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06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창3:4-5)

 

 

206.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동시에 세상 배움에 탁월한 사람들보다 더 강한 믿음을 가진 걸까요? Who have a stronger belief that their eyes are open, and that as God they know what is good and evil, than those who love themselves, and at the same time excel in worldly learning?

 

그렇다 하더라도 누가 더 눈이 먼 걸까요? And yet who are more blind?

 

그들에게 묻기만 해도 확인되는 사실은, 그들은 영의 존재를 알기는커녕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Only question them, and it will be seen that they do not even know, much less believe in, the existence of spirit;

 

그들은 정말이지 영적, 천적 삶이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서 너무하다 할 정도로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with the nature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they are utterly unacquainted;

 

그들은 영원한 삶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they do not acknowledge an eternal life;

 

그들은 자기들을 사라질 짐승과도 같은 존재들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for they believe themselves to be like the brutes which perish;

 

그들은 주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대신 오직 자신들과 자연만 숭배합니다. neither do they acknowledge the Lord, but worship only themselves and nature.

 

그들 가운데 자신들의 표현들 안에서 보호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잘 모르는 본성을 가진 어떤 최고의 존재가 만물을 다스린다고 합니다. Those among them who wish to be guarded in their expressions, say that 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 of the nature of which they are ignorant rules all things.

 

감각과 기억-지식의 일들을 가지고 그들은 다양하게 자신들을 컨펌하는 원리들이 있으며, 만일 그들이 하려고만 하면 그들은 온 우주를 앞에 놓고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These are the principles in which they confirm themselves in many ways by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nd if they dared, they would do the same before all the universe.

 

그런 사람들은 신(神) 또는 최고의 현자(賢者) 대접을 받고 싶어 하지만, 만일 ‘당신은 자기가 가진 것 가운데 없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질문받으면 대답하기를, ‘그런 건 없는데... 만약 제가 가진 이 모든 것을 잃게 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라고 합니다. Although such persons desire to be regarded as gods, or as the wisest of men, if they were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 they would answer that it is to have no existence, and that if they were deprived of everything that is their own, they would be nothing.

 

이들은 만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질문을 받으면, 생각하기를, ‘그런 건 판타지인데...’ 합니다. If they are asked 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 they think it a fantasy.

 

‘양심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는 질문에는, ‘그건 그저 상상력에 불과한 것으로, 천민(賤民)들 통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conscience is, they would say it is a mere creature of the imagination, which may be of service in keeping the vulgar under restraint.

 

‘퍼셉션이 무엇인지는 아십니까?’ 하는 질문에는, 그들은 씨익 비웃으며, ‘그런 건 광적인 쓰레기입니다.’ 합니다.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perception is, they would merely laugh at it and call it enthusiastic rubbish.

 

이런 게 그들의 지혜이며,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소위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입니다. Such is their wisdom, such “open eyes” have they, and such “gods” are they.

 

이런 원리들, 그들 생각에는 대낮보다 더 밝은 원리들인데, 이런 원리들을 가지고 그들은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삼으며, 그렇게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신앙의 신비들을 추론합니다. Principles like these, which they think clearer than the day, they make their starting point, and so continue on, and in this way reason about the mysteries of faith;

 

그 결과는 과연 어둠의 깊은 심연밖에 뭐가 더 있을까요? and what can be the result but an abyss of darkness?

 

무엇보다도 이런 것들이 바로 세상을 꾀는 ‘뱀들’인 것입니다. These above all others are the “serpents” who seduce the world.

 

하지만 태고교회의 후손은 아직 이런 캐릭터는 아니었습니다. But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as yet of such a character.

 

이런 모습은 본 장 14절로 19절에서 다루게 됩니다. That which became such is treated of from verse 14 to verse 19 of this chapter.

 

2021-04-13(D3)-창세기(창3,4-5, AC.206),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 사람들(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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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4-205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창3:4-5)

 

 

204.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가 상징하는 것은, 만일 그들이 신앙에 관한 것들을 조사하되 감각과 지식에 속한 것, 곧, 자기들 인간의 것으로 하면, 그들은 분명 그 신앙의 일들을 마치 무슨 오류가 있는 것처럼 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 signifies that if they were to examine the things of faith from what is of sense and knowledge [ex sensuali et scientifico], that is, from themselves, they would plainly see those things as if erroneous.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은, 만일 그들이 자기 것으로 그런 짓을 하면, 그들은 하나님처럼 되어 자기가 자기를 가이드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And that they would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denotes that if they did so from themselves, they would be as God, and could guide themselves.

 

 

205. 모든 구절에는 교회의 어떤 특별한 상태나 상태의 변화가 들어 있습니다. Every verse contains a particular state, or change of state, in the church:

 

선행구절들은, 비록 그렇게 기울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불법으로 지각했다는 내용인 반면, the preceding verses, that although thus inclined they nevertheless perceived it to be unlawful;

 

이 구절들은, 그것이 자기들에게는 합법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선조로부터 그동안 전해져온 말들이 과연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그렇게 그들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these verses, an incipient doubt 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whether the things they had heard from their forefathers were true, and so their eyes would be opened;

 

마침내 자아-사랑이 우위를 점하게 되자, 그들은 자기들이 자기들을 리드할 수 있다, 자기들이 주님처럼 될 수 있다 착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at length, in consequence of the ascendancy of self-love, they began to think that they could lead themselves, and thus be like the Lord;

 

자아 사랑은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을 꺼리며, 자기 스스로 하기를 더 좋아하고, 믿음의 영역을 감각과 기억-지식의 것들을 가지고 스스로 컨설팅을 하는 등, 이런 것이 바로 자아 사랑의 정체이기 때문입니다. for such is the nature of the love of self that it is unwilling to submit to the Lord’s leading, and prefers to be self-guided, and being self-guided to consult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s to what is to be believed.

 

2021-04-12(D2)-창세기(창3,4, AC.204-205),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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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8-203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창3:2-3)

 

 

198. ‘동산 나무의 열매’는 태고교회 때부터 그들에게 계시된 선과 진리입니다.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is the good and tru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 말라’는 신앙에 속한 선과 진리인데, 이것은 그들이 절대 자신들로부터 배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 i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which they were not to learn from themselves;

 

 

만지지 말라’는 스스로 혹은 감각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가지고 선과 신앙의 진리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금지입니다. not to touch it” is a prohibition against thinking of the good and truth of faith from themselves, or from what i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 et scientifico];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는 그렇게 신앙 혹은 모든 지혜와 지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lest ye die” is because thus faith, or all wisdom and intelligence, would perish.

 

 

199. 본문,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가 태고교회 때부터 그들에게 계시된 선과 신앙의 진리 혹은 신앙 지식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것은,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라고 하고 있지, 지난 번 천적 인간 또는 태고교회를 다룰 때 살피던 ‘동산 각종 나무’(창2:16)라고 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That the “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 signifie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t is said to be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 and not the “tree of the garden,” as before when treating of the celestial man, or the most ancient church (Gen. 2:16).

 

동산의 나무’는 거기 언급된 대로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퍼셉션입니다. The “tree of the garden,” as it is there called, is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선과 진리는 그 근원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열매’로 부르며, 그래서 말씀에서도 또한 자주 ‘열매’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which good and truth, because they are from that source, are here called “fruit,” and are also frequently signified by “fruit” in the Word.

 

 

200. 앞서 창세기 2장 9절에서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로 지식의 나무가 아닌 생명 나무가 언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지식의 나무’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라고 하는 이유는 동산의 ‘중앙’이 가장 깊은 곳, 맨 안쪽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he “tree of knowledge” is here spoken of as being “in the midst of the garden,” although previously (Gen. 2:9), the tree of lives was said to be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not the tree of knowledge, is that the “midst” of the garden signifies the inmost;

 

천적 인간 또는 태고교회의 맨 안쪽,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는 ‘생명 나무’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and the inmost of the celestial man, or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the “tree of lives,” which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그러나 천적 영적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사람, 혹은 그 후손한테서는 신앙이 동산 혹은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의 ‘중앙’이 되었습니다. whereas with this man, who may be called a celestial spiritual man, or with this posterity, faith was the “midst” of the garden, or the inmost.

 

태고 때 살던 사람들의 퀄러티를 아주 충분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누구의 재능하고도 완전히 다른 그들의 지니어스에 대해서는 오늘날 정말 끔찍할 정도로 알려진 게 없기 때문입니다. It is impossible more fully to describe the quality of the men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because at the present day it is utterly unknown, their genius being altogether different from what is ever found with anyone now.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니어스에 관한 한 조각 아이디어를 전하는 목적은, 그들은 선을 통해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사랑을 통해 무엇이 신앙에 속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언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For the purpose however of conveying some idea of their genius, it may be mentioned that from good they knew truth, or from love they knew what is of faith.

 

그러나 그 세대가 끝났을 때, 이후 일어난 새로운 세대는 완전히 다른 지니어스를 계승했습니다. 그들은 선을 가지고 진리를 식별하거나 사랑을 가지고 무엇이 신앙인지를 알아차리는 대신, 진리를 가지고 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지식을 습득하거나, 신앙의 지식들을 가지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지식을 획득했습니다. 그들 중 정말 많은 사람이 지식 밖에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But when that generation expired, another succeeded of a totally different genius, for instead of discerning the true from the good, or what is of faith from love, they acquired the knowledge of what is good by means of truth, or what is of love from the knowledges of faith,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이것이 바로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홍수 후 생겨난 변화였습니다.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201. 홍수 전 태고 때 사람들의 것과 같은 그런 지니어스는 오늘날은 찾을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들의 지니어스로 기록된 이 구절, 단어들의 의미를 인텔리전트하게 설명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Seeing therefore that such a genius as that of the most ancient people anterior to the flood is not found and does not exist at the present day, it is no easy matter to explain intelligibly what the words of this passage in their genuine sense imply.

 

하지만 이 말씀들은 천국에서는 아주 명확하게 이해됩니다. 천적이라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홍수 전 거듭난 태고 때 사람들과 같은 지니어스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They are, however, perfectly understood in heaven, for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called celestial are of the same genius as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regenerate before the flood;

 

한편, 영적이라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의 지니어스는 홍수 후 거듭난 사람들의 지니어스와 유사합니다. 두 경우 다 무한한 다양성을 가지지만 말입니다. while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termed spiritual are of a similar genius to the regenerate after the flood, although in both cases with indefinite variety.

 

 

202.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교회의 캐릭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지식의 나무를 먹는 일’, 곧 신앙에 속한 것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배우는 일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그 나무를 만지는 일, 곧 어떤 신앙 관련 일들을 그런 걸 가지고 생각하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안 그러면 그들은 천적 삶에서 미끌어져 영적 삶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밑으로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a celestial man, was of such a character as not only to abstain from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that is, from learning what belongs to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but was not even allowed to touch that tree, that is, to think of anything that is a matter of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lest they should sink down from celestial life into spiritual life, and so on downward.

 

천적 천사들의 삶 또한 바로 이와 같은데요, 천사들이 더 내적일수록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무슨 이름 같은 걸로 불리거나 무엇이든지 어떤 영적인 일에 관여되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Such also is the life of the celestial angels, the more interiorly celestial of whom do not even suffer faith to be named, nor anything whatever that partakes of what is spiritual;

 

만일 타인에 의해 거론되면, 그들은 신앙 대신 자기들만 아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사랑에 관한 퍼셉션을 취합니다. and if it is spoken of by others, instead of faith they have a perception of love, with a difference known only to themselves;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어떤 것이든지 그들은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출발합니다. thus whatever is of faith they derive from love and charity.

 

그들은 신앙 관련 무슨 토론 듣는 걸 아주 아주 싫어합니다. 또한 그에 관한 어떤 기억-지식도 정말 힘들어 합니다. Still less can they endure listening to any reasoning about faith, and least of all to anything of memory-knowledge respecting it;

 

그들은 사랑으로,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퍼셉션을 받기 때문입니다. for, through love, they have a perception from the Lord of what is good and true;

 

그리고 이 퍼셉션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어떤 일이 그런지, 안 그런지를 즉시 압니다. and from this perception they know instantly whether a thing is so, or is not so.

 

그래서 그들은 신앙에 관한 무슨 말을 들을 때, 그저 단순히 그렇다, 안 그렇다로 대답합니다. 그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걸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Therefore when anything is said about faith, they answer simply that it is so, or that it is not so, because they perceive it from the Lord.

 

이것이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Matthew: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마5:37)

 

이것이 바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만지지도 말라’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This then is what was meant by their not being allowed to touch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만일 그들이 그걸 만지면, 그들은 악 가운데 있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은 ‘죽기’ 때문입니다. for if they touched it, they would be in evil, that is, they would in consequence “die.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적 천사들은 다른 천사들처럼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서로 대화합니다. 그러나 천적 언어를 가지고 하는데요, 이 언어는 사랑으로 되어 있고,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훨씬 형언할 수 없는 언어입니다. Nevertheless the celestial angels converse together on various subjects like the other angels, but in a celestial language, which is formed and derived from love, and is more ineffable than that of the spiritual angels.

 

 

203. 반면, 영적 천사들은 신앙 관련 대화를 하며,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들을 가지고 신앙의 일들을 심지어 컨펌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런 그라운드에서 신앙의 일들 관련 무슨 결론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The spiritual angels, however, converse about faith, and even confirm the things of faith by those of the intellect, of the reason, and of the memory,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matters of faith on such grounds:

 

그렇게 하면 악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those who do this are in evil.

 

주님은 이들에게 신앙에 관한 모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관련 퍼셉션을 주시는데 물론 이것은 천적 천사들의 퍼셉션과는 다른 것입니다. They are also endowed by the Lord with a perception of all the truths of faith, although not with such a perception as is that of the celestial angels.

 

영적 천사들의 퍼셉션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생해지는 일종의 양심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는 천적 퍼셉션처럼 나타납니다만 그러나 사실은 그건 아니고, 오직 영적 퍼셉션일 뿐입니다. The perception of the spiritual angels is a kind of conscience which is vivified by the Lord and which indeed appears like celestial perception, yet is not so, but is only spiritual perception.

 

2021-04-11(D1)-창세기(창3,2-3, AC.198-20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에 대한 태고교회 사람들의 태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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