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408. 하나의 교회가 더 이상 그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지면, 전과 다르게 새로움이 시작됩니다. 즉, 새 빛이 발(發)하는데요, 이걸 말씀에서는 ‘아침’이라고 합니다. When a church has been so vastated that there is no longer any faith, then and not before, it begins anew, that is, new light shines forth,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morning.

 

이 새 빛 혹은 ‘아침’이 왜 교회가 황폐해질 때까지는 발하지 않는지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동안 신앙과 이웃 사랑의 일들은 모독의 일들과 뒤엉킨 상태로 지내왔습니다. The reason why the new light or “morning” does not shine forth until the church is vastated, is that the things of faith and of charity have been commingled with things profane;

 

그리고 이 일들이 여전히 이런 상태에 있는 한, 무슨 빛이나 이웃 사랑이 시작되기란 불가능합니다. ‘잡초들’이 모든 ‘좋은 씨’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and so long as they remain in this state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of light or charity to be insinuated, since the “tares” destroy all the “good seed.

 

그러나 신앙이 전혀 없으면, 신앙은 더 이상 모독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선포된 것을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But when there is no faith, faith can no longer be profaned, because men no longer believe what is declared unto them;

 

그리고 시인도, 믿지도 않고, 대신 알기만 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관찰한 것처럼, 모독을 할 수가 없습니다. an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but only know, cannot profane, as was observed above.

 

이것이 바로 오늘날 유대인들의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더불어 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시인하는 주님이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려 왔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이 사실을 모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시인도,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This is the case with the Jews at the present day, who in consequence of living among Christians must be aware that the Lord is acknowledged by Christians to be the messiah whom they themselves have expected, and still continue to expect, but yet they cannot profane this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it.

 

그리고 주님에 대하여 들은 모하메드인들과 이방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And it is the same with the Mohammedans and gentiles who have heard about the Lord.

 

이것이 바로 유대 교회가 아무것도 시인도, 믿지도 않을 때까지는 주님이 세상에 오실 수 없으셨던 이유였습니다.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did not come into the world until the Jewish church acknowledged and believed nothing.

 

 

409. ‘가인’이라 하는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이단 역시 세월이 흘러 황폐해졌는데요, 사랑을 시인했지만, 신앙을 머리 삼고, 사랑보다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이 가인이라는 이단에서 유래한 이단들은 점점 더 곁길로 빠지더니,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아예 신앙조차 부인했습니다. The case was the same with the heresy called “Cain,” which in process of time was vastated, for although it acknowledged love, yet it made faith the chief and set it before love, and the heresies derived from this one gradually wandered from it, and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altogether denied even faith.

 

이 지경이 되자 새 빛 혹은 아침이 빛을 발하며, 새 교회가 나왔는데 여기 본문에 보면, 그 이름이 ‘아다와 씰라’이며, 부르기를, ‘라멕의 아내들’이라 하고 있습니다. When this time arrived, a new light, or morning, shone forth, and a new church was made which is here named “Adah and Zillah,” who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그들을 일컬어 라멕의 아내들이라 하고 있습니다. 라멕은 아무 신앙도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의 내적, 외적 교회의 경우와 같은데요, 유대인들 역시 아무 신앙도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 두 교회를, 말씀에 보면 ‘아내들’, 곧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로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레아는 외적 교회를, 라헬은 내적 교회를 표현합니다. They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although he possessed no faith, just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church of the Jews, who also had no faith, are also in the Word called “wives,” being represented by Leah and Rachel, the two wives of Jacob—Leah representing the external church and Rachel the internal.

 

이 교회들은 둘로 보이지만 하나입니다. These churches, although they appear like two, are yet only one;

 

내적인 것과 분리된, 외적인 것 혹은 대신하는 것은 단지 무슨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거나 죽은 것인 반면, 외적인 것과 함께 하는 내적인 것은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며, 여기 아다와 씰라가 그런 것처럼 심지어 하나 된 교회, 같은 교회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for the external or representative, separate from the internal, is but as something idolatrous, or dead, whereas the internal together with the external constitute a church, and even one and the same church, as Adah and Zillah do here.

 

하지만 야곱과 그의 후손은 라멕처럼 아무 신앙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그들 가운데 있을 수가 없어 대신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이들은 부정(不貞, infidelity)한 대신 무지하게 살았습니다. As however Jacob and his posterity, like Lamech, had no faith, the church could not remain with them, but was transferred to the gentiles, who lived not in infidelity but in ignorance.

 

교회가 황폐해졌을 때, 그 가운데 진리를 가진 사람들이 남아 있을 경우는,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뭅니다. 교회는 그 경우, 진리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로 이동하는데요, 오히려 이 사람들이 저 사람들보다 더 쉽게 신앙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The church rarely, if ever, remains with those who when vastated have truths among them [apud se] but is transferred to those who know nothing at all of truths, for these embrace the faith much more easily than the former.

 

 

410. 황폐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Vastation is of two kinds;

 

먼저, 알면서 알고 싶어 하지 않거나, 보면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과거 유대인들과 오늘날 기독교인들처럼 말입니다. first, of those who know and do not wish to know, or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like the Jews of old, and the Christians of the present day;

 

두 번째는, 무지의 결과인데요, 뭘 알지도 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고대와 현대 이방인들처럼 말입니다. and secondly, of those who, in consequence of their ignorance, neither know nor see anything, like both the ancient and modern gentiles.

 

황폐함의 마지막 때가, 알면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즉, 보면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를 때, 하나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데요, 이들이 아니고, 이들이 이방인이라 부르는 사람들한테 일어납니다. When the last time of vastation comes upon those who know and do not desire to know, that is,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then a church arises anew, not among them, but with those whom they call gentiles.

 

이런 일이 홍수 전 태고 교회에 일어났고, 또 홍수 후, 고대 교회, 그리고 유대 교회에도 일어났습니다. This occurred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was before the flood, with the ancient church that was after that event, and also with the Jewish church.

 

새 빛이 그때 빛을 발하고, 전에는 아닌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그때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진리임을 시인도,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new light shines forth then and not before is, as has been said, that then they can no longer profane the things revealed,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they are true.

 

 

411.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먼저 마지막 황폐함의 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은 예언서에서 자주 선언하셨는데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해서는, ‘황폐함’, 혹은 ‘황폐하게 함’으로, That the last time of vastation must exist before a new church can arise, is frequently declared by the Lord in the prophets, and is there called “vastation” or “laying waste,” in reference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그리고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해서는, ‘황무함’으로 일컬으십니다. and “desolation,” in relation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또는 ‘종말’, ‘끊음’으로도 말씀하십니다. (※ 다음 본문들 참조 : 사6:9, 11-12, 23:8-끝절, 24장, 42:15-18, 렘25, 단8, 9:24-끝절, 습1, 신32, 계15, 16 및 이어지는 장들) It is also spoken of as “consummation” and “cutting off.” (See Isa. 6:9, 11–12; 23:8 to the end; 24; 42:15–18; Jer. 25; Dan. 8; 9:24 to the end; Zeph. 1; Deut. 32; Rev. 15; 16; and following chapters.)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6:9, 11-12)

 

8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9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11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여호와께서 가나안에 대하여 명령을 내려 그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게 하시고 12이르시되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13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그 백성이 없어졌나니 곧 앗수르 사람이 그 곳을 들짐승이 사는 곳이 되게 하였으되 그들이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헐어 황무하게 하였느니라 14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으라 너희의 견고한 성이 파괴되었느니라 15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16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17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 18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 (사23:8-18)

 

※ 이하 참조 본문은 성경을 직접 참조하세요.

2021-06-09(D4)-매일예배(창4,19, AC.408-41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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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3hpseoCgd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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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405. 가인으로부터 여섯 번째 순서인 ‘라멕’은 황폐함을 상징합니다. 더 이상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게 된 결과입니다. By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from Cain, is signified vastation, in consequence of there being no longer any faith;

 

그의 ‘두 아내’는 일종의 새로운 교회의 도래를 상징하며, by his “two wives” is signified the rise of a new church;

 

아다’는 그 교회의 천적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by “Adah,” the mother of it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그리고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각각 상징합니다. and by “Zillah,” the mother of its natural things.

 

 

406. ‘라멕’은 황폐함, 혹은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음을 상징합니다. 이 사실은 이어지는 23절, 24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거기에서,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말하고 있습니다.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or that there was no faith,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verses (23–24), in which it is said that he “slew a man to his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his hurt”;

 

거기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 혹은 ‘소년’은 이웃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for there, by a “man” is meant faith, and by a “little one” or “little child,” charity.

 

 

407. 보통 한 교회의 상태는 그래서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참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다가 결국 신앙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때를 일컬어 ‘황폐해졌다’고 합니다.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 “vastated.

 

이런 일이 태고 교회의 경우, 가인파(가인派, Cainites)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또한 홍수 후 고대 교회의 경우와, 뿐만 아니라, 유대 교회의 경우에도 있었습니다. 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주의 강림(降臨, the Lord’s advent)의 때에, 이런 종말이 다음과 같은 황폐한 상태 가운데 있었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시기로 예정되어 있던 주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 신앙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초대 기독교회, 혹은 주님 강림 후 존재했던 교회의 경우 또한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1750년대 즈음 유럽) 교회의 경우 역시 그 안에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철저하게 황폐해진 상황입니다.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그러나 교회의 극소수 핵들은 늘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앙에 관해서 황폐해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태고 교회의 경우가 그랬는데, 태고 교회의 남은 자들은 홍수 때까지 있었고, 홍수 후에도 계속 있었습니다.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이들 태고 교회 내 남은 자들을 이름하여 ‘노아’라 하는 것입니다.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 “Noah.

2021-06-08(D3)-매일예배(창4,19, AC.405-407), '라멕, 황폐함(vastation)'.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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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MsQb5UrG2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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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18)

 

 

404. 이 이름들은 모두 ‘가인’이라 하는 첫 이름에서 유래된 이단들을 상징합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 which was called “Cain”;

 

이들에 관해서는 이름들밖에는 현존하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들에 관한 무슨 언급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 except the names, 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이 이름들의 기원들로부터 뭔가 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

 

예를 들면, ‘이랏’은 ‘성의 후손’이라는 것, 그렇다면 ‘에녹’이라는 이단에서 비롯되었나? 뭐 그런 것입니다. for example, “Irad” means that he “descends from a 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2021-06-07(D2)-매일예배(창4,18, AC.404),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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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Ve6AS-9_q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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