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집트 사막의 어느 수도 공동체에 전해지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강문호 수도사 자신도 이 수도원을 직접 방문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수도원 밖 세상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 두 수도사가 어느 날 화면을 통해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싸움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두 사람은 호기심이 생겨 ‘우리도 한번 싸워 보자’고 합니다.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지갑 하나를 가운데 놓고 한 사람이 ‘내 것이다’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 것이다’라고 맞서면서 다투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자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한 수도사가 지갑을 집어 들고 ‘내 거다’라고 하자 다른 수도사가 ‘그래, 네 거다. 가져가라’고 해버린 것입니다. 싸움이 시작될 수가 없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여기에서 요한일서 39절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를 인용하고, 이 두 수도사가 싸울 수 없었던 까닭을 ‘그 속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소와 말이 저마다 타고난 방식으로 일어나고 병아리가 물을 마신 뒤 본능적으로 머리를 드는 모습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씨가 사람 안에 자리 잡으면 선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점차 그 사람의 ‘본질’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 보입니다. 무엇보다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대목입니다. 싸움에는 반드시 두 개의 ‘내 것’이 필요합니다. 한쪽이 ‘내 것이다’라고 할 때 다른 쪽에서도 ‘아니다, 내 것이다’라고 해야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수도사가 ‘그래, 네가 가져라’ 하는 순간 싸움의 재료 자체가 사라집니다. 이 작은 이야기는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갈등을 만들어 내는지를 아주 단순하면서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단순히 물건에 대한 소유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 것’, ‘내 생각’, ‘내 판단’, ‘내 공로’, ‘내 지위’, ‘내 명예’, ‘내가 옳다’는 데 집착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모두 여기에 연결됩니다. 실제로 우리의 싸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질 때문인 경우보다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누군가 내 의견을 무시했다고 느끼고, 내 체면을 손상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여기면서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결국 겉으로는 여러 이유가 있어 보여도 그 깊은 곳에는 ‘’와 ‘내 것’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두 번째 수도사가 ‘그래, 네 거다’라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논쟁에서 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 자체를 필요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과 맞설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도 매우 잘 연결됩니다. 천국에서는 각자가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유익을 기뻐합니다. 자신이 가진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움켜쥐기보다 그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알고 서로 나누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적 삶의 중심에는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서로에게 쓰임이 될 것인가’가 놓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조금 더 깊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요한일서의 ‘하나님의 씨’를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새로운 본질처럼 설명합니다. 이 방향에는 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거듭남이 깊어지면 사람은 단지 ‘죄를 지으면 안 되니까 참는 상태’를 넘어 ‘그 악 자체를 싫어하는 상태’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계명이 ‘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악을 피하지만, 나중에는 그 악이 주님을 거스르고 이웃을 해친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에서 싫어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 애정의 변화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은 강문호 수도사의 ‘본질이 달라진다’는 표현을 더욱 깊게 열어 줍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죄를 모르는 존재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도움을 받아 악과 싸우고 그것을 피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애정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하면 안 되니까 하지 않는 것’이었던 일이 어느 순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됩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억지로 행하던 선이 점차 좋아지고 기뻐집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놀라운 변화입니다. 선이 의무에서 기쁨으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죄를 피하는 게 아니라 죄를 모르는’ 삶이라는 표현은 그 의도를 잘 살려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거듭난 사람이 죄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악을 너무 멀리하여 그것을 자기 삶의 선택지로 삼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은 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 악과 거짓을 더욱 분명하게 분별합니다. 다만 그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악을 모른다’기보다 ‘악을 원하지 않는다’가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번 영상의 ‘하나님의 씨’라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요한일서의 ‘’를 곧바로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보존하시며, 훗날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점에서는 아름다운 접점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받은 사랑, 말씀을 들으며 느꼈던 거룩한 정서, 양심을 따라 선을 행했을 때의 기쁨, 주님과 이웃을 향했던 순수한 마음 등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것들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씨가 있으면 범죄하지 못한다’는 말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면 자칫 신앙생활의 실제 모습을 놓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시험은 있고 proprium은 계속 고개를 듭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 인간에게는 끊임없는 내적 싸움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악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물러서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선한지를 자랑하기보다 자기 안에는 선한 것이 없고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 점은 이번 이야기의 핵심과도 맞닿습니다. ‘내 거야’라고 주장하지 않았던 수도사의 모습은 단지 물질에 욕심이 없는 모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더 어려운 내려놓음은 ‘내가 선하다’는 생각까지 내려놓는 것입니다. 재산을 내려놓는 것은 눈에 보이지만 자기 공로를 내려놓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수도복을 입고 청빈하게 살면서도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더 거룩하다’, ‘나는 이것을 이루었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많은 재산과 책임을 가지고 세상 한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며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보다 그 형식 안에 있는 사랑의 질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이라는 환경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싸움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속의 싸움까지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악은 단순히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한 내면의 애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참된 수도는 장소의 격리가 마음의 변화로 이어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보다 자기 안의 ‘내 것’을 얼마나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두 수도사’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영적 비유로서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싸움을 멈추는 가장 깊은 방법은 싸움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일으키는 자기중심적 애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것이다’라고 할 때 언제나 ‘그래, 네가 가져라’라고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의 앞에서는 진리를 말해야 하고, 약자를 보호해야 하며, 맡겨진 것을 책임 있게 지켜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적인 양보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랑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자기 자존심과 승리를 위해 하느냐, 아니면 선과 진리와 이웃의 유익을 위해 하느냐입니다.

 

따라서 참된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평화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내적 질서입니다. 사람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바른 질서 아래 둘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때 사람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저 사람이 인정해야 한다’, ‘내가 한 일을 사람들이 알아줘야 한다’, ‘내가 받아야 할 몫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이전에는 싸움거리가 되었던 것들이 더 이상 싸움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앞선 ‘사과나무 이야기’가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는 자기 지혜를 내려놓고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이야기였다면, 이번 ‘수도사 싸움’은 ‘내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싸움 자체가 사라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영상 모두 깊은 곳에서는 proprium을 다룹니다. 하나는 ‘내가 안다’는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내 것이다’라는 proprium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이 ‘내가 안다’와 ‘내 것이다’가 조금씩 ‘주님께서 아십니다’와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로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인용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라는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끝나기보다 훨씬 아름다운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갈수록 선은 점차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이 됩니다. 처음에는 싸우고 싶은데 참습니다. 그다음에는 싸워서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의 유익을 자기 유익처럼 기뻐할 수 있는 상태를 향해 갑니다. ‘죄를 참는 사람’에서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번 ‘수도사 싸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거듭남이란 죄를 짓고 싶은 자신을 억지로 눌러 놓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심으신 선과 진리가 삶의 사랑이 되어 마침내 이전에 좋아하던 악을 싫어하고 이전에 힘들어하던 선을 기뻐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그리고 두 수도사가 싸움에 실패한 이유를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싸울 줄 몰라서 싸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싸움을 만들어 낼 내 것이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해야 할 것도 어쩌면 ‘평생 아무와도 부딪치지 않게 해주십시오’가 아니라 ‘부딪치는 순간에도 제 안의 proprium이 주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선과 진리와 체어리티가 저를 이끌게 해주십시오’일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한복판에서도 가능한 수도이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 ‘’가 마침내 삶의 열매가 되어 가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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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5

농사하는 (tiller of the ground)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내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고, 그가 자기 형제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벨(Abel) 의미하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가리켜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till the ground)이라고 했다는 것은 3:19, 23에서 분명합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 경작하게 되었다(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atiller of the ground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is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Jehovah had no respect to his offering, and that he slew his brother, that is, destroyed charity, signified byAbel. Those were said totill the groundwho look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as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in Gen. 3:19, 23, where we read that the man was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땅을 갈게 하시니라 (3:19, 23)

 

해설

AC.345는 창4:2의 마지막 표현,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AC.341부터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대비를 마무리합니다. 아벨은 치는 이고 가인은 농사하는 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연적인 직업의 우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43에서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고 사람을 그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을 나타냈고, AC.344에서는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과 교리의 목적이 체어리티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45는 그 반대편에 있는 가인을 보여 줍니다. 그는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이며, 바로 그런 상태를 여기서는 농사하는 라고 합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말씀에서 농사하는 땅을 경작하는 가 언제나 악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연적인 농사나 노동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말씀에서 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아벨은 목축을 했으므로 선하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으므로 악하다는 식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속뜻과 전혀 다릅니다. AC.345에서 농사하는 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가인이 의미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는 단어 하나에 언제나 똑같이 붙어 있는 고정된 암호가 아니라 말씀의 문맥과 그 안에서 나타나는 영적 상태에 따라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앞으로 일어날 두 사건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 사건은 결정적입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하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은 신앙 자체가 전혀 없는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라고 말합니다. 외적으로는 신앙이 매우 강해 보일 수도 있고,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가 풍부하며 그것을 열심히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AC.341에서 나온 선언이 AC.345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이것이 가인의 정체를 이해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이라고 했습니다. AC.345의 가인은 바로 그 위험이 실제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신앙에 속한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채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고 선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것으로 여겨질 때, 신앙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AC.345가 이 지점에서 창3:19, 23으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3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 경작하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45에서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이 농사하는 라는 말은 앞 장에서 나타난 이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덴으로 표상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질서에서 멀어지면서 시선은 점차 더 낮고 외적인 것에 향하게 됩니다. AC.345는 그러한 상태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사이의 관계를 땅을 경작함이라는 같은 표현을 통하여 연결해 보여 줍니다.

 

여기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본다는 말을 자연계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몸을 돌보고, 일하고, 돈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자연계에서 맡겨진 수많은 쓰임을 수행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으며 오히려 영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중요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무엇을 바라보는가입니다. 곧 무엇을 중심과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연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을 섬긴다면 그것들은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종교까지 자기 명예와 이익, 우월감과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면 질서는 뒤집힙니다.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의 시선과 목적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농사하는 가인이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이렇게 보면 치는 아벨과 농사하는 가인의 대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AC.343에서 보았듯 참된 목자는 양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모으고 결합합니다. 반면 AC.345의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한쪽은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선과 쓰임으로 나아가는 방향이고, 다른 한쪽은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져 점점 자기 자신에게 머무는 방향입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아주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을 서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살펴보았듯 문제는 구별 자체가 아니라 분리입니다. 구별된 신앙이 사랑과 다시 결합되지 않고 독립적인 것이 되면,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그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45는 앞으로 일어날 아벨의 죽음을 이미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갑자기 일어난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AC.338부터 설명해 온 분리의 결과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꺼내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정하고,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단지 지식으로 알게 되며, 신앙을 체어리티라는 목적에서 분리한 결과가 마침내 형제를 죽이는데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인간의 모든 교리적 구별에 적용하여 교리를 세우는 자체가 결국 체어리티를 죽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후대의 인간에게는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교리로 이해하며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와 결합하느냐,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완결적인 신앙으로 남느냐에 있습니다.

 

결국 AC.345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 신앙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말씀과 교리를 많이 알고 신앙을 강하게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기 우월성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세상적인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낸다면 우리는 농사하는 가인의 모습을 우리 자신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버린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면서 그 신앙의 생명과 목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를 잃은 데 있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이것이 AC.341에서 시작하여 AC.345에서 다시 한번 확정되는 창4:2의 결론입니다.

 

 

 

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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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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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4

신앙,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앙의 교리(doctrine of faith)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입니다(12:28-35; 22:34-39). What avails faith, that is, the memory-knowledge [scientia], the knowledge [cognitio], and the doctrine of faith, but that the man may become such as faith teaches? And the primary thing that it teaches is charity. (Mark 12:28-35; Matt. 22:34-39)

 

28서기관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분이시요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5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12:28-35)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중의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4-39)

 

이것이 신앙이 지향하는 모든 것의 목적입니다.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이나 교리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This is the end of all it has in view, and if this be not attained, what is all knowledge or doctrine but a mere empty nothing?

 

해설

AC.344는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문제를 매우 날카로운 질문 하나로 압축합니다.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낮추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하여 주어졌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scientia), 인식 지식(cognitio), 그리고 신앙의 교리(doctrine of faith)를 차례로 언급한 뒤, 그 모든 것의 목적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진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사람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으며, 그 진리를 아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 그리고 교리를 불필요하거나 낮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말씀의 내용을 배우고 기억해야 하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고, 서로 관련된 진리들을 질서 있게 연결하여 교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도 올바르게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그 모든 것에 무엇을 위해서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지식과 교리는 그 자체로 종착점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람이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목적은 사람이 단지 무엇을 믿는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믿는 진리가 가르치는 대로 그러한 사람이 되는데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가 자기 삶의 성질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정확한 교리 체계만을 만들어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의지와 사랑과 삶을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이 가르치는 여러 항목 가운데 조금 더 중요한 한 항목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진리들이 궁극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야 할 방향과 목적이 체어리티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342에서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은 자신에게 머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이 먼저 신앙을 만들고, 그다음 행위를 쌓아 마침내 자기 힘으로 체어리티를 만들어 낸다는 기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도 체어리티도 그 생명과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지만,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고 살아 있는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12:28-35와 마22:34-39가 여기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두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계명의 중심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두십니다. 특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은 신앙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말할 때, 그는 단순히 교리보다 윤리적 행동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계명과 주님에 관한 모든 참된 진리는 결국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12장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까지 말합니다. 따라서 외적인 종교 행위나 신앙고백 역시 그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으면 자기 목적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 두 복음서 인용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함께 제시된 것이므로, 각각 별도의 심화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가 목적이므로 신앙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 없는 막연한 선의나 인간적인 호감이 아닙니다.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 무엇이 주님의 질서에 맞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관계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선은 진리와 결합하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목적이 수단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단의 참된 가치를 결정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할 때 신앙은 비로소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 맞게 쓰이며,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통하여 바른 방향과 형태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AC.344의 질문은 신앙인가, 체어리티인가?가 아니라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이것을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놓으면 AC.344가 이 자리에서 등장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을 없애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고 교리로 정리하여 그것을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AC.340에서는 그 결과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어 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4는 그 분리가 왜 치명적인지를 목적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는 것은 단순히 두 요소가 서로 떨어지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잃는 것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가인이 아벨에게서 분리된다는 것은 신앙이 자신이 향해야 할 목적에서 분리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무엇인가 한 부분이 조금 부족한 신앙이 아니라 자기 생명과 목적을 잃은 신앙이 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두고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단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AC.344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과 교리는 아무것도 아닌 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지식과 교리 그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과 생명에서 분리된 지식과 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방대하고 정교한 신학 체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께로 돌이키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선을 행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아직 영적인 목적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람 안에서 악을 드러내고, 회개하게 하고, 삶을 바꾸며, 이웃을 향한 선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진리는 더 이상 머리에만 있는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이 점은 AC를 공부하는 우리에게 특히 직접적인 질문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 체어리티, 퍼셉션, 상응, proprium, 리메인스, 속 사람과 겉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같은 수많은 아르카나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귀하며,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아르카나를 더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의 오류를 더 잘 찾아내는 사람이 되는 데 그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잘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며 이웃의 참된 선을 더 구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아르카나에 대한 지식마저 자기 우월성을 세우는 수단이 된다면, 우리는 가인의 문제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가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배운 진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게 하고, 악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지식은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귀한 수단이 됩니다.

 

결국 AC.344의 핵심은 단순히 지식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말보다 훨씬 정교합니다. ‘진리는 삶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신앙의 교리는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중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입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을 귀하게 여긴 데 있지 않고 신앙을 그 목적에서 분리하여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게 한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44가 우리에게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도 나는 얼마나 정확한 신앙을 알고 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믿는 진리는 주님께서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쓰이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고, 진리가 삶이 되며,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실 때 비로소 신앙은 자신의 목적에 이르고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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