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4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믿음이 진실하다면 삶의 변화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 믿음의 열매는 저절로 맺히는가, 주님의 은혜에 응답하며 자라나는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가르침은 매우 익숙합니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으면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역사하시고, 이전에 사랑하던 죄를 멀리하며, 점차 주님을 닮아 가는 새로운 삶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믿음이 단순한 지식이나 입술의 고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떤 신자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믿음이 진실하다면 삶의 변화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므로, 지금 당장 자신을 살피고 잘못된 습관을 고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변화시키실 때가 되면 변화가 시작될 것이고, 아직 변화되지 않은 부분은 성령께서 앞으로 해결해 주실 문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한다는 진리가 들어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책임을 뒤로 미루는 위험도 숨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믿음이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변화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되,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합리성을 사용하여 그 역사에 실제로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믿음과 체어리티, 회개와 거듭남의 관계는 바로 이 질문을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참된 믿음이 선한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지만, 그 열매가 아무런 노력 없이 자동적으로 생긴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3장은 성화를 죄의 지배가 약화되고 신자가 거룩함 안에서 자라나는 실제적인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육체의 욕망과 성령을 따르는 새로운 생명 사이에 계속적인 싸움이 일어난다고 가르칩니다. 제16장 2항은 선행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로 설명하며, 3항은 선행을 행할 능력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에게서 오지만, 신자들이 특별한 감동이 찾아올 때까지 자신의 의무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공식 교리를 ‘믿기만 하면 언젠가 자동으로 선해진다’는 주장으로 소개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다만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믿음과 삶의 관계를 설명할 때 ‘참으로 믿으면 열매는 자연히 따라온다’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며, 그 말이 회개와 자기 성찰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의 진실성을 과거의 회심 경험이나 현재의 확신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변화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아도 그것을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참된 믿음이 열매를 맺는다는 가르침 자체가 아니라, 그 열매가 어떤 영적 질서를 통해 맺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믿음과 열매의 관계를 매우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요15:4-5에서 주님께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제자들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단순히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요15:10에서는 자신의 계명을 지키면 자신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약2:17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며, 약2:22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믿음과 행함은 서로 무관한 두 활동이 아닙니다. 믿음은 인간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과 관계되며, 행함은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사랑과 결합하여 나타나는 일과 관계됩니다. 갈5:6에서 바울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강조한 것도 같은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열매는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생겨나는 외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생명의 변화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생명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는다는 비유는 인간이 스스로 선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지만, 그 비유를 근거로 인간에게 회개와 순종의 책임이 없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108-109에서 믿음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직 살아 있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며, 그 말씀이 참되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보복을 상상하고, 상대방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면서도 그런 마음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해에는 용서에 관한 진리가 있지만 의지에는 여전히 원망과 적개심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간이 오래 지난다고 해서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자신의 원망을 계속 정당화하면 그 감정은 더욱 깊은 습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보복하려는 마음이 주님의 사랑에 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실제로 그 악한 의도에서 돌아서려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단순한 호의나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체어리티와 결합한다는 것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자신의 의지 안에서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실제로 살아가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자연적인 사랑이 언제나 주님의 선과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인정한 진리를 실제로 행하려 할 때, 오랫동안 익숙해진 욕망과 습관의 저항을 경험합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싶어질 수 있으며,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자기 뜻을 거스르는 사람에게 분노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571에서 인간이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상태로 변화되는 과정을 개혁과 거듭남이라는 두 상태로 구별합니다. 개혁의 상태에서는 이해가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지만, 거듭남의 상태에서는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여 인간의 사랑과 삶 자체가 새로워집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신이 믿는 진리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그의 의지가 이미 그 진리와 완전히 결합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와 의지 사이에는 실제적인 변화의 과정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악한 사랑과 맞서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83에서도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기 시작할 때 개혁이 일어나고, 그 악을 실제로 멀리하며 싸워 이기는 과정에서 거듭남이 진행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삶의 변화가 단순한 시간의 경과가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 아래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실제로 새로워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변화를 이루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 악을 멀리하고 선을 사랑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고 일방적으로 그를 선하게 만드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DP.100-128은 인간이 외적인 삶에서 악을 죄로 여겨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멀리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서도 악을 제거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as if of oneself)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악을 멀리하는 것처럼 경험하지만, 실제로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과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만일 사람이 ‘내가 할 일은 없고 주님께서 언젠가 나를 변화시키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악을 계속 허용한다면, 그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유와 합리성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노력으로 반드시 선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공로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도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여 실제로 행동하되, 그 선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은혜와 인간의 실천은 서로 경쟁하는 두 힘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가 인간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근원이며,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은 그 은혜를 실제로 받아들이도록 마련된 영적 질서입니다.

 

여기서 회개가 차지하는 위치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TCR.509-510에 따르면 참된 믿음과 체어리티는 회개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 안에 교회가 실제로 세워지는 일도 회개와 깊이 관계됩니다. 또한 TCR.528-530은 참된 회개가 자신의 삶을 살피고, 죄를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거나 언젠가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구별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분노 때문에 가족에게 반복적으로 상처를 주면서도 ‘주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실 때가 되면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잘못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미래로 미루고 있는 셈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분노가 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화가 날 때 상대방을 모욕하는 말을 멈추며, 잘못했을 때 사과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실제로 노력한다면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때로 매우 작고 더디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실천은 단순한 감정의 변화보다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그의 내면을 새롭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믿음이 충분히 자란 다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부수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실제적인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삶의 변화를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고 모든 잘못을 즉시 고쳐야 하는 부담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속도와 방식으로 경험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반복하던 악한 행동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같은 문제를 두고 오랜 시간 시험을 겪을 수 있습니다. 또한 외적으로 나타나는 변화가 크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내면까지 반드시 선하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높이거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도 행동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32-534에서 참된 회개가 외적인 행위뿐 아니라 의지의 의도까지 살피는 것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행동이 얼마나 빨리 달라졌는가만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악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으며 어떤 사랑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전에는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하던 사람이 이제 그 거짓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려 한다면, 아직 모든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그 안에는 중요한 방향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반복되는 실패가 있다고 해서 주님의 은혜가 전혀 역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실패를 정당화하고 악을 계속 사랑하는 것과, 실패할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악에서 돌아서려는 것은 서로 다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거듭남을 판단할 때에는 조급한 자기 정죄나 다른 사람에 대한 단정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오늘 실제로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믿음이 진실하다면 삶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표현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이 말에서 ‘자연스럽게’라는 표현이 주님의 사랑을 깊이 받아들인 사람이 점차 선을 사랑하게 되고, 이전에는 의무로 여기던 선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게 된다는 뜻이라면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인간은 선을 행하는 일을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라는 말이 인간이 자신의 악과 싸우거나 실제로 회개할 필요 없이 시간이 지나면 변화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오류입니다. 어떤 습관은 반복할수록 더욱 깊어지며, 자기중심적인 사랑은 정당화할수록 더욱 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은 처음부터 아무런 노력 없이 선한 삶이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계속되면서, 점차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이 형성되고 그 사랑에서 선한 행동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절제하고 노력해야 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진리가 자신의 사랑이 되어 선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변화의 자연스러움은 회개를 생략해도 된다는 이유가 아니라,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 인간의 사랑이 새로워질 때 나타나는 영적 성숙의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일에도 신중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도 눈에 띄는 변화가 없어 보일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신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상당한 변화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보이는 행동만으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 전체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변화는 자기 자신밖에 알지 못하는 내적인 싸움에서 일어나고 있을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선한 행동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목적에서 비롯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믿음에는 변화가 따른다’는 가르침을 다른 사람의 구원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가르침은 자기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나는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보다, 그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악을 얼마나 정직하게 살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선한가보다, 어제까지 정당화하던 악을 오늘은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려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외적인 성과에 따라 기계적으로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라, 각 사람의 자유와 상태를 아시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거듭남의 길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의 열매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진리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믿음이 진실하다면 삶의 변화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입니까? 참된 믿음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보존해야 할 중요한 진리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할 때 인간은 이전의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인간의 자유로운 회개와 실천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그가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고치려 노력해야 하지만, 그 모든 참된 선의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변화는 단순히 기다려야 할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오늘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진리에 응답함으로써 시작하고 계속해야 할 실제적인 과정입니다. 물론 변화의 속도와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며, 반복되는 시험과 실패 때문에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성급하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변화가 더디다는 사실과 변화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는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언젠가 좋은 사람이 될 것인가?’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주님께서 알려 주신 진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멀리하려 하고 있는가?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지혜가 내 삶에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도록 오늘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의 열매는 시간이 저절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생명에 따라 살아갈 때 맺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믿음과 삶의 변화, 그리고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 열매 맺는 영적 생명의 의미입니다. (PR.004 해설)

 

요약

‘믿음이 진실하다면 삶의 변화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라는 말에는 참된 믿음이 단순한 지식이나 신앙고백에 머물지 않고 실제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는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회개와 실천 없이 시간이 지나면 변화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이해된다면 오류가 됩니다. 개신교의 공식 교리 역시 성화를 죄와 싸우며 거룩함 안에서 성장하는 실제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고, 신자가 특별한 감동을 기다리며 자신의 의무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108-109에서 믿음과 체어리티가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처럼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571은 이해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개혁과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는 거듭남을 구별합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83과 DP.100-128에 따르면 인간은 악을 죄로 인정하고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멀리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그의 내면을 새롭게 하십니다. 따라서 삶의 변화는 주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 분리되지 않는 영적 질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특히 회개는 믿음이 충분히 성장한 다음에야 나타나는 부수적인 결과가 아니라, 믿음이 실제 생명으로 변화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TCR.509-510, 528-530). 물론 거듭남의 속도와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며, 반복되는 실패만으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가 얼마나 빠르게 나타나는가보다, 자신의 악을 어떻게 대하고 주님의 진리에 실제로 응답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결국 참된 믿음의 열매는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악을 멀리하며 선한 삶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맺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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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3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 세례의 은총과 참된 영적 출생은 같은 것인가?

 

해설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 말은 천주교 신앙생활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가르침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를 단순히 신앙 공동체에 가입하는 의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원죄가 씻기고 새로운 생명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아직 말을 하지 못하고 신앙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풉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은총을 베푸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세례라는 외적인 의식이 이루어지는 순간, 인간의 내적인 생명에도 실제적인 영적 출생이 완성되는 것일까요? 물로 머리를 씻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과, 주님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새로운 생명이 인간의 내면에 형성되는 것은 같은 사건일까요?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말은 새로운 종교적 신분이 부여되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실제로 그분을 닮은 존재로 변화되어 간다는 뜻입니까? 이 질문의 목적은 세례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 세례가 가리키는 참된 영적 출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265항은 세례를 받은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느님의 양자가 되며, 그리스도의 지체와 성령의 성전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어 1266항은 세례를 통하여 성화의 은총과 의화의 은총이 주어지고,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덕과 성령의 선물이 부여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272항은 세례가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인호를 남긴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천주교는 세례를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실제로 역사하는 성사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세례받은 사람이라면 이후 어떻게 살아도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받은 은총은 신앙생활 속에서 성장해야 하며, 인간은 그 은총에 응답하고 죄를 피하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천주교는 유효한 세례를 받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자들도 그리스도와 일정한 친교 안에 있다고 인정합니다. 따라서 이 명제를 ‘천주교 신자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배타적인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실제 쟁점은 세례라는 성사적 행위 자체가 인간에게 새로운 영적 신분과 은총을 부여한다는 천주교의 이해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의 질서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세례와 새로운 출생을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요3:3에서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세례의 필요성과 성사적 은총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6절에서 주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영적 출생이 자연적인 사건이나 외적인 신분 변화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요1:12–13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 그들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출생의 근원은 인간의 종교적 행위나 제도적 소속이 아니라 주님 자신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씀들이 세례와 거듭남의 관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물과 성령, 외적인 씻음과 내적인 새 생명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세례가 영적인 출생을 나타내는 거룩한 의식이라는 사실과, 그 의식의 시행이 곧 영적 출생의 완성이라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667–691에서 세례의 의미와 쓰임을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이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과 동시에 영계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연결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TCR.677–680). 두 번째 쓰임은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그분을 따르게 하는 것이고(TCR.681–683), 세 번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인간이 거듭나는 것입니다(TCR.684–687). 이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면 스베덴보리가 세례를 단순한 종교적 가입 절차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자연계에서 행해지는 세례는 영계의 질서와도 실제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첫 번째 쓰임과 세 번째 쓰임을 구별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로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새로운 영적 삶을 향한 입문이며, 후자는 그 입문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세례가 인간을 거듭남의 길로 인도할 수는 있지만, 세례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참된 가치는 그 의식 자체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인간을 주님께 인도하여 어떤 새로운 생명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가에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유아 세례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TCR.677에서 스베덴보리는 아직 합리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없고 신앙에 관한 것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유아들도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이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아직 선과 악을 분별하거나 의식적으로 회개할 능력이 없는 아이가 세례받는 순간 이미 영적인 거듭남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아 세례에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받은 아이들이 영계에서 기독교인들과 연결되며,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그 아이들이 장차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보호하고 준비시키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세례가 영계와 무관한 단순한 표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의 영적 상태는 점차 자신이 무엇을 믿고 사랑하며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와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세례받았다는 사실이 이후의 모든 삶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유아 세례는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거듭남을 향한 거룩한 시작이며, 주님께서는 그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계속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4255은 세례가 교회와 교회에 속한 것들로 들어가는 입문을 나타내며, 동시에 거듭남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세례의 물은 영적으로 진리를 의미하고, 물로 씻는 행위는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악과 거짓이 제거되는 정결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물이 육체의 더러움을 씻는다고 해서 인간의 의지에 자리 잡은 자기 사랑과 탐욕과 미움과 교만을 실제로 씻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내적인 악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그 악을 죄로 여겨 피할 때 점차 제거됩니다. 이 과정에서 진리는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 주는 지식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됩니다. 따라서 세례의 물이 나타내는 참된 씻음은 자연적인 물질 자체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역사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가 단순한 상징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세례에는 자연계와 영계를 연결하는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가 나타내는 영적 실재와 세례라는 외적인 행위를 서로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례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통하여 정결해지고 실제로 거듭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말의 가장 깊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TCR.684에서 세례의 궁극적인 쓰임을 거듭남이라고 설명하면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고 선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번에 완성되는 종교적 신분의 변경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합리성을 사용하는 가운데 평생 계속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29–345에서 어린아이들이 죽음 이후 주님의 인도 아래 천국에서 양육받고 성장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특정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거나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세례를 받은 아이뿐 아니라 세례를 받지 못한 아이도 주님의 사랑과 섭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며, 각 사람을 그가 처한 상태와 환경에 따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현은 단순히 종교적인 소속을 가리키는 신분 명칭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가장 깊은 의미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반영하는 존재로 실제로 변화되어 간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천주교의 세례론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는 인정해야 할 공통점과 중요한 차이가 함께 존재합니다. 양쪽 모두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 의미가 단순한 외적 가입 절차보다 깊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세례받은 사람이 이후에도 신앙 안에서 성장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세례 자체가 성화의 은총과 의화의 은총을 부여하고, 인간을 하느님의 양자로 만들며,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인호를 남긴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세례의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인정하면서도,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인 교회로의 입문과 궁극적인 쓰임인 거듭남을 명확하게 구별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세례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사의 시행 자체가 인간 안에서 어떤 영적 변화를 이루는가, 그리고 그 성사가 가리키는 실제적인 거듭남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영적 출생은 세례라는 외적인 의식의 시행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이해와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가 점차 악을 피하고 선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는 실제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평생 천주교 신자로 살아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례명을 소중히 여기고 주일마다 미사에 참석하며 여러 성사생활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의 신앙생활에 귀중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을 행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세례받은 하느님의 자녀다’라는 사실에 안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필요한 것이 세례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복적인 확인이 아니라, 세례가 가리키는 참된 회개와 거듭남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또한 이 문제는 천주교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개신교 신자 역시 자신이 세례를 받았거나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한 순간 구원과 하나님의 자녀 됨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이후의 실제적인 거듭남을 부차적인 문제로 여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이 세례와 거듭남의 영적 의미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영적으로 더 성숙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과 그 진리가 자신의 삶 안에서 실제로 살아 있다는 사실은 서로 다릅니다. 세례의 영적 의미를 이해했다면, 그 이해는 자신을 높이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인간에게 보여 주시는 거룩한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물은 육체를 씻지만, 주님의 진리는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그가 자신의 악을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세례는 한 번 이루어지는 외적인 의식일 수 있지만, 주님의 진리로 마음을 씻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평생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지만, 그 사실을 영적 성장의 완성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인간을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거룩한 시작이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여 진리를 배우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요1:12-13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자녀 됨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종교적 신분을 바꾸는 일보다 훨씬 깊으며,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삶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언제 세례를 받았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 세례가 나타내는 거듭남의 길을 지금도 걸어가고 있는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피하며, 주님의 사랑을 받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참된 생명은 외적인 의식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이루어 가시는 실제적인 거듭남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SL.RC.003 해설)

 

요약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명제에는 세례가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인간을 기독교회와 연결하고 새로운 영적 삶으로 인도하는 실제적인 쓰임을 가진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천주교가 세례 이후에도 신앙의 성장과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며, 세례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이 자동으로 완성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도 정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라는 성사적 행위 자체가 인간을 하느님의 양자로 만들고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인호를 남긴다는 천주교의 이해는,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인 교회로의 입문과 궁극적인 쓰임인 거듭남을 구별하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세례는 단순한 상징 이상의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가지지만, 그 의식 자체가 인간의 내적인 거듭남을 완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세례를 거룩하게 여기거나 그 영적 의미를 인정하는 데 있지 않고, 세례의 시행 자체를 새로운 영적 생명의 성립과 동일시하거나 그 완성에 대한 보증으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영적 출생은 주님께서 인간의 의지와 이해를 새롭게 하시고, 그 사람이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받아들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존재로 변화되어 가는 실제적인 거듭남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RC.004.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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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3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받는 것이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믿는 것뿐이다’ - 은혜는 인간의 응답을 불필요하게 하는가, 아니면 참된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는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다’는 고백은 가장 중요한 신앙의 기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이나 종교적 열심, 도덕적 성취를 통해 구원의 자격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의 교만을 경계하고 모든 구원의 공로를 하나님께 돌린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떤 신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라면 내가 할 일은 믿는 것뿐이며, 그 밖의 노력은 구원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회개와 순종, 악을 멀리하려는 노력과 이웃을 위한 선행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나중에 맺는 열매일 뿐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구원이 인간의 공로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인간이 구원을 위해 아무런 응답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과연 같은 의미입니까? 모든 선한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면, 인간은 그 능력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사용하여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신적 은혜와 인간의 자유, 그리고 거듭남의 질서를 살펴보면, 은혜가 인간의 응답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응답을 가능하게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구원론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엡2:8-9는 사람이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며, 이것은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고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롬3:28 역시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종교개혁 전통은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오직 믿음이라는 표현을 참된 믿음에는 사랑과 순종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2항은 믿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유일한 도구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안에서 그 믿음은 홀로 있지 않으며 사랑으로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제14장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공식적인 구원론 전체를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어떻게 살아도 구원받는다’는 주장으로 소개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다만 전통적인 개신교는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고, 특히 칭의를 인간의 선행에 근거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언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믿음과 체어리티, 죄 사함과 거듭남을 분리하여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따라서 이번 문항의 핵심은 은혜를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은혜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실제 구원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회개와 순종을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엡2:8-9에서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 바울은 바로 다음 절인 엡2:10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선한 일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제출하는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인간이 살아가도록 준비된 삶의 방향입니다. 또한 빌2:12-13에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권면하면서, 그들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칩니다. 이 두 말씀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명령과 그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선언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마7:21에서 자신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14:15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믿음의 고백이 실제적인 사랑과 순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선한 행위로 구원의 대가를 지불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인간의 삶에서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를 무조건 대립시키기보다, 참된 믿음이 무엇이며 그 믿음이 어떻게 사랑과 결합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108-109에서 믿음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의 관계에 비추어 설명합니다. 인간은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옳다고 인정할 수 있지만,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사랑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직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그 말씀이 참된 진리라는 사실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이 걸려 있을 때마다 이웃을 속이고 해치면서도 그 행동을 고칠 생각이 없다면, 그가 알고 있는 진리는 아직 자신의 사랑과 결합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어려운 사람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거나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따라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려는 영적 삶의 원리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와 분리된 믿음은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에 선행이라는 외적인 조건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자체가 선과 결합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살아 있는 믿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믿는 것뿐이다’라는 말은 믿음을 단순한 지적 동의나 신앙고백으로 이해할 때 심각한 오류가 됩니다. 참된 믿음은 주님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살아가는 데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회개와 악을 멀리하는 일은 구원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합니까?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509-510에서 회개 없이는 참된 믿음도 진정한 체어리티도 존재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인간 안에 교회가 실제로 세워지는 일이 회개와 깊이 관계된다고 가르치며, 회개를 단순히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거나 죄 때문에 슬퍼하는 감정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TCR.528-531에서는 참된 회개를 자기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회개가 구원에 덧붙여지는 선택적인 종교 활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악을 사랑하면서도 그 악을 전혀 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거짓말이 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계속 거짓을 행하고, 그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으면서 ‘나는 은혜로 구원받았으므로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는 은혜를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거짓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며, 실제로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인간이 구원의 자격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여기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이라는 표현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이 회개하고 악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면 어떤 신자는 그것이 결국 행위구원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 악을 제거하거나 참된 선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100-128에 따르면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는 일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as if of oneself)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며 행동하는 것처럼 경험하지만, 그에게 있는 모든 참된 생명과 선을 행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인간이 자신의 이해로 진리를 배우고 의지로 그것을 선택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여 악을 멀리하려 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는 과정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은 주님의 은혜와 경쟁하는 독립적인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혜가 인간 안에서 작용하도록 마련하신 신적 질서의 일부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모든 선한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실제로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인간이 자신의 악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분노와 원망에 사로잡혀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을 때마다 화를 내고 상대방을 모욕하면서, 자신은 원래 성격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강하게 확신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분노와 지배욕이 실제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며, 자신의 행동을 고치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는 오랫동안 형성된 습관 때문에 여러 번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다는 사실만으로 주님의 은혜가 그에게 역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의 도움으로 그 악에서 돌아서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35에서 자신의 모든 내면을 충분히 살피기 어려운 사람이라도 악을 죄로 여기고 행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러한 행동 역시 회개의 중요한 형태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특별한 신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나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서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멀리하려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실제적인 과정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외적인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으로 선한 사람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기 위해 선행을 하고,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헌금하며, 종교적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훌륭한 행동이지만, 그 행동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이 여전히 자기중심적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단순히 외적인 행위의 양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과 목적에 비추어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자신의 내적인 동기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사랑을 정직하게 살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행을 구원의 대가로 삼는 태도와, 주님의 은혜가 자신의 삶에서 실제적인 선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가르침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전자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를 쌓아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태도이지만, 후자는 인간이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지혜를 실제로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는 삶입니다. 따라서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옳지만, 그 말이 ‘선한 삶은 구원과 관계없다’는 뜻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선행은 구원에 대한 외적인 보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삶 안에서 실제로 결합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직 은혜’라는 고백은 오히려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라는 말은 단지 과거에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한 순간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는 순간에도, 그 악을 멀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삶에서도 주님의 은혜는 계속 필요합니다. 인간이 어떤 선한 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공로를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주님에게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그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은혜만을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을 실제로 변화시키기 원하며, 주님의 진리는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고 선을 사랑하도록 인도합니다. 따라서 은혜는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악을 극복하고 참된 자유를 회복하도록 하는 신적 능력입니다. 갈5:6에서 바울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말씀한 것도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사랑과 분리된 믿음은 단순한 종교적 지식이나 확신으로 남을 수 있지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삶 안에서 하나가 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은혜의 신앙은 믿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회개와 거듭남, 체어리티와 선한 쓰임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요? 이 질문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살피고 더 많은 선행을 해야 한다는 부담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와 거듭남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와 능력을 아시며,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진리를 가르치고 선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있는 악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모든 악을 한순간에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신의 영적 상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질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면서 오늘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랫동안 반복하던 거짓말을 멈추는 일이 중요한 회개의 시작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가까운 가족에게 가하는 언어적 폭력을 멈추는 일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던 태도를 버리는 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변화는 겉보기에 작아 보일지라도 영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자유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받는 것이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믿는 것뿐입니까? 구원이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에서 비롯된다는 고백은 반드시 보존해야 할 중요한 진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이나 종교적 공로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모든 참된 선과 진리, 거듭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실제적인 회개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믿음과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인간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는 일이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인간은 이러한 일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 하지만, 실제로 그 모든 선한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은혜와 인간의 응답은 서로 경쟁하는 두 구원의 원인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가 유일한 근원이며, 인간은 그 은혜를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여 실제로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구원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실제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고 있는가?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은혜의 신앙은 인간의 공로를 부정하지만 인간의 책임을 지우지 않으며, 믿음을 강조하지만 회개와 거듭남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할수록,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여 더욱 성실하게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게 됩니다. 결국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라는 말의 참된 의미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그 은혜를 받아들여 실제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은혜와 믿음,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실제적인 거듭남의 관계입니다. (PR.003 해설)

 

요약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받는 것이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믿는 것뿐이다’라는 고백에는 모든 구원의 근원과 능력이 인간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회개와 악을 멀리하는 실제적인 삶은 구원과 관계없다는 뜻으로 이해된다면 중요한 오류가 발생합니다. 개신교의 공식 교리 역시 단순한 지적 동의나 입술의 고백을 참된 믿음과 동일시하지 않으며, 살아 있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108-109에서 믿음과 체어리티가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처럼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509-510과 TCR.528-531은 회개가 참된 믿음과 거듭남에서 필수적이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참된 회개라고 가르칩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100-128에 따르면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는 일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 하지만, 실제로 그 모든 선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인간의 회개와 선한 삶은 구원의 공로를 쌓는 독립적인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은혜는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선을 사랑하며 새로운 삶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신적 능력입니다. 결국 참된 믿음은 회개와 체어리티를 배제하지 않으며,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라는 사실을 인정할수록 인간은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더욱 성실하게 선을 행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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