비는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지만, 강조점이 약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mercy’를 그렇게 자주 사용하는지를 이해하려면, 그의 인간관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매우 엄정하게 봅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거듭날 수 없으며, 끊임없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기울어지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이 구원과 거듭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결국 ‘주님의 끊임없는 긍휼과 자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설명을 할 때마다 ‘주님의 자비로(in the Lord’s Divine mercy)라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이 표현에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조차 자기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진리를 깨닫고, 어떤 선을 행하고, 거듭남의 길을 걷게 되는 것 자체가 ‘주님의 자비로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글에서도 ‘주님의 자비로 이것을 설명할 것이다’, ‘주님의 자비로 이것이 더 분명해질 것이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겸손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신학적 확신을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할 때, ‘사랑(love)이라는 말을 가장 중심에 둡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타락한 인간에게 작용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자비(mercy)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체는 사랑이지만, 그 사랑이 연약하고 비참한 인간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을 ‘자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사랑과 자비가 거의 함께 등장합니다.

 

한국 교회 현실을 생각하면 문화적 차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자비’라는 말이 불교적 자비와 연결되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서도 ‘긍휼’, ‘자비’, ‘인애’ 같은 표현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mercy’는 불교적 의미라기보다 ‘성경의 긍휼 전통에 더 가까운’ 표현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사랑을 강조하는 말이고, ‘자비’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오래 참고 인도하시는지를 강조하기 때문에 ‘자비’라는 표현을 특히 자주 사용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자비’와 ‘은혜’는 서로 경쟁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실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가운데서 특히 인간을 향해 내려오는 ‘긍휼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mercy’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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