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30(D1)-주일예배(2550, 눅20,9-18), ‘모퉁잇돌’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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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잇돌’의 속뜻

 

 

9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17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눅20:9-18)

 

 

모퉁이 돌과 주춧돌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모든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또한 신적 인성으로서 주님을 뜻한다. (계시록 해설 417:12, 이순철 역) and because “the stone of the corner” signifies all Divine truth upon which the church is founded, it also signifies the Lord in respect to His Divine Human; (AE.417:12)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러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종을 세 차례, 그리고 마지막엔 아들을 보내었지만 다 소용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9절과 10절의 말씀입니다.

 

9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말씀에서 포도원은 교회를 뜻하고, 포도원 주인은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교회는 꼭 외적으로만, 즉 겉으로 건물 형태로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어디 있든지 교회의 본질은 주님에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즉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지요. 그러면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는 누굴까요?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속에 신앙과 사랑의 씨앗을 심어주시고, 그것을 잘 가꿔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는 동안 주님은 각 사람과 항상 함께 계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아주 멀리 계시거나 아예 안 계신 것처럼 여깁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주고, 멀리 타국에 나가 있는 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때가 되자 주인이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 소출 얼마를 바치라고 합니다. 여기서 종은 누굴까요? 주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신앙인들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살핍니다. 예를 들면, 진리에 어긋난 행동은 하지 않는지, 잘못이 있으면 바로바로 회개하는지, 맡은 일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는지 돌아봅니다. 그리고 신앙이 잘 자라는 것을 확인하면 영광을 모두 주님께 돌립니다. 주인이 종을 보내 소출 얼마를 받으려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냈다고 합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종을 때리는 것은 교회들이 말씀을 왜곡, 거짓으로 만드는 걸 의미하고, 거저, 즉 빈손으로 보내는 건 교회 안에 진실한 신앙과 사랑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걸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본문의 농부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을 임의로 푼답시고 여러 가지 인간적인 것들을 섞어, 결국 장로의 전통이라는 걸 만들었고, 그걸로 교인들을 가르쳤으며, 심지어 말씀보다 자기들이 만든 전통을 더 우선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두 번째, 세 번째 종을 보냅니다. 본문 11절과 12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유대교회도 그렇고, 다른 교회들, 그러니까 현 기독교회를 비롯, 과거 고대교회나 태고교회도 교회가 타락할 때는 먼저 말씀부터 왜곡했습니다. 말씀이 왜곡되면, 교인들의 삶이 피폐해지는데요,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말씀을 통해 삶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실제로 주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여럿 욕보이고 죽였습니다. 선지자들을 욕보이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 말씀에 대한 폭행을 뜻하지요.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고 하셨는데요, 말씀의 진리를 더럽히고 죽이는 자가 바로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말씀을 뜻하고, 예루살렘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종을 세 번까지 보냈다고 했습니다. ‘세 번’에 나오는 이 ‘’이라는 숫자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세 번씩이나 종을 보내고, 농부들이 그때마다 때리고 쫓아내는 건 교회가 마지막까지, 끝까지 말씀을 더럽혔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사랑과 신앙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끝까지 말씀을 왜곡했다는, 즉 말씀에다가 인간적인 것들을 섞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하십니다. 13절로 15절입니다.

 

13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포도원 주인이 마침내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여기서 주인의 아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지만 그런데도 아들이라 부르는 까닭은, 말씀에서 아들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본래 사랑 자체이신 분이지만, 인간에게 오실 때는 진리로 오십니다. 왜냐하면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는 인간이 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와를 본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여호와는 인간이 만날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그런 까닭에, 말씀에서 주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는 사랑이신 주님을 뜻하고, 아들이라 부를 때는 진리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따라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은 진리, 또는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셨을 때, 교회는 주님을 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본문에 포도원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내쫓고 죽였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유대교회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쩌면 자기들 눈앞에 있는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은 그들이 무엇보다도 자신의 자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농부들처럼 어리석게도 그들 역시 선과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죽임으로써 스스로 선과 진리의 주인이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것이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상속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농부들을 진멸한다는 것은 주님이 교회를 벌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배척한 교회가 스스로 멸망을 자초, 망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은 절대로 누구를 진멸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진리이신 주님을 주인으로 섬겨야 살아나는데 진리를 왜곡하고 죽였으니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일종의 무장해제가 진행되어 지옥의 기운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그 기운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결과 당연히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초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피하면 보호받지만, 주님을 등지면 그대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타락한 교회를 대신해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말았으면 합니다’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17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계시록 해설 417:12항에서는 ‘모퉁이 돌과 주춧돌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모든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또한 신성한 인간으로서 주님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은 타락한 교회들이 배척한 진리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그 진리가 새로운 교회의 근간이 되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교회의 근간이 되는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마지막 때 새 교회를 통해 주께서 밝히시는 말씀의 내적 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진리 위에 떨어지는 자는 모두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때 주님이 밝혀 주시는 내적 진리를 거역하는 사람이나 교회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마저 모두 잃어버리고, 스스로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교회들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교회에서 쫓아내 죽이고 말았습니다. 유대교회의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만 주님을 죽이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고 악용하는 것은 모두 주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진리를 알면서 거역하는 것도 주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진리는 우리 삶의 곳곳에 있습니다. 일할 때도, 인간관계를 맺을 때도 진리가 있습니다. 무엇이 진리에 합당한 일인지 항상 정신을 차리고 살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에 대한 사랑을 거두고, 진리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진리 배우기를 힘쓰고, 배우는 대로 하루에 한가지씩이라도 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이유 없이 박해나 모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주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고 견뎌야 합니다. 그때 합리에 속한 능력이 열리고,

 

※ 이 ‘합리’에 관한 능력이 우리 안에 열리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우리는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바로 점프를 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이 둘을 중간에서 연결시켜 주는 거, 그게 바로 ‘합리’, 즉 납득하는 능력, 고개를 끄덕이는 능력입니다. 무엇이든 일단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능력을 가장 빠르게 얻는 방법은 바로 ‘애정’입니다. 애정이 있을 때, 우리의 내면이 진리의 말씀 앞에 확 열립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자아가 우리 안에 흘러 들어옵니다. 이 새로운 천국적 자아를 통해 신앙을 지킬 수 있고,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분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121:4-6)

 

아멘

 

 

2022-06-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3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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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D1)-주일예배(2549, 눅20,1-8), '요한의 세례'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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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6-23(D1)-주일예배(2549, 눅20,1-8, AC.7456.8), '요한의 세례'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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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세례’의 속뜻

 

 

1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5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20:1-8)

 

 

말씀에서 돌로 치는 행위는 진리에 반(反)하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 한 까닭은 그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며, 그들은 그것을 신성모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7456:8)

 

 

오늘부터 누가복음 20장입니다.

 

※ 다음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의 에피소드입니다.

 

제가 새 교회 진리를 처음 알게 된 건 30여 년 전입니다. 당시 저는 플라스틱 포장재를 생산하는 어떤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았고, 회사도 마음에 들지 않아 여러모로 우울할 때였습니다. 그때 가족 중 한 분이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을 주시면서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읽어갈수록 거기 적힌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가족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새 교회인이 되었습니다. 새 교회의 가르침 ‘천국의 비밀’ 5044번 글에는 ‘사람이 시험 가운데 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흘러들어온다. 그 진리가 그들의 생각을 다스리며, 의심하거나 절망할 때 그들을 끌어올린다’라고 합니다. 사람이 어려운 지경에 있을 때, 자존감이 크게 낮아집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것을 자아가 죽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아가 죽을 때,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흘러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는 자기 생각이 아닌 것을 잘 안 받아들이며, 그러므로 자아가 성(盛)하게 되면, 진리를 오히려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인생의 시련은 사람을 영적으로 만드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큰 교회에 다니는 분이 우리 교회로 찾아오셨습니다. 스베덴보리를 읽고 공감하는 바가 있어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얘기에 따르면, 장애가 있는 딸이 있어 교회의 식구들과 오랫동안 기도해 왔는데 낫지는 않고, 오히려 좋지 않은 사고가 간혹가다 일어난다는 겁니다. 답답하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주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자에 대해 그가 소경인 건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며,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분의 자녀에게 생긴 불행한 일도 필경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나 부모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삼중의 장애, 즉 시각, 청각 및 언어 장애 속에 살아야 했던 헬렌 켈러(1880-1968)는 새 교회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잠시만이라도 아름다운 하늘과 땅, 계절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1927년에 ‘내 어둠 속의 빛’이라는 책을 냈는데 거기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나의 빛이었고, 내 손의 지팡이였으며, 그의 밝은 시력이 나의 길에 함께했다...’ 그녀가 한 말을 되뇌면서, 그녀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었을까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인간들은 부족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나타내려 하시는지 알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장 눈앞의 문제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결해 주시기만 바랍니다. 그리고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주님을 원망하고 의심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주님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며서 주님의 권위를 의심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입니다.

 

1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볼 때, 주님은 가난한 시골의 보잘것없는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주님께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물었습니다. 말씀에서 성전(temple)은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인 영적 교회를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를 뜻한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라는 참된 진리가 새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르치시는 백성(people)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진리를 말해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나타나 주님께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제사장(priest)은 본래 선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자아에서 나오는 악을 뜻합니다. 그리고 서기관은 그런 자아에서 나오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과 주님이 전하시는 복음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새 교회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질 때, 자아의 악과 거짓에 빠진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로 된 겉뜻과 그 속에 감춰진 속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겉뜻만 있고 속뜻이 없다면, 말씀은 생명이 없는 죽은 것과 같습니다. 마치 영혼과 분리된 육신이 곧 시신인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속뜻만 있고 겉뜻이 없으면, 속뜻은 허공 중에 흩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내용물만 있고, 담을 그릇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겉뜻과 속뜻이 모두 중요하며, 둘 다 신성한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겉뜻만 말씀이고, 속뜻은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주님의 권위를 의심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자들이며, 자아에 매인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말을 들으시고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3절과 4절,

 

3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적 의미로 볼 때, 주님이 말씀의 속뜻을 표상한다면 요한은 속뜻을 담는 그릇인 말씀의 겉뜻을 표상합니다. 요한을 가리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라고 말한 것은 말씀의 겉뜻은 속뜻을 담기 위해 예비한 그릇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세례란 무엇일까요? 세례는 주님의 교회에 입문하는 것, 즉 회개와 거듭남의 삶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며, 추상적 의미, 곧 속뜻으로는 선, 또는 인애, 즉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뜻합니다. 그에 비해 요한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말씀의 겉뜻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진리, 또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요한의 세례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새 교회의 신앙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체어리티의 삶은 없더라도 신앙, 즉 믿음만으로 능히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앙과는 반대되는 신앙이지요. 따라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주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신앙이 하나님으로 온 것이냐, 아니면 인간이 사사로이 만든 것이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 교회나 오늘날의 주류 교회들은 말씀을 임의로 왜곡, 체어리티의 삶은 빼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걸 가르칩니다.

 

※ 지금까지 개신교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온 제가 볼 때는 위 문장처럼 노골적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새 교회 목회자들은 개신교 경험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잠깐 다니신 것만 있어 그 안에 깊숙이 있어 본 적이 없으셔서 이러시는 것 같습니다. 개신교 관련, 스베덴보리의 표현들을 보면, 살짝 무슨 중간이라는 게 없어 보이거든요... 다만 에베소서 다음 본문을 근거로 행위, 즉 체어리티의 삶을 덜 강조하거나 막연히 ‘뒤따라오는 것’ 정도로만 인식할 뿐이지요.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2:8, 9)

 

다만 신앙이냐 체어리티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양자택일식 접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어 옮깁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믿음으로 의롭게 됨)를 창안한 마틴 루터(1483-1546)를 영계에서 만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믿음 만에 의한 '이신득의'(위 이신칭의의 다른 말)라는 독단교리가 성언(聖言, ‘말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총명에서 창안한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을 때, 주님, 체어리티, 참믿음, 자유의지, 그리고 속량에 관해 성언에 의한 새 교육을 받기를 원하였다. 그는 마침내 새로운 교회가 주초를 놓아야 할 진리들에 찬동하며, 점차적으로 그 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가 새로운 교회의 진리들을 획득하는 데 따라 가끔 자기의 옛 견해가 성언에 직접 반대되는 것이라고 자조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믿음 만에 의한 득의에 내포되어 있는 다른 독단교리들, 곧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부정, 체어리티의 영적 본질의 부정 따위를 설교했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마시오. 왜냐하면 내 목적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의 분리였으니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목적이 달성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한 광인(狂人, 미치광이, 루터 자신을 말함)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따라서 광인이 된 것, 곧 이 독단교리 안에 내포된 사상들이 명확히 성서와 모순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그들이 이상할 따름이요.'

 

여기서 그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약간의 유명한 교리학자들을 향해 경멸의 눈길을 던졌다. 이어 나는 천사들에게 루터가 믿음 만에 의한 득의 교리로 자신들을 굳힌 다른 많은 자들보다 훨씬 전에 회심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이런 루터의 회심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젊어서 기독교 개혁이 시작되기 전에 체어리티의 중요성에 관한 교리에 정통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가 글로나 설교들로 체어리티를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믿음만이라는 교리가 그의 겉 사람에게는 심겼으나 그의 속 사람 안에는 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와는 달리 젊어서부터 믿음 만에 의한 득의에 찬동하는 논조로 체어리티의 영적 성질에 반대하고, 스스로를 그 교리에 다진 자들의 경우는 다르다. 나는 삭소니 후작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는 루터와 세상에서 사귄 사람이다. 그는 말하기를 '루터는 겉으로는 체어리티를 믿음과 분리시켜, 구원하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로마 카톨릭 종도들 때문에 그리하였고, 그 실제에 있어서는 체어리티를 믿음으로부터 분리한 것을 강하게 비난했다.'고 하였다. 이 후작은 축복받은 자들 가운데 있다...

 

즉 루터가 현 개신교가 그토록 붙들고 있는 ‘이신칭의’ 교리를 만든 것은 로마 카톨릭 때문이었으며, 실제로 그는 사후 영계에서 스베덴보리를 만나 이 사실을 자백하고, 돌이켰다는 얘기입니다.

 

제 설명은 여기까지 //

 

그러면서, 즉 ‘오직 믿음(Sola Fide)의 기치 아래 주님이 새 교회를 통해 밝히시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진리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물으시는 것은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을 부정하는 자들의 위선을 주님께서 꼬집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다음과 같이 의논합니다. 5절로 7절,

 

5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이 말씀의 외적 부분인 진리와 신앙을 뜻한다면, 세례는 말씀의 내적 부분인 선과 체어리티의 삶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 둘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고민이 거기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인정한다는 건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믿음 만의 신앙을 가르친 자들은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분리시켰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요한의 세례가 인간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이 하나라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사사로이 만든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영원히 떠날 것입니다. 백성들이 돌로 치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돌로 치는 건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이 밝혀지는 것이고, 그리하여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정죄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8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양심을 따르지도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주님과 말씀의 권위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양심에 따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합리성, 즉 겉 사람과 속 사람을 연결하는 중간이 열리고, 이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와 그 속에 계신 주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교회의 가르침, 그러니까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가르침에 의하면, 말씀의 겉뜻만으로도 구원에 관해 꼭 필요한 진리들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신체의 다른 부분은 옷으로 가려져 있지만 손과 발만은 그대로 노출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 내면의 성전에서 말씀의 속뜻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이유는 말씀의 속뜻이야말로 다시 오신 주님이시고, 마지막 때 보내주시기로 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 그리고 성령이 왜 한 분 주님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통해 왜 믿기만 하면 안 되고, 그 믿음에 기반한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고, 받아들이더라도 일부만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내면에 영적 합리성이 아직 열리지 않아서이고, 이는 곧 자아의 방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아가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주님의 권위를 의심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악하고 거짓된 것이 없는지 늘 살피고, 주님과 함께 그것들을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강처럼 흘러들어와 광야와 같은 마음을 적셔 살아나게 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교회의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3:8)

 

아멘

 

 

 

2022-05-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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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다음 달 초 둘째를 볼 큰애가 아이 이름 관련, 조언을 구하는 가운데 나눈 글입니다.

 

초태생’(初胎生, firstborn), ‘처음 난 자’ 등에 대해 찾아보니,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1, 2)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구나.

 

여기서 잠시 어떤 배경 이야기를 좀 해야 하는데... 내가 직접 하기 보다, 원본을 그대로 좀 가져와 보마.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the man and Eve his wife)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태고 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말합니다. 그 첫 자식, 처음 난 자녀는 신앙(信仰, faith)인데, 여기 ‘가인(Cain)이 바로 이 신앙을 말합니다. 그녀의 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는 ‘가인’이라는 사람들로 인해 신앙이라는 게 독립된 어떤 걸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 그들, 곧 인류 첫 교회인 태고 교회지요, 이 아담이라고 하는 교회는 신앙이 무엇인지에 관해 마치 무지한 듯 보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앙의 모든 것에 관한 퍼셉션(perception, 특별히 학습하지 않아도 마치 천국 천사들처럼 주님으로 말미암아 직관하는 영적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이런 완전한 모(母) 교회로부터 나오기 시작한 자식 교회들의 경우, 사랑과 신앙이 한 몸이었던 모 교회로부터, 즉 모 교회의 교리로부터 굳이 신앙의 교리를 따로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전에는 퍼셉션으로 그냥 알던 것들을 굳이 가져다가 따로 교리화하였고, 그러면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한 것입니다. 마치 자기들이 뭔가 새로운 걸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해서 전에는 그냥 심비(心碑)에 새겨지던 것들이 이제는 배워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두 번째 자녀는 ‘아벨(Abel), ‘아우(brother)로 상징된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입니다. ‘양 치는 자(a shepherd of the flock)는 체어리티라는 선을 행하는 사람을, ‘농사하는 자(a tiller of the ground)는 체어리티 없는, 사랑과 분리된 신앙, 이런 건 전혀 신앙이 아닌데, 이런 절름발이 신앙, 거짓, 가짜 신앙에 있어서는 또 아주 제대로일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교회의 두 번째 자녀가 체어리티인 것은, 교회는 신앙과 체어리티 말고는 잉태하고 해산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등... 인용은 이 정도만 하마.

 

이 정도로도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또는 교회, 교리)의 신앙이 어떤 건지, ‘아벨’이라 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어떤 건지와, 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를 살짝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이 두 신앙의 역사이지 싶구나. 주님은 이 둘의 하나 됨, 한 몸 됨을 정말 원하셨고, 그래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까지 하셨는데...

 

다음 말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출13:2)

 

에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Sanctify to Me all the firstborn)는 말씀은, 신앙,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을 뜻한다고 한다.

 

주님은 태고 교회의 후손들을 통해 잃으신 참 신앙을 되찾고 싶으셨던 것 같다.

 

열린다 성경’ 저자 류모세 선교사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일부로 전체를 대신한다’는 게 있댄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초실절’이라고... 아마 십일조 정신을 이렇게 연결해도 되지 싶다. 원래는, 즉 십일조의 기원은 리메인스이지만...

 

두루두루 아이의 이름을 이런 말씀 가운데서 찾게 하심의 증거를 주심이 기쁘구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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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설명,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창1:5) (2024/6/17)

 

오늘 22번 글은 좀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글 내용 일부인,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preceding state)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그늘 상태, 즉 거짓의 상태, 불신앙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뒤따르는 상태(subsequent state)입니다. 한 종류 빛이나 진리, 그리고 신앙 지식이 되는 상태이지요...

 

이런 내용은 지금의 저조차 그저 어렴풋이만 이해할 뿐 처음 접하시는 분께 밝히 설명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계속 주님께 도우심을 구하며 고민하던 중, 아래 ‘천국과 지옥’ 17장, ‘천사들의 상태 변화’를 소개하는 정도로 우선은 만족해야지 싶습니다.

 

 

HH.154, 17장, '천국 천사들의 상태 변화'(HH.154-161)

※  천사들의 상태 변화라는 것은 그들의 사랑과 신앙, 거기서 나온 지혜와 지성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17천국 천사들의 상태 변화Changes of State of the Angels in Heaven 154천사들의 상태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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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155, 17장, '천국 천사들의 상태 변화'(HH.154-161)

※  천사들의 사랑은 항상 일정한 상태가 아니며, 그 결과 지혜도 항상 같지 않다. 그들의 지혜는 모두 그들의 사랑에서 나오고, 그 사랑에 부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강렬한 사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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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156, 17장, '천국 천사들의 상태 변화'(HH.154-161)

※  천사들의 사랑과 지혜에 속한, 그들의 내면 상태가 변화함에 따라 그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물의 상태와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들도 변한다. 그들 주변에 있는 사물들은 그들 내면의 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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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157, 17장, '천국 천사들의 상태 변화'(HH.154-161)

※  모든 천사가 이러한 상태 변화를 거치고 지난다. 그들의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각자가 겪는 변화는 서로 다르다. 그들의 사랑과 지혜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17천국 천사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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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158, 17장, '천국 천사들의 상태 변화'(HH.154-161)

※  나는 왜 천국에 그러한 상태 변화가 있는지를 그곳에서 배웠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천사들은 설명했다. 첫째, 천사들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사랑과 지혜에서 생기는 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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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159, 17장, '천국 천사들의 상태 변화'(HH.154-161)

※  해로 계신 주께서 천적 나라의 천사들에게 그들의 첫째, 둘째, 셋째 상태에 각각 어떻게 나타나시는가를 나는 허락하심에 의해 볼 수 있었다. 나는 해로 계신 주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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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160, 17장, '천국 천사들의 상태 변화'(HH.154-161)

※  천사들의 이 마지막 상태는 그들이 자기 본성에 빠져있을 때인데, 이때 그들은 우울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그들이 그 상태에 있을 때, 대화를 나눴고, 그들의 우울함을 보았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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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161, 17장, '천국 천사들의 상태 변화'(HH.154-161)

※  지옥에도 상태의 변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지옥’ 편에서 설명하겠다.  17천국 천사들의 상태 변화Changes of State of the Angels in Heaven 161지옥에도 상태의 변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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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배경을 이해하고 나면, 창세기 1장의 무척 생소한 표현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의미가 이해됩니다. 제 경우는 그랬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면, 천국의 많은 것들은 비록 그곳에 직접 가서 직접 목격을 한다 한들, 그리고 밝히 이해를 했다 한들 지상에 돌아와서는 지상의 언어로 어떻게 형용이나 설명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상 생활을 하는 우리도 그러니까요. 예를 들면, 탈북자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겪었던 일들을 북에 있는 가족에게 아무리 설명을 한들 ‘후라이까지 말라우’ 하며 안 믿는다지 않습니까? 안 믿는 게 아니라 못 믿는 거죠... 이런 걸 감안하면, 스베덴보리가 이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을 주님으로부터 받아적을 때, 정말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걸 잘 아시는 주님은 그래서 27년 간 거의 매일 쉬지 않고, 스베덴보리를 천국으로, 영계로 들어 올려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신 것이고요...

 

아, 방금 ‘받아적었다’ 했는데, 곧이곧대로 무슨 프린터 역할만 했다는 건 아니고, 어떤 메인 아이디어를 주시면 그걸 스베덴보리가 본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 ‘주님, 그건 이렇게 표현하면,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요?’ 하면서 협업을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아르카나가 담긴 신구약 성경들 역시, 이사야면 이사야, 예레미야면 예레미야 등 그 기록자들의 퍼스낼러티 역시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AC.22,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AC.22-23)

5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22‘저녁’이 의미하는 바와 ‘아침’이 의미하는 바를 이제 알 수 있는데요, ‘저녁’은 모든 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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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설명,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4, 5) (2024/6/16)

 

어제 ‘’에 대한 설명글에 인용했던 ‘천국과 지옥’ 127번 글을 다시 보면,

 

...천국의 빛은 세상 빛 같은 자연적 빛이 아니라 영적 빛이다. 그 빛은 해로 계신 주께로부터 나온 것이고, 그 해는 신적 사랑(the Divine love)이기 때문이다. 해로 계신 주께로부터 발산되는 것을 천국에서는 신적 진리(Divine truth)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본질은 신적 진리에 융합된 신적 선(Divine good united to Divine truth)이다. 이로부터 천사들은 열과 빛을 얻는다. 빛은 신적 진리에서, 열은 신적 선에서 얻는다. 천국의 빛과 열이 이 근원에서 나온다는 사실에서 그 빛과 열은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 해를 가지고 생각해 보면, 해 자체는 불덩어리요, 거기서 빛과 열이 나오는데, 둘은 하나로 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이 세상 해의 이러한 속성은 천국 해의 상응으로, 이 세상 해와 그 속성을 잘 관찰함으로써 천국 해와 그 속성, 곧 주님과 주님의 신성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 해에서 나오는 햇볕이 열과 빛으로 되어 있듯 천국 해로 계신 주님에게서 천국의 열인 신적 선과, 천국의 빛인 신적 진리가 나옵니다. 이 세상 해가 불덩어리인 것처럼 천국의 해는 주님의 사랑인데요, 천국이 광명한 나라인 것은 주님한테서 나오는 신적 진리가 그렇게 빛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해로 계신, 즉 사랑으로 계신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선, 곧 신적 선과 주님의 진리, 곧 신적 진리가 온 천국에 충만한 나라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하셨습니다. 곧 우리 마음 상태가,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 곧 주님 사랑의 상태여야 천국이 우리 안에 임한다는 것이며, 그럴 때 위와 같은 천국의 빛이 우리 안에 충만하여 우리는 빛 가운데 거하며, 어둠은 우리로부터 물러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AC.21, 창1:4, 5,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AC.21)

4, 5절,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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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6(D1)-주일예배(2548, 눅19,45-48),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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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기도하는 집의 속뜻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눅19:45-48)

 

 

기도에 의존하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는 기도에는 그것이 유익한 것일지 어떨지 하는 것은 주님만이 아신다는 생각과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기도를 들어주실지 말지는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겟세마네의 가장 가혹한 시험 중에 말씀하신 대로 나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시길 기도해야 한다. (AC.8179, 이순철 역) ...prayer is not to be relied upon. For in prayer from the Divine it is always thought and believed that the Lord alone knows whether it is profitable or not; and therefore the suppliant submits the hearing to the Lord, and immediately after prays that the will of the Lord, and not his own, may be done,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in His own most grievous temptation at Gethsemane (Matt. 26:39, 42, 44).

 

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4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마26:39, 42, 44)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일이 있기 전에 주님과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도중, 감람산 근처에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에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묶여 있을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보니 정말 나귀 새끼가 묶여 있어 그것을 풀어 끌고 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옷을 벗어 나귀의 등에 깐 다음, 주님을 거기 태워 예루살렘 성을 향해 옵니다. 여기까지가 앞 절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과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은 영적으로는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에 의해 새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감람산 맞은편 마을은 믿음, 그러니까 신앙(faith)만 중시하고, 인애,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가벼이 여기는, 이른바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감람산은 사랑과 체어리티를 나타내고, 맞은편은 반대를 뜻하구요, 마을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거기 매여있는 나귀 새끼는 외적 교회의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매여있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에 매여 내적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셋째,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왔다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새 교회를 통해 비로소 말씀의 내적인 의미가 밝혀지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은 마지막 때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의 사람들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넷째, 제자들이 옷을 벗어 나귀 위에 깔고 주님을 태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새 교회의 사람들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와 그것을 통해 깨우친 내적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또한 이웃을 섬기는 걸 의미합니다. 제자들의 옷은 새 교회 사람들이 이해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 절에서 살핀 본문은 교회의 마지막 때, 참된 진리가 ‘오직 믿음’의 교리를 가진 외적인 교회로부터 신앙과 체어리티의 신앙을 가진 내적인 교회, 즉 새 교회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 설교 원본에 있는 ‘믿음’과 ‘인애’(仁愛)를 저는 가급적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로 수정하여 쓰고 있습니다. ‘믿음’은 개신교적 표현, ‘오직 믿음’이나 ‘믿습니다! 아멘!’ 같을 때만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인애’의 경우, 왠지 ‘체어리티’의 더욱 풍성한 뉘앙스를 많이 놓치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새 교회 교인이라고 처음부터 내적인 신앙을 가지는 건 아닙니다. 그분들 역시 새 교회로 오기 전에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진리의 전부라고 믿었고, 또 주류교회들의 신앙인 ‘오직 믿음’의 교리만이 진정한 신앙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밝혀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신앙만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새 교회로 오기 전 그들의 신앙이 감람산 맞은편 마을에 묶여 있어 아직 아무도 태운 적이 없는 나귀 새끼와도 같은 신앙이라면, 새 교회로 온 후의 신앙은 그 매인 상태에서 풀려난 나귀 새끼가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힘차게 가는 것과도 같은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도착, 성전으로 들어가시니 그곳에는 장사하는 자들이 가득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그냥 장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마태복음 21장 12절에는 돈을 바꿔주는 자들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이 성전에 가득히 들어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마21:12)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는 영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거룩한 것인 선과 진리를 가지고 사적인 욕심을 채우는 자들입니다. 이를테면 돈을 바꿔주는 자는 진리를 가지고 사욕을 채우는 자이고, 비둘기를 파는 자는 선을 가지고 욕심을 채우는 자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목회자가 교인들의 구원에는 뜻이 없고, 높은 지위나 재물을 모으는 데만 관심이 있다면 그는 장사꾼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중에 그 목적이 사적 이득이나 명예를 얻는 데 있다면 그런 사람도 영적으로는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새 교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본인 신앙의 순수함에 따라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 다음은 어떻게 이렇게 성전 안에 장사하는 자들이 득실댈 수 있었을까 하는 그 배경 이야기입니다.

 

...성전 벽 남쪽의 더블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왕의 행각 지하를 거쳐서 성전 뜰 밖으로 나오게 된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왼쪽에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가 직영하던 부스가 있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다.

 

이 상점에서 성전 제사에 필요한 물건, 즉 소, 양, 비둘기, 밀가루, 올리브 기름, 포도주, 나무 등을 팔았고, 성전세로 바칠 반 세겔을 바꾸는 환전상도 이곳에 있었다. 이 상점은 대제사장인 안나스 가문이 직영으로 운영했고, 여기서 구입한 제물만 성전 제사에 적합한 규격품으로 인정받았다. 당연히 가격은 시중가의 몇 배나 비쌌고, 이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성전 뜰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상행위를 할 수 없었지만, 안나스의 직영 상점은 원래의 성전 뜰인 마카베오 성전산의 바깥인 헤롯 성전산에 위치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따지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성전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종교적 기득권층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며,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성전 이야기)

 

※ 오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들’이라는 복수 표현, 그리고 위 이야기에서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라는, 이런 좀 이해하기 힘든 표현들은,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본래 한 명이어야 하니까요, 당시 극도로 부패,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암시하는 표현들입니다.

 

※ 헤롯 성전은 원래의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확장한 성전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를 성전 시대로 나누는데요, 먼저 솔로몬 성전 건축부터 멸망까지를 1차 성전 시대(BC.960-586)라 하고, 스룹바벨 성전 건축부터 AD 70년, 헤롯 성전 함락까지를 2차 성전 시대(BC.515-AD.70)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보고 어떻게 하셨을까요? 45절과 46절에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모욕하고 폭행할 때도 묵묵히 참으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장사하는 자들이 성전을 점령한 것을 보시고 참지 못하고 무섭게 그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단지 혈기를 누르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리에 의해 교회가 정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섭니다. 진리는 자체로 악과 거짓을 흩어버리는 힘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꼭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325번 글은 ‘예배의 첫째는 체어리티의 삶이고, 둘째는 기도다’라고 합니다. 기도는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일이며, 또 죄를 이길 힘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기도가 없으면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없고, 체어리티의 삶이 없으면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예배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성전에는 기도와 체어리티의 예배는 없고, 오로지 장사하는 자들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신 것입니다.

 

본문 47절에는 주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신 후의 성전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신앙인들의 내면에 있는 교회 안에는 진리를 방해하거나 파괴하려는 여러 종류의 도둑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지옥으로부터 자아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악한 욕망과 거짓된 망상들입니다. 그것들은 주님에 의해 일시적으로 쫓겨났다가도 경계가 느슨해지면 다시 들어와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본문에 주님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악과 거짓들입니다. 제사장은 본래 사랑과 선을 표상하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악한 욕망을 뜻하고, 서기관은 진리를 방해하는 거짓된 망상을 뜻합니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통해 쉬지 않고 주님과 대화하면서 그런 악과 거짓들의 훼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그것을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라는 표현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가르치실 때, 48절에는,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백성의 영어식 표현은 people인데, people의 속뜻은 진리, 또는 진리에서 비롯한 애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백성이 주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새 교회 사람들의 진리의 애정이 주님을 향하여 열려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께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복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복종할 때 악하고 거짓된 영들은 우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죽이려 꾀하나 방도를 찾지 못한다는 게 그런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많이 발전해서 그것만 있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계속해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신앙인들은 그들과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스마트폰 속에 있는 세상의 일에 집착하다 보면 말씀을 가까이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이러한 것들이 진리에 대한 애정을 빼앗아 갑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의 크기에 따라 진리를 파괴하는 악한 영들이 들고 일어나기도 하고 죽은 듯 잠잠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애정이 크고 순수한 만큼 우리의 겉 사람은 합리성과 가까워지고 합리성을 통해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 ‘합리성’이라는 것은 영어로는 rational이라 하며, 우리의 겉 사람과 속 사람 간 가교 역할, 다리 역할을 하는 기능입니다. 쉬운 말로는 ‘이성’(理性, reason)으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어떤 사안, 어떤 진리에 대한 설명이 낯설지만, 그러나 매우 합리적일 때, 우리는 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 수용하게 되는 걸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음은 이에 대한 보다 깊은 설명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는 주님이 거처하시는 곳, 즉 속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고, 가장 바깥쪽에는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는 합리적 사람, 또는 합리성이라는 마음이 있어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서로 연결하는 일을 합니다. 합리성과 겉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주님은 합리성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그 속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을 몰아내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겉 사람은 합리성과 만나 서로 결합할 수 있을까요? ‘천국의 비밀’ 3030:2번 글에 의하면,

 

합리성의 근본은 선이지만 그것이 겉으로 나올 때는 진리이다. 선은 내적인 경로를 통해 합리성 안으로 유입되지만, 진리는 외적 경로를 통해 유입된다. 선과 진리는 그렇게 합리성 안에서 하나로 결합한다. (AC.3030:2, 이순철 역) The genuine rational is from good, but comes forth [existit] from truth. Good flows in by an internal way; but truth by an external way. Good thus conjoins itself with truth in the rational,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합리성이라는 의식은 선과 진리로 형성되는데, 합리성을 이루는 선은 주님에게서 오고, 그것과 결합할 진리는 겉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합리성을 형성하는 진리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요?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외적인 경로를 통해 흘러들어옵니다. 즉 겉 사람 안에는 기억이라고 하는 지식의 창고가 있는데 거기서부터 흘러들어온다는 겁니다. 사람의 기억 속에는 세상의 지식이나 말씀으로부터 얻은 지식 등 수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외적 경로를 통해 합리성 안으로 유입되는 진리란 이를테면 그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 단지 세상적인 흥미나 명예를 위해 그런 지식을 습득한다면, 그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아닙니다. 지식을 추구하되 주님과 이웃을 섬길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애정입니다. 그 애정이 기억 속에 있는 지식을 소환해 합리성의 선과 결합하도록 만듭니다. 그때 비로소 영적인 합리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영적 합리성은 세상의 합리성과는 전혀 다릅니다. 신앙인들은 그런 합리성을 통해 진리를 파괴하려는 악과 거짓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합리성의 선은 오염된 진리와는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진리가 주님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아와 세상을 향하고 있는지를 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기도하도록 항상 힘써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21:16)

 

아멘

 

 

 

 

2022-05-1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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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설명,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 (2024/6/15)

 

오늘 이 20번 글은 창조의 첫날, 즉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에 관한 설명입니다.

 

선과 참, 선과 진리라는 게 있는데 이게 뭔가 그동안 자기가 알고 있던, 믿어왔던 것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며, 뭔가 더 높고, 품격 있고, 진짜라는 걸 느끼기 시작하는, 알기 시작하는 때라고 합니다.

 

마치 태생적으로 중화사상, 그러니까 온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며, 세상 나라들은 중국에 머리를 조아려야 하고, 그래서 중국은 가장 선진국이라는 사상에 세뇌되어 살아온 중국인들, 특히 중국 청년들이 선진문명을 접하면서 그 실상에 눈을 뜨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8번 글 설명에서도 말씀드렸듯, 비록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어도 술, 담배만 안 했을 뿐, 그리고 교회만 다녔을 뿐, 모든 가치관이 세속적이었던, 그러니까 신앙생활도 나의 미래와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건 줄 알았던 그런 삶을 살다 갑작스런 모친 별세를 접하고는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첫 번째 눈을 떴던 것과도 같습니다.

 

오늘 20번 글에는 ‘’이 나오는데요, 이와 관련, ‘천국과 지옥’ 15장, ‘천국의 빛과 열’에서 글 몇 개를 인용합니다.

 

126. 천국에 빛이 있다는 것은 물질적 개념으로만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빛은 이 세상 대낮의 빛보다 몇 배 더 밝다. 그 빛을 나는 자주 보았고, 심지어 저녁과 밤에도 보았다. 나는 처음에 이 세상 빛은 천국에 비하면 그림자보다 조금 밝은 정도라는 천사들의 말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보고 난 후에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천국 빛의 밝기와 광휘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내가 천국에서 본 모든 것은 그 빛으로 본 것이며, 따라서 이 세상 사물보다 훨씬 명백하고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HH.126, 15장, '천국의 빛과 열'(HH.126-140)

※  나는 처음에 이 세상 빛은 천국에 비하면 그림자보다 조금 밝은 정도라는 천사들의 말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보고 난 후에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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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천국의 빛은 세상 빛 같은 자연적 빛이 아니라 영적 빛이다. 그 빛은 해로 계신 주께로부터(from the Lord as a sun) 나온 것이고, 그 해는 신적 사랑(the Divine love)이기 때문이다. 해로 계신 주께로부터 발산되는(goes forth) 것을 천국에서는 신적 진리(Divine truth)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본질은 신적 진리에 융합된 신적 선(Divine good united to Divine truth)이다. 이로부터 천사들은 열과 빛을 얻는다. 빛은 신적 진리에서, 열은 신적 선에서 얻는다. 천국의 빛과 열이 이 근원에서 나온다는 사실에서 그 빛과 열은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HH.127, 15장, '천국의 빛과 열'(HH.126-140)

※  천국의 빛은 세상 빛 같은 자연적 빛이 아니라 영적 빛이다. 그 빛은 해로 계신 주께로부터(from the Lord as a sun) 나온 것이고, 그 해는 신적 사랑(the Divine love)이기 때문이다 (앞의 내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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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천사들에게는 신적 진리가 빛이다. 그들이 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적 존재들은 영적 해의 빛으로 보고, 자연적 존재들은 자연적 해의 빛으로 본다. 신적 진리로 인해 천사들은 사고기능(understanding)이 있으며, 그들의 사고력(understanding)은 내적 시각(inner sight)이어서 이것이 그들의 외적 시각으로 흘러들고, 그 시각을 형성한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해로 계신 주님으로 인해 보이는 모든 것이 빛에 드러난다. 천국 빛의 근원이 이렇기 때문에, 그 빛은 사람이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는 정도에 따라, 즉 천사들의 지성과 지혜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천적 나라와 영적 나라의 빛이 다르고, 각 공동체마다 빛이 다른 것이다. 천적 나라에서 빛은 타오르는 불꽃 같다. 그곳 천사들이 해로 계신 주께로부터 빛을 받기 때문이다. 한편, 영적 나라의 빛은 광채 나는 흰색이다. 그곳 천사들이 달로 계신 주께로부터 빛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 공동체마다 빛이 다르고, 그 사회 내에서도 중심부에 있는 이들은 더 밝은 빛에, 가장자리에 있는 이들은 덜 밝은 빛에 거한다. 한마디로, 천사들은 그들이 신적 진리의 그릇인 정도만큼, 즉 주께로부터 지성과 지혜를 받는 정도만큼 빛이 있다. 이것이 왜 천국 천사들을 빛의 천사라 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HH.128, 15장, '천국의 빛과 열'(HH.126-140)

※  천사들에게는 신적 진리가 빛이다. 그들이 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적 존재들은 영적 해의 빛으로 보고, 자연적 존재들은 자연적 해의 빛으로 본다.  15천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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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천국에서 주님은 신적 진리이시고, 신적 진리는 그곳 빛이기 때문에, 말씀에서 주님과 주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진리를 ‘’이라 하였다. 다음 구절들이 그 예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9:5)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46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12:35, 36, 46)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19)

 

또 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9)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4:1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사42:6)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사49:6)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계21:24)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43:3)

 

이 구절들과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주님을 빛이라고 한 것은 그분께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 때문이다. 또 진리 자체도 빛이라고 한다. 천국의 빛이 해로 계신 주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변화하셨을 때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2)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막9:3)

 

주님의 옷이 이렇게 보이는 것은, 옷이 천국의 신적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말씀 안의 ‘’도 진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한 것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시104:2)

 

HH.129, 15장, '천국의 빛과 열'(HH.126-140)

※  천국에서 주님은 신적 진리이시고, 신적 진리는 그곳 빛이기 때문에, 말씀에서 주님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진리를 ‘빛’이라 하였다.  15천국의 빛과 열Light and Heat in Heaven 129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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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관련, 나머지 글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들을 따라 가시면 됩니다.

 

 

HH.130, 15장, '천국의 빛과 열'(HH.126-140)

※  천국에서 주님은 신적 진리이시고, 신적 진리는 그곳 빛이기 때문에, 말씀에서 주님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진리를 ‘빛’이라 하였다. 15천국의 빛과 열Light and Heat in Heaven 130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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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131, 15장, '천국의 빛과 열'(HH.126-140)

※  천국의 빛은 신적 진리이므로, 또한 신적 지혜와 지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천국의 빛 안으로 올려진다는 말은, 천국의 지혜와 지성에로 고양(高揚)되고, 밝히 깨닫게 된다는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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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132, 15장, '천국의 빛과 열'(HH.126-140)

※  신적 진리가 천국의 빛이기 때문에, 모든 진리는 천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또 천국 안에서나 밖에서나 어디서나 빛을 낸다. 그러나 천국 밖의 진리는 천국 안의 진리처럼 빛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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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오늘 본문인 20번 글입니다.

 

AC.20, 창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AC.20)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20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는 그가 선과 참이 뭔가 더 높은 것(something higher)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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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설명,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2024/6/14)

 

오늘 본문에선 이것이 바로 ‘리메인스’라고 하는데요, 이에 대해선 이미 AC.8번 글에서 다루었지요.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AC.8 설명,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에 관하여

AC.8 설명,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에 관하여 (2024/6/1) 그러니까 유형(有形),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진짜라 믿고, 그런 삶을 추구하던 사람이 어떤 일을 계기로 ‘아,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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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인스에 관한 보다 깊은 설명은 이후 다루겠습니다만 힌트를 하나 미리 드리자면,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 역시 그 속뜻은 바로 이 리메인스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십일조를 가리켜 ‘나의 것’이라 하신 것이지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말3:8)

 

 

AC.19,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AC.17-19)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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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설명,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1:2) (2024/6/13)

 

앞서 ‘혼돈’(混沌, 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 ‘공허’(空虛, 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라 하였고, 뒤이어 오늘 ‘흑암’(黑暗, thick darkness) 상태, 즉 어리석은 상태이지요,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그 결과 영적, 천적(天的, heavenly) 생명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되는 것, 바로 ‘깊음’이 나오는데요, 이와 관련, 다음 글, 곧 지옥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자기 사랑’에 대한 글을 인용합니다. 한번 둘을 나란히 놓고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세요.

 

※ 아랫글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부 ‘지옥’편, ‘지옥의 모든 사람은 악과 허위 안에 있다’에 나오는 글입니다. 김은경 역입니다.

 

557. 무엇이 자기 사랑인가는 천국의 사랑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천국의 사랑은 쓰임새를 위해 쓰임새를, 즉 선을 위해 선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 동기는 교회와 조국과 인류 사회와 이웃 시민을 위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쓰임새와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도 쓰임새와 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종으로 사랑할 뿐이다. 따라서 자기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교회와 나라와 인류 사회와 이웃 시민이 자기에게 봉사하기를 바라고, 자기가 그들에게 봉사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사랑 안에 있는 정도만큼 그는 스스로 천국의 사랑에서 멀어지므로, 그만큼 자신을 천국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What love of self is can be seen by comparing it with heavenly love. Heavenly love consists in loving uses for the sake of uses, or goods for the sake of goods, which are done by man on behalf of the church, his country, human society, and a fellow citizen; for this is loving God and loving the neighbor, since all uses and all goods are from God, and are the neighbor who is to be loved. But he who loves these for the sake of himself loves them merely as servants, because they are serviceable to him; consequently it is the will of one who is in self-love that the church, his country, human societies, and his fellow citizens, should serve him, and not he them, for he places himself above them and places them beneath himself. Therefore so far as anyone is in love of self he separates himself from heaven, because he separates himself from heavenly love.

 

558. 사람이 천국의 사랑 안에 있는 정도만큼 그는 주님의 인도를 받는다. 주님이 그 사랑 안에 계시고, 그 사랑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천국의 사랑을 이루는 것은 쓰임새와 선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을 교회와 나라와 인류 사회와 이웃 시민을 위해 행하면서 마음의 기쁨으로 감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사랑 안에 있는 정도만큼 자기에게 끌려간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에게 끌려가는 정도만큼 주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스스로를 신성에서 떼어놓고, 따라서 천국에서 떼어놓는 결과가 된다. 자기에게 끌려간다는 것은 자기 본성에 이끌리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악을 빼면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의 타고난 악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천국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선을 행하면서 자기를 염두에 두면, 그때마다 자기 본성, 즉 자기가 타고난 악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는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선을 바라보지 않고, 선에서 눈을 돌려 자기를 바라보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의 선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자기의 형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Furthermore, so far as anyone is in heavenly love, which consists in loving uses and goods and being moved by delight of heart when doing them for the sake of the church, country, human society, and one’s fellow citizens, he is so far led by the Lord, because that love is the love in which the Lord is, and which is from him. But so far as anyone is in the love of self, which consists in performing uses and goods for the sake of himself, so far he is led by himself; and so far as anyone is led by himself he is not led by the Lord. And from this it also ollows that so far as anyone loves himself he separates himself from the Divine, thus also from heaven. To be led by oneself is to be led by what is one’s own; and what is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for man’s inherited evil consists in loving self more than God, and the world more than heaven. Whenever man looks to himself in the good that he does he is let into what is his own, that is, into his inherited evils; for he then looks from good to himself and from himself to good, and therefore he presents an image of himself in his good, and not an image of the Divine.

 

뒤에 계속 이어지지만 이 정도로 줄이지요.

 

천국은 선과 진리의 나라이지만, 지옥은 그와 정반대, 곧 악과 거짓의 나라입니다. 다른 말로는, 천국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나라이지만, 지옥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나라입니다.

 

천국의 필수 요소인 선과 진리가 없는 상태, 곧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들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AC.18,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AC.17-19)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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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설명,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창1:2) (2024/6/12)

 

혼돈’(混沌, 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 ‘공허’(空虛, 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라는 오늘 본문을 생각할 때, 다음 글이 혹시 도움 될까 인용합니다.

 

7. 천사들이 이만큼 모여 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천사들이 천국을 구성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천국을 이루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와서 천사들 안으로 흘러 들어가 그들에게 수용되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이 신성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the good of love and the truth of faith)이기 때문에, 천사들도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이 선과 진리를 받는 정도만큼만 천사요, 천국입니다. The angels taken collectively are called heaven, for they constitute heaven; and yet that which makes heave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is the Divine that goes forth from the Lord and flows into the angels and is received by them. And as the Divine that goes forth from the Lord is the good of love and the truth of faith, the angels are angels and are heaven in the measure in which they receive good and truth from the Lord. (HH.7)

 

이 글이 속한 장의 제목이 ‘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인 것으로 보아, ‘혼돈’과 ‘공허’에 대한 저 설명은, 천국에 꼭 필요한 두 가지 요소가 없는 상태라는 말이며, 이는 곧 저대로 가만 놔두면 지옥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온 인류를 지옥 가게 하려고 지으시는 분이 아니시므로 필연적으로 인류를 구원코자 하시는 주님의 어떤 액션이 시작되는데요, 그것이 바로 19번 글에서 다룰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입니다.

 

모든 지혜와 지성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이런 ‘혼돈’과 ‘공허’ 상태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무지’가 뒤따르는데, 이를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 합니다. 이는 바로 다음 글인 18번 글에서 다룹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모든 사람의,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왜 우리가 힘써 주님에 대하여, 천국에 대하여 주변에 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AC.17-19)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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