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이야기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창조 첫째 날입니다.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2-5)

 

이야기 #3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기 1장 천지창조 첫 육일 간 기록은, 사실은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을 대략 여섯 단계로 나눠 설명한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 11/15일자 이야기를 참고하시고요, 혹시 카톡 지난 글 찾는 게 불편하시면, 아래 링크, 제 블로그의 ‘창세기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로 가시면 지난 글들을 편리하게 보실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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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위 본문을 중심으로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 참고로, 이후 내용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창세기 주석, ‘Arcana Coelestia’ 글 번호 17번에서 23번까지를 주로 레퍼런스하였습니다.

 

사람의 거듭남 첫 번째 상태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요. 저런 상태에서 이런 상태로 상태 변화가 시작되려면 뭔가 준비 작업이 필요한데요, 그래서 이 첫째 날은 주님이 사람에게 거듭남에 필요한 사전 준비, 거듭남이라는 빌딩을 짓기 전, 땅을 다지는 일종의 사전 정지 작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거듭남 이전 상태,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의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은 선과 진리의 씨 심긴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의 마음을, ‘혼돈’은 그 땅에 선이 전혀 없음을, ‘공허’는 진리가 전혀 없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의 외적 발현이 선(善, the Divine good)이며, 이 선을 담은 그릇이 진리(眞理, the Divine truth)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선은 사랑의 선이요, 주님의 진리는 사랑의 진리인 것입니다.

 

어떤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았으면, 그 선과 진리의 결과, 그는 주님을 만나며, 주님 앞으로 인도됩니다. 천국은 주님의 선과 진리, 곧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나라이므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곧 천국과 같은 상태가 되어 천국을 맛보게 됩니다. 할렐루야!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있어 사람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이 자기의 신성과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하도록, 곧 주님의 선(good)과 사람의 의지(will)가, 주님의 진리(truth)가 사람의 이해(understanding)와 각각 서로 상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거듭남이란, 바로 이 상응이 깨어나 활성화, 서로 공명(共鳴)하는 것이며, 그래서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의 상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전혀 없는 상태를 가리켜서는 특별히 ‘혼돈과 공허’(a void and emptiness)라 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흑암’의 상태, 곧 주님 신앙에 속한 모든 것과,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삶에 속한 모든 것에 매우 어리석고 무지한, 심각한 상태가 되고 맙니다. ‘깊음 위에 있고’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비롯되는 거짓을 말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전적으로 이런 상태이며, 그 가운데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깊다’, 뭔가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하는 것입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란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또 천국에서 보면 마치 까만 덩어리(a black mass)처럼, 활기라고는 하나도 없는(destitute of vitality), 아주 극심한 궁핍 덩어리로 보입니다.

 

주님의 진리는 빛인데, 이 빛이 전혀 없으므로 저렇게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 것이지요. 천국이 광명한 나라인 것은 천국은 주님의 진리로 가득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태는 주님의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다음 단계인 거듭남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면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선이라는 것을 통해 마음에 감동이 시작되는데요, 그런데 이때 먼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고 반발하는(hinder and resist) 일체의 요소들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이지요. 새사람이 그 안에 잉태되려면 반드시 이런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이 표현은 주님의 자비를 가리키는 표현인데요,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품으시니라’(brood) 하신 것입니다. 마치 암닭이 알을 품에 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운행하시는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사람 안에 숨기시고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시며 보관하여 오신 것들인데요, 말씀 전체를 통하여, 이것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 혹은 ‘남은 자’(a remnant)라고 합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 이루어지며, 외적인 일들, 겉의 일들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결코 겉으로 밝히 드러나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이 지식을 가리켜 여기서 ‘수면 위’라 하신 것입니다.

 

이 ‘리메인스’ 이야기, ‘리메인스’라는 개념은 앞으로 말씀 전체를 관통합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 그의 영유아 시절, 자기도 모르게 주님으로부터 이 리메인스를 공급받게 되며, 즉 주님이 아이의 안으로 이 리메인스를 밀어넣으시며, 이것은 나중에 그의 거듭남과 회심에 아주 결정적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천적인 것, 주님의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며, 그렇게 사람의 ‘인권’(人權)이라는 것이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인권에 대한 올바른 관점은 각 사람 안에 주님이 보관하신, 주님의 것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며, 그것은 곧 이웃 사랑(charity)으로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인권’이라 쓰고, ‘교만’이라 읽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남은 자’ 사상이나 십일조도 다 이 리메인스에서 출발합니다.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라는 것이 뭔가 더 높은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부터 시작됩니다.

 

온통 겉 사람 뿐이기만 한 사람들은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선이라고 여기며, 그리고 또 이런 자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인 모든 걸 진리로 여깁니다. 그런 선들은 악이요, 그런 진리들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뭔가가 다시 시작될 때, 그때 그는 그동안 자기가 믿어왔던 선이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빛 가운데로 더욱더 다가갈 때, 이 빛이 바로 주님이신데요, 이분이 바로 선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또한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사람은 주님의 존재,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는 위의 말씀과, 또 주님은 선 또는 생명 그 자체시며, 진리 또는 빛 그 자체시라는 사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주님이 아니면 선도,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 3-4, 9)

 

빛을 일컬어, ‘좋았더라’, 곧, ‘’(good)이라 합니다. 이 빛이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인데,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그동안 빛인 줄 알았던 모든 걸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동안 악은 선인 것처럼, 거짓은 진리인 것처럼 행세해 왔습니다만, 이제 보니 그것들은 그저 어둠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그런 것들이었고, 여전히 남아 있는 어둠일 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진리로 여기며, 또 자기가 의도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주님께 속한 것이면, 그것은 ‘’으로 비교됩니다. 낮은 빛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이면, 그것은 ‘’으로 비교됩니다. 밤은 어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 앞서 있었던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그늘진 상태, 거짓의 상태, 아무런 신앙이 없는 상태입니다. ‘아침’은 모든 후속 상태, 앞으로 진행될 상태를 말합니다. 빛의 상태, 진리의 상태, 신앙에 관한 지식의 상태입니다.

 

저녁’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본성에 속한 모든 걸 의미합니다. 반면에, ‘아침’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 주님께 속한 것을 말합니다. 다윗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아무 신앙이 없는 때를 ‘저녁’이라, 신앙의 때를 ‘아침’이라 하였으므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이 ‘아침’이요, 주님이 떠나가실 때, 그때는 신앙이 없는 때이므로, ‘저녁’이라 하는 것입니다.

 

왜 ‘저녁’에서 바로 ‘아침’이 될까요? 그것은 천국에는 ‘’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 지옥의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천국에 ‘아침’이니, ‘저녁’이니 하는 무슨 상태들이, 무슨 상태들의 변화가 있다는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천국에는 상태 변화가 있습니다. 천국은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인데요, 천국의 상태는 곧 천사들의 상태입니다. 천사 하나하나가 가장 작은 천국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천사들의 상태가 새벽, 아침, 낮, 저녁 등으로 변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천사들은 늘 밝은 빛 가운데 하하호호 하며, 항상 충만한 기쁨 가운데 있는 줄 아는데요, 아닙니다. 천사들의 상태도 밝았다, 흐렸다, 기뻤다, 우울했다 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천사들 역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세상 모든 피조물은 자기를 사랑함이라는, 본성적으로 ‘자기 사랑’에 함몰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천사들은 이 ‘자기 사랑’을 ‘주님 사랑’으로 억제하는 만큼만, 저지하는 만큼만 천사입니다. 천사들은 생전에 우리하고는 차원이 다르게 주님을 사랑하여서 천사가 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존재들인데도 말입니다.

 

천국 한 공동체 내 같은 천사들일지라도 이 천사의 상태와 저 천사의 상태가 다르며, 또 여러 공동체들 역시, 이 공동체와 저 공동체의 상태가 다릅니다. 이 천국과 저 천국의 상태도 다르고요! 이는 마치 이 지구 상의 여러 날씨와 기후, 시간의 상태가 다 다른 것과 같습니다. 지구 이편이 밤이면, 저편은 낮이고, 이쪽에 동이 터오면, 저쪽은 해가 저물며, 이쪽은 타들어가는 가뭄이면, 저쪽은 모든 걸 다 휩쓸어 가는 홍수요, 이쪽이 여름이면, 저쪽은 겨울이고... 등등 지상의 이 모든 상태 변화는 곧 천국의 어떠함을 상응하는 것입니다. 오, 주님! 아멘, 할렐루야!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이요, 그래서 ‘’이 없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이 정도로 첫째 날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을 주님이 주님의 빛, 천국 빛으로 환히 비추사 내면이 밝아져 밝히 깨닫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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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이야기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지난 주에 이어 ‘지상의 혈연관계가 천국까지도 이어지는 걸까?’ 2편입니다.

 

지난 1편에 이어 계속 이어질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의 내면(interiors)의 상태변화

천국 올라가기 전 오리엔테이션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

 

네, 바로 시작합니다. 세 번째인, ‘③ 영의 내면(interiors)의 상태 변화’입니다.

 

우리가 ‘’(靈, spirit)만 해도 잘 잡히지가 않는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외면’, ‘내면’을 논하는 것은 더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사후, 영의 외면의 상태일 때까지는 그래도 아직 그 외모와 아우라가 느껴져 생전 혈연과 지인들이 알아보지만, 그후 외면은 잠들고, 드디어 내면이 드러나게 되면 그때는 완전 다른 그 무엇, 곧 자신의 진짜 모습, 진정한 ‘’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며, 나중에 주님이 인도하시는 천국 내 새 공동체에서, 역시 주님이 정해주시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걸 가리켜, ‘지상의 혈연관계가 천국 가서도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니다’라는 것이며, 또, 굳이 이런 사실을 미리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래야 지상 혈육과 혈연의 새로운 영적 의미를 알고, 그 의미에 맞게 주 안에서 올바르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지상 가족 사랑, 핏줄 사랑을 통해 오히려 주님 사랑을 배우고, 연습 및 훈련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지상에서, 예를 들면, 부부가 서로를 정말 참으로 ‘둘이 한 몸 되도록 사랑하였고’, 이후 천국에서도 여전히 부부로 지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은 그렇게 지내도록 허락하십니다 ^^ 여기서, ‘둘이 한 몸 되도록 사랑하였다’는 것은,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것을 자기도 원하고, 아내는 남편이 생각하는 것을 자기도 생각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아내의 의지가 남편의 이해 안으로 들어가고, 남편의 이해가 아내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는 상태, 곧 진정한 ‘하나 됨’, ‘한 몸 됨’을 말합니다.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있어 사람이기 때문인데요, 이 둘이 똑같으면, 주님 보시기엔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사람이 죽어 천국에 가면 거기는 다 천사와 같아서 지상처럼 남자, 여자 이런 성(性)적 구분이 없고, 더 이상 무슨 결혼이다, 부부다 이런 게 없는 걸로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눅20:34-36)

 

때문이지 싶은데요, 이는 우리가 그동안 천국의 결혼을 땅위 결혼의 확장, 연장 개념으로 이해해서 그런 것입니다

 

실상을 말씀드리면, 천국이라는 상태 자체가 ‘결혼’의 상태이며, 삼위일체, 곧 삼위가 한 분 주님으로 계신 것도 ‘결혼’의 상태요, 우리가 주님과 결합하는 것도 ‘결혼’의 상태인 것입니다. 오히려 이 지상의 결혼은 불완전하지만, 천국에 가면 비로소 완전한 결혼을 볼 수 있는 것이며, 우리가 가진 이 남자, 여자의 성(性)은 영원하여서, 지상에서 보낸 성으로 사후 천국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니 굳이 성전환 수술 같은 걸 할 필요가, 소용이 없습니다. 생전, 몸에 아무리 그런 변화를 주어도 사후, 몸을 벗고 영이 되면, 그 성은 고스란히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슨 젠더니 어쩌니 하는 다양한 시도들도 모두 천국으로 말미암은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 그리고 천국의 천사는 지상의 사람이 사후 천국에 올라가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 모든 구성원은 그전에 지상에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람 따로, 천사 따로, 기타 무슨 천상 피조물 따로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본래 참 사람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람 따로, 천사 따로로 알고 있게 된 건, 말씀을 글자의 뜻만으로 이해를 했기 때문이며, 사도들의 편지를 주님의 말씀과 동등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결혼은 영적이어서 땅위 결혼을 일컫는 용어인 ‘혼례’ 대신 선과 진리의 결합에서 오는 ‘마음의 결합’이라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남편’과 ‘아내’라는 말 대신 ‘두 마음이 하나로 합해짐’이라는 뜻을 가진, ‘서로에게 속함’이라는 어떤 천국 용어로 서로를 부릅니다.

 

항목 ⑤번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천국 공동체는 주님의 선(善, good)의 다양성으로 구분되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원칙, 곧, ‘비슷하면 가까이’에 따라 사후에도 서로 선이 비슷하면 같이 지낼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한 가족이었는데 천국에서도 같이 지내고 싶으면, 바로 이 선이 정말 비슷하면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외면’일 때는 알아보는데, ‘내면’일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는 게 뭘까? 하실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 한 가지 예를 준비했는데요, 바로 나비의 일생입니다. 나비의 일생은 성충-알-유충-번데기의 네 단계를 거칩니다. 이 가운데 번데기를 기준으로 유충 시절과 성충 시절이 극과 극일 정도로 그 외모와 삶이 완전 다른데요, 유충 시절엔 보기에도 참 징그러운 모습으로 잎사귀를 갉아먹으며 살지만 번데기를 거쳐 성충이 되면, 이때는 많은 사람을 매혹케 하는 아름다운 날개를 가지고 꽃으로 만발한 화원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꿀과 수액을 얻어 살아가지요.

 

여기서 굳이 비유하자면, 영의 외면 시절이 유충 모습이요, 영의 내면 시절이 성충, 곧 아름다운 나비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 경우는 천국의 경우이겠고요, 그 내면이 지옥으로 향한 경우는, 정말 참혹한 괴물의 모습이겠지요. 하지만 이 지옥의 경우도, 자기들끼리는 정상적인(?) 사람 모습으로 보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천국 빛으로는 괴물로 보이지만요. 이 역시 주님의 자비요, 배려입니다.

 

네,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정도로 변신(?)을 하게 되기 때문에, 이 ‘영의 내면’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더 이상 생전 모든 기억은 소용이 없게 됩니다. 이 상태에선 모두 휴면 상태에 들어가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꺼내어져 활성화됩니다.

 

생전 모든 경험과 기억들은 그래서 이 ‘영의 내면’을 형성하는 일종의 재료들인 셈입니다. ‘영의 내면’은 선과 진리가 어느 정도로 하나가 되었는가, 혹은 악과 거짓이 어느 정도로 하나가 되었는가 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천국 혹은 지옥에 가는 것은 바로 이 ‘영의 내면’으로 갑니다. 물론, ‘영의 외면’도 같이 가지만 이것은 이미 휴면 상태에 들어갔으므로, ‘영의 내면’으로만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겠지요 ^^

 

참고로, ‘선과 진리의 하나 됨’이란, 주님 말씀하신,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마7:24)이라는 말씀과 같이, 주님의 말씀인 진리를 듣고, 들은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알고만 있으면 아직 내 것, 곧, ‘내면’이 아니지만, 알고 있는 그것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면, 바로 그때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가 되어 나의 ‘내면’이 되며, 이때 내 ‘영의 내면’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악과 거짓으로 하나 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주의할 것은, 내가 무슨 진리를 실천할 때, 그 동기가 ‘주님을 사랑해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니까’, ‘말씀에 그렇게 하라 되어 있으니까’ 등의 동기도 좋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건 안 됩니다. 가령, 사람들의 보는 눈이 있으니까..., 내가 이래뵈도 목산데 지금 딴짓을 하거나 모른체 하면 나중에 골치아파지니까..., 그래도 내가, 우리 교회가 사회적 지위와 레벨이 있으니까... 등, 이런 이유로 무슨 선행을 하는 건 그냥 머리(understanding)로만 하는 것일뿐, 그것이 가슴(will)으로까지 내려오지 않았으므로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하더라도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후, 영계에서 깨어나는 순간, 주님에 의해 정확히 분류(?)됩니다. 곧 천국 혹은 지옥이 결정되는데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슨 사후, ‘눈 뜨니 천국’ 혹은, ‘눈 뜨니 지옥’, 네, 이런 거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거의 다 어느 정도의 선과 진리, 혹은 악과 거짓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요, 비록 천국 갈 사람이라 하더라도 얼마 간 악과 거짓을 지닌 채 임종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 죄를 말갛게 씻었으므로 우리는 깨끗해졌다. 그러므로 죽으면 바로 천국 간다.’ 뭐, 이렇게 믿어왔고, 또 고백하며, 확신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천사들은 ‘주님의 보혈’(the Lord’s blood)을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한 진리’(the Divine truth proceeding from the Lord)로 지각합니다.

 

이 진리를 접한 책임(?)과 그 결과는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해의 빛과 열을 받아 생명활동을 하는 숲은 생기로 넘쳐나게 되지만, 반대로 부패를 일으키는 거름더미는 악취로 가득한 것처럼 말입니다. 해는 공평, 공정하게 만물에게 빛과 열을 공급하지만, 그 완전 상반되는 나중 결과는 그 책임이 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걸 받은 당사자인 피조물에게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보혈’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혈’의 능력, 곧 주님의 신성한 진리의 능력을 힘입어 스스로 결단, 악에서 물러나는 일은 안하고, 그저 ‘믿기만’ 하면, 미안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천사들조차 ‘주님의 보혈’로 자기들의 본성(本性, own, 라. 프로프리움 proprium)이 저지되는 만큼만 천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우리 역시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악에서 물러나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직접 해야 합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 본성의 힘이 아주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요청으로, 악을 직접 상대하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악에서 물러나는 건 우리가 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의 의미입니다.

 

천국의 경우를 말씀드리면, 그러나 천국은 일체의 악과 거짓은 허용되지 않는 곳이므로, 천국 가기 전, 먼저 이 악과 거짓을 선(先)처리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천국에서는 이 악과 거짓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먼저 이 악과 거짓을 떼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 과정이 끝나 온전히 100% 선과 진리로 하나 된 상태가 되면 이제 세 번째 상태인 천국 오리엔테이션 장소로 가는 문이 열리며, 주님이 친히 우리를 그 장소로 인도하십니다.

 

지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과 진리를 떼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게 다 되어 100% 악과 거짓으로 하나 된 상태가 되면, 이때 비로소 지옥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그 문, 그 틈으로 나오는 끔찍한 냄새에 그만 환장을 하며 뛰어듭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지옥을, 사람들은 가기 싫어 하는데 지은 죄과 때문에 억지로 쳐넣어진다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두 번째 상태인 ‘영의 내면’이 지옥으로 완성된 사람은 이 지옥에서 올라오는 기운과 냄새, 끔찍한 악취에 그만 환장을 할 정도로 좋아하기 때문에, 머리를 아래로, 두 발을 위로 하고 뛰어들게 되는데, 그게 남이 볼 땐, 누가 발로 차서 거꾸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두 번째 상태인 ‘영의 내면’ 상태를 마치게 되면, 사람은 악과 거짓으로 100%가 된 상태, 악과 거짓이 결혼한 상태, 온전히 악과 거짓으로 영근 상태이기 때문에, 일말의 무슨 양심의 가책이나 회개, 뉘우침 같은 걸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말입니다. 사실, 지옥의 영들도 자기들이 지금 악을 행하고, 거짓을 말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금할 수가 없는 게, 그들 영의 내면에 있는, 악을 향한 달콤함이 그들을 삼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선이며,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육으로 뭘 어떻게 할 수가 없고, 오직 벌로만 통제할 수 있으며, 그래서 지옥은 벌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참고로, 천국 갈 사람들한테는 세 번째 상태인 오리엔테이션 상태가 있지만, 지옥갈 사람들은 이 두 번째 상태로 끝, 바로 지옥 내 해당 공동체로 배정을 받게 됩니다.

 

아, 오늘도...

 

겨우, 하나만 다루었네요. 아이고...

 

나머지는 다음에, 3편으로 만나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의 주제가 너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나머지는 다 합쳐 다음 3편 하나로 끝내겠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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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다음은 지난 2월 14일, 함께 나눈 내용입니다.

 

... 최근 창세기 1장 2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와, 이에 대한 AC.44번 내용 중에,

 

사람은, 땅처럼, 먼저 자기 안에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심어 무얼 믿고 무얼 행해야 하는지를 모르고서는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습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하는 문장에 눈길이 갔더랬습니다. 특별히 땅을 사람의 마음으로 연결하는 표현에 말이지요.

 

특별히 세계테마기행 최근 편 가운데 ‘벼랑 끝을 걷다, 협곡 기행’인 시리즈를 보는 중, 오... 정말 지구 상 어마어마한 협곡들을 소개하는데, 비록 영상으로지만,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양 프랑스령 레위니옹 살라지 협곡, 실라오스 협곡, 그리고 중국의 시링협곡, 언스대협곡,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블라이드리버캐니언 등입니다.

 

이 장엄, 광대, 광활한 장면들을 또 드론으로 말미암아 기가 막힌 영상으로 보여주는데요, 정말 엄청났습니다. 그렇게 계속 감탄에 감탄을 계속하다가...

 

오, 할렐루야! 이 모든 광경, 곧 땅의 모습 이 모든 장관이 주님 보시기에 사람의 마음이겠구나 싶은 겁니다. 주님이 우리 인간의 마음을 보실 때, 저렇게 보이시는가 보다 싶은 순간, 엄청난 전율이 일며, 말할 수 없는 큰 감동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반짝이는 말씀 구절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대하16:9)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8:36)

 

주님이 내 안에 조성하신 마음의 어떠함에 대해 조금, 아주 조금, 그러나 엄청난 무슨 발견을 한 것 같은 아주 흥분된 순간이었습니다...

 

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의 모판입니다. 모형이요, 모델하우스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사람을 위함이며, 오직 사람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럴 듯한 무엇이라 해도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일체의 것은 천국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며, 아무리 사람을 그럴 듯하게 여긴다 해도 사람의 구원, 곧, 천국으로 인도함이 아니면 여전히 천국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 말씀(The Word) 전체가 단 한 가지 목적, 곧,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것이며, 그래서 창세기도, 그리고 창세기 1장도 결국은 한 사람의 거듭남의 전 과정을 아름다운 천지창조 이야기로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첫 단계부터 여섯 번째 단계 가운데 있는 사람, 즉, 아직 거듭남 중에 있는 영적(靈的, spiritual) 인간한테는 주님은 아직 ‘하나님’이셔서 창세기 1장엔 ‘하나님’으로, 그리고 드디어 일곱 번째 단계인 일곱째 날 안식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 즉,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한테는 주님은 비로소 ‘여호와’이셔서 창세기 2장에서는 ‘여호와’로 각각 호칭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자연계 모든 만물은 사람의 거듭남에 관련되며, 구원에 기여할 때에만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바로 그때가 그 사람한테는 ‘태초’(太初, the beginning)가 되는 것입니다.

 

천지’(天地, the heavens and the earth)는 사람 안의 속 사람, 겉 사람을 말합니다. 이 속 사람, 겉 사람 이야기는 앞으로 대하(大河)처럼 계속 됩니다.

 

말씀에 나오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거듭남을 가리킵니다. (cf. 사43:7)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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