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이야기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부터는 창세기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기 앞서, 거듭 당부드리는 몇 가지입니다.

 

첫째, 사람의 영과 육은 정말 다르듯 말씀의 영과 육, 곧 속뜻과 겉 글자의 뜻은 정말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말씀(the Word)은 어떻게든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인간을 또한 어떻게든 주님과 연결되어 있게 하시려는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주님의 관심은 오직 사람의 구원, 곧 거듭나서 천국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은 한마디로, 거듭남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넷째, 그래서 말씀은 그 주된 포커스가 오직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맞추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이 정도만 꼭 붙드셔도 앞으로 읽으시게 될 내용들을 향해 잘 준비된 마음, 착하고 좋은 마음 밭의 상태를 잘 유지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님의 신성은 이런 마음 상태라야 한 방울 누수 없이 고스란히 다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의 장,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첫 육 일간 기록입니다. 이것이 겉 글자의 의미 그대로이며, 저 역시 사십여 년 전인 대학생 시절, 창조과학회에 심취, 공대생으로서 뭔가 과학적으로도 이론적 뒷받침이 되는 것 같아 더 깊이 들어갔던 생각이 납니다 ^^

 

그러면서도 당시 아인슈타인과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의 글 등을 통해, 한편으로는 미니, 마이크로, 분자, 원자, 중성자, 소립자, 미립자의 세계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광활한 우주, 끝도 없는 유니버스의 세계로 등 양쪽 극단의 지식들을 조금, 아주 조금 접하고 제 안에 부인할 수 없었던 의문점들이 있었지요.

 

여기서 이런 얘길 말씀드리려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우주 저 수많은 은하 중 비교적 가깝다고 하는, 250만 광년(光年,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 거리에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만 해도 우리 태양계의 태양에 해당하는 항성 수가 1조 개... 이런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을 그저 이 지구라는 조그마한 행성 하나를 밤에 반짝반짝 비추기 위한 용도로만 지으셨다고? 너무 비능률, 비효율적인 게 아닐까? 하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건 있었습니다 ^^

 

네, 이 얘긴 이쯤하고... 다시 창세기 1장입니다.

 

어쨌든 창세기 1장은 겉뜻으로는 창조 첫 육 일간 기록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과 관련된 여섯 단계 또는 상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천국 이야기 #3, ‘천국은 상태(狀態, state)의 나라’에서 말씀드렸듯 창세기를 포함, 말씀도 역시 ‘상태’ 관점에서 보시면 좋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을 무슨 계단처럼 딱딱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해지는 노을, 아름다운 색조가 그레디언트하게 연이어져 딱딱 구분은 어려워도 대략적으로는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 간 한 가지 차이점을 말씀드리면요, 거듭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will)와 새 이해(understanding, 이성, 사고력, 이해하는 능력)를 받아 그것으로 주님의 선을 행할 마음을 먹고, 주님의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의지라기보다는 탐욕으로 기우는 갈망(yearning)이 있고, 이성이라기보다는 잔머리에 가까운 머리굴림(reasoning)이 있습니다. 네, 두 사람은 이렇게 다릅니다.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입니다. ‘혼돈’, ‘공허’, ‘흑암’이라고 하는 상태입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입니다.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의 것과 사람의 것 사이, 어떤 구분이 생기는 상태로서, 주님의 것은 ‘리메인스’(remains)라 하여, 모든 사람의 영유아기를 비롯, 어린 시절에 주님으로부터 이슬비처럼 내려 조용히 쌓이는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모든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영구 보관하시며, 나중에 이걸 가지고, 각 사람의 거듭남의 여정을 도우십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람이 어떤 큰 시험, 불행, 혹은 슬픔 등을 겪을 때, 비로소 깨어나며, 그 사람의 인생에서 이 리메인스가 깨어나면, 그때까지 그가 정신없이 추구하던 모든 세상에 속한 것들은 휴면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두 번째 상태 때,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속한 것 사이, 구분이 일어납니다. 참고로, 십일조의 기원이 바로 이 리메인스입니다.

 

세 번째 상태는 신앙의 말도 하고,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기부, 자선)도 실천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기특하게도 전에 안 하던 이쁜 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 활기,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런 걸 자기가 하는 줄로, 자기가 대단해서 하는 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네 번째 상태는 애정 어린 사랑의 사람, 조명받은 신앙의 사람이 되는 상태입니다. 드디어 속 사람 안에 신앙의 불, 체어리티의 불이 켜집니다. ‘두 큰 광명체’입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자기가 하는 신앙의 말과 체어리티의 행위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활기와 생명력을 갖는 상태입니다.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입니다.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의 말을 할 때도, 사랑의 선을 행할 때도 주님을 사랑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상태입니다. ‘생물’, ‘짐승’입니다. 비로소 그는 영적 인간이 되었으며, 이런 그를 가리켜 ‘형상’(image)이라 합니다. 그의 영적 삶은 ‘먹을거리’라고 하는, 신앙의 지식과 체어리티의 일로 더욱 더 밝아지고, 지속되며, 그의 몸과 감각 등 자연적 삶 역시 그렇게 밝아지고, 지속됩니다. 이때 그의 겉 사람은 이런 그의 변화를 저항하며, 그래서 그의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 전투가 일어납니다.

 

이 마지막 상태인 여섯 번째 상태 끝에 가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이제 도저히 이 사람이 예전 삶으로 유턴할 가망이 없다 판단한, 그의 평생에 그를 지옥으로 끌어당긴 악한 영들은 그를 포기하고 물러갑니다. 전투란 서로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악한 영들이 더 이상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감으로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드디어 쉴 수 있게 되며, 그래서 드디어 주님이 쉬실 수 있는 상태, 안식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속뜻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는 사실은 우리 대신 주님이 싸우신 싸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안식일인 것이며, 이 안식의 상태가 바로 일곱 번째 상태입니다.

 

이 일곱 번째 상태는 지상에서는 몇몇 성인(聖人)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천국의 상태입니다. (사실, 후세를 사는 우리는 이분들을 성인이라고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런 호칭에 대해 기겁을 하고, 정색을 할 겁니다...)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시대, 아담 교회 때 사람들이 바로 이런 상태였고, 그래서 그때는 천사들도, 그리고 주님도 친히 지상의 사람들과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네, 그런 상태가 바로 일곱 번째 안식의 상태이며, 이런 사람을 가리켜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라 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도달한 인간을 영적 인간이라 하고, 여기서 악한 영들이 포기하고 물러간 사람들을 천적 인간이라 합니다.

 

참고로, 그래서 영적 인간의 이야기인 창세기 1장은 주님에 대한 호칭이 ‘하나님’이고, 천적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2장은 주님에 대한 호칭이 ‘여호와’이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겨우 첫 번째 상태에, 그중에서 일부가 두 번째, 그중에서, 그중에서... 여섯 번째 상태만 해도 아주아주 극소수입니다.

 

창세기 이야기의 오프닝, 개략을 너무 많이, 자세히 다루었나요? 앞으로 장별, 절별 자세히 다루는 방식은 좀... 순서대로 나가되 특별한 주제, 이슈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이런 얘긴 생전 처음 듣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 우리 안의 천사들은 저렇게, 저런 속뜻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영은 영, 육은 육인 것처럼, 우리는 육의 글자를 읽을 때, 천사들은 영의 글자, 곧 속뜻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말씀의 속뜻으로 오십니다. 이 표현이 참 어려우실 듯한데요... 네, 어쨌든 그래서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시는 아름다운 분들마다 어서 이 말씀의 속뜻 공부를 좀 하셔야 합니다. 네, 그래서입니다 ^^ 아멘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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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며칠, 계속된 글 공유로 좀 어떠실까 하여 오늘은 쉴까 하였으나 금요 오후, 천국 이야기 약속도 있고 하여 부득불 공유합니다. 많은 양해 바랍니다...

 

천국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많이, 아니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곳은 물질, 저곳은 비물질, 이곳은 자연계, 저곳은 영계니까요. 그러나 주님의 방법으로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결과, 이 세상은 천국을 가리키는 일종의 모델하우스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을 잘 관찰하면 ‘아, 천국은 어떤 곳이겠구나!’, ‘영계는 어떤 곳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

 

천국을 비롯, 이 모든 피조세계에 주님이 심으신 몇 가지 설계 원리들이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비슷하면 가까이, 다르면 멀리’라는 게 있습니다. 바로 ‘상태(狀態, state)’ 이야기인데요, 상태가 비슷하면 같이 지낼 수 있지만, 다르면 같이 못 지낸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원리 중 하나는 ‘심은 대로 거둔다’가 있습니다.

 

그런 예는 차고도 넘치지요. 우선, 천국과 지옥이 서로 하늘과 땅처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겠고요, 세 천국 간 구별이 있는 것이며, 천국 내에서도 또 수많은 공동체로 나뉘는 것이며, 같은 공동체 내에서도 서로 간 간격의 가깝고 먼 등등... 이 모든 것이 다 상태로 결정됩니다.

 

그러면 이 ‘상태’라는 게 뭘까요?

 

상태는 천국을 예로 들면, 천국을 구성하는 각 천사들의 사랑과 신앙, 그로 말미암은 지혜와 지성의 상태와 그 변화를 말합니다. 그리고 천사의 사랑과 신앙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으므로 결국, 상태란 주님에 대한 상태,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천국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개인적으로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곧 주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신성에 대한 태도는 곧 주님에 대한 태도가 되는 것이지요 ^^

 

아, 한 가지 더, 천사라는 존재는 주님이 별도로 지으신 무슨 다른 피조물이 아닙니다. 본래, 그리고 진정한 ‘사람’이신 주님은 사람 이외의 그 어떤 피조물도 짓지 않으셨어요. 심지어 주님은 천국 전체도 사람 형상으로 지으실 정도이시지요. 우리가 사후(死後)에 천국에 올라가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 구성원들을 천사라 하는 것이며, 현재 존재하는 모든 천사와 영들은 예전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천사 따로, 사람 따로로 알고 있는 것은 말씀을 겉뜻으로,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읽어서 그런 것입니다. 천사가 곧 사람이라 하신 말씀은 계21:17을 참조하셔요.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의 나라라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 천국을 무슨 지상 생활의 확장 정도로 생각하는 오류에서 물러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주님에 대한 현재 나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로 모든 게 결정되는 나라에 들어가는 걸, 세상에서처럼 무슨 표 한 장 끊으면 들어갈 수 있는 데로 안다거나, ‘그동안 잘못 산 거 다 용서해 줄 테니까 들어가서는 잘 살아야 해’하는 윗분의 ‘은혜’로 들어갈 수 있는 데로 안다든가 등등 말이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사후 신성(神性, Divine Essence, 선과 진리로 표현되는, 주님의 神으로서의 성품)이라는 대기로 충만한 나라에 들어가서 신성 호흡을 하며 살 수 있으려면 생전에 미리 그 호흡법을 연습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무리 소위 ‘은혜’로 통과시켜 주신들 호흡을 할 수 없어 뛰쳐나오게 되지요... 신성을 준비한다는 건, 그 나라 주인님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비슷해야 가까이’, 곧 주님을 닮아야 주님 곁에서 지내죠!

 

참고로, ‘은혜’는 내면이 어떻든 그냥 ‘통과’시켜 주는 그런 은혜가 아니라, 한평생 선악 간 싸움에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대신 우리와 동행하시며 도우시는 ‘은혜’, 끝까지 우리를 주님 자신을 향해, 천국을 향해 끌어당기시는 다함없으신 사랑을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천국의 실상, 곧 천국은 주님 향한 내면 상태의 나라라는 걸 모른 채, 지상에서 남들 다 하는 대로 마치 무슨 동호회 활동하듯 교회를 다니며, 종교 생활 차원의 신앙생활을 하다가 사후 영계에 들어온 사람들은 처음엔 당연히 자기들은 천국 들어갈 수 있는 줄 알고 무척 원합니다. 이럴 경우, 주님은 자비로우셔서 얼마든지 원하는 가장 좋은 걸 체험하게, 맛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 그것도 가장 낮은 천국의 입구로 인도를 받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들이 천국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들은 온몸이 뱀처럼 뒤틀리는 극심한 고통과 함께, 숨이 턱 막혀 질식할 것 같은 극심한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들 내부에,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안 되어 있고 대신 모든 게 천국 질서와는 정반대로, 거꾸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전에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 대신,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삶을 살면서 천국 준비를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교회를 다녔는데도 말이지요... 이윽고 그들은 죽을 것 같아 도저히 못 견뎌 그만 천국을 탈출, 뛰쳐나오게 됩니다.

 

이 모습이 제 3자가 보기에는 얼핏 천국에서 사람을 쫓아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전혀 아닙니다. 자기가 자발적으로 뛰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을 뛰쳐 나와 자기 내면과 잘 어울리는 곳으로 가서, 겨우 ‘아, 이제야 살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는 천국에 올라갈 엄두도 내지 않게 됩니다. 천국은 늘 항상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으며, 주님은 모든 사람이 천국에서 지낼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지낼 수만 있으면...’ 이라는 단서가 붙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지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힘써 ‘상태’ 훈련, 곧 주님을 사랑하는 상태에 늘 머무르는 훈련에 전념해야 합니다. 이 훈련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사람들을 허락하시며, 온갖 환경과 상황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 대신, 원망 대신 순간순간 깨어있어 주님을 늘 주시하며, 늘 그분의 현존과 임재 가운데 생활하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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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어제 ‘말씀(The Word)이란?’ 글 공유 후, 주님께 드린 기도문입니다...

 

주님, 오늘 글을 수신, 읽어본 많은 구독자들 중 아마 대다수가, ‘내용 자체는 전반적으로 맞는 말 같은데 이상하게 화가 나네...’ 할 것 같습니다. 개신교인으로서 제가 3년 전, 처음으로 이런 내용을 접했을 때처럼 말이지요.

 

개신교인에게 있어 바울 서신을 비롯, 다른 많은 신구약성경은 사실 성도들의 매일 일상 속 깊숙이 들어와 있는,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인데, 오늘 글은 그걸 통째로 건드리고 있으니까요...

 

주님, 오랜 세월 붙들고 살아온 성경 중 상당수가 사실은 메인이 아닌 조명이었다는 이런 글은, 비록 사람들을 힘들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지라도 본의 아니게 개신교인들,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나름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 저의 구독자들은 다들 착하고 진실한 사람들이오니 불쌍히 여기시며, 빛을 비추사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이 글을 읽는 동안, 마음이 환하여지며, 눈이 밝아져 주님의 위로가 쏟아져 들어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글을 주님의 말씀으로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간이 걸리고 마음이 힘들더라도 오늘 글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혹시 주님의 말씀(The Word)보다 더 우선하였던 어떤 교리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주님 의지하며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비롯, 종교개혁 여러 슬로건들도 그런 입장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정황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러나 슬로건이라는 게 주님보다 클 수 없음을, 교리라는 게 주님보다 우선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불러 영계에 올라 루터, 멜랑히톤 및 칼빈을 만나 오랫동안 많은 대화를 나눴던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그중 루터의 말,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alone)를 비롯, 자기가 힘써 주창했던 많은 독단교리들은 사실은 다 자기의 머리에서 나온 거라고... 당시 카톨릭하고는 무조건 대척점에 서야 해서 무리를 해서라도 어떤 교리들, 곧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해내는 교리를 만들어내야 했던 거라고...’(TCR.796:4)

 

주님, 우리 개신교인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다른 사람들이, 태어나보니 불교 가정이었고, 태어나보니 무슬림 가정이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태어나보니 개신교 가정이었고, 태어나보니 이런 교리들, 곧 사도들의 편지에서 추출한 교리들이었습니다...

 

주님, 저의 카톡 구독자들 중 상당수가 개신교인입니다. 저를 비롯, 이제 많은 새 일꾼들을 통해 이런 사실들을 저들에게 알리시고, 이제라도 우리로 하여금 주의 말씀(The Word)으로 돌아와 주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이 온전히, 그리고 아름답게 이루어지시기를,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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