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창4:9)

 

 

37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는 이웃 사랑, 혹은 ‘아우 아벨’에 관하여 그들에게 일종의 딕테이트를 주는 어떤 영적 지각을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 “brother Abel.

 

가인의 대답,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는, 신앙이 이웃 사랑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여기거나 이웃 사랑에게 순종하는 걸 내켜 하지 않아, 그 결과, 이웃 사랑과 관련된 모든 걸 거부했음을 상징합니다. Cain’s reply,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

 

그들의 교리는 그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371. 태고인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이라는 표현을 이용해서 퍼셉션을 상징했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영적 지각 능력 주셨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By the “speaking of Jehovah” 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

 

이 퍼셉션은 사랑이 주(主)가 되는 동안은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

 

주님 사랑이 식고, 그 결과, 이웃 사랑 또한 식으면 퍼셉션은 사라졌습니다. 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그러나 사랑이 아직 남아 있는 한은, 퍼셉션은 남아 있었습니다.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

 

이러한 퍼셉션 능력은 태고 교회에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서, 홍수 후 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이웃 사랑이 신앙을 통해서 주어졌고, 양심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 양심 또한 일종의 딕테이트를 주는데, 방식이 다릅니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양심이 딕테이트할 때, 그것은 마치 말씀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와 같은 식입니다. 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 “Jehovah speaks”;

 

양심이라는 게, 계시로 알게 하신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말씀이 말씀하시거나 딕테이트하실 때, 말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그런 까닭에, 심지어 오늘날에조차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언급할 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 Lord says.

 

 

372. ‘지키는 자’가 된다는 것은 섬기는 것, 유대 교회의 ‘문지기’나 ‘수위’(문지방을 지키는 자)처럼 섬기는 걸 상징합니다. To be a “keeper” signifies to serve, like “door keepers” and “porters” (that is, the keepers of the threshold) in the Jewish church.

 

신앙은 이웃 사랑의 ‘지키는 자’입니다. 신앙은 원래 그래야 하니까요. 그런데 ‘가인’이라고 하는 교리의 원리들, 곧 신앙이 이웃 사랑을 다스리고자 하는 원리들을 따랐습니다. 7절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Faith is called the “keeper” of charity, from the fact that it ought to serve it, but it wa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called “Cain” that faith should rule, as was said in verse 7.

 

아래 인용은 '양심'에 대한 글입니다. 아직 번역을 곁들이지 못했습니다. 완성되면 곁들이겠습니다.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9. Conscience

 

133. In a true conscience is man’s spiritual life itself, for there his faith is conjoined to charity.

 

On which account to act from conscience is to them to act from their spiritual life; and to act against conscience is to them to act contrary to that life of theirs.

 

Hence it is that they are in the tranquility of peace, and in internal happiness, when they act according to conscience, and in intranquility and pain, when they act against it.

 

This pain is what is called remorse of conscience.

 

 

134. Man has a conscience of what is good, and a conscience of what is just.

 

The conscience of what is good is the conscience of the internal man, and the conscience of what is just is the conscience of the external man.

 

The conscience of what is good consists in acting according to the precepts of faith from internal affection; but the conscience of what is just consists in acting according to civil and moral laws from external affection.

 

They who have the conscience of what is good, have also the conscience of what is just; but they who have only the conscience of what is just, are in a faculty of receiving the conscience of what is good; and they also do receive it when they are instructed.

 

 

135. Conscience, with those who are in charity toward the neighbor, is the conscience of truth, because it is formed by the faith of truth; but with those who are in love to the Lord, it is the conscience of good, because it is formed by the love of truth.

 

The conscience of these is a superior conscience, and is called the perception of truth from good.

 

They who have the conscience of truth, are of the Lord’s spiritual kingdom; but they who have the superior conscience, which is called perception, are of the Lord’s celestial kingdom.

 

2021-05-27(D5)-창세기(창4,9, AC.370-372),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hwp
0.07MB

https://youtu.be/mtYn0tMfsfw

 

Posted by bygracetistory
,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창4:8)

 

 

366.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는 시간의 경과를 상징합니다. Cain spake to Abel” signifies an interval of time.

 

가인’은 앞서 기술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이웃 사랑, 곧 신앙의 아우를 각각 상징하며, 그래서 여기서 그는 두 번 ‘아우’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Cain,” as before stated, signifies faith separated from love; and “Abel” charity, the brother of faith, on which account he is here twice called his “brother.

 

’은 무엇이든지 교리에 속한 것을 상징합니다.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분리된 신앙이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렸음을 상징합니다.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signifies that separated faith extinguished charity.

 

 

367. 이웃 사랑이 신앙의 ‘아우’라는 것과, ‘’이 교리에 속한 무언가를 상징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것 말고는 이들 아케이나 확증을 위해 굳이 말씀 내 유사 구절들을 찾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It is unnecessary to confirm these things by similar passages from the Word, except so far as to prove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and that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이웃 사랑이 신앙의 ‘아우’라는 사실은 신앙의 속성이나 본질상 누구에게나 자명합니다.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is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nature or essence of faith.

 

이 형제지간(兄弟之間)이 에서와 야곱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장자권 및 그로 말미암은 주도권 다툼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This brotherhood was represented by Esau and Jacob, and was the ground of their dispute about the birthright and the consequent dominion.

 

이것은 또한 유다로 말미암은 다말의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로(창38:28-30), It was also represented by Pharez and Zarah, the sons of Tamar by Judah (Gen. 38:28, 29, 30);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창38:28-30)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창48:13-14)로도 표현되었습니다. and by Ephraim and Manasseh (Gen. 48:13, 14);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창48:13-14)

 

이 둘도 다른 유사한 경우들과 같이 장자권과 그로 인한 주도권 다툼이 있습니다.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

 

신앙과 이웃 사랑은 교회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

 

신앙을 일컬어 ‘남자’라 하였고, 이 장 1절에 나오는 ‘가인’을 가리켰지요, 이웃 사랑을 일컬어 ‘아우’라 불렀습니다. 사19:2, 렘13:14 및 다른 데서들도 말이지요. Faith is called a “man,” 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 “brother,” 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 (사19:2)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13:14)

 

신앙과 이웃 사랑 간 결합을 ‘형제의 계약’(암1:9)이라 합니다. The union of faith and charity is called “the covenant of brethren.” (Amos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암1:9)

 

가인과 아벨의 상징과 비슷한 것이 방금 말씀드린 야곱과 에서의 상징이었습니다. 야곱 역시 그의 형 에서를 대신하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그런데요, 호세아를 보면 분명합니다.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2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To visit upon Jacob his ways, according to his doings will he recompense him; he supplanted his brother in the womb. (호12:2-3)

 

그러나 에서, 곧 에서로 표현된 이웃 사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주도권을 쥘 것이라는 내용이, 그들의 아버지 이삭의 예언을 보면 나옵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By thy sword shalt thou live, and shalt serve thy brother;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ou hast the dominion, that thou shalt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창27:40)

 

또는 같은 건데요,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새 교회는 에서로, 유대인들의 교회는 야곱으로 표현됩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형제로 여겨야 한다는 말을 아주 자주 듣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원시 교회에서는 이웃 사랑으로 모두가 형제로 불렸습니다. Or what is the same,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new church, is represented by Esau, and the Jewish church is represented by Jacob; and this is the reason for its being so often said that the Jews should acknowledge the gentiles as brethren; and in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primitive church, all were called brethren, from charity.

 

마찬가지로 주님도 누가복음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을 형제라 하셨습니다. Such as hear the Word and do it are likewise called brethren by the Lord (Luke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눅8:21)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은 이웃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 혹은 신앙인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행함은 없는, 혹은 이웃 사랑은 없는 사람들, 이들은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에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those who hear are such as have faith; those who do are such as have charity; but those who hear, or say that they have faith, and do not, or have not charity, are not brethren, for the Lord likens them unto fools (Matt. 7:24, 26).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6)

 

 

368. ‘’이 교리를,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앙과 이웃 사랑의 교리에 속한 것이면 무엇이나 상징한다는 것은 다음 예레미야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O my mountain in the field, I will give thy possessions [facultates] and all thy treasures for a spoil. (렘17:3)

 

이 구절에서, ‘’은 교리를, ‘재산’과 ‘보물’은 신앙의 영적인 부(富), 혹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다음 말씀도 같습니다. In this passage “field” 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 and “treasures” 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In the same: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Shall the snow of Lebanon fail from the rock of my field? (렘18:14)

 

신앙의 교리의 결핍 시, 시온을 향하여 선포하시기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It is declared concerning Zion, when destitut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she shall be “plowed like a field.” (Jer. 26:18, Micah 3:12)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렘26:18)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미3:12)

 

에스겔에서 In Ezekiel:

 

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He took of the seed of the land, and set it in a field of sowing, (겔17:5)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다루고 있습니다. 교리를 일컬어 그 안에 종자가 있는 ‘’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 “field” from the seed in it.

 

같은 본문에서 In the same: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And let all the trees of the field know that I Jehovah bring down the high tree. (겔17:24)

 

요엘입니다. In Joel:

 

10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2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The field is laid waste, the ground mourneth, for the corn is wasted, the new wine is dried up, the oil languisheth, the husbandmen are ashamed, the harvest of the field is perished, all the trees of the field are withered, (욜1:10-12)

 

여기 ‘’은 교리를, ‘나무’는 지식들을, ‘농부들’은 예배자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the “field” signifies doctrine, “trees” knowledges, and “husbandmen” worshipers.

 

시편에서 In David: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The field shall exult and all that is therein; then shall all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시96:12)

 

여기서, ‘’이 어떻게 기뻐 어쩔 줄 몰라 하겠으며, ‘숲의 모든 나무들’이 어떻게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 안에 있는 것들, 곧 신앙의 지식들 얘기인 것입니다.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렘12:4)

 

여기서도 분명한 것은, ‘’도, ‘지방의 채소’도 슬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황폐함 가운데 있는 사람의 내면 속 어떤 것에 관한 것입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The mountains and the hills shall break forth before you into singing, and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all clap their hands. (사55:12)

 

주님 또한 세상 종말 관련 예언 가운데 신앙의 교리를 가리켜 ‘’이라 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 “field: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Then shall two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마24:40; 눅17:36)

 

※ 개역개정 한글 성경에는 눅17:36 본문이 ‘(없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은 신앙의 교리, 곧 참과 거짓 둘 다를 의미합니다. where by a “field” 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

 

’이 교리를 가리키기 때문에, 신앙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누구든, 그것이 사람이든, 교회든, 아니면 세상이든, 또한 일컬어 ‘’이라 합니다. As a “field” 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 “field.

 

 

369. 이상으로부터, 그리고 다음 사실들이 이어집니다. 즉, 본문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가 가리키는 것은, 신앙과 이웃 사랑이 둘 다 신앙의 교리로부터 왔으면서도, 자기를 사랑에서 분리하는 신앙은 이웃 사랑을 무시하지 않고는 못 배기며, 그래서 결국은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린다는 사실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오늘날의 경우를 보면, 이웃 사랑의 행위는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바로 이런 가정으로 그들은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알고 있고, 입술로 고백하기를, 사랑 없이 신앙 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2021-05-26(D4)-창세기(창4,8, 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hwp
0.07MB

https://youtu.be/rdZzsgRVmTs

 

Posted by bygracetistory
,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창4:7)

 

 

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가 상징하는 것은, 네가 선에 대해 호의적이면 너는 이웃 사랑을 가졌다는 것이며,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네가 만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웃 사랑은 전혀 없고, 대신 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 signifies that if thou art well disposed, thou hast charity;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signifies that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ou hast no charity, but evil.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이웃 사랑은 신앙과 함께, 같이 지내는 걸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신앙이 이웃 사랑을 다스리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signifies that charity is desirous to be with thee, but cannot because thou desirest to rule over it.

 

 

362. ‘가인’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를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면, 그 결과, 이웃 사랑으로부터도 분리됩니다. 이웃 사랑은 사랑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Cain” 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어디든지 교회가 있는 곳이면 이단들이 일어나는데요, 사람들은 신앙의 어떤 특별한 조항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다가 그만 그걸 메인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게 바로 인간 사고의 본성인데요, 사람은 어떤 것 하나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다가 그걸 다른 것 앞에 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며, 이런 경향은 특히 그가 그걸 자신의 고유한 발견이라고 주장할 때라든지, 그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렇습니다.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다 그것에 들어맞는 것 같고,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는 결국 그것이 맞다 맹세까지 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것이 거짓이더라도 말이지요.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도 더 본질적인 걸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과적으로 사랑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삶에서 비롯된 자아와 판타지 둘 다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확신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 “Cain” 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363. ‘가인’이라 부르는 신앙의 교리의 본질을 이 구절 설명 중 그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그걸 보면, 이웃 사랑은 신앙과 결합할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신앙이 아닌 이웃 사랑이 주가 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he natur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was called “Cain” is seen from the description of it in this verse, from which it appears that charity was capable of being joined to faith, but so that 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이런 이유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를 먼저 거론한 것입니다. 이 표현은 선에 대해 호의적이면 이웃 사랑도 있을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선을 행하다’의 속뜻이 기꺼이 선을 선택하고자 하는 마음인데요,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선한 일을 마음먹는 것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On this account it is first said,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 signifying, If thou art well disposed, charity may be present; for to “do well” signifies, in the internal sense, to be well disposed, since doing what is good comes from willing what is good.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습니다. 행위를 보면, 그 의지를 알 수 있었지요. 그때는 위선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In ancient times action and will made a one; from the action they saw the will, dissimulation being then unknown.

 

낯을 들다’가 이웃 사랑이 있다를 상징함은 얼굴에 대해 이미 말씀드린 내용을 보시면 분명한데요, 거기에 보시면, ‘낯을 들다’가 이웃 사랑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낯을 떨구다’는 그 반대를 각각 상징하고 있습니다. That an “uplifting” signifies that charity is presen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aid about the face, that to “lift up the face” is to have charity, and that for the “face to fall” is the contrary.

 

 

364. 두 번째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만일 네가 선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면 이웃 사랑은 전혀 있을 수 없고 대신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준비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악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웃 사랑이 전혀 없는 곳에는 오직 무자비함과 증오, 결과적으로는 모든 악만 있기 때문입니다. Everybody can see that “sin lying at the door” 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보통, 죄를 일컬어 ‘악마’라고 부르는데, 지옥에 있는 이 악마의 동료들은 사람에게 이웃 사랑이 결핍될 때, 그 사람 마음의 문 아주 가까이 와 있습니다. 마음의 문에서 이 악마와 그의 동료들을 쫓아버리는 오직 유일한 방법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Sin in general is called the “devil,” 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365. 세 번째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이웃 사랑은 신앙과 함께, 같이 지내기를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신앙은 이웃 사랑을 다스리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질서에 반(反)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신앙이 주도권을 쥐며, 지배하려고 하는 한, 그런 건 전혀 신앙이 아닙니다. 오직 이웃 사랑이 다스릴 때만 신앙이 됩니다. 위에서 보여드린 것처럼 이웃 사랑이 신앙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이웃 사랑은 불에 비유할 수 있겠는데요, 불은 열과 빛의 본질이지요. 열과 빛이 불에서 나오기 때문인데, 분리 상태에 있는 신앙은 마치 불의 빛은 빛인데 열 없는 빛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빛이 있어도 만물이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겨울철 빛입니다.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2021-05-25(D3)-창세기(창4,7, AC.361-365),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hwp
0.07MB

https://youtu.be/jEMufBdBn60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