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5

농사하는 (tiller of the ground)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내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고, 그가 자기 형제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벨(Abel) 의미하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가리켜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till the ground)이라고 했다는 것은 3:19, 23에서 분명합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 경작하게 되었다(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atiller of the ground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is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Jehovah had no respect to his offering, and that he slew his brother, that is, destroyed charity, signified byAbel. Those were said totill the groundwho look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as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in Gen. 3:19, 23, where we read that the man was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땅을 갈게 하시니라 (3:19, 23)

 

해설

AC.345는 창4:2의 마지막 표현,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AC.341부터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대비를 마무리합니다. 아벨은 치는 이고 가인은 농사하는 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연적인 직업의 우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43에서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고 사람을 그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을 나타냈고, AC.344에서는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과 교리의 목적이 체어리티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45는 그 반대편에 있는 가인을 보여 줍니다. 그는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이며, 바로 그런 상태를 여기서는 농사하는 라고 합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말씀에서 농사하는 땅을 경작하는 가 언제나 악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연적인 농사나 노동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말씀에서 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아벨은 목축을 했으므로 선하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으므로 악하다는 식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속뜻과 전혀 다릅니다. AC.345에서 농사하는 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가인이 의미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는 단어 하나에 언제나 똑같이 붙어 있는 고정된 암호가 아니라 말씀의 문맥과 그 안에서 나타나는 영적 상태에 따라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앞으로 일어날 두 사건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 사건은 결정적입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하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은 신앙 자체가 전혀 없는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라고 말합니다. 외적으로는 신앙이 매우 강해 보일 수도 있고,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가 풍부하며 그것을 열심히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AC.341에서 나온 선언이 AC.345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이것이 가인의 정체를 이해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이라고 했습니다. AC.345의 가인은 바로 그 위험이 실제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신앙에 속한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채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고 선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것으로 여겨질 때, 신앙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AC.345가 이 지점에서 창3:19, 23으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3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 경작하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45에서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이 농사하는 라는 말은 앞 장에서 나타난 이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덴으로 표상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질서에서 멀어지면서 시선은 점차 더 낮고 외적인 것에 향하게 됩니다. AC.345는 그러한 상태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사이의 관계를 땅을 경작함이라는 같은 표현을 통하여 연결해 보여 줍니다.

 

여기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본다는 말을 자연계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몸을 돌보고, 일하고, 돈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자연계에서 맡겨진 수많은 쓰임을 수행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으며 오히려 영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중요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무엇을 바라보는가입니다. 곧 무엇을 중심과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연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을 섬긴다면 그것들은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종교까지 자기 명예와 이익, 우월감과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면 질서는 뒤집힙니다.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의 시선과 목적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농사하는 가인이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이렇게 보면 치는 아벨과 농사하는 가인의 대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AC.343에서 보았듯 참된 목자는 양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모으고 결합합니다. 반면 AC.345의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한쪽은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선과 쓰임으로 나아가는 방향이고, 다른 한쪽은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져 점점 자기 자신에게 머무는 방향입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아주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을 서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살펴보았듯 문제는 구별 자체가 아니라 분리입니다. 구별된 신앙이 사랑과 다시 결합되지 않고 독립적인 것이 되면,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그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45는 앞으로 일어날 아벨의 죽음을 이미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갑자기 일어난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AC.338부터 설명해 온 분리의 결과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꺼내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정하고,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단지 지식으로 알게 되며, 신앙을 체어리티라는 목적에서 분리한 결과가 마침내 형제를 죽이는데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인간의 모든 교리적 구별에 적용하여 교리를 세우는 자체가 결국 체어리티를 죽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후대의 인간에게는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교리로 이해하며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와 결합하느냐,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완결적인 신앙으로 남느냐에 있습니다.

 

결국 AC.345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 신앙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말씀과 교리를 많이 알고 신앙을 강하게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기 우월성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세상적인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낸다면 우리는 농사하는 가인의 모습을 우리 자신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버린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면서 그 신앙의 생명과 목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를 잃은 데 있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이것이 AC.341에서 시작하여 AC.345에서 다시 한번 확정되는 창4:2의 결론입니다.

 

 

 

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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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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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4

신앙,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앙의 교리(doctrine of faith)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입니다(12:28-35; 22:34-39). What avails faith, that is, the memory-knowledge [scientia], the knowledge [cognitio], and the doctrine of faith, but that the man may become such as faith teaches? And the primary thing that it teaches is charity. (Mark 12:28-35; Matt. 22:34-39)

 

28서기관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분이시요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5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12:28-35)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중의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4-39)

 

이것이 신앙이 지향하는 모든 것의 목적입니다.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이나 교리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This is the end of all it has in view, and if this be not attained, what is all knowledge or doctrine but a mere empty nothing?

 

해설

AC.344는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문제를 매우 날카로운 질문 하나로 압축합니다.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낮추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하여 주어졌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scientia), 인식 지식(cognitio), 그리고 신앙의 교리(doctrine of faith)를 차례로 언급한 뒤, 그 모든 것의 목적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진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사람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으며, 그 진리를 아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 그리고 교리를 불필요하거나 낮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말씀의 내용을 배우고 기억해야 하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고, 서로 관련된 진리들을 질서 있게 연결하여 교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도 올바르게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그 모든 것에 무엇을 위해서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지식과 교리는 그 자체로 종착점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람이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목적은 사람이 단지 무엇을 믿는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믿는 진리가 가르치는 대로 그러한 사람이 되는데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가 자기 삶의 성질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정확한 교리 체계만을 만들어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의지와 사랑과 삶을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이 가르치는 여러 항목 가운데 조금 더 중요한 한 항목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진리들이 궁극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야 할 방향과 목적이 체어리티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342에서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은 자신에게 머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이 먼저 신앙을 만들고, 그다음 행위를 쌓아 마침내 자기 힘으로 체어리티를 만들어 낸다는 기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도 체어리티도 그 생명과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지만,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고 살아 있는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12:28-35와 마22:34-39가 여기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두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계명의 중심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두십니다. 특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은 신앙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말할 때, 그는 단순히 교리보다 윤리적 행동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계명과 주님에 관한 모든 참된 진리는 결국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12장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까지 말합니다. 따라서 외적인 종교 행위나 신앙고백 역시 그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으면 자기 목적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 두 복음서 인용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함께 제시된 것이므로, 각각 별도의 심화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가 목적이므로 신앙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 없는 막연한 선의나 인간적인 호감이 아닙니다.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 무엇이 주님의 질서에 맞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관계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선은 진리와 결합하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목적이 수단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단의 참된 가치를 결정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할 때 신앙은 비로소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 맞게 쓰이며,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통하여 바른 방향과 형태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AC.344의 질문은 신앙인가, 체어리티인가?가 아니라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이것을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놓으면 AC.344가 이 자리에서 등장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을 없애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고 교리로 정리하여 그것을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AC.340에서는 그 결과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어 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4는 그 분리가 왜 치명적인지를 목적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는 것은 단순히 두 요소가 서로 떨어지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잃는 것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가인이 아벨에게서 분리된다는 것은 신앙이 자신이 향해야 할 목적에서 분리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무엇인가 한 부분이 조금 부족한 신앙이 아니라 자기 생명과 목적을 잃은 신앙이 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두고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단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AC.344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과 교리는 아무것도 아닌 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지식과 교리 그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과 생명에서 분리된 지식과 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방대하고 정교한 신학 체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께로 돌이키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선을 행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아직 영적인 목적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람 안에서 악을 드러내고, 회개하게 하고, 삶을 바꾸며, 이웃을 향한 선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진리는 더 이상 머리에만 있는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이 점은 AC를 공부하는 우리에게 특히 직접적인 질문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 체어리티, 퍼셉션, 상응, proprium, 리메인스, 속 사람과 겉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같은 수많은 아르카나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귀하며,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아르카나를 더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의 오류를 더 잘 찾아내는 사람이 되는 데 그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잘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며 이웃의 참된 선을 더 구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아르카나에 대한 지식마저 자기 우월성을 세우는 수단이 된다면, 우리는 가인의 문제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가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배운 진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게 하고, 악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지식은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귀한 수단이 됩니다.

 

결국 AC.344의 핵심은 단순히 지식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말보다 훨씬 정교합니다. ‘진리는 삶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신앙의 교리는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중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입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을 귀하게 여긴 데 있지 않고 신앙을 그 목적에서 분리하여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게 한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44가 우리에게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도 나는 얼마나 정확한 신앙을 알고 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믿는 진리는 주님께서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쓰이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고, 진리가 삶이 되며,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실 때 비로소 신앙은 자신의 목적에 이르고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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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한 수도사와 사과나무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수도사는 사과를 먹고 싶어 작은 묘목 하나를 심고 정성껏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연약한 사과나무가 잘 자라도록 이슬비를 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다음에는 햇볕을, 또 적당한 바람을, 나무가 커진 뒤에는 충분한 소낙비를 구합니다. 가을이 되어 열매가 맺힐 무렵에는 서리가 알곡을 여물게 한다고 생각하여 적당한 서리까지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수도사는 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자기가 판단하여 그때그때 하나님께 요청했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서리를 맞은 사과나무가 얼어 죽어 버립니다. 수도사는 실망합니다. 자신은 사과나무가 잘되기를 바라며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하나님께 구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이 수도사가 이웃 수도원에 갔더니 그곳에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놀란 수도사가 어떻게 이렇게 잘 길렀느냐고 묻자 다른 수도사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사과나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사과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 제일 잘 아십니다.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적당한 것을, 가장 적당한 양만큼 주셔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시오.’ 그는 이슬비와 햇볕과 바람과 소낙비와 서리의 시기와 양을 자신이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사과나무를 만드신 분이 사과나무를 자신보다 더 잘 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려는 핵심도 분명합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짧은 이야기는 놀랍도록 깊은 ‘신적 섭리’의 문제를 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도사의 잘못은 기도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아주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사과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은 이슬비가 필요하고, 다음에는 햇볕이 필요하며, 이제는 바람이 필요하고, 이만큼 자랐으니 소낙비가 필요하고, 가을에는 서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정한 순서대로 하나님께 그것을 요청합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인데,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계획은 이미 사람이 세워 놓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실행해 주시는 분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서도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이미 가장 좋은 결과를 정해 놓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 일이 이렇게 풀려야 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변해야 하며, 이 문은 열리고, 저 문제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기도가 점점 깊어진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 받아 내는 것’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원하게 되는 것’으로 중심이 이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두 번째 수도사의 기도가 아름답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과나무를 심었고 돌보았으며 열매를 기다렸습니다. 다만 자기가 알지 못하는 영역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 나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이 나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체념이 아닙니다. 창조주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이 태도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그림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지금 보고 있는 한순간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적 삶에서 영원한 삶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의 평안과 성공과 문제 해결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보십니다. 우리는 ‘이 일이 잘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일이 잘되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에 유익한지를 보십니다. 우리는 오늘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영원을 보십니다. 바로 이 시야의 차이가 첫 번째 수도사와 두 번째 수도사의 차이 속에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우리가 구한 ‘햇볕’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가 내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바람이 불고, 생각하지 못했던 겨울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주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을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맑은 날만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도, 기다림도, 좌절도, 때로는 우리의 계획이 무너지는 경험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쓰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난 자체가 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과 고통을 만들어 우리를 교육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자연계의 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주님께서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향하도록 끊임없이 굽혀 이끄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에서 사과나무는 인간의 거듭남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상징이 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 햇빛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도 필요하고 바람도 필요하며 계절의 변화도 필요합니다. 인간의 영적 성장 역시 한 가지 경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위로받을 때도 있고, 시험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으며, 말씀의 진리가 밝게 이해될 때도 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을 조금씩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느 한순간만 떼어 놓고 ‘이것은 왜 필요합니까?’라고 묻지만, 주님께서는 한 사람의 거듭남 전체를 보고 계십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시험을 거듭남의 중요한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사람 안에 깊이 숨어 있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평온할 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잘될 때에는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길이 막히며, 내 판단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내 안의 proprium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왜 내 뜻대로 되지 않는가?’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도의 응답보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험이 우리 자신을 더 깊이 보여 주기도 합니다.

 

첫 번째 수도사의 사과나무가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나무를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 목적 자체는 선합니다. 그러나 그 선한 목적 속에도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는 자기 지혜가 숨어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proprium은 노골적인 악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일과 선한 일 속에도 아주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위해 이것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계획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과까지 결정한 다음 주님께 그 계획을 승인하고 도와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단순히 악한 욕망만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안다’는 자기 지혜까지 조금씩 내려놓게 됩니다.

 

그렇다고 두 번째 수도사의 태도를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섭리를 믿는 삶은 수동적인 삶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야 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농부라면 계절을 살펴야 하고, 병이 나면 의사를 찾아야 하며, 맡은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과나무를 심었다면 물도 주고 가지도 돌봐야 합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면서 ‘결과까지 내가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섭리를 믿는다’는 말의 가장 실제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내일의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실하게 판단하되 내가 알 수 없는 것까지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되 ‘반드시 이것이어야 합니다’라고 주님의 손을 묶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내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도 즉시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결론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장면을 보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전체 이야기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이야기에 이어 요한복음 1516절, 곧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앞선 다섯 번째 ‘연못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포도나무와 가지의 말씀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지난 영상의 중심이 ‘주님 안에 거하라’였다면 이번 영상은 ‘그 안에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목적은 단순히 살아남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열매’는 특히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삶으로 나타나는 선, 곧 선한 행위와 쓰임에 상응합니다. 신앙은 머릿속에서 진리를 많이 아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삶이 되고, 이웃을 향한 선한 행위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열매가 됩니다. 따라서 ‘열매를 많이 맺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교회가 커지고, 사역의 결과가 많아진다는 의미보다 훨씬 깊습니다. 한 인간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실제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 정직해지고, 더 온유해지고, 자기 욕심을 덜 따르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과나무 이야기의 마지막 열매는 단순히 ‘사과’가 아닙니다. 주님께 맡긴 삶에서 맺히는 선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맺게 하시는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나무를 심고 돌보지만,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인간이 해야 할 고백은 ‘내가 이렇게 훌륭한 열매를 맺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 일을 이루셨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와도 다시 연결됩니다. 기도의 가장 깊은 목적은 세상의 조건을 내 뜻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나 자신이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슬비를 주십시오. 햇볕을 주십시오. 바람을 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서 기도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지금 제게 무엇이 필요한지 저는 다 알지 못합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충실히 행하게 하시며, 제가 알 수 없는 것은 주님의 섭리에 맡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기도를 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걱정, 근심,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 알아서 해주십시오’라는 말도 이런 의미에서 들으면 참 편안합니다. ‘알아서 해주십시오’는 무책임의 말이 아니라 신뢰의 말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들고 염려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몫과 주님의 몫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내게 주어진 선을 행하고, 전체의 결과는 주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어쩌면 우리의 많은 근심은 미래에 대한 지식까지 가지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일이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저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 하며 아직 오지 않은 날의 짐까지 오늘 짊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 전체를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필요한 만큼의 빛을 주십니다. 그것으로 오늘의 한 걸음을 걷게 하십니다. 내일이 오면 내일 필요한 빛을 다시 주십니다. 이것이 섭리 아래 사는 사람의 평안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수도사의 차이는 ‘기도한 사람과 기도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아닙니다. 둘 다 기도했습니다. 차이는 ‘내가 알고 있으니 그대로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기도와 ‘주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니 저는 제 몫을 행하며 주님께 맡깁니다’라는 기도 사이에 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결과를 자기 손에 쥐고 싶어 하는 기도이고, 후자는 결과를 주님의 지혜에 맡기는 기도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기도 역시 전자에서 후자로 조금씩 옮겨갈 것입니다.

 

이번 ‘사과나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해야 할 선을 충실히 행하면서, 내가 볼 수 없는 내일과 영원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의 지혜와 사랑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수도사의 기도와 두 번째 수도사의 기도를 나란히 놓으면 아주 짧은 차이가 보입니다. ‘주님, 제가 보기에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에서 ‘주님, 주님께서 보시기에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로 바뀌는 것입니다. 말은 몇 글자밖에 달라지지 않지만 그 사이에는 proprium에서 섭리로, 자기 지혜에서 주님의 지혜로 옮겨가는 긴 거듭남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사과나무 한 그루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그 나무를 만드신 분이 가장 잘 아신다면, 하물며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보고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얼마나 더 잘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기도는 결국 주님께 무엇을 알려드리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아시는 그 선한 뜻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여는 일이 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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