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 설명, '혼돈, 공허, 흑암'(창1:2)의 속뜻 (2024/5/31)

 

앞서 창세기 1장은 거듭남에 수반되는 수많은 상태변화를 여섯 단계로 나눈 것이라 말씀드렸는데요, 오늘은 그 첫 번째 단계로 창세기 본문으로는 1장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에 해당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주석은 뒤 17, 18, 19번 글에 나오지만, 혹시 미리 보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들을 찾아가시면 되겠습니다.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AC.17-19)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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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AC.17-19)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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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AC.17-19)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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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일단 태어나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누구든지 대한민국에 태어나면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나라와 주변의 돌봄이 시작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천국을 사람으로 채우시는 것이며, 이를 위해 그로 하여금 먼저 지상에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 태어난 사람을 천국에 데려가시기 위해 그의 평생, 그와 동행하시며 그를 돌보시는 전 과정이 한 사람의 거듭남 풀코스라 할 수 있는데요, 그 결과 누구는 천국으로, 누구는 지옥으로 가게 되지만, 이는 전적으로 그 사람 본인의 선택이고, 그래서 천국도 그가 원해서, 지옥도 그가 원해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평생에 천국과 지옥 간, 선과 악 간 좌우 균형을 잡아주시는데요, 즉 지옥이 잡아당기는 만큼 천국 또한 같은 힘으로, 악이 잡아당기는 만큼 선 또한, 그래서 마치 저 태양과 지구, 지구와 달 사이 딱 균형 잡힌 위치에서 서로 공전과 자전을 하도록, 누가 다른 쪽으로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시는 일, 사람이 할 수 없는 이런 일을 주님은 신으로서, 사랑의 신으로서 하고 계십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 중 직전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AC.7, 창1, '본문, 개요, 배경'(AC.6-15)

7첫 번째 상태는 선행 상태와 유아기 상태 둘 다를 포함하는 상태, 그리고 중생 직전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혼돈’, ‘공허’, ‘흑암’(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이라고 하며, 그 첫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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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1.18.162-169.'천국의 시간'.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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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 설명,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2024/5/30)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천지창조의 역사로 읽었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 글을 읽어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아실 수 있는데요, 아래 글은 이 창세기 1장 주석의 마지막 글이지만, 어쩌면 시작 시점인 지금 읽을 필요도 있겠다 싶어 이렇게 링크 달아놓습니다.

 

 

AC.66, 창1 뒤,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AC.66)

66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다음과 같았는데요, 그들은 어떤 지상에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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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지구의 시작과 역사는 우리, 특히 인류학자, 지질학자 등에게는 정말 꼭 알고픈 것일 수 있겠으나, 그러나 주님은 그런 거엔 거의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런 건 사람들의 천국 입국에 필수 불가결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태고교회, 즉 태고시대 언어생활의 특징을 담아 인류의 시작, 지구의 시작을 창세기 1장처럼 마치 무슨 스토리텔링식으로 표현, 사람들의 천국 입국 영순위 조건인 ‘거듭남’에 대하여 그렇게 첫째 날, 둘째 날... 식의 상응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AC.6, 창1, '본문, 개요, 배경'(AC.6-15)

※ 내용은 하단에 나옵니다.  창 1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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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설명, '스베덴보리에게 시작된 첫 영계 체험 이야기' (2024/5/29)

 

다음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일생에 처음 주님이 찾아오신, 스베덴보리 연구회 편역,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천재 과학자의 감동적인 천국 체험기)에 나오는 생생한 간증입니다.

 

 

위대한 선물 | 스베덴보리 - 교보문고

위대한 선물 | 스웨덴 태생의 신비적 신학자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 47세에 심력적 체험을 겪은 후 하늘의 소명을 받고 신비적 신학자로 전향하여 27년간 영계를 자유롭게 오가며 지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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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5년 어느 날, 스베덴보리에게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영국 런던에서 여행 중이었다. 그동안 영국 여행이 잦아 단골 여관과 단골식당이 있었다. 스베덴보리는 여느 때처럼 단골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 불가사의한 일이 시작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포크를 테이블 위에 놓고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스베덴보리가 식사를 하던 식당 쪽으로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비치더니 곧이어 태양 빛의 열 배쯤 되는 강렬한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스베덴보리는 눈이 부셔 눈을 뜰 수도 없었고, 기절할 정도로 놀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잠시 후, 그 빛 가운데서 금빛 찬란한 흰색 로브(길고 헐거운 예복으로 예복, 관복, 법복으로 쓰임)를 입은 한 인물이 빛을 발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스베덴보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비한 느낌의 인물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대여!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사라진 뒤로도 식당 안엔 구름과 안개가 자욱했고, 스베덴보리는 그 안개 속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구름과 안개가 사라지고, 스베덴보리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식당에 혼자 서 있었다.

 

스베덴보리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조금 전 식당에서 있었던 기이한 경험을 떠올렸다. ‘내가 헛것을 볼 정도로 몸이 안 좋은가?’ 하고 생각해 봤으나 분명 자신이 본 것이 헛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베덴보리는 잘 알고 있었다. 고심하던 그는 곧 잠이 들었다. 그다음 날 저녁에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다음 날 밤, 스베덴보리가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막 누우려고 할 때였다. 방 안으로 전날 식당에서처럼 갑자기 환한 빛이 비쳐 대낮같이 밝아지더니, 어제 봤던 그 신비한 인물이 또다시 나타나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놀란 스베덴보리는 몸을 떨었다. 그런데 그 신비로운 인물은 준엄한 어조로 스베덴보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놀라지 마시오!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사명을 부여하러 왔습니다. 나는 그대를 사후세계인 영의 세계로 안내할 것입니다. 그대는 그곳에 가서 거기 있는 영인들과 교류하고, 그 세계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그대로 기록하여 이 지상 사람들에게 낱낱이 전하시오. 그대는 이 소명을 소홀히 생각하지 마시오!

 

이 말을 남기고 신비의 인물은 다시 사라졌다.

 

스베덴보리는 그날 이후 그를 다시는 본 적이 없다. 지상에서는 물론이고, 그렇게 많이 드나들던 영계에서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스베덴보리의 생활과 환경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불가사의한 인물을 만난 이후로 그에게 영계의 문이 활짝 열렸다. 영안을 뜨게 된 것이다. 또 영계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신비한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 능력으로 그는 영계를 마치 자기 집과 같이 드나들게 되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불가사의한 인물로부터 소명을 받은 대로 영계에서 보고 들은 모든 체험을 낱낱이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영계 저술’의 출발이었다. 그는 어떤 위대한 힘, 즉 창조주의 소명을 받았음을 추호도 의심치 않게 되었다...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보면 수시로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또는 ‘허락하심’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일거수일투족, 그리고 일점일획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하지 않았는데요, 저 역시 그의 이 점 또한 온전히 본받고 싶습니다.

 

 

AC.5,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5이런 사실은 실제로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런 경우인데요, 그래서 저는 지난 수년간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계속 끊임없이 함께 지내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거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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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설명, '말씀의 속뜻이 이제야 계시된 이유' (2024/5/28)

 

오늘 본문에 ‘아직 한 번도 밝혀지지 않은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 heavenly secrets)’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다음은 말씀의 속뜻인 이런 아르카나가 왜 이제서야, 그러니까 지난 18세기 중반인 1750년대에 들어서야 세상에 계시되었나 하는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206번 글 인용입니다. 참고로, 이 책은 스베덴보리(1688-1772)의 마지막 저서로,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지난 30여 년간 밝히신 모든 계시를 정리, 정돈한 일종의 조직신학 같은 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책을 끝으로 그다음 해인 1772년에 영원한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첫째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단순, 그들에게는 이것이 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인데요, 설령, 그럼에도 그랬다면 그들은 그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결과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 쓰임새도, 즉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for the reason that the Christians of the primitive church were too simple to have it disclosed to them, and if it had been it would neither have been of any use to them nor would have been understood.

 

둘째는, 이 초대교회 후 기독교 세계 전반에 어두움이 찾아왔는데, 먼저 많은 이단의 확산과 그 뒤를 이은 니케아 공의회의 심의와 칙령 때문이었습니다. 이 회의는 영원부터 계시다는 세 신적 인격과,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리스도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the deliberations and decrees of the council of Nice respecting three Divine persons from eternity, and respecting the person of Christ as being the son of Mary and not the son of Jehovah God.

 

※ 다음은 위키백과에 있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요약 설명입니다.

 

니케아 공의회(영어: First Council of Nicaea, 라틴어: Concilium Nicaenum Primum)는 325년 5월 20일 니케아(Nicaea, 현재 튀르키예의 이즈니크, 콘스탄티누스 1세의 니케아 별궁)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다. 부활절과 삼위일체 등을 논의했으며,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보편교회(공교회, The Catholic Church)의 정치적 외연을 확대했다.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 기독교 최초 공의회로 인정받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정치적으로는 하나지만, 신학적으로 갈라진 로마 제국의 통일과 화합을 위하여 기독교의 단결이 중요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 내부에는 많은 교리의 대립이 있어 수습이 곤란하였기 때문에 이 대립을 끝내기 위해 비티니아의 니케아에서 주교들을 소집하였다.

 

계속해서, 여기서, 그러니까 이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 ‘칭의’(justification)에 관한 현대적 믿음이 생겨났는데요, 이 믿음은 세 신이 돌아가며 자기 차례가 되면, 그때 사람들이 다가가야 한다는 걸 가르치는, 그러니까 이거 할 때는 아버지 하나님을, 저거 할 때는 아들 하나님을, 그리고 요거 할 때는 성령 하나님을 찾는, 즉 용도에 따라 따로따로 하나님들을 찾는 그런 믿음인데, 이 믿음은 오늘날 교회에 속한 온갖 것이 의존하는, 마치 몸에 속한 것들이 머리에 의존하듯 그렇게 의존하는 믿음입니다. From this springs the modern belief in justification, which teaches that three gods are to be approached in their order, on which faith each and all things of the present church depend as the members of the body depend on the head.

 

그리고 어두움이 임한 두 번째 이유는, 이로 인해 말씀의 모든 것이 이 잘못된 믿음을 확실히 하는 용도로만 사용되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And because all things of the Word have been applied to confirm that erroneous belief,

 

말씀의 영적인 뜻은 열릴 수가 없었는데요, 만일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 뜻을 같은 목적으로 사용할 테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곧 말씀의 거룩함 그 자체를 (본의 아니게) 모독, 즉 더럽히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 the spiritual sense could not be disclosed, for if it had been they would have applied that sense also to the same purpose, and thereby have profaned the very holiness of the Word,

 

그리고 역시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천국을 철저히 닫아버리게 되고, 그 결과 주님을 교회로부터 떼어놓게 되기 때문입니다. and thus have completely closed up heaven against themselves, and have separated the Lord from the church.

 

네, 이런 이유로, 주님 초림 후, 지난 1750년대까지 이 아르카나가 봉인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려주고 계시네요.  

 

우리는 보통 ‘삼위일체(The Divine Trinity)를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 하나님이 계시지만, 이 세 하나님은 하나이시다’라고, 뭐 잘은 모르지만, 그리고 이해는 안 되지만, 이렇게 고백하고, 또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는 뭐 특별히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뭔가 불편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계, 특히 천국에서는 사정이 다른가 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제1장,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나는 자주 이 문제로 천사들과 대화를 나눴다. 천국에서는 신을 셋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천사들은 한결같이 단언했다. 그들은 신이 한 분이심과, 그 한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심지어 지상에서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도, 신이 세 분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천국에 올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세 신 사이를 헤매기 때문이며, 천국에서는 한 분을 생각하면서 셋이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생각을 그대로 말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의 언어는 생각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즉 소리 나는 생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살 때, 신을 셋으로 나누어 그 각각을 별개로 인정한 사람들, 그래서 신관을 주님 한 분으로 모으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각 사람의 생각이 전체에 전달되기 때문에, 만일 입으로는 한 분을 말하면서 셋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드러나고 거부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진리와 선을 분리시키지 않은 사람들,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놓지 않은 사람들은 사후에 영계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주님께 대한 천국의 관념, 즉 주님이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생활이 따르지 않은 신앙인, 참 신앙의 교훈대로 살지 않은 사람은 그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스베덴보리가 알려주는, 그리고 천국 천사들이 고백하는 삼위일체는, ‘사람이 영과 육, 그리고 활동으로 이루어지듯 주님도 영이신, 즉 신성(The Divine)이신 여호와 하나님, 육이신, 즉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활동, 그러니까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이신 성령이 한 분 주님으로 모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해가 되실까요? 이에 대해서는 일단 여기까지만 하지요 ^^

 

 

AC.4,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4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해석하는 동안에는 그 안에 그러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첫 장에서는 세상의 창조와 낙원이라고 불리는 에덴동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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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설명, '사람처럼 말씀도 영과 육으로 되어 있다' (2024/5/25)

 

우리가 영과 육, 즉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되어 있는 존재임을 확실히 믿으신다면, 말씀 또한 동일하게, 즉 우리가 지금 우리말로 읽고 있는 이 겉 글자는 말씀의 육이요, 그 안에는 비록 우리 눈에는 안 보이나 천사들 눈에는 보이는 말씀의 영으로 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산상수훈 주님의 말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5:18)

 

하신 말씀은 그 안에 들어있는 말씀의 영, 곧 주님의 신성을 가리키신 것이며, 이것이 곧 오늘 AC.3번 글의 내용인, 말씀 안에 담긴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 곧 주님의 말씀을 늘 마치 양식 구하듯 찾아야 하며, 또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119:18, 개역한글)

 

해야 할 것이며, 그러다 보면, 우리 내면이 점점 열려 어느덧 천국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 21)

 

천국은 자기 안에 천국이 있는 사람이 가는 곳(상태)이며, 자기 안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자기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 상태와 같아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AC.3,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3그런 생명 없이는, 그저 겉 글자 만이기만 한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기독교계에서 알려진 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된 인간의 경우와 같은데요, 속 사람과 분리된 상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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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설명, 천국은 '만큼의 나라' (2024/5/24)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 거의 모든 것에 다 해당되는 말이지만, 천국, 특히 주님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의 천국은 무척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요, 그것은 천국은 ‘만큼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만 누릴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이지요. 아는 만큼만, 나의 내면이 열린 만큼만 허락되는 나라...

 

천국의 ‘’ 개념이 여기서 출발하며, ‘능력’도, ‘형통’도 다 여기서 출발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만, 주님을 아는 만큼만 말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영적 역량을 넘어서는 영적 경험은 오히려 그에게 큰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이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량만큼만 허락하시되 그러나 그 안에서는 넘치도록 허락하시는 주님! 그래서 우리 모두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 말씀에 대한 태도 또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만큼만 결정됩니다.

 

주님을 세상 가장 존귀한 분으로, 주님을 온 우주, 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한테는 이 기록된 말씀 하나하나에 대한 태도가 마치 천국 천사들이 말씀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뵈옵고는 어쩔 줄 몰라 하듯 그렇게 말씀 앞에 감동, 감격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주님의 허락으로 영안이 열려 말씀 안에 계신 주님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AC.2,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2그러나 기독교계는 아직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일반적이든 아니든 아니, 가장 작은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一點一劃, the 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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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설명, '말씀의 속뜻과 겉뜻' (2024/5/23)

 

창세기 속뜻 주석을 시작하면서 중요한 건, 그렇다고 창세기 겉뜻이 틀렸다, 쓸데없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속뜻을 모르고도 지금까지 수많은 인류가 천국 갈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현재의 천국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며,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고, 육이란, 영이 이 세상에서 옷처럼 입고 생활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무척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겉뜻과 속뜻의 관계는 겉뜻, 곧 겉 글자는 속뜻을 담는 그릇이며, 주님의 거룩한 신적 진리(Divine Truth)이신 속뜻을 보호하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말씀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여기 ‘그룹’의 속뜻이 바로 보호장치이며, ‘생명나무의 길’은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두루 도는 불 칼’은 겉뜻 안에 있는 이런저런 신적 진리를 말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깊이 다루겠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속뜻을 살핀다 하여 겉뜻을 소홀히 여기고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와있는 천사들은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육안을 통해 말씀의 속뜻, 곧 아르카나를 읽는데요, 우리는 말씀을 읽으면서 보통은 그저 그냥저냥 하고 있어도, 이때 천사들은 아르카나에 담긴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을 뵈오며, 형언할 수 없는 감격과 감동으로 온몸을 떤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내면, 자신의 영이 열릴수록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놀라운 광경을 더욱 느끼시며, 또 주께서 허락하시면 목격하실 수 있습니다.

 

아울러 말씀을 지나치게 무슨 원어 공부니 무슨 주석이니 하며 세상 지식 일변도의 접근을 하시지 말 것과, 속뜻을 안다고 겉뜻 가운데 있는 분들을 하찮게 여기신다거나, 겉뜻에 목숨을 거신다고, 속뜻에 힘쓰시는 분들을 이단, 삼단 정죄를 일삼거나 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럴 시간에 전자는 실제 실천에 힘쓰시고, 후자는 사랑에 뿌리내리시는 일에 힘쓰시는 것이 더욱 중요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AC.1,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1구약 말씀을 단순히 그 겉 글자로만(the mere letter of the Word), 즉 기록된 글자 그대로만 읽어서는 아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말씀의 이면(裏面, this part of the Word)에는 천국의 깊은 비밀들(deep 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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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6(D1)-주일예배(2545, 눅19,12-24), '열 므나 비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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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5-26(D1)-주일예배(2545, 눅19,12-24), '열 므나 비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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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므나 비유의 속뜻

 

 

12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15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6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24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눅19:12-24)

 

 

진리를 기억 속에만 가지고 있고, 삶 안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사후에 진리를 모두 빼앗겨 버리지만, 그러나 기억과 삶 안에 모두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혜가 영원히 늘어난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은화 한 므나를 가지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열 므나 남긴 사람에게 준다고 말한다. (계시록 해설)

 

 

오늘 본문은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과제를 내어 주신 다음, 심판 때에 과제를 충실히 이행한 착한 종은 천국으로 보내시고, 그렇지 않은 악한 종은 지옥에 던지신다는 내용입니다. 주님에게 심판받을 때, 악한 종이라고 꾸지람을 듣는다면 그 사람 마음은 어떨까요? 버나드 쇼(아일랜드, 192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자신의 묘비명에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길 줄 난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고 적었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후회를 할까요, 아니면 이를 갈며 주님께 대들까요?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우연히 태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목적은 세상 사는 동안 진리를 열심히 배우고 익혀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인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어느 귀인이 먼 나라로 가면서 종들에게 과제를 부여하고 떠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먼저 12절과 13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12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여기서 귀인은 주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귀인의 종 열 명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열(10)이란 수는 모든 걸 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종들에게 은화 열 므나를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 참고로, 므나는 주님 당시 사용되던 은으로 된 화폐인데, 100 드라크마에 해당하며, 당시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과 함께 품꾼들 하루 품삯에 해당하였다고 하니, 한 므나는 백 일치 품삯으로 작은 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월 300 일용직의 경우, 대략 천 정도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이런 므나의 그 속뜻은 말씀을 통해 배우는 선과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인이 종 열 명에게 열 므나를 나눠줬다는 것은 주님께서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것을 통해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걸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은화를 가지고 장사를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선과 진리의 지식을 삶에 적용하여 더 많은 선과 진리를 소유하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배우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우는 대로 열심히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선과 진리가 늘어나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즉 진리를 배우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장사꾼이 재물을 모으듯 선과 진리가 점점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할 때마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선과 진리들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선과 진리의 지식을 불려 나가는 것이 바로 종들이 주인의 돈으로 장사를 해 이문을 남기는 것입니다.

 

주인이 한참 후에 돌아와 종들이 어떻게 장사를 하였는지 보고자 하여 종들을 불렀습니다. 첫 번째 종이 주인에게 나아와 보고합니다.

 

15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6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첫 번째 종은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배를 남겼고, 두 번째 종도 다섯 배를 남겼습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벌어질까요? 그 이유는 사람마다 영적인 상태와 능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2967번 글 2번 항은 ‘모든 사람은 각자의 상태와 능력에 따라 거듭난다(but each according to his capacity and his state;)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같은 시기에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각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능력이 다르며, 그에 따라 믿음과 사랑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열 배 이문을 남긴 종은 다섯 배 남긴 종에 비해 영적 능력이 우월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왜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의지가 약할까, 왜 다른 사람보다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할까 하면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람마다 영적인 상태와 능력이 다르다는 걸 알았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겁니다. 유전적인 요인도 있겠고,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과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중요한 건,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문을 남겨 주님께 돌려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배를 남긴 사람에게는 열 고을을, 그리고 다섯 배를 남긴 사람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주십니다.

 

※ 이건 차별이 아닌 오히려 똑같이 공평하게 대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열 배의 역량을 가진 사람한테는 열 배, 다섯 배의 역량을 가진 사람한테는 다섯 배, 즉 각자의 입장에서는 100%,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부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 배의 역량을 가진 사람에게 열 배로 부으시면 그 사람한테는 오히려 큰 고통이 됩니다. 내면이 안 열려 오히려 천국 질서가 뒤집힌 사람에게 그가 원한다고 천국 문턱에라도 들어가 보게 하는 순간, 그는 마치 불 위에 놓인 마른오징어처럼 온몸이 뒤틀리며, 죽을 것만 같은 상태가 되어 그만 후닥닥 원래 있던 지옥으로 도망치듯 뛰어내리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이런 건 천국 내에서도, 즉 일층천에서 이층천, 이층천에서 삼층천을 희망하는 천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천사마다 자기 내면이 열린 곳에 있는 것이 천국이요,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상으로 받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말씀에서 고을(city)은 ‘남은 자(remains, 한글 번역 시 음역 그대로 ‘리메인스’로 표기)라고 하는, 선과 진리의 의식이 있는, 속 사람 속 깊은 내면을 뜻합니다. 따라서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상으로 받는 건 진리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리메인스가 많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리메인스란, 사람이 아주 어릴 때, 주님께서 속 사람 깊은 곳에 심어놓으신 선과 진리의 의식,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애정을 뜻합니다. 리메인스는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어린아이의 영 속으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다가 아이에게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면 유입이 멈춥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신념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 때, 다시 흘러들어옵니다. 반대로 선과 진리를 멀리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한테는 리메인스가 파괴되어 점점 고갈이 됩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개인의 영적 상태에 따라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리메인스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으며,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리메인스가 중요한 까닭은 이 리메인스가 없으면 악과 거짓에 저항할 힘을 잃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많아진다는 건 개인의 영적 상태가 점점 강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는 주님께서 소득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바치라고 명하시는데, 십일조를 드리는 것 역시 리메인스가 많아지는 걸 뜻합니다. 10이란 수가 리메인스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십일조를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일조의 의미는 선과 진리라는 영적 재물이 늘어날 때, 리메인스 또한 그만큼 늘어나는 걸 뜻합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드리는 건 내 걸 가지고 주님께 드리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오늘 본문의 종들처럼 여러 배로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며, 그때 리메인스라고 하는 주님의 생명이 각자의 내면에 쌓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위해 한번 악을 멀리하고, 한번 선을 행할 때마다 내면에 리메인스가 쌓이고, 그리하여 점차 거듭나기 좋은 상태로 바뀐다는 걸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종이 와서 주님께 고했습니다.

 

20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의 명에 따라 장사를 하지 않고, 돈을 수건으로 싸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주인이 엄한 사람이라 심지 않아도 거두시는 분으로 생각했다고 변명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주인이 준 은화를 수건에 싸두는 건 선과 진리의 지식을 기억 속에만 넣어두고 행하지는 않는 걸 의미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오직 믿음’, 즉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워 행위, 즉 삶의 실천을 소홀히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 여기서부터는 설교 원본을 수정, 제가 조금 보충하였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2:8, 9)

 

라는 에베소서 구절을 댑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본 것입니다. 모든 행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같아도 그 출발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은 자기를 사랑해서이기 때문이지요. 위 에베소서 구절은 후자의 경우입니다. 즉 바울은 에베소서 및 그 근방 교회들에게 자기를 사랑해서 선행을 하고, 그걸 근거로 자기 구원의 공로로 여기는, 그런 걸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선행은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1-3)

 

참고로, 거듭나는 세 종류의 사람 중에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영적 인간은 영생을 추구하다가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고, 후자인 천적 인간은 주님을 사랑하다가 영생을 덤으로 얻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사람인데, 이 사람은 이런 일, 곧 주님과 영생에 도무지 관심이 없고, 그냥 선하고 착하기만 했던 사람입니다.

 

(여기까지)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교리에 충성, 정작 ‘주님을 사랑하여 선을 행하는 삶’은 소홀히 하는 대부분의 기독교, 개신교인들의 모습은 마치 주인이 엄격한 사람이라 장사를 하다 돈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돈을 수건에 싸두었다고 하는 오늘 본문, 세 번째 종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종의 말을 듣고 주인이 말합니다.

 

22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말씀에는 진리를 배워 머리에만 쌓아두는 것을 재물을 수건에 싸서 보관하거나 땅에 묻어두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장사하는 것, 또는 은행에 맡겨 이식(利殖, 이자에 이자가 붙어 재물이 늘어가는 것)을 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종에게 악한 종이라고 꾸짖으시며,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과 관련, 이사야에서는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고 하십니다. 여기서 포도주와 젖은 각각 진리와 선을 뜻하고, 값없이 사서 먹으라는 것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진리와 선을 행하되 주님으로부터 행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주님을 의지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즉 선을 행할 때는 즐겁게, 마치 자원하여, 그러니까 자기가 원해서, 하고 싶어서 하듯 하면서도, 하고 나서는 그 모든 공을 오직 주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곁에 서 있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4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세상 살 때 진리를 많이 안다 자랑하면서도 정작 행하지는 않았던 사람들은 나중에 주님 앞에 가면 가지고 있던 진리를 모두 빼앗기고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열심히 진리를 따라 살았던 사람들은 기왕에 가지고 있던 진리와 선 말고도 더 많은 선과 진리를 얻어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없는 사람은 가진 것마저 모두 빼앗기고, 상대적으로 진리가 많은 사람은 넘치도록 주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한 종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가진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진리를 안다고 모두 구원받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주인이 멀리 떠나면서 종들에게 은화 한 므나씩을 주면서 장사를 하라고 명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새 교회인이라면 누구나 진리에 따라 살기를 원하고 매일 같이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뜻대로 잘되지 않는 것은 사람마다 영적 상태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이나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이나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꼭 열 므나를 남기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힘닿는 대로 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고, 대신 진리에 부합하는 일은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신 한 므나를 여러 배로 만들어 주님께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는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도 구원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주님이 워낙 엄격하셔서 인위적인 어떤 선도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고, 내심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 것입니다. 어떤 생각일까요? 본문 14절에는 그것에 대해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주님을, 또는 진리를 왕으로 섬기려는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준 은화를 수건에 싸둔 종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와 자기 생각이 충돌할 때, 언제나 진리는 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진리와 선이 늘어나지를 않았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는지, 아니면 주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것은 아닌지 항상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되 주님으로부터 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아멘

 

2022-04-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5-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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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9(D1)-주일예배(2544, 눅19,1-10), '삭개오 본문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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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5-19(D1)-주일예배(2544, 눅19,1-10), '삭개오 본문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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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 본문의 속뜻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10)

 

 

일반적으로 성령이 의미하는 바 하나님의 능력과 작용(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으로 개혁과 거듭남(reformation and regeneration)이 있고, 그에 따라 (영적) 쇄신과 살아남, 성화와 의롭게 됨(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이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해 악이 씻어지고 죄가 사해지며(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최종적으로는 구원(salvation)이 있다. (참된 기독교 142, 이순철 역) 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 which are meant by the Holy Spirit, are, in general, reformation and regeneration; and in accordance with these, 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 and in accordance with these latter, 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and finally salvation. (TCR.142)

 

 

오늘은 저 유명한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와 그 의미, 곧 그 속뜻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넜을 때 처음 마주친 곳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가까운 곳이지만, 그렇다고 아직 가나안 땅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리고의 속뜻은 보통은 교회 밖의 이방인을 뜻하거나, 또는 사람들을 교회로 이끄는 선과 진리에 속한 지식을 뜻하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참된 진리를 방해하는 거짓 교리를 뜻합니다. 이를테면, 주님 당시 유대교회의 교리인 장로의 전통이나 오늘날 믿음만의 교리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시는 건 어쩔 수 없이 태생적으로 잘못된 교리 안에 있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참된 진리를 배우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삭개오라는 세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리가 무슨 뜻인지는 성문서(聖문서, ※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들을 가리키는데요, 스베덴보리에게 이 모든 기술(記述)을 허락하시고, 또 친히 계시, 딕테이션하게 하신 분이 주님이셔서 사람들의 일반적 저작들과는 구분하려고 이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세리가 어떤 사람인지, 그 속뜻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요, 다음은 위 비유의 본문입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이 본문의 세리를 보면, 그는 그 역시 비록 잘못된 교리 안에 있지만, 겸손하고 늘 자신을 돌아보는 진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는 삭개오가 부자라고 했습니다. 부자의 속뜻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을 뜻하는데요, 이러한 의미들을 통해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겠는데요, 정리하자면, 그는 태생적으로, 즉 태어나길 당시의 잘못된 교리 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고, 또 말씀을 항상 가까이하여 참된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었겠구나 하는 걸 말입니다. 그런 삭개오이니 그런 그가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아 인파 속에서는 도무지 주님을 볼 수 없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길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참고로, 이 돌무화과나무는 이전 번역인 개역한글에서는 ‘뽕나무’로 번역된 나무입니다. 삭개오의 그런 모습을 3절과 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가 키가 작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키가 작다는 것의 속뜻은 자연적 합리성만 있고, 영적 합리성은 아직 열리지 않은 사람을 뜻합니다. 영적 합리성은 주님이 주시는 합리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합리성을 소유한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특별한 지각, 즉 퍼셉션(perception, ※ 주님으로 말미암는 통찰력인데요, 태고교회 때 존재했던, 그리고 지금도 천국에서는 이 퍼셉션으로 천사들과 주님 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따로 학습하지 않고도 바로 직관하는 능력입니다.)으로 말씀을 읽을 때,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합리성은 인간의 지식에 의존하는 합리성입니다. 그래서 자연적 합리성 안에 있는 사람은 인간의 지식을 바탕으로 말씀의 의미를 추론하여 이해합니다. 가령, 히브리어, 헬라어 같은 원어를 가지고 말씀을 풀고자 하는, 그리고 각종 주석이나 세상의 온갖 사례들을 가지고 하고자 하는 이런 일련의 태도들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결국 자기를 높이게 되는데요, 그런 사람이 영적으로는 키가 작은 사람이며, 삭개오입니다.

 

본문에는 사람이 많아서 삭개오가 주님을 볼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원문에는 삭개오가 인파에 떠밀렸다(press)고 되어 있습니다. 인파에 떠밀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거짓 교리로 인해 합리성이 훼손되는 걸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군중이나 무리(multitude)는 진리를 뜻하고, 떠미는 건 폭행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합리성이 훼손된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만나더라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만의 교리에 젖어있는 사람에게 인애(charity)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면 오히려 그걸 거짓이라고 하는데요, 이를테면, 그런 것이 키가 작은 삭개오가 사람들 속에서 주님을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때 삭개오가 주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이 나무는 바로 이런 열매를 맺는 나무인데요

엄밀히 말하면, 무화과나무하고는 다른 나무이지만, 그 열매가 얼핏 무화과나무의 열매 같아 이렇게 부르는 나무입니다. 이 무수히 열리는 열매들은 그대로 두면 너무나 떫어 나중에 익어도 도저히 먹을 수 없지만, 익기 전 바늘 같은 걸로 구멍을 내고, 거기에 올리브기름을 발라주면 나중엔 달달해져서 먹을 만하게 되는 그런 신기한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아모스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암7:14)라 했던 말씀에 나오는 나무인데요, 당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우기에는 그럭저럭 들에서 양을 칠 수 있지만, 건기에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성읍 근방 논으로 들어와 거기 남아 있는, 추수하고 남은 곡식 밑동들을 양들에게 먹여야 하는데, 이때 땅 주인들과 협상, 그 대신 목자들은 이 돌무화과나무에 이 무수히 달린 열매들을 일일이 올리브기름으로 침놓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걸 ‘뽕나무를 재배한다’한 것인데요, 그래서 아모스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 것입니다. 이렇듯 엄밀히 말하면, 다른 나무이지만, 말씀에서는, 그리고 위 두 번째 이미지처럼 실제 무화과나무 열매하고도 비슷하게 생겨 당시 사람들은 이 돌무화과나무도 일종의 무화과나무로 쳐주었으므로 우리도 무화과나무로 보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말씀에는 무화과나무(fig tree)나 포도나무, 올리브나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속뜻으로는 신앙인들의 선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뜻하고,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그리고 올리브 나무는 천적 선을 뜻합니다. 자연적 선은 무엇이고, 영적 선은 무엇일까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행하는 모든 선이 자연적 선입니다. 예를 들면, 질서를 지키고, 이웃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하는 것 같은, 이런 선한 행실이 모두 자연적 선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자연적 선이라도 내적으로 영적인 것이 있고, 영적이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4988번 글 2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선의 기원은 두 가지이다. 즉 유전적인 것이 있고, 믿음과 인애의 교리에서 비롯한 것이 있다. 유전적인 선은 자연적이지만 영적이지는 않은 선이고, 교리에 따른 선은 자연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선이다라고 말이지요. 그러니까 교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천성적으로 선한 사람이 있는데요, 그런 사람의 선이 바로 자연적이지만 영적이지는 않은 선이고, 교회의 교리에 따라 행하는 선은 자연적이며 영적인 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주님을 보려고 했다는 것은 그의 선이 자연적이지만 아직 영적이지는 않다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안에 참된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었겠구나 생각해 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양심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런 것이 바로 참된 진리에 대한 갈증이며, 그리고 그것이 진리에 대한 삭개오의 갈증인 것입니다.

 

※ 저 역시 이러한 갈증으로 지난 2022년 12월, 그동안 속했던 지방회를 나왔던 것이며, 또 수도원 역시 거리를 두게 된 것인데요, 지방회에서는 모이면 그저 어디 다니자는 이야기, 무슨 집회에 가자는 이야기, 어느 교회 누가 어떻다더라 등 무슨 친목회, 동호회 수준 같은, 도무지 주님과 천국 이야기는 없는, 그리고 그런 지식도, 관심도 없어 보이는 그런 이야기에 제가 많이 지쳤으며, 물론 참 선하신 분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말입니다. 수도원 역시 그 심성들이 다르지 않았고, 역시 주님보다는, 그리고 천국보다는 무슨 성인들 이야기, 그리고 남들 모르는 무슨 신기한 이야기들에만, 그래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혹하게 하는, 그리고 자꾸 처음 원칙과 규칙들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깨면서 변칙, 반칙을 허용하는, 이름은 ‘봉쇄’이면서, 그러나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세상을 향해 두리번거리며, 혼자 주님을 독대하려 하기보다는 계속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덜 심심하고, 늘 주목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뭔가 계속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에너지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런 모습 때문에 처음 몇 년을 마음을 다해 다녔으나 결국은 지쳤기 때문입니다. 네, 하여튼 그런 갈증이 저 역시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어쩌면 이렇게 스베덴보리를 만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자, 다시 이제 마침내 주님이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5절과 6절입니다.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 하십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착한 마음과 진리에 대한 갈증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러자 삭개오가 급히 내려옵니다. 교리의 오류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만날 때, 처음에는 선뜻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스스로 높이 앉아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번 들어 보자 라고 생각합니다. 삭개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나무 높은 곳에서 주님을 내려다 봤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그분이 참된 진리라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진리 앞에 황급히 자신을 낮추고, 진리이신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것이 삭개오가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만나게 된 삭개오가 감격해 말합니다.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세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모르긴 해도 부당하게 세금을 매겨 착복한 일이 그동안 많았을 것입니다. 당시 많은 세리들이 그렇게 해서 부자로 살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세리를 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로마 통치하에서 동족에게 세금을 거두니 말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교리에 빠져 있을 때는 그것이 죄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열심히 믿고, 헌금 많이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를 만나자 그것이 모두 죄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 하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다 주님 앞에 선언합니다. 영적인 의미로 볼 때,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는 건 이웃에게 잘못된 교리를 전해 결과적으로 그들로부터 진리와 선을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은 그 속뜻으로는 물질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전하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절반은 모든 것을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절반 안에는 전체의 특성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절반은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또 네 갑절로 갚겠다고 했는데 이 말은 진리를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본을 보이며 전하겠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넷이란 수는 둘의 배수로 둘과 같은 뜻을 가지며, 그래서 둘이나 넷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진리를 믿고, 또한 행하는 걸 의미합니다. 따라서 네 갑절로 갚겠다는 건 진리를 말로만 전하는 게 아니라 행하면서 전하는 걸 뜻합니다. 마태복음 5장 19절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고, 요한복음 13장 15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이런 말씀들을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아주 반듯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하시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십니다. 잃어버린 자가 누굴까요? 아담으로 상징되는 천적인 교회의 지극히 순수하고 선한 사람들입니다. 그 교회가 무너졌을 때, 주님께서는 노아와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로 상징되는 영적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마저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되자 주님은 직접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시험을 이기시고, 거룩한 인간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신 목적은 삭개오와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영적 교회의 재건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잃어버린 천적 교회를 되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르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삭개오의 모습을 보시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삭개오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말씀에서 삭개오는 거짓 교리에 빠진 모든 신앙인을 나타냅니다. 거짓 교리는 신앙인들이 참된 진리를 만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본문에는 그것을 삭개오가 무리 속에서 떠밀려 다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참된 진리를 만나더라도 이전의 동료들로부터 이단의 진리에 빠졌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셨을 때, 무리들이 예수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 비난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죄인의 진리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모든 방해를 딛고, 영적 여리고에서 탈출, 주님의 손을 잡고 구원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그동안 삭개오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진리를 혼자만 알면 안 되고,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진리를 전할 때는 말로만 전하는 게 아니라 주님처럼 행동으로 본을 보이며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이 성령에 대해서는 앞의 ‘참된 기독교’ 142번 글을 다시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이 의미하는 바 하나님의 능력과 작용(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으로 개혁과 거듭남(reformation and regeneration)이 있고, 그에 따라 (영적) 쇄신과 살아남, 성화와 의롭게 됨(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이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해 악이 씻어지고 죄가 사해지며(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최종적으로는 구원(salvation)이 있다. (참된 기독교 142, 이순철 역)

 

※ 참고로, 저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사람에게 영과 육, 그리고 활동이 있듯, 주님 역시 신성(The Divine)과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그리고 ‘신적 에너지와 활동(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이라는 게 있으시며, 이때 이 세 번째가 바로 성령이시구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 주님을 느끼며, 그 인격을 감지하는 건, 모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모두 그 얼굴을 늘 주님을 향하는데 이는 그들의 중심 사랑이 주님 사랑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해서 늘 주님을 대면하여 뵙는 듯한 느낌 가운데 지낸다고 하는데요, 지상에 사는 우리 역시 천사들처럼 주님을 사랑하면, 똑같이 늘 주님을 뵙는 것 같은, 늘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독대하는 것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멘

 

주님의 은혜가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5:19)

 

아멘

 

 

2022-03-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5-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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