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4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한 인격 안에 있지만 서로 섞이지 않는 두 본성이다’ - 주님의 인성은 영원히 인간적인가, 아니면 완전히 신성해졌는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십니다. 그분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지니시고, 인성에 있어서는 죄를 제외하고 우리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것입니다. 이 두 본성은 한 인격 안에 연합되어 있지만 서로 섞이거나 변하지 않으며, 분리되거나 나뉘지도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해는 교회사에서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 불리며,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에서 정통 기독론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가르침을 살펴보면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뒤 십자가와 부활을 거쳐 이루신 영화는 과연 무엇을 변화시켰을까요? 신성과 인성은 단지 한 인격 안에 결합되어 있을 뿐, 각각의 본성으로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주님께서는 자신이 취하신 인성을 실제로 신성하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인 신적 인성을 이루신 것일까요? 이 질문은 단순히 두 본성의 관계를 설명하는 신학적 용어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인성이 과연 어떤 인성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시며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라고 고백하면서, 두 본성이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할 없이, 분리 없이’ 연합되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앞의 두 표현은 신성과 인성이 뒤섞이거나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바뀌는 것을 부정하고, 뒤의 두 표현은 그리스도를 두 인격으로 나누거나 신성과 인성을 서로 떨어뜨리는 것을 부정합니다. 따라서 칼케돈 신조는 예수님 안에 신과 인간이라는 두 인격이 따로 존재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본성의 고유한 특성을 보존하면서도 한 분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지키려는 교리입니다. 이 신조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다가 그분의 참된 인성을 약화시키거나, 반대로 신성과 인성을 지나치게 분리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일성을 훼손할 위험을 경계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비교할 때에도 전통 교리가 신성과 인성을 단순히 느슨하게 결합된 두 실체로 이해한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쟁점은 그 연합의 깊이와 완성, 특히 주님의 영화 이후 인성의 상태에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 역시 신성과 인성이 단순히 뒤섞인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35항에서 그는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받으신 인간 본성이 신적 본질로 그대로 변하거나 신적 본질과 혼합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 점에서는 칼케돈 신조와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같은 항에서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을 점차 벗으시고, 그분 안에 계신 신성으로부터 새로운 인성을 입으셨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신적 인성’(Divine Human)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화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 본성이 신적 본질과 섞여 신성이 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인성에 속한 것을 점차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나온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인성 자체가 신성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전통적인 두 본성 교리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별개의 유한한 인간 본성으로 남아 있는 인성이 아니라, 완전히 영화된 신적 인성입니다.
이러한 영화의 과정을 이해하려면 주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겪으신 두 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DL.35와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104항에서 주님의 지상 생애에 ‘비움’ 또는 낮아지심의 상태와 영화의 상태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 안에 계실 때 시험을 받으시고 고통을 겪으셨으며,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자신을 아버지보다 낮은 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영화의 상태에서는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이며,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계시고 자신도 아버지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서로 다른 두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신성과 아직 영화되어 가는 인성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요14:10에서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시고, 요10:30에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고 선언하신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시험을 이기실 때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에 속한 것을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나온 인성을 입으셨으며,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과 부활을 통해 이 과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화는 주님의 지상 생애에 부수적으로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성육신과 구속의 목적을 완성하는 결정적인 역사입니다.
여기서 성경의 부활 본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눅24:39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을 보라고 하시며, 자신은 살과 뼈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20:27에서는 도마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단지 비물질적인 영으로만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성을 지니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전통적인 기독론은 이를 부활 이후에도 주님의 참된 인성이 보존된다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신적 인성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분은 일반적인 인간처럼 물질적인 육체를 무덤에 남겨 두고 영으로만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인성 자체가 영화되었기 때문에 무덤도 비어 있었으며, 그분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말씀들이 전통적인 두 본성 교리를 저절로 반박하는 것은 아닙니다. 양쪽 모두 부활하신 주님이 실제로 살아 계신 한 분 그리스도임을 고백하지만, 그분의 부활한 인성이 어떤 본성을 지니는지에 관해 서로 다르게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부활이 단순한 육체의 소생이 아니라 주님의 인성이 완전히 신성하게 된 영화의 완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영혼과 몸의 비유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TCR.98-101에서 그는 주님 안의 신성과 인성이 인간 안의 영혼과 몸처럼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영혼과 몸은 서로 구별되지만 두 사람이 아니며, 하나의 인격을 이룹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서 성부는 그분의 내적인 신성이고, 성자는 그 신성에서 비롯된 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주장은 단순히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한다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의 신성이 영혼처럼 인성 안에 거하시고, 인성이 영화됨으로써 신성과 완전한 하나를 이루었다고 가르칩니다. 일반 인간의 영혼과 몸은 각각 유한하지만, 주님의 경우 그분의 내적인 생명은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성도 영화의 과정을 통해 신적 인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가 되었다’는 말은 신성과 인성이 서로 뒤섞여 구별할 수 없는 어떤 제삼의 본성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성이 인성 안에, 인성이 신성 안에 완전하게 결합하여 한 분 주님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두 본성의 단순한 병존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의 살아 있는 완전한 하나 됨입니다.
이 가르침은 주님께서 오늘도 인간과 어떻게 관계하시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골2:9는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씀하며, 요14:9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말씀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우리에게 나타나신 주님이 서로 다른 신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그분의 신적 인성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신성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주님의 인성을 영원히 신성과 구별되는 유한한 인간 본성으로만 생각한다면, 신앙의 실제적인 사고 속에서 주님의 신성과 인성을 서로 다른 차원에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기독교가 반드시 그러한 분리를 가르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칼케돈 신조는 그것을 명시적으로 금지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한 인격이라는 고백에도 불구하고 신성과 인성을 실제 사고에서 분리해 생각하는 경향을 비판하며, 부활하신 주님의 인성 자체가 신성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분의 인성은 우리가 신성에 도달하기 위해 잠시 통과해야 하는 외적인 껍질이 아닙니다. 바로 그 신적 인성 안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이 계시며,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예배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경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을 벗으셨다고 말할 때, 그것을 주님의 인간적인 경험과 사랑과 지혜가 아무 의미 없이 폐기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지상에서 겪으신 배고픔과 피로, 고난과 시험, 십자가의 고통은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인간의 삶을 외적으로 흉내 내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인성을 취하셔서 인간의 조건 안에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영화가 그 인성을 단순히 인간적인 상태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인성 안에 있던 유한한 것들을 벗으시고 신적인 것으로 완성하신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적 인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분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그 인성을 통해 지옥의 세력을 이기시고, 이제 신적 인성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직접 다가오실 수 있는 분이 되셨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영화 교리는 단순한 기독론적 차이를 넘어 주님의 구속과 구원, 그리고 인간과 주님 사이의 결합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한 인격 안에 있지만 서로 섞이지 않는 두 본성이다’라는 말에서 보존해야 할 진리는 주님께서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그분이 한 인격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신성과 인성이 서로 섞여 본래의 의미를 잃는다는 생각을 경계하는 것 역시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은 신성과 인성이 영화 이후에도 각각의 본성으로 구별된 채 남아 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신성과 인성을 한 인격 안에 결합하신 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을 점차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나온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마침내 인성 자체를 완전히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영화이며, 신적 인성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지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함께 존재하는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고난과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결과, 그분의 인성에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지금 내가 믿고 사랑하며 예배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인성은 여전히 유한한 인간 본성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이 거하시는 신적 인성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질문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신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끕니다. (PR.004 해설)
요약
전통적인 두 본성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며 한 인격이심을 보존하려는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신성과 인성이 뒤섞이지 않는다는 가르침 자체는 스베덴보리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간 본성이 영화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인성을 점차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나온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인성 자체를 신성하게 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칼케돈 기독론과 스베덴보리의 기독론 사이의 핵심 차이는 신성과 인성의 단순한 결합 여부가 아니라, 주님의 영화가 인성을 어디까지 변화시켰는가에 있습니다. 이 차이는 실제적인 교리 차이이며, 단순한 표현상의 차이로 축소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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