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1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세 인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시다’ - 한 하나님 안의 신적 삼위인가, 영원한 세 신적 인격인가
해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한 하나님을 세 하나님으로 나누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초대교회는 성경이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분명히 가르치면서도 성부를 하나님이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적으로 고백하며, 성령 또한 하나님의 영으로서 신적 사역을 하신다고 증언하는 사실을 어떻게 함께 고백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고전적 삼위일체 교리는 ‘한 본질, 세 인격’이라는 언어로 정착했습니다. 개신교 역시 이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부·성자·성령 세 인격’이라는 말을 곧바로 ‘세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으로 바꾸어 비판하는 것은 개신교의 자기 이해를 공정하게 다루는 방식이 아닙니다. 개신교는 분명히 한 하나님을 믿으며, 성부·성자·성령은 본질이나 신성이 나누어진 세 신이 아니라 한 신적 본질을 온전히 공유하는 세 인격이라고 고백합니다. 신6:4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는 선언과 마28:19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말씀을 동시에 붙드는 것이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의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이 교리 안에는 반드시 보존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둘째,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성경의 구별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이나 피조물로 낮추어서도 안 되며, 성령을 단순한 비인격적 힘으로만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요1:1은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고, 요10:30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며, 요14:9에서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성령을 보내실 것을 말씀하시는 장면도 있습니다.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는 바로 이 모든 성경적 증언을 어느 하나 버리지 않고 보존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신학적 의도를 정당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결정적인 질문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문제는 ‘삼위가 있는가?’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신적 삼위를 분명히 인정합니다. 문제는 ‘그 삼위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에서 스베덴보리는 성부·성자·성령을 부정하지 않고, 이 셋이 한 하나님의 신적 구성 요소라고 설명합니다(TCR.163-166). 그러나 그는 이 삼위를 영원 전부터 서로 구별되어 존재하는 세 신적 인격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에게 신적 삼위는 세 분의 하나님이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는 구조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한 분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의 신적 실재입니다. 그는 이를 인간에게 있는 영혼과 몸과 그로부터 나오는 활동에 비유합니다. 영혼과 몸과 활동이 한 사람에게 속하면서 세 사람이 아닌 것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도 한 분 주님 안의 신성 자체, 신적 인성, 그리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활동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용어 차이가 아닙니다. 전통적 삼위일체가 ‘한 본질 안의 세 인격’을 말한다면, 스베덴보리는 ‘한 신적 인격 안의 삼위’를 말합니다. 전통적 기독교는 성부가 하나님이시고 성자가 하나님이시며 성령이 하나님이시지만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실제 사고를 문제 삼습니다. 입으로는 ‘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성부 한 분, 성자 한 분, 성령 한 분을 각각 독립적인 인격적 주체로 그린다면, 신적 본질이 하나라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실제 내적 관념에서는 세 하나님이 형성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는 이러한 문제를 매우 강하게 지적하며, 신적 삼위를 세 인격으로 분리하면 입술의 ‘하나’와 생각의 ‘셋’이 충돌하게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의 단일성은 단지 ‘본질이 하나’라는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예배하는 사람의 생각과 사랑 안에서도 실제로 한 분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부·성자·성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스베덴보리의 구조에서 ‘성부’는 접근할 수 없는 별개의 신적 인격이라기보다 주님의 내적 신성, 곧 신성 자체를 가리킵니다. ‘성자’는 그 신성이 세상 안으로 들어와 취하신 인성, 특히 성육신을 통해 나타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또 하나의 별도 신적 인격이라기보다 영화롭게 되신 주님에게서 나와 인간에게 역사하는 신적 진리와 신적 활동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골2:9의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해집니다. 또한 요14:9의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14:10의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도마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받으시는 요20:28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육신은 보이지 않는 한 하나님이 단순히 두 번째 신적 인격을 세상에 보내신 사건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접근 가능하도록 인성을 입고 오셔서 그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대편 오류도 피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를 ‘성부·성자·성령은 이름만 다를 뿐 아무 구별도 없다’는 식의 단순한 양태론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실제적 의미를 가집니다. 신성 자체와 신적 인성, 그리고 그 둘에서 나오는 신적 활동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습니다. 영혼과 몸과 활동을 구별할 수 있지만 한 사람에게서 떼어 세 사람으로 만들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핵심은 ‘삼위를 없애자’가 아니라 ‘삼위를 한 분 주님 안에서 보자’입니다. 한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성경적 구별을 지우는 것도 오류이고, 그 구별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에 관한 실제 관념을 세 신적 인격으로 분리하는 것도 오류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추상적인 조직신학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고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와 결합하려 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세 신적 인격으로 생각하면 신앙생활에서도 성부는 엄격한 심판자, 성자는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중보자, 성령은 두 분의 뜻을 인간에게 실행하는 분처럼 역할이 나뉘어 생각되기 쉽습니다. 이후 PR 시리즈에서 다룰 형벌대속론과 중보론의 일부 문제도 이 하나님 관념과 연결됩니다. 반면 한 분 주님 안에서 신적 삼위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서서 제삼자인 하나님을 설득하는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가까이 오신 신적 인성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라는 고후5:19의 말씀도 이 관점에서는 특별한 깊이를 갖습니다. 구원은 한 신적 인격의 진노에서 다른 신적 인격이 우리를 보호하는 사건이 아니라, 한 분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 자신과 다시 결합시키시는 역사가 됩니다.
거듭남에서도 이 하나님 관념은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선과 진리가 들어오는 모든 인플럭스(influx)의 근원은 한 분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실제 선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에 관한 복잡한 형이상학적 공식을 정확히 암송하는 데 있지 않고, 한 분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삶으로 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단순한 교리 하나가 아니라 모든 신학의 머리와 영혼에 해당하는 문제로 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그 뒤에 이어지는 구원·속죄·성령·기도·섭리·천국에 대한 모든 이해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PR.001의 명제에는 중요한 진리와 결정적인 차이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신적 삼위가 있다’,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고백은 보존해야 할 핵심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삼위를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세 신적 인격’으로 규정하는 순간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갈라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제시하는 대안은 삼위일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더욱 철저한 하나님의 단일성 안에서 다시 보는 것입니다. 곧 성부·성자·성령은 세 하나님도 아니고 한 신성을 공유하는 세 신적 인격도 아니라,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 완전하게 존재하는 신적 삼위입니다. 그러므로 이 항목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문제는 삼위일체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 삼위를 영원한 세 신적 인격 안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볼 것인가입니다.’ (PR.001 해설)
요약
개신교의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는 세 하나님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성부·성자·성령의 성경적 구별과 각각의 신성을 함께 보존하려는 교리입니다. 따라서 이를 단순한 삼신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신적 삼위 자체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영원 전부터 구별된 세 신적 인격으로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입으로 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실제 생각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을 각각 독립적인 신적 주체로 그리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성부는 주님의 내적 신성, 성자는 성육신하여 영화롭게 된 신적 인성,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활동이며, 이 셋은 인간의 영혼·몸·활동처럼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삼위일체의 폐기가 아니라 ‘세 인격 안의 한 하나님’에서 ‘한 분 주님 안의 신적 삼위’로 하나님 관념의 중심을 옮기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교리 논쟁을 넘어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고 누구에게서 구원을 받으며 누구와 결합하여 거듭나는가를 결정하는 신앙의 근본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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