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D1)-주일예배(2544, 눅19,1-10), '삭개오 본문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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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5-19(D1)-주일예배(2544, 눅19,1-10), '삭개오 본문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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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 본문의 속뜻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10)

 

 

일반적으로 성령이 의미하는 바 하나님의 능력과 작용(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으로 개혁과 거듭남(reformation and regeneration)이 있고, 그에 따라 (영적) 쇄신과 살아남, 성화와 의롭게 됨(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이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해 악이 씻어지고 죄가 사해지며(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최종적으로는 구원(salvation)이 있다. (참된 기독교 142, 이순철 역) 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 which are meant by the Holy Spirit, are, in general, reformation and regeneration; and in accordance with these, 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 and in accordance with these latter, 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and finally salvation. (TCR.142)

 

 

오늘은 저 유명한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와 그 의미, 곧 그 속뜻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넜을 때 처음 마주친 곳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가까운 곳이지만, 그렇다고 아직 가나안 땅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리고의 속뜻은 보통은 교회 밖의 이방인을 뜻하거나, 또는 사람들을 교회로 이끄는 선과 진리에 속한 지식을 뜻하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참된 진리를 방해하는 거짓 교리를 뜻합니다. 이를테면, 주님 당시 유대교회의 교리인 장로의 전통이나 오늘날 믿음만의 교리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시는 건 어쩔 수 없이 태생적으로 잘못된 교리 안에 있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참된 진리를 배우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삭개오라는 세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리가 무슨 뜻인지는 성문서(聖문서, ※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들을 가리키는데요, 스베덴보리에게 이 모든 기술(記述)을 허락하시고, 또 친히 계시, 딕테이션하게 하신 분이 주님이셔서 사람들의 일반적 저작들과는 구분하려고 이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세리가 어떤 사람인지, 그 속뜻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요, 다음은 위 비유의 본문입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이 본문의 세리를 보면, 그는 그 역시 비록 잘못된 교리 안에 있지만, 겸손하고 늘 자신을 돌아보는 진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는 삭개오가 부자라고 했습니다. 부자의 속뜻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을 뜻하는데요, 이러한 의미들을 통해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겠는데요, 정리하자면, 그는 태생적으로, 즉 태어나길 당시의 잘못된 교리 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고, 또 말씀을 항상 가까이하여 참된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었겠구나 하는 걸 말입니다. 그런 삭개오이니 그런 그가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아 인파 속에서는 도무지 주님을 볼 수 없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길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참고로, 이 돌무화과나무는 이전 번역인 개역한글에서는 ‘뽕나무’로 번역된 나무입니다. 삭개오의 그런 모습을 3절과 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가 키가 작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키가 작다는 것의 속뜻은 자연적 합리성만 있고, 영적 합리성은 아직 열리지 않은 사람을 뜻합니다. 영적 합리성은 주님이 주시는 합리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합리성을 소유한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특별한 지각, 즉 퍼셉션(perception, ※ 주님으로 말미암는 통찰력인데요, 태고교회 때 존재했던, 그리고 지금도 천국에서는 이 퍼셉션으로 천사들과 주님 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따로 학습하지 않고도 바로 직관하는 능력입니다.)으로 말씀을 읽을 때,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합리성은 인간의 지식에 의존하는 합리성입니다. 그래서 자연적 합리성 안에 있는 사람은 인간의 지식을 바탕으로 말씀의 의미를 추론하여 이해합니다. 가령, 히브리어, 헬라어 같은 원어를 가지고 말씀을 풀고자 하는, 그리고 각종 주석이나 세상의 온갖 사례들을 가지고 하고자 하는 이런 일련의 태도들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결국 자기를 높이게 되는데요, 그런 사람이 영적으로는 키가 작은 사람이며, 삭개오입니다.

 

본문에는 사람이 많아서 삭개오가 주님을 볼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원문에는 삭개오가 인파에 떠밀렸다(press)고 되어 있습니다. 인파에 떠밀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거짓 교리로 인해 합리성이 훼손되는 걸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군중이나 무리(multitude)는 진리를 뜻하고, 떠미는 건 폭행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합리성이 훼손된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만나더라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만의 교리에 젖어있는 사람에게 인애(charity)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면 오히려 그걸 거짓이라고 하는데요, 이를테면, 그런 것이 키가 작은 삭개오가 사람들 속에서 주님을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때 삭개오가 주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이 나무는 바로 이런 열매를 맺는 나무인데요

엄밀히 말하면, 무화과나무하고는 다른 나무이지만, 그 열매가 얼핏 무화과나무의 열매 같아 이렇게 부르는 나무입니다. 이 무수히 열리는 열매들은 그대로 두면 너무나 떫어 나중에 익어도 도저히 먹을 수 없지만, 익기 전 바늘 같은 걸로 구멍을 내고, 거기에 올리브기름을 발라주면 나중엔 달달해져서 먹을 만하게 되는 그런 신기한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아모스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암7:14)라 했던 말씀에 나오는 나무인데요, 당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우기에는 그럭저럭 들에서 양을 칠 수 있지만, 건기에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성읍 근방 논으로 들어와 거기 남아 있는, 추수하고 남은 곡식 밑동들을 양들에게 먹여야 하는데, 이때 땅 주인들과 협상, 그 대신 목자들은 이 돌무화과나무에 이 무수히 달린 열매들을 일일이 올리브기름으로 침놓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걸 ‘뽕나무를 재배한다’한 것인데요, 그래서 아모스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 것입니다. 이렇듯 엄밀히 말하면, 다른 나무이지만, 말씀에서는, 그리고 위 두 번째 이미지처럼 실제 무화과나무 열매하고도 비슷하게 생겨 당시 사람들은 이 돌무화과나무도 일종의 무화과나무로 쳐주었으므로 우리도 무화과나무로 보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말씀에는 무화과나무(fig tree)나 포도나무, 올리브나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속뜻으로는 신앙인들의 선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뜻하고,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그리고 올리브 나무는 천적 선을 뜻합니다. 자연적 선은 무엇이고, 영적 선은 무엇일까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행하는 모든 선이 자연적 선입니다. 예를 들면, 질서를 지키고, 이웃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하는 것 같은, 이런 선한 행실이 모두 자연적 선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자연적 선이라도 내적으로 영적인 것이 있고, 영적이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4988번 글 2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선의 기원은 두 가지이다. 즉 유전적인 것이 있고, 믿음과 인애의 교리에서 비롯한 것이 있다. 유전적인 선은 자연적이지만 영적이지는 않은 선이고, 교리에 따른 선은 자연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선이다라고 말이지요. 그러니까 교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천성적으로 선한 사람이 있는데요, 그런 사람의 선이 바로 자연적이지만 영적이지는 않은 선이고, 교회의 교리에 따라 행하는 선은 자연적이며 영적인 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주님을 보려고 했다는 것은 그의 선이 자연적이지만 아직 영적이지는 않다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안에 참된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었겠구나 생각해 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양심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런 것이 바로 참된 진리에 대한 갈증이며, 그리고 그것이 진리에 대한 삭개오의 갈증인 것입니다.

 

※ 저 역시 이러한 갈증으로 지난 2022년 12월, 그동안 속했던 지방회를 나왔던 것이며, 또 수도원 역시 거리를 두게 된 것인데요, 지방회에서는 모이면 그저 어디 다니자는 이야기, 무슨 집회에 가자는 이야기, 어느 교회 누가 어떻다더라 등 무슨 친목회, 동호회 수준 같은, 도무지 주님과 천국 이야기는 없는, 그리고 그런 지식도, 관심도 없어 보이는 그런 이야기에 제가 많이 지쳤으며, 물론 참 선하신 분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말입니다. 수도원 역시 그 심성들이 다르지 않았고, 역시 주님보다는, 그리고 천국보다는 무슨 성인들 이야기, 그리고 남들 모르는 무슨 신기한 이야기들에만, 그래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혹하게 하는, 그리고 자꾸 처음 원칙과 규칙들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깨면서 변칙, 반칙을 허용하는, 이름은 ‘봉쇄’이면서, 그러나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세상을 향해 두리번거리며, 혼자 주님을 독대하려 하기보다는 계속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덜 심심하고, 늘 주목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뭔가 계속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에너지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런 모습 때문에 처음 몇 년을 마음을 다해 다녔으나 결국은 지쳤기 때문입니다. 네, 하여튼 그런 갈증이 저 역시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어쩌면 이렇게 스베덴보리를 만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자, 다시 이제 마침내 주님이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5절과 6절입니다.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 하십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착한 마음과 진리에 대한 갈증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러자 삭개오가 급히 내려옵니다. 교리의 오류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만날 때, 처음에는 선뜻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스스로 높이 앉아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번 들어 보자 라고 생각합니다. 삭개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나무 높은 곳에서 주님을 내려다 봤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그분이 참된 진리라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진리 앞에 황급히 자신을 낮추고, 진리이신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것이 삭개오가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만나게 된 삭개오가 감격해 말합니다.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세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모르긴 해도 부당하게 세금을 매겨 착복한 일이 그동안 많았을 것입니다. 당시 많은 세리들이 그렇게 해서 부자로 살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세리를 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로마 통치하에서 동족에게 세금을 거두니 말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교리에 빠져 있을 때는 그것이 죄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열심히 믿고, 헌금 많이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를 만나자 그것이 모두 죄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 하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다 주님 앞에 선언합니다. 영적인 의미로 볼 때,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는 건 이웃에게 잘못된 교리를 전해 결과적으로 그들로부터 진리와 선을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은 그 속뜻으로는 물질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전하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절반은 모든 것을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절반 안에는 전체의 특성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절반은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또 네 갑절로 갚겠다고 했는데 이 말은 진리를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본을 보이며 전하겠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넷이란 수는 둘의 배수로 둘과 같은 뜻을 가지며, 그래서 둘이나 넷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진리를 믿고, 또한 행하는 걸 의미합니다. 따라서 네 갑절로 갚겠다는 건 진리를 말로만 전하는 게 아니라 행하면서 전하는 걸 뜻합니다. 마태복음 5장 19절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고, 요한복음 13장 15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이런 말씀들을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아주 반듯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하시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십니다. 잃어버린 자가 누굴까요? 아담으로 상징되는 천적인 교회의 지극히 순수하고 선한 사람들입니다. 그 교회가 무너졌을 때, 주님께서는 노아와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로 상징되는 영적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마저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되자 주님은 직접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시험을 이기시고, 거룩한 인간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신 목적은 삭개오와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영적 교회의 재건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잃어버린 천적 교회를 되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르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삭개오의 모습을 보시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삭개오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말씀에서 삭개오는 거짓 교리에 빠진 모든 신앙인을 나타냅니다. 거짓 교리는 신앙인들이 참된 진리를 만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본문에는 그것을 삭개오가 무리 속에서 떠밀려 다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참된 진리를 만나더라도 이전의 동료들로부터 이단의 진리에 빠졌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셨을 때, 무리들이 예수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 비난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죄인의 진리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모든 방해를 딛고, 영적 여리고에서 탈출, 주님의 손을 잡고 구원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그동안 삭개오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진리를 혼자만 알면 안 되고,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진리를 전할 때는 말로만 전하는 게 아니라 주님처럼 행동으로 본을 보이며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이 성령에 대해서는 앞의 ‘참된 기독교’ 142번 글을 다시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이 의미하는 바 하나님의 능력과 작용(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으로 개혁과 거듭남(reformation and regeneration)이 있고, 그에 따라 (영적) 쇄신과 살아남, 성화와 의롭게 됨(renovation, vivification, sanctification and justification)이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해 악이 씻어지고 죄가 사해지며(purification from evils, forgiveness of sins), 최종적으로는 구원(salvation)이 있다. (참된 기독교 142, 이순철 역)

 

※ 참고로, 저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사람에게 영과 육, 그리고 활동이 있듯, 주님 역시 신성(The Divine)과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그리고 ‘신적 에너지와 활동(The Divine energy and operation)이라는 게 있으시며, 이때 이 세 번째가 바로 성령이시구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 주님을 느끼며, 그 인격을 감지하는 건, 모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모두 그 얼굴을 늘 주님을 향하는데 이는 그들의 중심 사랑이 주님 사랑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해서 늘 주님을 대면하여 뵙는 듯한 느낌 가운데 지낸다고 하는데요, 지상에 사는 우리 역시 천사들처럼 주님을 사랑하면, 똑같이 늘 주님을 뵙는 것 같은, 늘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독대하는 것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멘

 

주님의 은혜가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5:19)

 

아멘

 

 

2022-03-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5-1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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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1.17.154-161.'천사들의 상태변화'.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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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성녀(聖女) 클라라 (1)

 

1194년 7월 11일, 아씨시 귀족 가문 출생, 프란치스코하고는 12세 연하

1212년 3월 18일 종려주일, 클라라의 출가1215년, 클라라, 자신이 개척한 여자 수도원(2회) 원장으로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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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1.16.141-153.'천국의 네 방위'.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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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2(D1)-주일예배(2543, 눅18,35-4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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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5-12(D1)-주일예배(2543, 눅18,35-4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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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

 

 

35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눅18:35-43)

 

 

영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믿음은 주님으로부터만 온다. 즉 주님께서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워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치유의 믿음을 주신다. (계시록 해설 815:5, 이순철 역) the faith by which spiritual diseases are healed by the Lord can be given only through truths from the Word and a life according to them; (AE.815.5)

 

※ 위 글은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계13:11) 속뜻 중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And I saw another beast coming up out of the earth,)에 관한 주석 내용 일부 인용입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주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이 고치시는 병은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영적 질병(spiritual diseases)입니다. 영적인 질병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사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질병이란 어떤 것입니까? 영적 질병은 내적으로는 선과 진리의 불균형으로 인해 생기는 병입니다. 그러니까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거나,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거나 할 때 생기는 병입니다. 영적인 질병들은 종종 육신의 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열등감이나 우울증, 거만함, 분노 조절 장애, 각종 중독 같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맹인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맹인’(盲人)이라고 부르는 것은 속뜻으로는, 그가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에 대한 애정은 있는데 진리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맹인은 어떻게 눈을 뜰 수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35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5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막 들어가는 초입(初入, 골목 등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여리고’ 사람들의 영적인 의미, 즉 속뜻은 진리에 대해 무지한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합니다. 맹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는 것으로 보아 진리에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는 진리를 구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36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맹인이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기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대답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선만 있고 진리가 없거나, 또는 진리만 있고 그에 부합하는 선이 없을 때, 사람은 영적인 병에 듭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시험과도 같습니다. 시련이 있을 때,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종교를 찾게 되고,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확신이 없는 사람은 구원의 진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것이 길에 앉아 진리를 구걸하는 맹인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영적 맹인이 참된 진리를 만나는 순간입니다. 본문에는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비하(卑下,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거나 상대방을 업신여겨 낮춤)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진리, 또는 구원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AC 9144:10). From this it is evident what was signified by the “crown of thorns,” and by his being hailed “King of the Jews,” by “behold the man,” and also by the inscription on the cross, “Jesus of Nazareth, the king of the Jews” (John 19:19, 20); namely, that Divine truth, or the Word, was so regarded and so treated by the Jews, among whom was the church. (That all things done to the Lord by the Jews at his crucifixion signified the states of their church with respect to truth Divine, or the Word, see n. 9093.)

 

38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자기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들은 맹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맹인은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은 평생 이방인들과 싸웠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마치 진리가 거짓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다윗’은 신성한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이 신성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맹인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비하할 때, 맹인은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맹인은 그동안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려고 했고, 진리를 알면 그대로 살려고 노력한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길에 앉아 구걸하는 것의 속뜻이기 때문입니다. ‘’의 속뜻은 진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때 주님은 이렇게 그를 만나시기 이전에 이미 그에게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진리 자체인 분이시라는 믿음을 주셨던 것이고, 그런 믿음이 그에게 이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오늘 주님을 만나자마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도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때가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진리를 모를 때는 마음에 평안이 없었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스베덴보리를 만났고, 주님의 사랑과 섭리로 그의 책들에 적힌 내용들이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마치 맹인이 오늘 예수를 보자마자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39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맹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외치자, 본문 39절에는 “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했습니다. 주님을 만나 처음 진리를 배우기 시작할 때는 시련이 많습니다. 진리를 잘못 적용, 실수할 때도 있고, 진리를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하며 다른 사람과 다투기도 합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할 때는 수치심과 좌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것은 죽이 막 끓기 시작할 때와 같이 혼란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때 마음 한쪽에서 집요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지옥의 영들이 비난하고 조롱하는 소리이지요. 그런가 하면, 참된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질시 어린 시선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앞서가는 자들의 꾸짖음입니다. 이런 일련의 시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맹인은 자신의 병의 원인에 대해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던 기도가 좀 더 구체적인 기도로 바뀝니다. 그때를 40절과 4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0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맹인이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그동안 희미하게 알고 있던 진리를 점점 분명하게 알기 시작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맹인은 그동안 그저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두루뭉술하게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가까이 가면서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진리에 대한 무지였습니다. 진리에 대한 무지란, 진리가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 없는 진리는 죽은 진리와 같아 설령 있다 하더라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맹인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단순한 진리, 지식에 불과한 진리가 아니라 선이 있는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선이 있는 진리를 소유할 때라야 진리를 적재적소에 올바로 적용할 수 있고, 또한 진리를 가지고만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하기 시작합니다. 진리 안에 있는 선, 곧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기 때문이지요.

 

42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주님께서 맹인의 말을 들으시고,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선이 있는 진리는 오직 그분에게서만 나온다는 사실을 믿을 때, 영적 고질병이 치유됩니다. 그렇게 맹인의 병이 고쳐진 상태를 이사야서 35장 5절에서는,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는 것은 진리에 무지했던 사람들이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는 것은 진리에 순종하는 힘이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때가 그동안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것은 진리를 아는 것도 아니고, 구원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면서 주시는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함께 들어있는 진리이며, 그래서 구원의 진리입니다. 맹인은 그 진리를 통해 눈을 뜰 수 있었고, 삶의 질곡(桎梏, 차꼬와 수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맹인의 그런 상태를 본문 4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3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맹인이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의 병의 원인이던 진리에 대한 무지가 해소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맹인은 그동안 진리를 몰라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없어서 이웃과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열등감이나 우울증, 근거 없는 교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진정한 진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맹인이 진리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께 매달렸을 때, 주님으로부터 치유의 믿음이 흘러들어와 닫혔던 눈이 떠졌습니다. 말씀에는 맹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계시록 해설 1210번 글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praising God)은 믿음의 고백과 예배(to confess and worship him)라고 말합니다.

 

Saying, Praise God, all ye his servants, signifies worship of the Lord by those who are in truths. Thi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raising God,” as being to confess and worship him (of which presently); (계19:5)

 

구원의 진리로 인해 닫혔던 눈이 떠질 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에 따라 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예수를 따라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맹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믿음이든 개인적인 신념이든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 모두 구원의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모든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로 밝혀져야 구원의 믿음이 됩니다. 구원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삶이 즐겁지 않고, 삶 속에서 보람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런 상태가 영적으로 병든 상태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의 믿음을 얻을 수 있으며, 영적 질병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요? 계시록 해설 815:5번 글에서는 “영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믿음은 주님으로부터만 온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워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치유의 믿음을 주신다.”(이순철 역)고 합니다. 구원의 믿음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계시록 해설 1210번 글은, “사람이 자신에게는 어떤 선도 없고 자신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반면에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고 주님만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때 사람은 자아 사랑에 속한 것들을 밀어내고 마음을 연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선과 능력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when he acknowledges in heart that there is nothing of good in himself, and that he can do nothing of himself, and on the other hand, that all good is from the Lord, and that the Lord can do all things. When man is in this acknowledgment he puts aside what is his own which belongs to the love of self, and opens all things of his mind, and thus gives room for the Divine to flow in with good and with power. 이순철 역)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먼저 ‘네가 나를 믿느냐’ 라고 물으시고, 그다음에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 곧 이 ‘자기 부인’의 태도가 구원의 출발점, 곧 위 말씀, ‘그때 사람은 자아 사랑에 속한 것들을 밀어내고 마음을 연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선과 능력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처럼,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 영적 질병에 걸린 나를 치료하시는 주님의 치료의 광선이 내 안을 환히 비춰 나의 내면, 내 영혼을 충만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누구를 주님의 제자 삼으실 때마다 하신 말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처럼, ‘자기를 부인할 것’을 요구하신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것이 곧 ‘네가 나를 믿느냐’의 속뜻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배우신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께 구원의 믿음, 치유의 믿음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6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아멘

 

2022-03-0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5-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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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천국의 빛과 열

Light and Heat in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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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뽀르치운꼴라의 형제들 생활 (1211년) (2)

에지디오

베르나르도

루피노

레오

 

초대 형제들과 그 후대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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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천국에 있는 해

The Sun in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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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the days of man being a hundred and twenty years)라는 표현은, 그들이 남겨진 신앙의 리메인스(remains of faith), 신앙의 흔적들(traces)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3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My spirit shall not reprove man forever, for that he is flesh;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575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the days of man being a hundred and twenty years)라는 표현은, 그들이 남겨진 신앙의 리메인스(remains of faith), 신앙의 흔적들(traces)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전 장 3절과 4절에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그들의 때(times)와 상태(states)를 상징한다(AC.482, 487-488)는 것과, 태고인들은 그 교회의 상태와 상태 변화들(AC.487:2)을 상징하기 위해 숫자들의 서로 다른 조합들을 사용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지금은 그들이 그 교회와 관련된 일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그 숫자 조합 방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That by the days of man being a hundred and twenty years is signified that he ought to have remains of faith, appears from what has been said in the foregoing chapter (Gen. 5:3–4), concerning “days” and “years” signifying times and states; and also from the circumstance of the most ancient people from numbers variously compounded signifying states and changes of states in the church; but the nature of their ecclesiastical computation is now totally lost.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3-4)

 

본 절 이 ‘백이십 년’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숫자 역시 같은 방식이며, 그래서 그 의미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one, 1)에서 ‘열둘(twelve, 12) 및 기타 등등 그 각각의 숫자에 감춰진 의미들부터 먼저 알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분명한 건, 그 안에 뭔가 비밀스러운 게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백이십 년’이라는 인간의 수명과 선행절들하고는 맞지가 않기 때문이며, 홍수 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봐도 사람들이 딱 백이십 년만 산 게 아닙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셈의 경우,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되어 있고,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은 후, ‘사백삼 년’을, 셀라는 에벨을 낳은 후, ‘사백삼 년’을, 에벨은 벨렉을 낳은 후, ‘사백삼십 년’을, 그리고 노아는 홍수 후, ‘삼백오십 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숫자 ‘백이십(one hundred and twenty, 120) 안에 들어있는 의미는 ‘(ten, 10)과 ‘열둘(twelve, 12)의 의미로만 나타나는데, 이 둘이 곱해져서 백이십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들 숫자를 이루는 숫자 성분들의 상징으로부터, ‘백이십 년’은 신앙의 리메인스를 상징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숫자 ‘’은 ‘십분의 일(tenths, tithes 십일조)과 함께 리메인스를 상징하고 표현합니다. 이 리메인스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 안에 보관되는데, 이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한편, 숫자 ‘열둘’은 신앙, 혹은 신앙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숫자 ‘백이십’이 이들 숫자 성분들의 조합으로 신앙의 리메인스를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Here in like manner numbers of years are mentioned, whose signification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understand, unless he be first acquainted with the hidden meaning of each particular number from “one” to “twelve,” and so on. It plainly appears that they contain within them something else that is secret, for that men were to live a “hundred and twenty years” has no connection with the preceding part of the verse, nor did they live one hundred and twenty years, as is evident from the people after the flood (chapter 11), where it is said of Shem that “he lived after he begat Arphaxad five hundred years”; and that Arphaxad lived after be begat Selah “four hundred and three years”; and that Selah lived after he begat Eber “four hundred and three years”; and that Eber lived after he begat Peleg “four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that Noah lived after the flood “three hundred and fifty years” (Gen. 9:28), and so on. But what is involved in the number “one hundred and twenty,” appears only from the meaning of “ten” and “twelve,” which being multiplied together make one hundred and twen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se component numbers it may be seen that “one hundred and twenty” signifies the remains of faith. The number “ten” in the Word, as also “tenths,” signify and represent remains, which are preserved by the Lord in the internal man, and which are holy, because they are of the Lord alone; and the number “twelve” signifies faith, or all things relating to faith in one complex; the number therefore that is compounded of these, signifies the remains of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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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5(D1)-주일예배(2542, 눅18,31-34),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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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5-05(D1)-주일예배(2542, 눅18,31-34),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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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의 속뜻

 

 

3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눅18:31-34)

 

 

율법과 예언서에는 주님에 대해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주님이 지옥을 정복하심으로 해서 의롭게 되셨고, 천국을 질서 아래 두셨으며,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셨고, 또한 그렇게 해서 인간이 거듭나고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천국의 비밀 10239:4, 이순철 역) Therefore when the Lord suffered John to baptize him, he said: Thus it becometh us to fulfil all the righteousness of God (Matt. 3:15). “To fulfill all the righteousness of God” denotes to subdue the hells by his own power, and reduce them and the heavens into order, and at the same time glorify his human; which things were done by means of temptations admitted into himself, thus by means of continual combats with the hells, even to the last on the cross. (That this is the “righteousness” which the Lord fulfilled, see n. 9486, 9715, 9809, 10019, 10152.) The like things are also signified by “all things being fulfilled which were written concerning the Lord in the law and the prophets” (Luke 18:31; 22:37; 24:44); and by the Lord’s coming “to fulfill all things of the law” (Matt. 5:17, 18).

 

※ 위 내용은 출30:19,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And Aaron and his sons shall wash from it their hands and their feet)에 관한 속뜻 주석 중 일부입니다.

 

 

※ 아래 본문 중 ‘개인적으로는’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님 본인을 가리킵니다.

 

새 교회에 입문하면서 개인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성경의 내적 의미, 곧 속뜻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큰 감동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는지 실감이 잘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마 그렇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 교회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제각기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의 기록들이 실제와 다르다면서 성경의 완벽함을 의심합니다. 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어야 하느냐 의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그냥 믿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순하게 말씀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름대로는 모두 독실한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뿌리가 그렇게 튼튼하지가 않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말씀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데, 그냥 맹목적으로, 아, 표현이 좀 그런가요? 말씀의 내적 의미, 즉 그 속뜻을 모른 채 그냥 겉 글자만 믿기 때문이지 싶은데요, 그것은 잘 모르는 어떤 존재, 즉 그 존재의 겉만 믿는 것과 같으며,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이라 볼 수 없지 않을까 저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성경은 문자, 즉 겉 글자로 된 외적 의미, 그러니까 겉뜻과, 그 속의 내적 의미, 즉 속뜻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문자적 의미로만 말씀을 이해하면 여러 가지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예를 들면, 앞에서 어떤 분이 말씀에 기록된 내용들이 실제와 많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내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며, 그러므로 그 자체로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오류가 없는 완전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의미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의미를 통해 볼 때, 성경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까요? 첫째는, 인류가 생긴 이래로 존재 했던 교회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내적 의미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교회는 아담과 그 후손들로 표상되는 태고교회입니다. 태고교회 다음에는 노아와 그의 후손들로 표상되는 고대교회가 있었고, 그 후에는 야곱의 자손들로 표상되는 유대교회가 있었습니다. 유대교회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해서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유대교회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이 현 기독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인류를 위한 마지막 교회인 새 교회가 등장합니다. 그 교회를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계21:2, 10)이라고 합니다. 내적 의미를 통해 성경에 기록된 두 번째 내용은 주님에 관한 것입니다. 창세기와 예언서, 그리고 복음서의 기록들은 주님이 오실 것에 대한 예언과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시는지 그 과정들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세 번째 내용은 인간의 영적 거듭남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 창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내적 의미로 볼 때, 그것은 자연계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은 이와 같이 주님에 대해, 그리고 하늘의 천국과 지상의 교회에 대해, 또한 신앙인들의 거듭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 곧 그 속뜻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이해할 때,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고, 그때 비로소 주님을 굳게 믿고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에게 참된 진리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이 입으신 인간은 선 그 자체이신 여호와에게서 나오는 진리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처음부터 완전한 인간이요, 완전한 진리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인간(human) 안에는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전적인 속성들이 남아 있어서 그것을 완전히 벗으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인 것들을 벗는 일은 불완전한 몸을 통해 지옥의 시험을 불러들여 그것을 완전히 이기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 비로소 주님은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이 되셨으며, 동시에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 마지막 시험인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먼저 본문 3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말씀에서 ‘열둘’(’12)이라는 수는 믿음 또는 믿음에 관한 모든 것을 나타냅니다. ‘열둘’(12)이라는 숫자에 그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말씀에는 주님의 제자들을 ‘열두 제자’로 표현을 했고, 이스라엘을 또한 ‘열두 지파’로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열두 제자는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뜻하며, 또한 그들의 다양한 믿음을 나타냅니다. 주님을 믿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믿음이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믿음이 있는가 하면, 도마와 같은 믿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모든 사람을 함께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이 마지막 시험을 당하실 고난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성전을 뜻하고, 또한 사람의 내면에서는 하나님이 계신 곳인 속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하시는 것은 주님에게는 십자가의 시험을 통해 당신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고요, 제자들에게는 시험을 통해 겉 사람과 속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곧 영적 성장을 의미하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표현하기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해서 ‘천국의 비밀’ 10239번 글의 4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과 예언서에는 주님에 대해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데, 그 의미는 주님이 지옥을 정복하심으로 해서 의롭게 되셨고, 천국을 질서 아래 두셨으며,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셨고, 또한 그렇게 해서 인간이 거듭나고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은 주님이 세상에 오실 것과 지옥을 정복하시고, 그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지금 올라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에 대해 32절과 33절에서는,

 

32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말씀에서는 주님에 대해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주님을 사람의 아들이라 할 때는 주님의 인간 안에 있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는 주님의 인간 안에 있는 선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시험을 당하실 때 주님은 왜 당신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실까요? 그 이유는 지옥의 영들은 선은 공격하지 못하고, 오직 진리만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주님은 인자가 욕을 당하고, 채찍질과 침 뱉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욕을 먹고 채찍질을 당하는 것은 주님의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고 더럽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욕을 당하시는 주님은 말씀이시며,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이 삼 일 만에 일어나신 것은 시험을 통해 주님의 인성이 신성과 하나가 되신 것이며, 그렇게 해서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3)은 완전한 성취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일을 한 번에 이루시지 않습니다. 한 번 하시고, 두 번 하시고, 마지막 세 번째 이루십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는 3시에 못 박히시고, 6시까지 견디시며, 마지막으로 9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교회가 무너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번 참으시고, 두 번 참으시며,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 믿음과 사랑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때 비로소 교회의 문을 닫으십니다. 교회가 타락하는 모습을 마가복음 12장에서는 포도원을 세로 얻은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두 번째 보낸 종을 또 때리며, 마지막에는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26장에는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 주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당시 유대교회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고난에 대해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본문에는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의 의미를 감추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왜 말씀의 의미를 감추셨을까요? 첫째는, 진리를 받을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진리를 주면, 그것을 더럽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더럽히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이기시기 전 주님은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해, 요한복음 14장 25절 이하에서는,

 

25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하십니다. 주님이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보혜사 성령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밝혀주시는 신성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언제 그것을 보내주실까요? 그것에 대해 ‘참된 기독교’ 791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천국에서 마지막 심판을 끝내신 후, 세상에서 그를 따르던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 모두를 온 영계로 보내 다니엘서 7장 13절과 14절의 예언, 즉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고 한 예언에 따라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신다는 것과 그의 나라가 세세토록 있을 것이라는 복음을 가르치게 하셨다. (이순철 역)

 

Note: After this work was finished the Lord called together his twelve disciples who followed him in the world; and the next day he sent them all forth throughout the whole spiritual world to preach the gospel that the Lord God Jesus Christ reigns, whose kingdom shall be for ages and ages, according to the prediction in Daniel (7:13, 14), and in Revelation (11:15).

 

Also that blessed are those that come to the marriage supper of the lamb (Rev. 19:9).

 

This took place on the nineteenth day of June, 1770. This is what is meant by these words of the Lord:

 

He shall send his angels and they shall gather together his elect, from the end of the heavens to the end thereof (Matt. 24:31).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신적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보혜사 성령, 즉 신성한 내적 진리가 천국을 통해 지상에까지 전파되게 된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791번 글은 그 일이 일어난 때를 지상의 시간으로 1770년 6월 19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선지자들이 당신에 대해 기록한 모든 것을 이루자고 하십니다. 주님은 왜 예루살렘에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려고 하실까요? 주님은 바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한편으로는 고난을 당하시고, 한편으로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욕되게 하거나 채찍질을 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얼마나 주님께 함부로 했을까를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에 설레고 기대가 됩니다. 항상 자신을 낮추시고,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끝까지 싸워 이기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와, 그리고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6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6-7)

 

아멘

 

2022-02-1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5-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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