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4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믿음이 진실하다면 삶의 변화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 믿음의 열매는 저절로 맺히는가, 주님의 은혜에 응답하며 자라나는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가르침은 매우 익숙합니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으면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역사하시고, 이전에 사랑하던 죄를 멀리하며, 점차 주님을 닮아 가는 새로운 삶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믿음이 단순한 지식이나 입술의 고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떤 신자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믿음이 진실하다면 삶의 변화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므로, 지금 당장 자신을 살피고 잘못된 습관을 고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변화시키실 때가 되면 변화가 시작될 것이고, 아직 변화되지 않은 부분은 성령께서 앞으로 해결해 주실 문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한다는 진리가 들어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책임을 뒤로 미루는 위험도 숨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믿음이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변화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되,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합리성을 사용하여 그 역사에 실제로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믿음과 체어리티, 회개와 거듭남의 관계는 바로 이 질문을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참된 믿음이 선한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지만, 그 열매가 아무런 노력 없이 자동적으로 생긴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3장은 성화를 죄의 지배가 약화되고 신자가 거룩함 안에서 자라나는 실제적인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육체의 욕망과 성령을 따르는 새로운 생명 사이에 계속적인 싸움이 일어난다고 가르칩니다. 제16장 2항은 선행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로 설명하며, 3항은 선행을 행할 능력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에게서 오지만, 신자들이 특별한 감동이 찾아올 때까지 자신의 의무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공식 교리를 ‘믿기만 하면 언젠가 자동으로 선해진다’는 주장으로 소개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다만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믿음과 삶의 관계를 설명할 때 ‘참으로 믿으면 열매는 자연히 따라온다’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며, 그 말이 회개와 자기 성찰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의 진실성을 과거의 회심 경험이나 현재의 확신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변화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아도 그것을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참된 믿음이 열매를 맺는다는 가르침 자체가 아니라, 그 열매가 어떤 영적 질서를 통해 맺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믿음과 열매의 관계를 매우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요15:4-5에서 주님께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제자들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단순히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요15:10에서는 자신의 계명을 지키면 자신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약2:17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며, 약2:22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믿음과 행함은 서로 무관한 두 활동이 아닙니다. 믿음은 인간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과 관계되며, 행함은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사랑과 결합하여 나타나는 일과 관계됩니다. 갈5:6에서 바울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강조한 것도 같은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열매는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생겨나는 외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생명의 변화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생명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는다는 비유는 인간이 스스로 선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지만, 그 비유를 근거로 인간에게 회개와 순종의 책임이 없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108-109에서 믿음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직 살아 있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며, 그 말씀이 참되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보복을 상상하고, 상대방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면서도 그런 마음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해에는 용서에 관한 진리가 있지만 의지에는 여전히 원망과 적개심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간이 오래 지난다고 해서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자신의 원망을 계속 정당화하면 그 감정은 더욱 깊은 습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보복하려는 마음이 주님의 사랑에 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실제로 그 악한 의도에서 돌아서려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단순한 호의나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체어리티와 결합한다는 것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자신의 의지 안에서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실제로 살아가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자연적인 사랑이 언제나 주님의 선과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인정한 진리를 실제로 행하려 할 때, 오랫동안 익숙해진 욕망과 습관의 저항을 경험합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싶어질 수 있으며,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자기 뜻을 거스르는 사람에게 분노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571에서 인간이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상태로 변화되는 과정을 개혁과 거듭남이라는 두 상태로 구별합니다. 개혁의 상태에서는 이해가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지만, 거듭남의 상태에서는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여 인간의 사랑과 삶 자체가 새로워집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신이 믿는 진리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그의 의지가 이미 그 진리와 완전히 결합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와 의지 사이에는 실제적인 변화의 과정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악한 사랑과 맞서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83에서도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기 시작할 때 개혁이 일어나고, 그 악을 실제로 멀리하며 싸워 이기는 과정에서 거듭남이 진행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삶의 변화가 단순한 시간의 경과가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 아래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실제로 새로워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변화를 이루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 악을 멀리하고 선을 사랑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고 일방적으로 그를 선하게 만드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DP.100-128은 인간이 외적인 삶에서 악을 죄로 여겨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멀리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서도 악을 제거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as if of oneself)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악을 멀리하는 것처럼 경험하지만, 실제로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과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만일 사람이 ‘내가 할 일은 없고 주님께서 언젠가 나를 변화시키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악을 계속 허용한다면, 그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유와 합리성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노력으로 반드시 선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공로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도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여 실제로 행동하되, 그 선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은혜와 인간의 실천은 서로 경쟁하는 두 힘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가 인간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근원이며,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은 그 은혜를 실제로 받아들이도록 마련된 영적 질서입니다.
여기서 회개가 차지하는 위치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TCR.509-510에 따르면 참된 믿음과 체어리티는 회개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 안에 교회가 실제로 세워지는 일도 회개와 깊이 관계됩니다. 또한 TCR.528-530은 참된 회개가 자신의 삶을 살피고, 죄를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거나 언젠가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구별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분노 때문에 가족에게 반복적으로 상처를 주면서도 ‘주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실 때가 되면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잘못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미래로 미루고 있는 셈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분노가 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화가 날 때 상대방을 모욕하는 말을 멈추며, 잘못했을 때 사과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실제로 노력한다면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때로 매우 작고 더디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실천은 단순한 감정의 변화보다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그의 내면을 새롭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믿음이 충분히 자란 다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부수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실제적인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삶의 변화를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고 모든 잘못을 즉시 고쳐야 하는 부담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속도와 방식으로 경험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반복하던 악한 행동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같은 문제를 두고 오랜 시간 시험을 겪을 수 있습니다. 또한 외적으로 나타나는 변화가 크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내면까지 반드시 선하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높이거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도 행동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32-534에서 참된 회개가 외적인 행위뿐 아니라 의지의 의도까지 살피는 것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행동이 얼마나 빨리 달라졌는가만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악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으며 어떤 사랑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전에는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하던 사람이 이제 그 거짓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려 한다면, 아직 모든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그 안에는 중요한 방향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반복되는 실패가 있다고 해서 주님의 은혜가 전혀 역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실패를 정당화하고 악을 계속 사랑하는 것과, 실패할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악에서 돌아서려는 것은 서로 다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거듭남을 판단할 때에는 조급한 자기 정죄나 다른 사람에 대한 단정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오늘 실제로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믿음이 진실하다면 삶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표현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이 말에서 ‘자연스럽게’라는 표현이 주님의 사랑을 깊이 받아들인 사람이 점차 선을 사랑하게 되고, 이전에는 의무로 여기던 선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게 된다는 뜻이라면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인간은 선을 행하는 일을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라는 말이 인간이 자신의 악과 싸우거나 실제로 회개할 필요 없이 시간이 지나면 변화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오류입니다. 어떤 습관은 반복할수록 더욱 깊어지며, 자기중심적인 사랑은 정당화할수록 더욱 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은 처음부터 아무런 노력 없이 선한 삶이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계속되면서, 점차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이 형성되고 그 사랑에서 선한 행동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절제하고 노력해야 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진리가 자신의 사랑이 되어 선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변화의 자연스러움은 회개를 생략해도 된다는 이유가 아니라,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 인간의 사랑이 새로워질 때 나타나는 영적 성숙의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일에도 신중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도 눈에 띄는 변화가 없어 보일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신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상당한 변화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보이는 행동만으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 전체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변화는 자기 자신밖에 알지 못하는 내적인 싸움에서 일어나고 있을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선한 행동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목적에서 비롯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믿음에는 변화가 따른다’는 가르침을 다른 사람의 구원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가르침은 자기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나는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보다, 그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악을 얼마나 정직하게 살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선한가보다, 어제까지 정당화하던 악을 오늘은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려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외적인 성과에 따라 기계적으로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라, 각 사람의 자유와 상태를 아시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거듭남의 길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의 열매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진리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믿음이 진실하다면 삶의 변화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입니까? 참된 믿음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보존해야 할 중요한 진리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할 때 인간은 이전의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인간의 자유로운 회개와 실천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그가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고치려 노력해야 하지만, 그 모든 참된 선의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변화는 단순히 기다려야 할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오늘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진리에 응답함으로써 시작하고 계속해야 할 실제적인 과정입니다. 물론 변화의 속도와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며, 반복되는 시험과 실패 때문에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성급하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변화가 더디다는 사실과 변화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는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언젠가 좋은 사람이 될 것인가?’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주님께서 알려 주신 진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멀리하려 하고 있는가?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지혜가 내 삶에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도록 오늘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의 열매는 시간이 저절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생명에 따라 살아갈 때 맺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믿음과 삶의 변화, 그리고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 열매 맺는 영적 생명의 의미입니다. (PR.004 해설)
요약
‘믿음이 진실하다면 삶의 변화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라는 말에는 참된 믿음이 단순한 지식이나 신앙고백에 머물지 않고 실제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는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회개와 실천 없이 시간이 지나면 변화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이해된다면 오류가 됩니다. 개신교의 공식 교리 역시 성화를 죄와 싸우며 거룩함 안에서 성장하는 실제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고, 신자가 특별한 감동을 기다리며 자신의 의무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108-109에서 믿음과 체어리티가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처럼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571은 이해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개혁과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는 거듭남을 구별합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83과 DP.100-128에 따르면 인간은 악을 죄로 인정하고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멀리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그의 내면을 새롭게 하십니다. 따라서 삶의 변화는 주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 분리되지 않는 영적 질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특히 회개는 믿음이 충분히 성장한 다음에야 나타나는 부수적인 결과가 아니라, 믿음이 실제 생명으로 변화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TCR.509-510, 528-530). 물론 거듭남의 속도와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며, 반복되는 실패만으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가 얼마나 빠르게 나타나는가보다, 자신의 악을 어떻게 대하고 주님의 진리에 실제로 응답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결국 참된 믿음의 열매는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악을 멀리하며 선한 삶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맺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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