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천 산책(4/19)

일상 2021. 4. 1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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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6-228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창3:9-10)

 

 

226. ‘부르시며’, ‘동산에서 나는 소리’,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의 의미들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The meaning of “crying,” of the “voice in the garden,” of their “being afraid because they were naked,” and of “hiding themselves” has been previously explained.

 

말씀에서, 사람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무엇을 하느냐 먼저 묻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주님은 이미 다 아시면서 말이지요. It is common in the Word for man to be first asked where he is and what he is doing, although the Lord previously knew all things;

 

그러시는 이유는, 그러면 그가 혹시 시인하고 자백할까 해서입니다. but the reason for asking is that man may acknowledge and confess.

 

 

227. 퍼셉션, 내면의 소리, 그리고 양심 등의 기원을 알 수 있었으면 하는 것과, 또 오늘날(1,750년 즈음 유럽)엔 그 기원에 관해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이유로, 제가(Swedenborg, 스베덴보리, 1688-1772) 이 주제에 관해 무언가를 연관 지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As it is desirable that the origin of perception, internal dictate, and conscience, should be known, and as at the present day it is altogether unknown, I may relate something on the subject.

 

정말 엄청난 진실은, 주님이 영들과 천사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It is a great truth that man is governed by the Lord by means of spirits and angels.

 

악한 영들의 지배가 시작되면, 천사들은 악과 거짓들로부터 고개를 돌리게 하려고 애를 쓰며, 이렇게 전투가 발생합니다. When evil spirits begin to rule, the angels labor to avert evils and falsities, and hence arises a combat.

 

사람은 퍼셉션, 내면의 소리 및 양심의 전투를 통해 점점 더 예민해집니다. It is this combat of which the man is rendered sensible by perception, dictate, and conscience.

 

이것들과 또 시험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과 천사들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아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육체의 일에 아주 깊이 잠겨 영들과 천사들에 관한 것을 전혀 믿지 않는 그런 사람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By these, and also by temptations, a man might clearly see that spirits and angels are with him, were he not so deeply immersed in corporeal things as to believe nothing that is said about spirits and angels.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그들이 이런 전투들을 수백 번 느껴도 여전히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건 다 상상이며, 마음이 어수선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Such persons, even if they were to feel these combats hundreds of times, would still say that they are imaginary, and the effect of a disordered mind.

 

저는 허락하심을 받아 이런 전투들을 수천 번씩이나 느낄 수 있었고, 아주 생생하게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수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이런 전투들을 일으키는 그들이 누구며, 무슨 일을 했고, 어디 출신인지, 그리고 그들이 언제 오며, 언제 떠나가는지 등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I have been permitted to feel such combats, and to have a vivid sense of them, thousands and thousands of times, and this almost constantly for several years, as well as to know who, what, and where they were that caused them, when they came, and when they departed;

 

저는 그들과 지금까지도 대화하고 있습니다. and I have conversed with them.

 

 

228. 천사들에게는 말로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정말 차원이 다른 정교한 퍼셉션이 있는데요, 천사들은 어떤 일이 신앙의 진리, 사랑의 선하고 반대되는지 여부를 이 퍼셉션을 가지고 압니다. It is impossible to describe the exquisite perception whereby the angels discover whether anything gains admission that is contrary to the truth of faith and the good of love.

 

천사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언제 해야 할지를 그런 것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는 사람이 혼자 하는 것 보다 수천 배나 더 완벽하게 지각합니다. They perceive the quality of what enters, and when it enters, a thousand times more perfectly than the man himself, who scarcely knows anything about it.

 

사람이 하는 가장 작은 생각조차도 천사들은 더욱 완벽하게 지각합니다. 사람이 그걸 가지고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그레이트한 생각보다도 더 말이지요. The least of thought in a man is more fully perceived by the angels than the greatest is by himself.

 

이런 이야기는 정말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백 프로 사실입니다. This is indeed incredible, yet is most true.

 

2021-04-19(D2)-창세기(창3,9-10, AC.226-228),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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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8-225

 

8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창3:8)

 

 

21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는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한 내면의 소리를 상징합니다. 이 소리는 그들이 전에 소유했던 퍼셉션 가운데 아직 남아 있던 나머지입니다.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signified an internal dictate which caused them to feel afraid, this dictate being the residue of the perception which they had possessed;

 

그 날 바람이 불 때’는 교회가 아직 약간의 퍼셉션을 갖고 있던 기간을 가리킵니다.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denoted a period when the church still possessed some residue of perception;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는 그 소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악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그러듯 말입니다.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s to fear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동산 나무 사이에’는, 그들이 자신들을 숨긴 곳이지요, 자연적 선을 상징합니다. by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in which they hid themselves, is signified natural good;

 

여기 가장 안쪽을 ‘사이에’라 하고, that which is inmost is called the “midst”;

 

나무’는, 앞서 살핀 대로, 퍼셉션을 가리킵니다. the “tree” denotes perception as before;

 

그런데 이제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마치 유일하게 남은 것처럼 나무를 단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but because there was little perception remaining, the tree is spoken of in the singular number, as if there were only one remaining.

 

 

219.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가 그들이 두려워한 내면의 소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 나오는 ‘소리’가 상징하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말씀에서 ‘여호와의 소리’는 말씀 그 자체, 신앙의 교리, 양심이나 내적으로 주의하기, 그리고 또한 그렇게 이어지는 모든 책망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곤 합니다. That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meant an internal dictate of which they were afrai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voice” in the Word, where the “voice of Jehovah” is used to designate the Word itself, the doctrine of faith, conscience or a taking notice inwardly, and also every reproof thence resulting;

 

그래서 천둥소리들을 ‘여호와의 소리’라고 하는데요, 요한계시록입니다. whence it is that thunders are called the “voices of Jehovah,” as in John: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The angel cried with a loud voice, as a lion roareth, and when he had cried seven thunders uttered their voices, (계10:3)

 

그때 외적, 내적 둘 다인 어떤 소리였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denoting that there was then a voice both external and internal.

 

다시, Again: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In the days of the voice of the seventh angel the mystery of God shall be consummated. (계10:7)

 

시편입니다. In David: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Sing unto God, sing praises unto the Lord, who rideth upon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lo, he shall send out his voice, a voice of strength. (시68:32-33)

 

옛적 하늘들의 하늘’은 태고교회의 지혜를 말합니다.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denote the wisdom of the most ancient church;

 

소리’는 계시, 그리고 또한 내면의 소리를 뜻합니다. voice,” revelation, and also an internal dictate.

 

다시, Again: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The voice of Jehovah is upon the waters; the voice of Jehovah is in power; the voice of Jehovah is in glory; the voice of Jehovah breaketh the cedars; the voice of Jehovah divideth the flames of fir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wilderness to shak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hinds to calve and uncovereth the forests. (시29:3-5, 7-9)

 

이사야입니다. And in Isaiah: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Jehovah shall cause the excellency of his voice to be heard, for through the voice of Jehovah shall Asshur be beaten down. (사30:30-31)

 

 

220. ‘거니시는 소리’는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음을, 또한 혼자여서 아무도 자신에게 귀 기울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다음 절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를 보면 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voice going to itself,” is meant that there was but little perception remaining, and that alone as it were by itself and unheard, as is manifest also from the following verse where it is said, “Jehovah called to the man.

 

그래서 이사야에서, So in Isaiah: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the voice said, Cry. (사40:3, 6)

 

광야’는 신앙이라는 게 남아 있지 않은 교회입니다. The “wilderness” is a church where there is no faith;

 

외치는 자의 소리’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수태고지(受胎告知), 곧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모든 소식을 말합니다.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있는 내면의 소리처럼 말이지요. the “voice of one crying” is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and in general every announcement of his coming, as with the regenerate, with whom there is an internal dictate.

 

 

221. ‘그날 바람이 불 때’가 기간, 곧, 교회에 아직 어느 정도 퍼셉션이 남아 있던 기간을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한 것은, ‘’과 ‘’의 상징 때문입니다. That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signified a period when the church had still somewhat of perception remaining,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day” and of “night.

 

태고교회 사람들은 교회의 상태들을 낮과 밤의 때들과 비교했는데, 교회가 아직 빛 가운데 있었을 때를 낮 시간으로 보았고, 이런 이유로, 이 상태가 ‘그날’의 숨 또는 바람으로 비교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저녁의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을 만큼의 퍼셉션이 아직 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the states of the church to the times of the day and of the night, to the times of the day when the church was still in light, wherefore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breath or air “of the day,” because there was still some remnant of perception by which they knew that they were fallen.

 

주님은 또한 신앙의 상태를 ‘’으로, 신앙이 없는 상태를 ‘’으로 부르십니다. The Lord also calls the state of faith “day,” and that of no faith “night”;

 

요한복음입니다. as in John: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ometh when no man can work. (요9:4)

 

같은 이유로, 사람의 거듭남의 상태들을 창세기 1장에서 ‘날들’이라 하였습니다. Th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were for the same reason called “days” in chapter 1.

 

 

222.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가 악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그러듯 그 내면의 소리를 두려워함을 의미하는 것은, 그들의 대답인 10절 말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means to be afraid of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is evident from their reply (verse 10):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여호와의 낯’ 혹은 주님의 얼굴은 자비, 평강 및 모든 선입니다. 다음 축복의 말씀들을 보면 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The “face of Jehovah,” or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as is clearly evident from the benediction: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merciful unto thee;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민6:25-26)

 

시편에서는, And in David: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God be merciful unto us, and bless us, and cause his faces to shine upon us. (시67:1)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ght of thy faces upon us. (시4:6)

 

그래서 이사야에서는 주님의 자비를 가리켜 ‘자기 앞의 사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The mercy of the Lord is therefore called the “angel of faces,” in Isaiah: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I will make mention of the mercies of Jehovah; he hath requited them according to his mercies, and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his mercies; and he became their savior. In all their affliction he was afflicted, and the angel of his faces saved them; in his love and in his pity he redeemed them. (사63:7-9)

 

 

223. ‘주의 낯’은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선이시 때문에, 분명한 것은, 주님은 만물을 향해 자비로우시며,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고, As the “face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it is evident that he regards all from mercy, and never averts his countenance from any;

 

오히려 사람입니다. 악 가운데 있을 때, 얼굴을 돌리는 자는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과, but that it is man, when in evil, who turns away his face, as is said by the Lord in Isaiah: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between you and your God, and your sins have hid his face from you; (사59:2)

 

그리고 여기 ‘그들이 자기들이 벗었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를 보면 말이지요. and here, “they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because they were naked.

 

 

224.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선, 혹은 ‘여호와의 얼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가진 사람들 역시 방식은 다르지만 같습니다. 이것들은 늘 자비롭게 작동하지만, 사람의 상태에 따라 수용되는 정도가 달라집니다. Mercy, peace, and every good, or the “faces of Jehovah,” are the cause of the dictate with those who have perception, and also, although in a different manner, with those who have conscience, and they always operate mercifully, but are received according to the state in which the man is.

 

이 사람의 상태, 곧 태고교회의 이 후손의 상태는 일종의 자연적 선이었습니다. The state of this man, that is, of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ne of natural good;

 

이렇게 자연적 선 가운데 있는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이유로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주님 앞에 자신들을 감추는 그런 캐릭터입니다. and they who are in natural good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hide themselves through fear and shame because they are naked;

 

반면, 이 자연적 선이 고갈된 사람들은 자신들을 숨길 줄 모릅니다.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while such as are destitute of natural good do not hide themselves, because they are insusceptible of shame;

 

예레미야입니다. concerning whom, in Jeremiah 8:12–13. (See above, n. 217.)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렘8:12-13)

 

 

225. ‘동산 나무 사이에’는 그 안에 ‘나무’라 부르는 어떤 퍼셉션이 있는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동산’이 전에 천적 인간이 거주했던 곳이었음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signifies natural good, in which there is some perception which is called a “tree,” is also evident from the “garden” in which the celestial man dwelt;

 

모든 선과 진리를 가리켜 ‘동산’이라고 합니다. 그곳을 경작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기 때문입니다. for everything good and true is called a “garden,”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man who cultivates it.

 

선은 그 가장 안쪽이 천적이지 않으면 선이 아닙니다. 그곳으로부터이거나 그곳을 통해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퍼셉션이 나옵니다. Good is not good unless its inmost is celestial, from which, or through which, from the Lord, comes perception.

 

이 가장 안쪽을 가리켜 ‘사이’라 하며, 여기서든 말씀 어디에서든 또한 같습니다. This inmost is here called the “midst,” as also elsewhere in the Word.

 

2021-04-18(D1)-창세기(창3,8, AC.218-225),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an internal dictate'.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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