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4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한 인격 안에 있지만 서로 섞이지 않는 두 본성이다’ - 주님의 인성은 영원히 인간적인가, 아니면 완전히 신성해졌는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십니다. 그분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지니시고, 인성에 있어서는 죄를 제외하고 우리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것입니다. 이 두 본성은 한 인격 안에 연합되어 있지만 서로 섞이거나 변하지 않으며, 분리되거나 나뉘지도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해는 교회사에서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 불리며,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에서 정통 기독론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가르침을 살펴보면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뒤 십자가와 부활을 거쳐 이루신 영화는 과연 무엇을 변화시켰을까요? 신성과 인성은 단지 한 인격 안에 결합되어 있을 뿐, 각각의 본성으로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주님께서는 자신이 취하신 인성을 실제로 신성하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인 신적 인성을 이루신 것일까요? 이 질문은 단순히 두 본성의 관계를 설명하는 신학적 용어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인성이 과연 어떤 인성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시며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라고 고백하면서, 두 본성이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할 없이, 분리 없이’ 연합되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앞의 두 표현은 신성과 인성이 뒤섞이거나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바뀌는 것을 부정하고, 뒤의 두 표현은 그리스도를 두 인격으로 나누거나 신성과 인성을 서로 떨어뜨리는 것을 부정합니다. 따라서 칼케돈 신조는 예수님 안에 신과 인간이라는 두 인격이 따로 존재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본성의 고유한 특성을 보존하면서도 한 분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지키려는 교리입니다. 이 신조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다가 그분의 참된 인성을 약화시키거나, 반대로 신성과 인성을 지나치게 분리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일성을 훼손할 위험을 경계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비교할 때에도 전통 교리가 신성과 인성을 단순히 느슨하게 결합된 두 실체로 이해한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쟁점은 그 연합의 깊이와 완성, 특히 주님의 영화 이후 인성의 상태에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 역시 신성과 인성이 단순히 뒤섞인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35항에서 그는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받으신 인간 본성이 신적 본질로 그대로 변하거나 신적 본질과 혼합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 점에서는 칼케돈 신조와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같은 항에서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을 점차 벗으시고, 그분 안에 계신 신성으로부터 새로운 인성을 입으셨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신적 인성’(Divine Human)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화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 본성이 신적 본질과 섞여 신성이 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인성에 속한 것을 점차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나온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인성 자체가 신성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전통적인 두 본성 교리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별개의 유한한 인간 본성으로 남아 있는 인성이 아니라, 완전히 영화된 신적 인성입니다.

 

이러한 영화의 과정을 이해하려면 주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겪으신 두 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DL.35와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104항에서 주님의 지상 생애에 ‘비움’ 또는 낮아지심의 상태와 영화의 상태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 안에 계실 때 시험을 받으시고 고통을 겪으셨으며,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자신을 아버지보다 낮은 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영화의 상태에서는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이며,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계시고 자신도 아버지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서로 다른 두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신성과 아직 영화되어 가는 인성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요14:10에서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시고, 요10:30에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고 선언하신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시험을 이기실 때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에 속한 것을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나온 인성을 입으셨으며,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과 부활을 통해 이 과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화는 주님의 지상 생애에 부수적으로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성육신과 구속의 목적을 완성하는 결정적인 역사입니다.

 

여기서 성경의 부활 본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눅24:39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을 보라고 하시며, 자신은 살과 뼈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20:27에서는 도마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단지 비물질적인 영으로만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성을 지니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전통적인 기독론은 이를 부활 이후에도 주님의 참된 인성이 보존된다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신적 인성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분은 일반적인 인간처럼 물질적인 육체를 무덤에 남겨 두고 영으로만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인성 자체가 영화되었기 때문에 무덤도 비어 있었으며, 그분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말씀들이 전통적인 두 본성 교리를 저절로 반박하는 것은 아닙니다. 양쪽 모두 부활하신 주님이 실제로 살아 계신 한 분 그리스도임을 고백하지만, 그분의 부활한 인성이 어떤 본성을 지니는지에 관해 서로 다르게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부활이 단순한 육체의 소생이 아니라 주님의 인성이 완전히 신성하게 된 영화의 완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영혼과 몸의 비유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TCR.98-101에서 그는 주님 안의 신성과 인성이 인간 안의 영혼과 몸처럼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영혼과 몸은 서로 구별되지만 두 사람이 아니며, 하나의 인격을 이룹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서 성부는 그분의 내적인 신성이고, 성자는 그 신성에서 비롯된 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주장은 단순히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한다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의 신성이 영혼처럼 인성 안에 거하시고, 인성이 영화됨으로써 신성과 완전한 하나를 이루었다고 가르칩니다. 일반 인간의 영혼과 몸은 각각 유한하지만, 주님의 경우 그분의 내적인 생명은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성도 영화의 과정을 통해 신적 인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가 되었다’는 말은 신성과 인성이 서로 뒤섞여 구별할 수 없는 어떤 제삼의 본성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성이 인성 안에, 인성이 신성 안에 완전하게 결합하여 한 분 주님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두 본성의 단순한 병존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의 살아 있는 완전한 하나 됨입니다.

 

이 가르침은 주님께서 오늘도 인간과 어떻게 관계하시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골2:9는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씀하며, 요14:9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말씀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우리에게 나타나신 주님이 서로 다른 신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그분의 신적 인성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신성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주님의 인성을 영원히 신성과 구별되는 유한한 인간 본성으로만 생각한다면, 신앙의 실제적인 사고 속에서 주님의 신성과 인성을 서로 다른 차원에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기독교가 반드시 그러한 분리를 가르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칼케돈 신조는 그것을 명시적으로 금지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한 인격이라는 고백에도 불구하고 신성과 인성을 실제 사고에서 분리해 생각하는 경향을 비판하며, 부활하신 주님의 인성 자체가 신성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분의 인성은 우리가 신성에 도달하기 위해 잠시 통과해야 하는 외적인 껍질이 아닙니다. 바로 그 신적 인성 안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이 계시며,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예배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경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을 벗으셨다고 말할 때, 그것을 주님의 인간적인 경험과 사랑과 지혜가 아무 의미 없이 폐기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지상에서 겪으신 배고픔과 피로, 고난과 시험, 십자가의 고통은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인간의 삶을 외적으로 흉내 내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인성을 취하셔서 인간의 조건 안에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영화가 그 인성을 단순히 인간적인 상태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인성 안에 있던 유한한 것들을 벗으시고 신적인 것으로 완성하신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적 인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분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그 인성을 통해 지옥의 세력을 이기시고, 이제 신적 인성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직접 다가오실 수 있는 분이 되셨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영화 교리는 단순한 기독론적 차이를 넘어 주님의 구속과 구원, 그리고 인간과 주님 사이의 결합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한 인격 안에 있지만 서로 섞이지 않는 두 본성이다’라는 말에서 보존해야 할 진리는 주님께서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그분이 한 인격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신성과 인성이 서로 섞여 본래의 의미를 잃는다는 생각을 경계하는 것 역시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은 신성과 인성이 영화 이후에도 각각의 본성으로 구별된 채 남아 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신성과 인성을 한 인격 안에 결합하신 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을 점차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나온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마침내 인성 자체를 완전히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영화이며, 신적 인성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지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함께 존재하는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고난과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결과, 그분의 인성에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지금 내가 믿고 사랑하며 예배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인성은 여전히 유한한 인간 본성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이 거하시는 신적 인성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질문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신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끕니다. (PR.004 해설)

 

요약

전통적인 두 본성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며 한 인격이심을 보존하려는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신성과 인성이 뒤섞이지 않는다는 가르침 자체는 스베덴보리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간 본성이 영화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인성을 점차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나온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인성 자체를 신성하게 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칼케돈 기독론과 스베덴보리의 기독론 사이의 핵심 차이는 신성과 인성의 단순한 결합 여부가 아니라, 주님의 영화가 인성을 어디까지 변화시켰는가에 있습니다. 이 차이는 실제적인 교리 차이이며, 단순한 표현상의 차이로 축소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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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3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 세례의 은총과 참된 영적 출생은 같은 것인가?

 

해설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 말은 천주교 신앙생활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가르침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를 단순히 신앙 공동체에 가입하는 의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원죄가 씻기고 새로운 생명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아직 말을 하지 못하고 신앙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풉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은총을 베푸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세례라는 외적인 의식이 이루어지는 순간, 인간의 내적인 생명에도 실제적인 영적 출생이 완성되는 것일까요? 물로 머리를 씻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과, 주님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새로운 생명이 인간의 내면에 형성되는 것은 같은 사건일까요?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말은 새로운 종교적 신분이 부여되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실제로 그분을 닮은 존재로 변화되어 간다는 뜻입니까? 이 질문의 목적은 세례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 세례가 가리키는 참된 영적 출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265항은 세례를 받은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느님의 양자가 되며, 그리스도의 지체와 성령의 성전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어 1266항은 세례를 통하여 성화의 은총과 의화의 은총이 주어지고,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덕과 성령의 선물이 부여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272항은 세례가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인호를 남긴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천주교는 세례를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실제로 역사하는 성사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세례받은 사람이라면 이후 어떻게 살아도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받은 은총은 신앙생활 속에서 성장해야 하며, 인간은 그 은총에 응답하고 죄를 피하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천주교는 유효한 세례를 받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자들도 그리스도와 일정한 친교 안에 있다고 인정합니다. 따라서 이 명제를 ‘천주교 신자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배타적인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실제 쟁점은 세례라는 성사적 행위 자체가 인간에게 새로운 영적 신분과 은총을 부여한다는 천주교의 이해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의 질서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세례와 새로운 출생을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요3:3에서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세례의 필요성과 성사적 은총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6절에서 주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영적 출생이 자연적인 사건이나 외적인 신분 변화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요1:12–13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 그들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출생의 근원은 인간의 종교적 행위나 제도적 소속이 아니라 주님 자신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씀들이 세례와 거듭남의 관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물과 성령, 외적인 씻음과 내적인 새 생명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세례가 영적인 출생을 나타내는 거룩한 의식이라는 사실과, 그 의식의 시행이 곧 영적 출생의 완성이라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667–691에서 세례의 의미와 쓰임을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이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과 동시에 영계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연결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TCR.677–680). 두 번째 쓰임은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그분을 따르게 하는 것이고(TCR.681–683), 세 번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인간이 거듭나는 것입니다(TCR.684–687). 이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면 스베덴보리가 세례를 단순한 종교적 가입 절차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자연계에서 행해지는 세례는 영계의 질서와도 실제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첫 번째 쓰임과 세 번째 쓰임을 구별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로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새로운 영적 삶을 향한 입문이며, 후자는 그 입문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세례가 인간을 거듭남의 길로 인도할 수는 있지만, 세례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참된 가치는 그 의식 자체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인간을 주님께 인도하여 어떤 새로운 생명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가에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유아 세례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TCR.677에서 스베덴보리는 아직 합리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없고 신앙에 관한 것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유아들도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이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아직 선과 악을 분별하거나 의식적으로 회개할 능력이 없는 아이가 세례받는 순간 이미 영적인 거듭남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아 세례에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받은 아이들이 영계에서 기독교인들과 연결되며,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그 아이들이 장차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보호하고 준비시키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세례가 영계와 무관한 단순한 표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의 영적 상태는 점차 자신이 무엇을 믿고 사랑하며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와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세례받았다는 사실이 이후의 모든 삶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유아 세례는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거듭남을 향한 거룩한 시작이며, 주님께서는 그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계속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4255은 세례가 교회와 교회에 속한 것들로 들어가는 입문을 나타내며, 동시에 거듭남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세례의 물은 영적으로 진리를 의미하고, 물로 씻는 행위는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악과 거짓이 제거되는 정결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물이 육체의 더러움을 씻는다고 해서 인간의 의지에 자리 잡은 자기 사랑과 탐욕과 미움과 교만을 실제로 씻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내적인 악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그 악을 죄로 여겨 피할 때 점차 제거됩니다. 이 과정에서 진리는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 주는 지식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됩니다. 따라서 세례의 물이 나타내는 참된 씻음은 자연적인 물질 자체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역사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가 단순한 상징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세례에는 자연계와 영계를 연결하는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가 나타내는 영적 실재와 세례라는 외적인 행위를 서로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례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통하여 정결해지고 실제로 거듭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말의 가장 깊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TCR.684에서 세례의 궁극적인 쓰임을 거듭남이라고 설명하면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고 선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번에 완성되는 종교적 신분의 변경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합리성을 사용하는 가운데 평생 계속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29–345에서 어린아이들이 죽음 이후 주님의 인도 아래 천국에서 양육받고 성장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특정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거나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세례를 받은 아이뿐 아니라 세례를 받지 못한 아이도 주님의 사랑과 섭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며, 각 사람을 그가 처한 상태와 환경에 따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현은 단순히 종교적인 소속을 가리키는 신분 명칭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가장 깊은 의미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반영하는 존재로 실제로 변화되어 간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천주교의 세례론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는 인정해야 할 공통점과 중요한 차이가 함께 존재합니다. 양쪽 모두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 의미가 단순한 외적 가입 절차보다 깊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세례받은 사람이 이후에도 신앙 안에서 성장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세례 자체가 성화의 은총과 의화의 은총을 부여하고, 인간을 하느님의 양자로 만들며,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인호를 남긴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세례의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인정하면서도,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인 교회로의 입문과 궁극적인 쓰임인 거듭남을 명확하게 구별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세례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사의 시행 자체가 인간 안에서 어떤 영적 변화를 이루는가, 그리고 그 성사가 가리키는 실제적인 거듭남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영적 출생은 세례라는 외적인 의식의 시행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이해와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가 점차 악을 피하고 선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는 실제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평생 천주교 신자로 살아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례명을 소중히 여기고 주일마다 미사에 참석하며 여러 성사생활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의 신앙생활에 귀중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을 행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세례받은 하느님의 자녀다’라는 사실에 안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필요한 것이 세례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복적인 확인이 아니라, 세례가 가리키는 참된 회개와 거듭남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또한 이 문제는 천주교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개신교 신자 역시 자신이 세례를 받았거나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한 순간 구원과 하나님의 자녀 됨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이후의 실제적인 거듭남을 부차적인 문제로 여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이 세례와 거듭남의 영적 의미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영적으로 더 성숙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과 그 진리가 자신의 삶 안에서 실제로 살아 있다는 사실은 서로 다릅니다. 세례의 영적 의미를 이해했다면, 그 이해는 자신을 높이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인간에게 보여 주시는 거룩한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물은 육체를 씻지만, 주님의 진리는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그가 자신의 악을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세례는 한 번 이루어지는 외적인 의식일 수 있지만, 주님의 진리로 마음을 씻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평생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지만, 그 사실을 영적 성장의 완성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인간을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거룩한 시작이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여 진리를 배우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요1:12-13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자녀 됨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종교적 신분을 바꾸는 일보다 훨씬 깊으며,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삶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언제 세례를 받았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 세례가 나타내는 거듭남의 길을 지금도 걸어가고 있는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피하며, 주님의 사랑을 받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참된 생명은 외적인 의식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이루어 가시는 실제적인 거듭남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SL.RC.003 해설)

 

요약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명제에는 세례가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인간을 기독교회와 연결하고 새로운 영적 삶으로 인도하는 실제적인 쓰임을 가진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천주교가 세례 이후에도 신앙의 성장과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며, 세례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이 자동으로 완성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도 정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라는 성사적 행위 자체가 인간을 하느님의 양자로 만들고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인호를 남긴다는 천주교의 이해는,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인 교회로의 입문과 궁극적인 쓰임인 거듭남을 구별하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세례는 단순한 상징 이상의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가지지만, 그 의식 자체가 인간의 내적인 거듭남을 완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세례를 거룩하게 여기거나 그 영적 의미를 인정하는 데 있지 않고, 세례의 시행 자체를 새로운 영적 생명의 성립과 동일시하거나 그 완성에 대한 보증으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영적 출생은 주님께서 인간의 의지와 이해를 새롭게 하시고, 그 사람이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받아들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존재로 변화되어 가는 실제적인 거듭남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RC.004.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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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3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시다’ - 영원부터 계신 주님과 영원부터 태어난 성자는 같은 뜻인가?

 

해설

개신교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약 2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처음 존재하기 시작하신 분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함께 계셨으며 때가 되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삼위일체 교리의 중심에 자리하며,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에서 정통 기독교 신앙의 기본 전제로 받아들여집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영원성을 고백한다는 매우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부터 계신 주님’과 ‘영원부터 성부에게서 태어나신 성자’가 과연 동일한 의미인지 질문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전통적인 삼위일체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그는 주님이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성부와 구별되는 성자가 영원부터 태어나 함께 계셨다는 교리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가 부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일까요, 아니면 그 영원한 신성을 이해해 온 특정한 신학적 방식일까요?

 

먼저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거쳐 확립된 신앙고백은 성자가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지니신 참 하나님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영원한 출생’(eternal generation)이란 성자가 어느 시점에 처음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자는 시작 없이 영원부터 성부에게서 나셨으며,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지니신다는 뜻입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이를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출생이나 창조와 구별합니다. 또한 성부와 성자가 서로 다른 두 하나님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구별되는 세 위격이지만 하나의 신적 본질을 지니신 한 하나님이라는 것이 정통 삼위일체론의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단순히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주장’으로 소개한다면 그 전통의 실제 가르침을 왜곡하게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서로 구별되는 세 신적 위격을 영원한 존재로 상정하는 일이 실제 신앙의 사고 속에서는 세 하나님을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고 비판합니다. 바로 이 차이가 우리가 살펴야 할 핵심입니다.

 

전통적인 성자의 선재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성경 본문은 요1:1-3입니다.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만물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음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이어 요1:14에서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합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여기서 영원부터 성부와 함께 계신 성자가 인간이 되셨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같은 본문을 다른 방식으로 읽습니다. 그에게 영원부터 계신 말씀은 성부와 별도로 존재하는 두 번째 신적 위격이라기보다, 한 하나님 자신의 신적 진리이며 신적 지혜입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분리된 또 다른 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것이므로, 요한은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적 진리를 통해 인간의 인성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영원성이나 신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원하신 말씀이 바로 한 하나님의 신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 말씀을 성부와 별도로 존재하는 영원한 신적 위격으로 이해하는 데 반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19항에서 이 차이를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는 영원부터 계신 성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계신 주님이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주님께서 신적 인성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시고, 말씀에 관해서는 ‘인자’라 불리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명칭의 차이가 아닙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에서 ‘성자’는 성육신 이전부터 성부와 구별되어 영원히 존재하시는 신적 위격을 가리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서 취하신 인성, 곧 신적 기원을 지닌 주님의 인성을 가리킵니다. 이 인성은 성모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인간 아버지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눅1:35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실 것이므로 태어날 거룩한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이해의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92항에서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보내실 때 취하신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관점에서는 영원한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표현보다,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취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이해가 더 근본적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오셨다고 말씀하시거나,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셨다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요17:5에서 주님은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리셨던 영화를 말씀하시며, 요17:24에서는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에서는 이러한 본문들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영원한 관계를 증언한다고 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성육신하신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주님의 내적인 신성이고, 아들은 그 신성에서 비롯된 인성입니다. 주님께서 지상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시거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것은 영원부터 존재한 두 하나님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아직 영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던 인성이 그 안에 계신 신성을 향하는 상태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과 실제로 충돌하는 신학적 주장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말씀들이 저절로 스베덴보리의 해석만을 증명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동일한 성경 본문을 전통적인 기독교와 스베덴보리가 서로 다른 신론의 구조 속에서 해석한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제기하는 중요한 질문은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아버지를 그분과 구별된 또 하나의 신적 존재로 생각해야 하는가, 아니면 한 분 주님 안에 계신 신성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주님의 성육신과 영화에 관한 가르침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속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인성을 취하셨으며, 지상에서 시험과 승리를 거치시면서 그 인성을 점차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참된 기독교’ 102항은 주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는 과정에서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에 속한 것을 벗으시고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신적 인성으로 영화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단순히 신성이 인간의 몸 안에 거하셨던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인성 자체가 신성화되어, 부활 이후에는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기독론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영원부터 존재하던 성자가 인간의 몸을 잠시 입은 사건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인간의 인성을 취하시고, 그 인성을 통하여 지옥의 세력을 이기고 모든 것을 질서 안으로 회복하시며, 마침내 그 인성까지 완전히 신성하게 하신 구속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도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단지 영원한 신적 위격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성을 취하시고 그 인성을 영화하신 주님 자신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 166-170항에서 신적 삼위일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영원부터 구별되어 존재한 세 신적 위격의 삼위일체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삼위일체라고 가르칩니다. 성부는 주님의 신성 자체이며, 성자는 그분의 신적 인성이고, 성령은 그분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역사입니다. 그는 이를 인간의 영혼과 몸과 활동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사람 안에서 영혼과 몸과 활동을 구별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서로 다른 세 사람을 이루지는 않는 것처럼, 주님 안에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구별되지만 한 분 하나님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비유가 인간의 구성과 하나님의 본성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신적 삼위일체를 이해할 때 반드시 한 분 주님이라는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TCR.170은 이러한 삼위일체가 성육신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육신 이전에는 불완전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완전한 신성이셨지만, 성육신과 영화로 말미암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삼위일체가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하게 성립하고 계시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배운 신자는 흔히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이러한 기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거나,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세 하나님을 믿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정통 삼위일체 신앙은 명시적으로 한 하나님을 고백하며, 그 안에는 주님께 대한 참된 사랑과 신뢰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신앙의 초점은 더욱 분명해져야 합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서로 떨어진 존재들처럼 마음속에 그리는 대신, 모든 신성의 충만함이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바로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골2:9에서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씀하는 것이 이 이해의 중요한 근거입니다. 또한 요14:9에서 주님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주님은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 데려가 주시는 중간적인 신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알고 사랑하고 예배해야 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신론에서 주님을 아는 일은 단순히 삼위일체 교리의 구조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고 사랑하며 의지하는 하나님을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바라보는 일과 관계됩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에서 우리가 보존해야 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신성은 영원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분이 단지 뛰어난 인간이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피조물이 아니라는 고백도 반드시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은 이 영원한 신성을 성부와 구별되어 영원부터 태어나신 또 하나의 신적 위격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계신 분은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분께서 때가 되어 인성을 취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인성을 영화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셨으며,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적 인성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의 목적은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이 고백해 온 주님의 신성을 약화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신성을 더욱 온전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을 세 신적 위격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하려는 사고를 넘어 한 분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결합을 바라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단지 ‘예수님은 영원부터 계셨는가?’가 아닙니다. ‘영원부터 계신 분은 과연 누구이시며, 그분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지금 내가 믿고 사랑하며 예배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신적 위격이신가, 아니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성을 취하시고 그 인성까지 영화하신 한 분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신가?’라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시선을 한 분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리도록 이끕니다. (PR.003 해설)

 

요약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영원성을 고백하는 것은 보존해야 할 핵심 진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성부와 구별되는 신적 위격으로서의 성자가 영원부터 태어나 함께 계셨다는 교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영원부터 계신 분은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분께서 시간 안에서 인성을 취하셨고 그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립니다. 주님께서는 그 인성을 영화하여 신성과 인성을 완전히 하나로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부정하는 것은 주님의 영원한 신성이 아니라 ‘영원한 성자의 출생’이라는 전통적인 신학적 설명입니다. 다만 이 교리는 정통 기독교의 공식적인 삼위일체 신앙과 실질적으로 충돌하므로, 단순한 용어 차이나 신자들의 무의식적인 오해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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