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3

치는 (shepherd of the flock)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에서 아주 익숙하게 사용하는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shepherd)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flock)라고 합니다.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아니며, 선으로 인도받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떼에 속하지 않습니다. 목자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씀의 인용으로 확증할 필요는 거의 없지만, 다음 구절들을 인용할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That ashepherd of the flocki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must be obvious to everyone, for this is a familiar figure in the Word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s. He who leads and teaches is called ashepherd,and those who are led and taught are called theflock. He who does not lead to the good of charity and teach it, is not a true shepherd; and he who is not led to good, and does not learn what is good, is not of the flock. It is scarcely necessary to confirm this signification ofshepherdandflockby quotations from the Word; but the following passages may be cited. In Isaiah: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날에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30:23) The Lord shall give th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owest the ground, and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in that day shall he feed thy cattle in a broad meadow, (Isa. 30:23)

 

여기서 땅의 소산의 양식(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다시 이사야에서, where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denotes charity. Again:

 

그는 목자같이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0:11) The Lord Jehovih shall feed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shall gather the lambs into his arm, and carry them in his bosom, and shall gently lead those that are with young. (Isa. 40:11)

 

시편에서, In David:

 

요셉을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80:1) Give ear, O Shepherd of Israel, thou that leadest Joseph like a flock; thou that sittest on the cherubim, shine forth. (Ps. 80:1)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2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 3목자들이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6:2, 3) I have likened the daughter of Zion to a comely and delicate woman; the shepherds and their flocks shall come unto her, they shall pitch tents near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everyone his own space.(Jer. 6:2, 3)

 

에스겔에서, In Ezekiel:

 

37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38제사 드릴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알리라 하셨느니라 (36:37, 38) Thus saith the Lord Jehovih, I will multiply them as a flock of man, as a hallowed flock, as the flock of Jerusalem in her appointed times; so shall the waste cities be filled with the flock of man. (Ezek. 36:3738)

 

이사야에서, In Isaiah:

 

게달의 무리는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60:7) All the flocks of Arabia shall be gathered together unto thee, the rams of Nebaioth shall minister unto thee. (Isa. 60:7)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떼를 모으는(gather the flock) 사람들이며,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떼를 흩는(scatter the flock) 사람들입니다.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ey who lead the flock to the good of charity are they whogather the flock”; but they who do not lead them to the good of charityscatter the flock”; for all gathering together and union are of charity, and all dispersion and disunion are from want of charity.

 

해설

AC.343은 앞의 AC.341-342에서 아벨을 치는 라고 한 이유를 말씀 전체에 익숙한 목자와 의 표상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AC.341에서는 치는 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AC.342에서는 체어리티를 의미하는 레위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치는 를 표상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3은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하면서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떼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목자=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이라는 대응 관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AC.343 전체를 여는 핵심 질문은 목자가 얼마나 많이 가르치는가?가 아니라 목자가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하는가?입니다. 그 목적지는 분명히 체어리티의 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라는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참된 목자는 사람에게 무엇이 참인지를 알려 주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그 신앙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고, 마침내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이루시도록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렇다고 진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목자는 분명히 인도하고 가르치는사람이며, 양 떼 역시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는사람들입니다. 참된 선을 행하려면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진리를 통하여 배워야 합니다. 다만 진리는 그 자체에 사람을 붙잡아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가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세운 데 있었다면, 참된 목자의 역할은 정반대로 진리를 통하여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의미가 말씀 전체에서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사실 많은 인용으로 확증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면서도 여러 구절을 제시합니다. 이 구절들을 각각 독립된 주제로 확장하기보다 하나의 공통된 그림으로 읽는 것이 AC.343의 의도에 더 잘 맞습니다. 30:23에서는 주님께서 비를 주시고 땅이 양식을 내며 가축이 넓은 목장에서 먹는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땅의 소산의 양식을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80:1에서는 주님을 이스라엘의 목자’, 요셉을 같이 인도하시는 라고 부릅니다. 6:2-3에서는 목자들과 양 떼가 나타나고, 36:37-38에서는 사람들을 제사 드릴 로 표현하며, 60:7에서도 양 무리가 모여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모든 인용의 중심은 목자와 양 떼라는 말이 말씀에서 사람을 영적으로 인도하고 선으로 이끄는 관계를 나타내는 익숙한 표상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40:11은 이 전체 의미를 가장 아름답게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주 여호와께서 친히 목자같이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십니다.여기서는 참된 목자의 원형이 결국 주님 자신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신다는 일련의 모습은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영적 생명을 위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흩어진 것을 모으시며, 연약한 것을 품으시고, 각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사람인 목자가 참된 목자인 것은 자기에게서 목자직의 능력이나 선이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 쓰임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 인도하며, 자기 생각으로 먹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하여 사람들이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AC.343은 목회와 가르침을 바라보는 상당히 엄중한 기준도 제시합니다. 성경을 많이 가르치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많은 사람을 이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참된 목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이 사람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배우면서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선을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 가르침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지식은 많아지는데 자기 교리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며, 끊임없이 편을 나누고 적을 만들어 간다면 그 가르침이 정말 AC.343이 말하는 체어리티의 으로 사람을 인도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흐리거나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가르치는 일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목자는 진리를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양 떼의 편에서도 똑같이 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선으로 인도받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양 떼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회에 등록되어 있거나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듣는다는 외적인 소속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된 양 떼는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고 그 선으로 인도받으려 합니다. 목자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해야 한다면 양 떼 역시 그 선을 배우고 받아들여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목자와 양 떼 모두의 중심에는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목자는 자기 권위와 지식을 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양 떼도 단지 종교적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하시고, 사람은 그 인도를 받아 실제 삶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AC.343의 마지막은 이 모든 설명을 모임과 결합이라는 매우 중요한 원리로 모읍니다.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임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모여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교회에 속하고 같은 예배에 참석하며 같은 교리를 고백한다고 해서 반드시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결합을 이루는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반대로 외적인 생각과 판단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의 참된 선을 바라며 주님 안에서 이웃의 유익을 구한다면 더 깊은 차원에서 결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리적 차이가 모두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 주고 체어리티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다만 진리가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생명을 가지려면 체어리티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마지막 원리에서 가인과 아벨의 대비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의 길은 분리의 길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세우고,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며, 마침내 자기 형제인 아벨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치는 입니다. 체어리티는 양 떼를 선으로 인도하고, 모으고, 결합합니다. 특히 사40:11의 주님은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는목자로 나타나시므로, 가인이 보여 주는 분리와 목자이신 주님이 보여 주시는 모음은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가인은 나쁜 사람, 아벨은 착한 사람이라는 도덕적 대비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는 신앙의 질서를, 아벨은 신앙이 본래 결합되어야 할 체어리티의 선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신앙이 단지 하나의 덕목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자신이 사람을 선으로 인도해야 하는 목적과 생명을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결국 AC.343참된 목자는 어디로 인도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답은 체어리티의 선으로입니다. 참된 목자는 진리를 가르치지만 사람을 지식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 진리가 삶이 되고 선이 되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참된 인도의 근원은 사람인 목자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십니다. 사람은 그 주님의 목자직에 쓰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AC.343은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돌보는 모든 자리에서 우리는 같은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전하는 진리는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있는가?그리고 우리 자신이 양 떼의 자리에서는 나는 단지 진리를 듣고 아는 머무르는가, 아니면 주님의 인도를 받아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고 선을 행하려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있는 곳에서는 모이고 결합하며, 체어리티가 사라지는 곳에서는 흩어지고 분리됩니다. 이것이 치는 아벨을 통하여 AC.343이 보여 주는 참된 목자의 모습입니다.

 

 

 

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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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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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2

교회의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야곱에게서 레아의 아들들도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르우벤(Reuben) 신앙을, 시므온(Simeon)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Levi)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29:32-34). 이런 이유로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치는 (shepherd of the flock) 표상했습니다. That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chur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nothing else than faith and charity. The same is signified by the first children of Leah from Jacob; “Reubendenoting faith; “Simeon,” faith in act; andLevi,” charity (Gen. 29:32, 33, 34), wherefore also the tribe of Levi received the priesthood, and represented theshepherd of the flock.”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아들을 낳았으니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29:32-34)

 

체어리티는 교회의 번째 자손이므로 형제(brother)라고 하며, 이름을 아벨(Abel)이라고 합니다. As charity is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t is calledbrother,and is namedAbel.

 

해설

AC.342는 바로 앞 AC.341교회의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과 형제가 이를 의미한다는 설명을 말씀의 다른 곳을 통하여 뒷받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잉태하고 낳는다는 표현은 AC.339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 안에서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다른 상태로부터 생겨나는 것을 출생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교회 안에서 참으로 생겨나야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신앙과, 그 진리가 선과 삶으로 결합되어 나타나는 체어리티입니다. 이 둘은 서로 독립하여 경쟁하는 두 요소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적 생명을 이루도록 결합되어야 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야곱과 레아에게서 난 첫 세 아들, 곧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를 가져옵니다. 르우벤은 신앙,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이 세 이름을 함께 놓으면 AC.342가 보여 주려는 질서가 선명해집니다. 신앙은 단지 어떤 진리를 알고 그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받아들인 진리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렇게 삶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마침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라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이 나아가는 방향과 정반대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세우려 하지만, 말씀에 나타나는 정상적인 질서에서는 신앙이 자기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삶으로 나아가며 체어리티를 향합니다.

 

다만 이 흐름을 먼저 머리로 진리를 알고, 그다음 일정 기간 행동을 반복하면, 마지막에 자동으로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기계적인 세 단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은 인간의 반복된 행위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진리와 선을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행위로 나아가고 체어리티에 이르는 과정 전체는 인간이 스스로 선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행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이루시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또한 이것을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에 그대로 소급해서도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졌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AC.337이 말하는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는 특히 진리를 배워 삶으로 받아들이고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후대 인간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이것을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단일한 시간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29:32-34가 인용된 이유도 바로 이 정도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40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의 이름을 비롯한 여러 사례를 인용하여 고대인들이 어떤 상태와 의미를 이름에 담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AC.342에서는 같은 창29의 구절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가 차례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통하여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더 넓은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는 르우벤의 이름이 , 시므온이 들음, 레위가 연합과 연결되어 각각 더 깊은 의미를 갖지만, AC.342 자체에서는 그 세부 상응까지 모두 풀 필요가 없습니다. 이 번호가 직접 밝히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르우벤은 신앙,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레위는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창29:32-34는 세 인물에 관한 별도의 주제를 여는 인용이라기보다 AC.342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하나의 연속된 계보로 보여 주는 근거입니다.

 

이어지는 레위 지파와 제사장직에 관한 설명도 같은 중심에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레위가 체어리티를 의미하기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고 치는 를 표상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제사장직의 역사나 제도 전체로 논의를 넓히기보다, 왜 이것이 아벨의 치는 와 연결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AC.342에서는 레위 역시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그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아 치는 를 표상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벨 - 체어리티 - 치는 레위 - 체어리티 - 제사장직 - 치는 가 같은 중심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말씀의 서로 멀리 떨어져 보이는 부분들이 속뜻에서는 하나의 영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치는 를 곧바로 오늘날의 목회자와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AC.342의 직접적인 초점은 체어리티입니다.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와 연결되는 것은 참된 체어리티가 이웃의 선을 실제로 돌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단지 마음속의 따뜻한 감정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의 참된 유익을 구하며 그것을 실제 쓰임으로 행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사장직 역시 그 본질을 지위나 권위에서 찾기보다 선을 섬기고 사람을 주님의 선과 진리로 인도하는 쓰임에서 보아야 합니다. 다만 목자가 양을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한다는 이미지는 바로 다음 AC.343에서 훨씬 직접적으로 전개되므로, AC.342에서는 그 주제를 지나치게 앞당겨 확장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다시 형제라는 표현으로 돌아옵니다. ‘체어리티는 교회의 번째 자손이므로 형제라고 하며, 이름을 아벨이라고 합니다.이것은 가인과 아벨이 단지 한 부모에게서 난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넘어,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결합되어 있어야 하는 관계임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정상적인 방향이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곧 신앙에서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거쳐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가인의 비극은 바로 이 방향을 거부한 데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이고 함께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그 형제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가인이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하는 장면도 더욱 무겁게 읽히게 됩니다. 다만 그 구절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AC에서 자세히 다루는 것이 좋고, 여기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형제로서 결합되어야 한다는 데까지만 붙드는 것이 적절합니다.

 

결국 AC.342의 핵심은 신앙의 목적지는 신앙 자체가 아니다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삶으로 나아가야 하고, 삶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자신의 생명과 목적을 얻습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참된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내가 알고 믿는 진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단지 머릿속에서 더 많은 교리 지식으로 쌓이고 있는가, 아니면 실제 삶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주님께서 그것을 체어리티와 결합하시도록 받아들이고 있는가? ‘르우벤 시므온 레위는 신앙이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고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을 보여 주며, 바로 그 점에서 체어리티인 아벨이 왜 신앙인 가인의 형제인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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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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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처럼 오래된 수도사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문호 수도사가 충주봉쇄수도원에서 직접 겪은 아주 작은 일상에서 시작합니다. 수도원에는 금붕어와 비단잉어 백여 마리가 사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어느 목사님의 제안으로 연못 바닥에 자갈을 깔고 정비하기로 했습니다. 포클레인을 불러 연못을 수리하려면 먼저 그 안의 물고기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강문호 수도사가 직접 연못 안에 들어가 물고기들을 손으로 잡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물고기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자신들을 잡으려는 손이 죽이려는 손이 아니라 살리려는 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도망가는 물고기들을 보며 속으로 ‘, 이놈들아. 잡혀라. 안 잡히면 포클레인에 깔려 죽는다’고 합니다. 이 짧은 장면이 이번 영상 전체를 여는 하나의 영적 비유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장면을 바라보면 먼저 ‘섭리’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의 섭리라 하면 내가 원하는 일이 잘 풀리고, 위험에서 벗어나며,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붙잡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내가 원하는 방향과 반대로 끌려가는 것처럼 느껴지며, 지금까지 편안하게 살던 자리에서 갑자기 옮겨지는 것처럼 경험되기도 합니다. 연못 속 물고기의 눈으로 보면 자기를 붙잡는 손은 위협입니다. 그러나 연못 밖에서 전체 상황을 보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그 손이 생명을 살리는 손입니다. 물고기는 곧 포클레인이 들어온다는 것을 모르지만 사람은 압니다. 이 작은 차이에서 인간과 주님의 시야가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눈앞의 순간을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십니다. 우리는 지금 나에게 좋은 것을 구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묻는 순간에도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먼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고난과 실패를 단순히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선을 위하여 사용하실 수 있으며, 우리가 자유롭게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물고기에게는 붙잡힘이었지만 실상은 구원이었던 그 순간처럼 말입니다.

 

연못을 수리하는 동안 물고기들은 수도원에서 가장 큰 물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목욕탕에 임시로 옮겨집니다. 그런데 넓은 연못에서 살던 물고기들에게 목욕탕은 답답했는지 자꾸 물 밖으로 뛰쳐나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닥에 떨어진 물고기들을 다시 주워 넣으며 또 말합니다. ‘나오면 죽어. 물 안에 있어.’ 여기서 두 번째 영적 그림이 생겨납니다. 처음에는 ‘잡혀야 산다’였고, 이제는 ‘안에 있어야 산다’입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는 자연스럽게 요한복음 15장의 주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인간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고서는 참된 영적 생명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매우 깊이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입니다.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사랑도, 생각도,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그 근원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면서 마치 그것이 인간 자신의 것인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우리가 ‘내가 생각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살아간다’고 느끼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래야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날수록 사람은 한 가지를 점점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참된 생명은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아르카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지는 실제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가지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줄기와 뿌리에서 생명을 받아 열매를 맺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선을 행해야 하고, 실제로 악을 피해야 하며,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맡겨진 쓰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이 선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라고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질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동시에 선을 행할 힘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의 ‘잡혀서 살아라’라는 표현도 아름답게 들립니다. 물론 주님께 붙잡힌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강제로 끌고 가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지극히 존중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억지로 붙잡혀 있는 인간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그것이 생명의 길임을 깨달아 자유롭게 주님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인간입니다. 처음에는 계명이 나를 붙잡는 울타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 말라’, ‘용서하라’, ‘사랑하라’, ‘거짓을 버려라’, ‘탐욕을 버려라’ 하는 말씀들이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그 계명들이 자신을 가두는 울타리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지켜 주는 울타리였음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물 밖으로 뛰쳐나온 물고기를 생각하면 이것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물고기에게 물은 속박이 아닙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그 존재가 살아갈 수 있는 질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주님의 계명은 생명을 억압하는 규칙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질서입니다. 악을 마음껏 행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고기가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처음 몇 순간은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생명 자체를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자유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하는 자유가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 점에서 proprium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끊임없이 ‘내가 내 삶의 주인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자유다’, ‘내 판단이 옳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가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지의 모습입니다. 가지가 ‘나는 이제 줄기가 필요 없다’며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다면 그것은 독립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주님 없이 자기 지혜와 자기 능력과 자기 의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할수록 영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의 개성이 없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어 한 사람의 인상적인 목회 현장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교회에서 어떤 오해가 생겨 약 십 년 동안 교회를 떠나 있던 사람이 어느 날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무당이 굿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굿을 하던 무당이 갑자기 ‘여기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이 사람의 마음에 놀라운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나는 십 년 동안 주님을 떠나 있었는데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셨구나. 나는 주님을 버렸는데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그리고 그는 그 일을 계기로 다시 교회로 돌아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고백일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떠났지만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리메인스’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남겨 두시고 보존하십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 말씀을 들으며 느꼈던 거룩한 감동,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순간, 잘못을 뉘우치며 주님을 찾았던 경험 등은 모두 단순히 사라져 버리는 과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사람의 깊은 내면에 보존하시며, 훗날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의 신비입니다.

 

사람은 때로 아주 멀리 떠날 수 있습니다. 십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과 아무 관계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과거에 심어 두신 선과 진리를 함부로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어느 날 한 말씀을 듣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다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겪다가 오래전에 묻혀 있던 것이 갑자기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 나에게도 주님을 사랑했던 때가 있었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이 다시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화의 중심은 기이한 현상 자체보다 ‘십 년 동안 기다리신 주님’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강문호 수도사의 메시지가 참 따뜻해집니다. 인간은 주님을 놓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을 쉽게 놓지 않으십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끝까지 거절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끊임없이 구원하시려는 사랑이 흘러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주님의 신적 섭리는 모든 순간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인간이 돌아설 수 있는 길을 남겨 두시고, 선을 선택할 가능성을 보존하시며, 때가 되면 다시 부르십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을 버렸는데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이 사람의 고백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아주 아름답게 표현하는 말로 들립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어 태양을 예로 듭니다. 지구와 태양의 관계가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질서 안에 있듯이 인간도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 역시 스베덴보리의 세계에서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태양에 관하여 매우 중요하게 말합니다. 천국의 태양은 주님의 신적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며, 그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열은 사랑에, 빛은 지혜와 진리에 상응합니다. 자연계에서 태양의 열과 빛이 생명을 가능하게 하듯, 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인간의 영적 생명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연못의 물과 포도나무와 가지와 태양이 모두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물고기에게 물이 생명의 환경이고, 가지에게 포도나무가 생명의 근원이며, 자연계의 생명에게 태양의 열과 빛이 필요하듯, 인간의 영적 생명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것을 ‘내가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가는가에 있습니다.

 

영상 마지막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사의 삶을 ‘하나님만 붙잡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거룩한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이 말이 전체 이야기를 잘 정리해 줍니다. 수도생활의 본질이 반드시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에서 사는 데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된 수도는 결국 매일의 삶에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에 있는 사람도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고, 시장과 직장과 가정 한복판에 있는 사람도 주님 안에 깊이 거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붙잡는다’는 말 역시 다른 모든 인간관계를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참으로 붙잡을수록 이웃을 더 바르게 사랑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흘러갈 때 그것이 체어리티가 되고,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줄기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의 신앙은 결국 그의 삶에서 선한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영상의 핵심을 ‘잡혀서 살아라’라는 강렬한 표현에서 시작하여 ‘붙어 있어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열매를 맺어라’로 이어서 읽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나를 붙드시는 은혜를 깨닫습니다. 다음에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이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붙잡힘 거함 열매 맺음’입니다. 이 셋이 함께 있을 때 신앙은 단순한 고백을 넘어 삶이 됩니다.

 

연못에서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금붕어에게 자신을 붙잡는 손이 살리는 손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말씀을 주셨고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으며, 그 진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듭남은 물고기처럼 억지로 붙잡혀 옮겨지는 일이 아니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주님의 손길이 사실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가며 스스로 그 손을 신뢰하게 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연못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고기가 물 안에서 살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열매를 맺듯,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며, 거듭남이란 그 생명이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점점 더 깊이 인정하면서 받은 사랑과 진리를 이웃을 위한 선한 열매로 돌려드리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의 ‘잡혀서 살아라’라는 말을 그대로 마음에 담으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사는 것보다 먼저인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연못 속에서 주님의 손을 피해 달아나는 동안에도, 좁고 답답하다며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동안에도, 심지어 십 년 동안 주님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주님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를 붙잡아 당신에게 예속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작은 연못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님의 섭리이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신 말씀의 깊은 위로이기도 합니다.

 

 

 

SY.68, 강문호 수도사, ‘시오도르 수도사’ (20191215)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https://youtu.be/ycpr_QuUjbc?si=heNUWptbnsCcOZsH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동방정교회에 전해 내려오는 ‘시오도르’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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