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 (창6:1-2) (2024/11/27)
이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the sons of God, the daughters of man)이라는 표현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조금은(?) 알쏭달쏭한 표현입니다. 오늘은 이와 관련한 말씀을 먼저 좀 드리고, 이어 ‘백이십 년’(a hundred and twenty years) 및 ‘네피림’(the Nephilim)에 관하여 준비되는 대로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창세기 6장, 특히 1절로 8절은 홍수 전 사람들의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요약, 정리되고 있는 아담 교회, 곧 아담(man)으로부터 시작,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그리고 라멕(Lamech)을 끝으로 하는, 인류 첫 번째 교회인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홍수로 표현된 큰 시프트(shift)를 통해 마감되고, 이후 노아(Noah) 교회, 곧 인류 두 번째 교회인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가 일어납니다.
아, 참고로 늘 말씀드리지만, 창세기 아브람 등장 전까지는 등장하는 이름들이 어느 한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닌, 그 시절 존재했던, 그리고 주도적이었던 교회, 즉 교리, 신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참고하세요. 고대에는 이런 식의 스토리 텔링, 즉 의인화를 통한 드라마 기법 스피칭을 아주 즐거워했다고 하며, 이와 관련해선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태고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 지상에 머물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걸 잃어버린, 노아 이후 지금까지 우리 인류는 이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 무슨 말로도 설명이 안 되고, 또 설령 그 어떤 말로 설명을 한다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 그저 관련 글을 읽고, 여러 해 고민, 그리고 살짝 ‘아, 이런 건가?’ 체험한 걸 가지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마저도 그러나 감사하게도 지금도 주님을 사랑하여 천국을 향한 내면의 창을 활짝 여는 사람들한테는 즉시 이 퍼셉션을 허락하시는 주님이시라는, 참으로 감사한 글에 힘입어 주님의 붙드심 가운데 어린아이같이 구할 수 있었던 덕분이지요.
오늘 글은 퍼셉션 관련 글이 아니기 때문에 아주 살짝만(?) 말씀드리면, 천국은 퍼셉션으로 충만한 나라이며, 천국 모든 구성원은 주님과 이걸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 주님의 신성은 신적 사랑(Divine Love)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이며, 그래서 천국 모든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이 둘을 즉시 아는 능력, 곧 퍼셉션이 필요한 것이지요.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 퍼셉션을 많이 받는 천사일수록 그는 주님의 신성을 더욱 내적으로 이해, 받을 수 있으며, 그 가운데 특별히 주님의 신적 선에 더 특화된, 그러니까 주님의 신성을 이루는 두 가지인 선과 진리 중 선에 더 끌리는 천사들을 삼층천 천사, 곧 천적(celestial) 천사, 진리에 더 끌리는 천사를 이층천 천사, 곧 영적(spiritual) 천사라고 합니다.
주님의 신성을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처럼 무슨 공부를 통해서, 학습을 통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이 퍼셉션으로 그냥 압니다. 직감이라고 해야 하나요? 천사들이 뭘 궁금해하면, 그 즉시 그냥 어떤 답이 내적으로 들린답니다. 참 신기하지요? 그만큼 주님과 늘 막힘없이 커뮤니케이션하는 천사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저는 아주 사소한 것 하나도 주님 뜻 알기 위해 여러 번 이랬다저랬다 하는데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태고교회가 이런 퍼셉션을 지상에서도 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할렐루야! 지금까지 인류는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현 기독교회를 지나가고 있으며, 그 각각, 또 그 안에 수많은 교회가 부침을 거듭했는데요, 그 가운데 주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교회가 바로 태고교회의 첫 출발인 아담이라는 교회였습니다. 그 이유는, 지상에서도 천국을 온전히 그대로 수용할 수 있었던 교회였기 때문인데요, 그때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했으며, 주님도 자주 지상에 오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마치 천국에서처럼 말입니다!
아, 참고로 주님은 사람 따로, 천사 따로 지으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천사는 천사가 되기 이전에 지상에서 사람으로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주님 자신, 먼저 참 사람이신 주님은 심지어 천국 전체도 한 사람 모습으로 지으셨고, 천국 내 수많은 공동체들 역시 사람 모습으로 지으셨는데요, 이런 주님이 굳이 사람 아닌 제 삼의 무엇을 지으실 이유가 없으신 것입니다. 지옥의 악령들 역시 모두 생전에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은 아래 책, ‘천국과 지옥’에 자세히, 아주 자세히 나옵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음... 글이 길어지네요...
네, 어쨌든 이런 퍼셉션이, 그러나 세상 모든 교회가 그렇듯 태고교회 역시 뒤로 갈수록 그들의 선조와 달리 각 교회의, 이 퍼셉션 수용 능력이 약화되다가 거의 소멸 상태까지 이르렀는데, 이때가 바로 이 창세기 6장 1절로 8절 상태인 것입니다. 교회의 상태가 거의 늘 항상 이렇게 되는 이유는, 주님 사랑, 이웃 사랑보다는 자아 사랑, 세상 사랑에 더 기울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신앙의 하나 됨, 즉 신앙으로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사랑 따로, 신앙 따로, 즉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갈수록 지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인데요, 그러니까 가인처럼 말입니다. 아벨은 하나 됨을 추구하는 교회였지만, 가인은 분리를 추구하는 교회였고,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건 그때 교회의 상태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홍수 전 상태 또한 이랬는데요, 이때는 창세기 3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최악이었다고 합니다. 3장에서는 그래도 ‘리메인스’(remains)라는 것이 남아 있었지만, 이 6장 홍수 전 교회에는, 그러니까 교회 구성원들 하나 하나에게는 거의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리메인스’에 관해서는 요 다음 글인 ‘백이십 년’에서 충분히(?) 다룰 건데요, 그러니까 모든 교회, 모든 사람에게 주님이 은밀히 보관해 오고 계시는, 주님의 신성과 관련된 지식입니다. 우리 사람과 짐승을 구분하는 것도 이 리메인스의 유무입니다. 사람이, 그리고 교회가 아무리 악하여 황폐해져도 이 리메인스만 있으면 주님이 좀 어떻게 해보실 수가 있는데 이마저 없어지면 그때가 바로 개인으로서도 끝이요, 교회적으로도 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후 지옥 가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이 리메인스가 소멸된 상태였기 때문임을 유추할 수 있지요. 앞에 세 번의 교회 시대가 있었고, 지금 네 번째 교회 시대인 기독교회 시대라는 것은, 앞서 세 번의 종말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인류가 늘 주님과 연결되어 있게 하시려고, 매번 각 교회 시대의 종말 때마다 소위 ‘리메인스’의 역할을 하는 교회들을 준비하셔서 다음번 새 교회 시대를 일으키곤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남은 자’, ‘남은 그루터기’, ‘십일조’, ‘소돔과 고모라 의인 열 명’ 등이 모두 이와 관련된 것들이며, 6장 후반 ‘노아’ 역시 그 시대의 ‘리메인스’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 제목인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the sons of God, the daughters of man)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이미 어느 정도 배경 설명을 드렸기 때문에 간단히 정리만 해도 되겠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앙과 관련된 교리적인 것들(the doctrinal things of faith)을, 그리고 ‘사람의 딸들’은 거의 욕망이 되어버린 갈망(yearnings)을 말합니다.
태고인들은 그들이 지각하는, 즉 퍼셉션으로 아는 진리와 선(the truths and goods)을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이라 하였는데요, 창5: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인류 역사상, 그러니까 지상에 교회가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주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태고교회, 그중에서도 주님이 안식하실 수 있으셨던 ‘일곱째 날’이었으며,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이었던 아담 교회 이후, 셋, 에노스를 거쳐 후대로 갈수록 점점 주님 사랑보다는 자아 사랑을, 이웃 사랑보다는 세상 사랑으로 더 기울더니 급기야 마지막 교회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퍼셉션도, 리메인스도 거의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안에 주님의 것인 리메인스가 있어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과 짐승을 구분하는 이것이 없게 되면, 겉은 사람 모습이어도 결코 사람이라 할 수 없는데, 이때가 바로 이런 상태였으며, 또 그 시절엔 인류가 주님과 퍼셉션으로 연결되어 있어 주님의 신성을 호흡하던 시대였는데, 그 퍼셉션이 흐릿, 희미, 거의 희박해지는 바람에, 홍수 전 인류, 곧 교회가 주님의 신성에 대해, 그러니까 무엇이 주님의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있어 또한 사람입니다. 신성(神性, The Divine), 곧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은 사람의 의지 안으로는 직접 들어가시고, 사람의 이해 안으로는 의지를 거쳐 간접적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온전한 상태인 게 정말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태고교회의 끝에 가서는 퍼셉션도, 리메인스도 거의 소멸,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도 더 이상 의지가 아니요, 사람의 이해 역시 더 이상 이해가 아닌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홍수 전 사람들은 ‘이건 내 의지야’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 욕심, 욕망에 가까운 갈망이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주님 아닌 사람, 곧 자기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더럽다’(filthy)고 하는 것입니다.
매 교회 시대마다 갈수록 사람들의 상태, 곧 교회의 상태가 이렇게 되며, 이렇게 그 의지가 고장 나 버린다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그러니까 창6:1, 2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의 속뜻, 그 아르카나(arcana)는, 그 시절 존재하던 세상 모든 교회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멀어져 주님의 선과 진리 대신 더러운 것들을 갈망하는 욕망 상태가 되었고, 그 결과 주님 신앙에 관련된 모든 교리적인 것들, 곧 주님의 거룩한 것들을 자신들의 더러운 갈망과 결합(conjoin)시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뭘 의도하든 모두 악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 상태를 ‘네피림’이라 하며, ‘백이십 년’과 함께 곧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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