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02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 - 주님의 교회는 역사적 계승에 있는가,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 있는가?

 

해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 짧은 문장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교회론적 명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틴어로는 ‘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고 하며, 3세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와 관련하여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명제는 본래 교회의 일치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강조하는 신학적 맥락에서 사용되었지만, 역사 속에서는 종종 눈에 보이는 교회 조직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배타적 주장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천주교에서 이 명제는 교회가 구원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이 교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교리적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여러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가 아닌 개신교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 다른 종교 안에서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라는 제도에 속하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천주교의 배타성을 비판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구원의 근원과 교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묻게 합니다.

 

먼저 오늘날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846항은 이 명제를 긍정적 형태로 설명하면서, 모든 구원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온다고 가르칩니다. 이어 847항은 자기 잘못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은총의 도움을 받아 양심에 따라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들도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밝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14항과 16항 역시 이러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에 필요한 교회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 교회에 들어가거나 그 안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오늘날 천주교의 입장은 모든 비가톨릭 신자를 무조건 배제하는 단순한 제도적 배타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성과 가톨릭교회의 구원적 필요성을 동시에 주장하는 구조입니다. 이 점을 정확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천주교가 실제로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만들어 놓고 비판하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천주교가 자기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구원을 궁극적으로 가톨릭교회의 구원적 질서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과, 그러한 구원이 특정한 역사적 교회의 제도적 질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요14:6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며, 행4:12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에서 ‘주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특정한 역사적 교회 제도와의 관계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보존하고 주님을 증언하며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곧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교회의 제도적 경계에 종속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참으로 주님의 교회라면,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 묶어 두기보다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치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의 숫자나 제도적 권위가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얼마나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에서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고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견해를 소개한 뒤, 그러한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주님의 자비가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주님의 자비가 모든 개인에게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느 나라와 시대에 태어날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떤 종교적 환경에서 성장할지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적 조건이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면, 주님의 사랑과 공의가 인간이 선택할 수 없었던 역사적 조건에 종속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의 본질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은 복음을 직접 접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가진 종교와 양심을 통하여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선하게 살아갈 기회를 마련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동일하게 참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하시는 섭리가 인간의 종교적 환경에 의하여 차단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보편적 구원 섭리는 HH.328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각자의 종교 안에서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선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주님의 교회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교회를 인체의 심장과 폐에, 다른 종교 안의 사람들을 여러 기관과 지체에 비유합니다. 심장과 폐가 온몸의 생명 유지에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듯, 말씀을 가진 교회도 인류 전체의 영적 생명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비유는 교회의 독점적인 구원 권한을 주장하기 어렵게 합니다. 심장과 폐는 몸 전체를 위하여 존재하지, 몸의 다른 기관들을 배제하기 위하여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가진 교회에 특별한 영적 빛을 주셨다면, 그것은 그 교회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배제하라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며 인류 전체를 섬기는 쓰임을 담당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영적 특권은 곧 영적 책임이 됩니다. 더 많은 진리를 받은 사람일수록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그 빛을 자기 우월감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1032에서도 확인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지닌 사람들과 결합하시며, 여기에는 교회 안의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포함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교리적 차이를 근거로 자기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을 부정하려는 태도 역시 경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종교적 명칭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그의 내면에 실제로 어떤 사랑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진리에 대한 이해를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그 방향을 발견하고, 진리는 선과 결합할 때 생명을 얻습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잘못 없이 더 밝은 진리를 배우지 못한 경우, 주님께서는 그가 알고 있는 진리와 선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를 이끄실 수 있습니다. 또한 HH.321–325항은 기독교 밖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사후에 주님에 관한 가르침을 받으며, 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상에서 특정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영원한 배제를 뜻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사후의 가르침이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의 방향을 무조건 뒤집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선을 향한 사랑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종교적 명칭만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르침은 결국 어느 종교를 믿든 선하게만 살면 모두 천국에 간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참된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은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체어리티 역시 단순한 친절이나 자선활동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삶의 성향이며, 실제적인 행동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말은 선과 악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종교적 소속보다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삶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 사랑의 방향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가르침을 통하여 더 밝은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지상에서 어떻게 살아도 죽은 뒤에 얼마든지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구원 섭리는 보편적이지만 인간의 자유와 삶의 책임까지 없애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차이를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양쪽 모두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있으며,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또한 신앙이 실제적인 삶과 결합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러한 구원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관련하여 이해하며, 가톨릭교회 안에 구원의 수단들이 온전히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가 인류 전체에 걸쳐 존재하며, 그 교회에 속한다는 것의 본질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천주교는 배타적이고 스베덴보리는 포용적이라는 정도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교회의 본질을 어디에 두고,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제도적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천주교가 교회의 성사적 질서와 역사적 연속성을 구원론 안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주님과 인간의 실제적인 결합을 중심으로 교회를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교회는 구원의 근원을 소유하는 기관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인간에게 전하고 그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거룩한 수단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천주교 신자가 자신은 참된 교회 안에 있으므로 영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듯이, 개신교 신자도 자신이 정통교회에 속해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므로 구원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은 참된 교리를 알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보다 주님께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는 모두 같은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자신의 종교적 지식이나 소속에 대한 확신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하지만, 자기 자신이 받은 진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밖에 있다는 이유로 그의 구원을 부정하기 전에, 먼저 자신은 교회 안에서 배운 사랑과 진리를 실제로 살아 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교회에 속한 사람의 첫 번째 책임은 다른 사람의 구원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진리를 통하여 더욱 깊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처음의 명제로 돌아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 말은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으며, 모든 구원받은 사람이 궁극적으로 주님의 영적인 공동체에 속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교회’를 특정한 역사적 제도와 동일시하고, 그 제도와의 관계를 구원의 보편적인 조건으로 삼는다면 주님의 교회가 지닌 영적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이 설정한 종교적 경계보다 크고,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하는 구원의 경로보다 깊습니다. 그렇다고 교리와 교회생활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진리를 배운 사람은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교회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인도하는 책임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권위를 갖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진리의 빛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의 사랑을 실제로 살아 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문을 자기 소유로 선언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주님을 증언하고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SL.RC.002 해설)

 

요약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에는 모든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천주교의 공식 교리가 비가톨릭 신자들의 구원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으며, 자기 잘못 없이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러한 구원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원적 질서와 연결하여 설명하며, 가톨릭교회 안에 구원의 수단들이 온전히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교회는 특정한 역사적 조직의 경계보다 넓으며,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존재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교회가 구원의 역사에서 귀중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역할을 특정한 제도의 구원적 필요성이나 독점적 지위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구원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선과 진리의 생명을 이루시고 그 사람을 당신과 결합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근원은 교회의 제도적 권위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시며, 교회의 참된 목적은 인간을 그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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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2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부와 성자는 서로 구별되는 두 신적 인격이시지만 본질에서는 하나이시다’ - 두 신적 인격의 본질적 일치인가, 한 분 주님 안의 신성과 신적 인성의 하나 됨인가

 

해설

개신교의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에서 성부와 성자는 같은 분이 아닙니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도 성부가 아니며, 두 분은 서로를 향하여 말씀하시고 사랑하시며 성자는 성부께 기도하고 성부에게서 보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부와 성자는 두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신적 본질을 온전히 가지시는 한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는 서로 구별되는 두 신적 인격이지만 본질에서는 하나’라는 명제는 전통적 개신교의 하나님 이해를 비교적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고(요17:1), ‘아버지께서 나보다 크심이라’고 말씀하시며(요14:28),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를 말씀하시는 구절들을 생각하면 이러한 구별에는 분명한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구별 자체를 오류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성경에는 그 구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강력한 하나 됨의 말씀들도 있습니다. 주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시고(요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하시며(요14:9),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요14:10). 또 바울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합니다(골2:9). 전통적 삼위일체 신학은 이러한 말씀들을 성부와 성자가 ‘인격에서는 구별되지만 본질에서는 하나’라는 방식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보존하면서도 복음서에 나타나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시도이며, 그 안에는 반드시 보존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에게 핵심 질문은 ‘성부와 성자가 구별되는가?’가 아니라 ‘그 구별은 무엇과 무엇 사이의 구별인가?’입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92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인성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아들’은 영원 전부터 성부 곁에 존재하던 또 하나의 신적 인격이 인간의 몸을 입은 것이라기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위해 취하신 인성을 가리킵니다. 눅1:35에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아들의 기원을 ‘영원 전의 두 번째 신적 인격’에서 찾기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인성을 취하신 성육신 사건에서 찾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아버지’는 주님 밖에 계시는 또 한 분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신성 자체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그 신성이 세상에서 취하신 인성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98에서 성부와 성자의 결합을 인간의 영혼과 몸의 결합에 비유합니다. 사람의 영혼과 몸은 구별됩니다. 영혼을 몸이라고 할 수도 없고 몸을 영혼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혼과 몸이 서로 마주 보는 두 사람은 아닙니다. 한 사람의 내적인 생명이 영혼이고 그것이 세상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형체가 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서 ‘아버지’라고 불리는 신성과 ‘아들’이라고 불리는 인성은 구별되지만 두 신적 인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요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두 인격이 동일한 신적 본질을 공유한다는 의미보다 훨씬 직접적입니다. 성부와 성자가 한 분 주님 안에서 영혼과 몸처럼 하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성육신과 영화(glorification)가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유한한 인간적인 것을 그대로 영원히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시험을 이기시고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는 과정을 통하여 그것을 점차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오는 신적 인성을 입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영화라고 부릅니다. TCR.97–98에서 그는 성부와 성자가 구속의 행위들을 통하여 결합하였고 마침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복음서에서 주님이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시는 장면들은 거짓된 연극도 아니고 단순한 표현상의 편의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성육신하신 주님이 아직 영화의 과정을 거치시는 동안, 마리아에게서 취한 인간적인 상태에서 자기 안의 신성을 향하시는 실제적인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점은 요14:28의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와 요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를 함께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전자만 보면 성부와 성자는 서로 다른 두 존재이며 성부가 성자보다 높은 것처럼 보입니다. 후자만 보면 아무런 구별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두 말씀을 함께 붙들 수 있습니다. 아직 영화되지 않은 인간적인 상태에서 주님은 자신 안의 신성을 향하여 기도하시고 자신을 낮추실 수 있었지만, 영화가 완성됨에 따라 신성과 인성은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며(요20:28), 주님은 그 고백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지나 또 다른 신적 인격에게 올라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아타나시우스 신조 전체를 단순히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신조 안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장이 있다고 봅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 한 그리스도’이며, ‘영혼과 몸이 한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도 한 그리스도’라는 고백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원리를 끝까지 밀고 갑니다. 영혼과 몸이 한 사람이라면 성부와 성자 역시 궁극적으로 두 신적 인격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관한 글에서 성부와 성자가 ‘주님 한 분’이라고 말하며, 삼위가 한 인격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삼위 안의 하나와 하나 안의 삼위’가 실제적인 하나님의 관념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반대편 오류를 피해야 합니다. ‘성부는 신성이고 성자는 신적 인성이다’라는 설명을 단순히 ‘성부와 성자는 사실 같은 이름이므로 아무 차이도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아버지께 드린 기도와 순종과 시험은 실제적이었습니다. 성육신과 영화 역시 실제적인 신적 과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의 구별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적인 구별입니다. 다만 그것이 두 신적 자아, 두 신적 중심, 두 영원한 신적 인격의 구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주님 안의 ‘신성 자체’와 ‘신적 인성’의 구별이며, 영화 이후에는 영혼과 몸이 한 사람을 이루듯 완전히 하나를 이룹니다.

 

이 차이는 기도와 예배에서도 매우 실제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성부와 성자를 영원히 서로 구별되는 두 신적 인격으로 생각하면, 신앙인의 내적 상상에서는 예수께 기도한 뒤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아버지께 전달하시거나, 성자가 성부를 설득하여 우리를 받아 주시게 하는 구조가 형성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를 만납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버리고 예수만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곧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도 이것은 중요합니다.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려면 하나님이 단순한 추상적 절대자나 접근할 수 없는 신적 본질로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신적 인성을 취하신 것은 인간에게 자신을 보이고 말씀하시며 사랑하시고 마침내 인간과 결합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TCR.98에서 성부와 성자의 결합을 인간과 하나님의 결합, 곧 구원과 직접 연결합니다. 보이지 않는 신성 자체가 신적 인성 안에서 인간에게 접근 가능하게 되었고, 인간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신의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거듭나게 됩니다. 성육신은 단지 하나님에 관한 교리적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실제적인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구원의 중심 사건인 것입니다.

 

따라서 PR.002의 명제에도 진리와 오류가 정교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분명히 구별되며, 그 구별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점은 진리입니다. 성자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히 있으며 성부와 성자가 하나라는 고백 역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구별을 ‘영원히 서로 마주하는 두 신적 인격’으로 규정하고, 그 두 인격이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라고 설명하는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갈라집니다. 그의 렌즈에서 성부와 성자는 ‘본질에서는 하나인 두 신적 인격’이 아니라, 한 분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의 ‘신성 자체와 신적 인성’입니다. 그러므로 이 항목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참된 구별은 두 하나님 사이의 구별도, 한 본질을 공유하는 두 신적 인격 사이의 구별도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서 영혼과 몸처럼 하나를 이루는 신성과 신적 인성의 구별입니다.’ (PR.002 해설)

 

요약

개신교의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는 성부와 성자를 서로 구별되는 두 신적 인격으로 고백하면서도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므로 두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교리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성부와 성자의 실제적인 구별과 하나님의 유일성을 함께 보존하려는 것이므로 단순한 이신론이나 삼신론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구별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묻습니다. 그에게 성부는 주님 안의 신성 자체이고 성자는 그 신성이 세상에서 취하여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며, 둘의 관계는 서로 마주하는 두 신적 인격보다 한 사람의 영혼과 몸의 관계와 같습니다. 주님이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자신을 낮추신 말씀들은 성육신과 영화 과정의 실제적인 상태를 보여 주지만, 영화가 완성된 뒤 신성과 인성은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말씀은 단지 두 인격의 본질적 일치를 넘어 한 분 주님 안에서의 실제적인 하나 됨을 가리킵니다. 이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또 다른 하나님 사이에 서 있는 두 번째 신적 인격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인간과 결합하시기 위해 취하신 신적 인성입니다.

 

 

 

PR.003,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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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001,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세 인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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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1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 - 주님의 교회는 역사적 계승에 있는가,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 있는가?

 

해설

천주교는 자신을 수많은 기독교 교파 가운데 하나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교회가 역사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그 교회의 온전한 실재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일치하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교단적 자부심을 넘어서는 신학적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곧 교회는 인간들이 신앙생활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공동체이며, 사도적 계승과 성사, 교도권과 교회적 일치가 그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에게 가톨릭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느 종교단체에 가입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온전한 질서 안에 머물며, 그분께서 맡기신 구원의 수단들에 참여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참된 교회도 역사적 계승과 제도적 연속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어떤 공동체를 당신의 교회로 인정하시는 기준은 사도적 계승과 교회의 외적 일치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에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특정 교단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인정하는 문제를 넘어, 교회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8항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유일한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온전히 존속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표현은 ‘존속한다’(subsistit in)라는 말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역사적이고 지속적인 실재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 말이 가톨릭교회 밖에는 아무런 진리나 은총도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도 성화와 진리의 요소들이 존재하며, 세례받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도 실제적이지만 불완전한 친교가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836–848항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으며, 자기 잘못 없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주교회만이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의 실제 주장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온전한 신앙과 성사, 교회적 질서가 가톨릭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온전한 교회’의 기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마16:18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도적 직무와 그 후계자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해석에서 베드로는 신앙, 특히 주님을 신적 존재로 인정하는 진리를 표상합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AE, 1759) AE.206과 ‘계시록 풀이’(Apocalypse Revealed, AR, 1766) AR.768에서 그는 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와 반석의 의미를 인간 개인에게 독립적으로 주어진 영적 지배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의 진리와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권능에 연결합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교회의 기초는 베드로라는 한 인간의 지위 자체가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주님에 관한 진리에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실을 근거로 주님의 교회 전체에 대한 영적 권위가 특정한 인간 직위에 독점적으로 계승된다고 보는 해석과는 구별됩니다. 교회를 세우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328에서 주님의 교회를 훨씬 넓은 시야로 설명합니다. 그는 주님의 자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며, 말씀을 직접 접하거나 주님의 이름을 알지 못한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HH.328에서는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각자의 종교 안에서 신적인 것, 곧 신성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며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 똑같이 참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에 특별한 영적 역할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그러한 교회를 인체의 심장과 폐에,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인체의 여러 기관과 지체에 비유합니다. 심장과 폐가 온몸의 생명 유지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하듯, 말씀을 가진 교회도 인류 전체의 영적 생명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비유 때문에 어느 한 기관도 몸 전체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심장이 중요하다고 해서 손과 발이 몸 밖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폐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해서 다른 모든 기관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이 설정한 종교적 경계보다 크며, 그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교회 이해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241–248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에 의하여 성립하며, 말씀에서 비롯된 교리가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 인간 안에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의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는 인간에게 무엇이 선하고 진리인지를 가르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확한 교리를 알고 있더라도 그것이 이해 속의 지식으로만 머물고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 교회의 참된 생명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사랑에 관한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악을 행한다면, 그의 이해에는 사랑에 관한 지식이 있을지라도 의지에는 아직 그 사랑이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교리적 이해에 일정한 부족함이 있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역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은 외적 교리 체계와 제도적 연속성 자체에 있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결합하여 살아 있는 생명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적 계승과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을 보존하시고, 신앙의 가르침을 다음 세대로 전하며, 예배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는 말씀을 필사하고 보존한 사람들, 신앙을 가르친 사람들, 이웃을 섬기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본 사람들의 수많은 헌신이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실제적인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공동체적인 예배와 교육과 봉사를 위하여 일정한 질서와 직무를 갖추는 것은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외적인 질서를 교회의 영적 생명 자체와 동일시할 때 발생합니다. 교회의 제도는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돕는 수단이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사제와 주교와 교황이든, 목사와 장로와 교회의 지도자이든, 그들의 직무는 사람들을 자기 권위에 종속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외적인 계승이 아무리 분명하더라도 그 안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사라진다면 계승된 것은 교회의 형식일 뿐, 그 생명이 온전히 보존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외적인 모습이 보잘것없더라도 주님의 진리와 사랑이 살아 있다면 그곳에 참된 교회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가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가 자신이 사도적 계승을 보존한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영적인 우월감의 근거로 삼을 수 있듯이, 개신교 신자도 자신이 성경 중심의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영적인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 진리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변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프로프리움’(proprium)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인 자기 사랑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은 어느 공동체가 더 우월한지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교회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깨닫고, 자신이 그 생명 안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인간에게 종교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인도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천주교의 주장에는 인정해야 할 진리와 다시 검토해야 할 부분이 함께 존재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과 예배와 신앙 공동체를 보존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은 귀중한 진리입니다. 또한 교회에 질서와 직무가 필요하며, 신앙의 가르침이 세대를 넘어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계승과 제도적 일치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전히 존재하는 장소를 결정한다는 주장은, 스베덴보리의 영적 교회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교회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마음과 삶 안에서 실제로 결합하는 곳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특정 교회가 참된 교리를 많이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실제로 참된 신앙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특정 교회의 제도적 경계 밖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람에게 주님의 교회에 속한 영적 생명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거룩한 수단이지만,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독점하는 소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15:5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말씀하시면서 당신 안에 거하는 사람이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가지의 생명은 어느 가지가 먼저 생겼는지, 어느 가지가 더 높은 위치에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모든 가지가 동일한 포도나무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또한 요13:35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알아보게 하는 표지가 그들 사이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준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주님의 진리를 보존하고 가르쳐야 하지만, 그 진리는 결국 사랑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교회는 역사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역사 안에서 주님을 증언해야 하며, 질서를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질서를 통하여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느 교회가 자신을 참된 교회라고 선언하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어느 곳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 생명이 사람들의 사랑과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것은 인간이 자랑하는 역사적 이름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이루어 가시는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SL.RC.001 해설)

 

요약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에는 교회가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낸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께 속하며,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과 예배와 교회 질서를 보존하도록 섭리하신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온전한 실재를 사도적 계승과 교황과의 일치라는 특정한 역사적·제도적 구조 안에 독점적으로 위치시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가진 교회의 특별한 영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교회의 역사와 제도를 존중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외적인 질서를 참된 교회의 영적 본질과 동일시하거나 그 본질을 특정한 제도의 독점적 소유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여져 사랑과 신앙의 생명으로 결합하는 곳에 존재합니다. 결국 교회의 참됨은 역사적 계승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에서 드러납니다.

 

 

 

RC.002.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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