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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3.19 25. 눅4:38-44, '우리의 질병과 주님의 병 고치심' 2

 

우리의 질병과 주님의 병 고치심

 

 

38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40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42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눅4:38-44)

 

 

질병(diseases)이라는 것은 영적 삶과 관련된 해롭고 악한 것들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주님께서 질병을 치유하신다는 것은 교회와 인류에게 우글우글 들러붙어 그들을 영적 죽음으로 이끄는 다양한 종류의 악과 거짓들로부터 그들을 자유하게 하심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신적 기적들(Divine miracles), 주님의 미러클들은 교회와 천국의 상태들을 포함하고, 그들에 대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다른 기적들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기적들은 주로 병 고치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1:4-5) (AC.8364:6, 변일국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위 8364번 글 6번 항에 대한 Clowes 영역 및 Potts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s diseases represented the hurtful and evil things of the spiritual life, therefore by the diseases which the Lord healed is signified liberation from various kinds of evil and falsity which infested the church and the human race, and which would have led to spiritual death. For Divine miracles are distinguished from other miracles by the fact that they involve and have regard to states of the church and of the heavenly kingdom. Therefore the Lord’s miracles consisted chiefly in the healing of diseases. This is meant by the Lord’s words to the disciples sent by John:

 

Tell John the things which ye hear and see: the blind see, and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leansed, and the deaf hear, the dead rise again, and the poor hear the gospel (Matt. 11:4, 5).

 

이는 출애굽기 15장 26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에 관한 주석 중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지난 시간에는 주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특별한 점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는데 주님께서 그 병을 낫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38, 39절입니다.

 

38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주님께서 회당에서 나오셔서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주님께서 회당에서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이동하신 것이지만, 속뜻으로는 다른 의미인데요, 우리의 내면으로 임재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이성 가운데 계시다가 우리의 의지 안으로 이동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회당’은 신앙인의 이성을 뜻하며, ‘’은 의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니까 ‘속뜻’이란 천사들이 읽는 말씀을 말합니다. 천사들은 영적 존재라 사람의 육이 아닌 영을 보는데요, 그런 것처럼 말씀도 지상 언어로 된 말씀이 아닌 거기에 담긴 영을 보는 겁니다. 우리가 천사들처럼 말씀을 속뜻으로 볼 줄 아는 게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 엉뚱한 해석으로 인생을 우왕좌왕 낭비하지 않고, 그대로 천국에서도 통하는 말씀 이해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게 그 말씀의 속뜻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 지점에서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중요해지는 겁니다. 주님이 이 일을 위해 그를 불러 말씀의 속뜻과 그 원리를 오픈하셨거든요. 그가 여러 해에 걸쳐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라틴어로 풀어 기록했는데요, 그 글의 수만 10,837개나 되며,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의 허락으로만,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이 계시하시는 걸 곁에서 받아적기만 한 것입니다. 그럼, 성경의 나머지 말씀들은 왜 안 했냐면, 이 두 책에 나오는 원리들과 그 인용 구절들로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의 많은 저작 중, 특별히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그리고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이 두 권은 꼭 좀 읽으시라 권하는 것입니다. 전자를 통해서는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후자를 통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고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사들의 시각과 마음을 가지고 남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 아래 링크로 가시면 구하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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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은 본래 교회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의 내면에서 주님께서 교리를 가르치시는 곳, 즉 인간의 이성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누구입니까? 말씀에서 ‘어머니’나 ‘아내’는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내면에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디에 세워집니까? 사람의 의지 속에 세워집니다. 말씀 지식이 많다 해서 그 사람 내면에 교회가 있는 건 아닙니다. 말씀을 받아들여 그것을 의도하고, 삶으로 옮길 때라야 비로소 그 사람 내면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교회를 뜻하는 ‘시몬의 장모’와 ‘시몬의 집’은 그런 뜻입니다. 의지 가운데 교회가 세워진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지금 병을 앓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경우에 병이 들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는데, 보통은 신앙인들이 악의 유혹에 넘어가 헤어 나오지 못할 때이거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고, 그 거짓을 믿을 때 교회는 중병에 걸립니다. 그러니까 시몬의 장모가 지금 열병을 앓고 있는 상태는, 신앙인들이 어떤 종류의 악이나 거짓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주님 앞에 그를 위하여 구합니다. 말씀에서 ‘사람’은 보통 진리에 대한 애정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주님께 구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진리이신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영적 질병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영적 질병을 고치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열병을 꾸짖어 주십니다. ‘꾸짖으신대’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 악들과 싸우시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병을 꾸짖으시자 악한 영이 떠나고, 시몬의 장모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병이 나은 시몬의 장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께 수종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주님께 ‘수종드니라’는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수종을 드는 것’은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병이 낫기 전에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진리에 순종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악과 거짓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병을 고쳐 주시자 악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그렇게 해서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장모가 주님께 수종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교회가 진리이신 주님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주님께 왔습니다. 40절입니다.

 

40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해 질 무렵은 어떤 때입니까? 신앙인들의 마음에 사랑이 없고, 그러므로 지혜가 없는 때입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는 항상 일정하지 않습니다. 아침일 때가 있고요, 한낮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일 때가 있고, 밤일 때도 있습니다. 아침이나 낮처럼 햇빛이 밝을 때는 마음에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넘칠 때입니다. 그러나 저녁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고, 교회에 대한 애정도 없으며, 그러므로 지혜가 없는 때입니다.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 질 무렵은 시험의 기간이며, 영적 질병에 걸리기 쉬운 때입니다. 본문에서 해 질 무렵에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왔다 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온갖 병자를 데리고 왔다는 것은 신앙인들이 안고 있는 영적인 문제가 그만큼 다양하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직면하는 영적인 문제들이 다 다릅니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애정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애정의 다양성에 대해 성(聖) 문서에서는 수만, 또는 수만 곱하기 수만 개만큼이나 많다 합니다.

 

※ 위 ‘(聖) 문서’라는 용어는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 이후부터 기록한, 그러니까 주님이 그의 손을 빌려 기록하신 저작들(Writings)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가 천국에서 듣고 본 모든 경험과 남기는 이 모든 기록은 오직 주님의 허락으로 하는 것이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은 오직 주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을 자기는 성경 한 권만 가지고 받아 적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프린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그가 남긴 기록들에 대하여 ‘’(聖, Divine)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안 되죠. 감히 말입니다! 이 형용은 오직 주님 한 분께만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얼굴의 생김새가 모두 다른 것처럼, 각자의 애정이 모두 다르고, 그러므로 직면하고 있는 영적 문제가 다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온 것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영적 질병을 주님 앞에 진심으로 고백하고, 치유 받기를 원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 생각하는 한,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려 해도 개입할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온전히 비우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환부에 당신의 손을 얹으시고, 병을 고쳐 주십니다. 환부에 손을 얹으실 때, 주님과 우리 사이 소통이 일어납니다. 소통이란 어떤 것입니까? 소통이란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마치 몸 안 혈액이 각 장기와 조직, 세포 속을 원활하게 흐를 때, 병에 안 걸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주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병자들의 내면에 있던 귀신들이 나가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소리를 질렀고, 그러자 주님은 그들을 꾸짖으시며, 그들의 말함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악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 고백은 순수한 고백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혐오이며 적대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때문인지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리스도란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셨습니다. 심지어 대제사장 가야바가 네가 그리스도인지 말하라 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직접적 대답을 피하시고, ‘네가 말하였느니라’ 하실 정도였습니다. 아마 악한 사람들에게 진리가 들어가면 진리를 더럽히거나 파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폭행, 십자가에 매다는 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악인들이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 위 ‘병자들의 내면에 있던 귀신들’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다음 글들을 참고하세요.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지옥과 교통하는 영들 역시 사람에게 와있는 이유는, 사람이 모든 악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며, 따라서 사람의 생명이 전적으로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동질의 영이 함께 있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도 없고, 사실상 그의 악에서 떠날 수도, 개선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악한 영들에 의해서 자아의 생명 안에 머물고, 동시에 선한 영들에 의해서 거기서 물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양쪽에 의해 균형이 유지되고, 균형이 유지되기 때문에 자유가 있다. 따라서 악에서 떠날 수 있고, 선 쪽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선이 사람 안에 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자유가 없으면 전혀 불가능하다. 그리고 사람은 지옥측 영들이 한쪽에서 작용하고, 천국측 영들이 다른 한쪽에서 작용하는 그 중간에 있을 때만 자유로울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생명이 그 타고난 것에 들어 있고, 따라서 자기 본성에 들어 있는 한, 만일 악 안에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면, 그에게 생명이 있을 수 없다. 또 사람에게 자유가 없으면 생명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강제로 선해질 수 없다. 강제로 하는 것은 오래 남지 않는다. 사람이 자유 안에서 받아들이는 선은 그의 의지 안에 심어져 그 자신의 것처럼 된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지옥과 교통하고, 또 천국과 교통하는 것이다. (HH.293)

 

이 글들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3장, ‘천국과 인류의 결합’에 나오는 글들로서, 모든 사람에겐 최소한 천국 측 선한 영 둘, 지옥 측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글들을 통해 ‘사람’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더 이상 무슨 귀신이니, 악령이니, ‘누구는 귀신 들렸다’ 하는 것들에 관해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다음 42, 43절입니다.

 

42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조금 전에 ‘해 질 무렵’이 사랑이 없는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날이 밝으매’는 무슨 뜻입니까? 날이 밝았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빛이 흘러들어오는 영적 상태이며, 그래서 사랑과 지혜가 풍성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한적한 곳’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요, 영어 성경 번역은 ‘황무지’ 또는 ‘사막’입니다. 황무지는 진리가 없고, 그러므로 선한 삶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날이 밝은 것과 황무지의 상태는 정반대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날이 밝았을 때 황무지로 가셨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은 우리 내면의 황무지를 진리로 개간하시는데 한 번에 하지 않으시고,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미 옥토로 변한 곳도 있을 것이고, 여전히 황무지와 같은 곳도 있을 것입니다. 저 스스로도 그런 걸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비교적 합리적인데, 다른 어떤 면에서는 전혀 합리적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수도 하고 후회도 합니다.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그 부분에 있어서는 진리가 없다는 것이고, 황무지와 같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날이 밝았을 때 주님께서 황무지에 가신 것은, 주님이 사람의 내면 어떤 부분을 치유하신 후에, 이번에는 황무지와 같은 곳으로 이동하셔서 그곳을 다시 변화시키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을 찾던 무리가 주님을 발견하고는 떠나지 마시라 붙잡습니다. 주님을 찾는 무리처럼 우리도 주님의 부재(不在)를 느낄 때, 주님을 찾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의 의도와 생각을 살피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되 스스로 하듯 자신의 의지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라고 무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어떤 문제에 대해 주님의 지혜를 구할 때마다 교리적인 답변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동네’는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른 동네’는 삶의 어떤 문제에 대해 특별한 교리적 해법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삶의 모든 상황에서 다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우리는 애정을 가지고 주님께 특별한 진리를 구합니다. 그것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물을 향해 뿌리를 뻗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원천이신 주님께 닿으려는 수많은 뿌리는 주님이 복음을 전하실 다른 동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오신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진리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그냥 진리가 아니고, 선을 동반한 진리입니다.

 

끝으로 44절에서는 주께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라고 합니다. ‘갈릴리’는 이방을 뜻합니다. 그러면 우리 내면에 있는 이방 지역은 어떤 곳입니까? 주님으로부터 가장 먼 곳이며, 가장 나중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곳, 그곳이 이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의 갈릴리는 겉 사람입니다. 따라서 주께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는 것’은 앞에서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즉 주님께서 겉 사람 안의 여러 애정과 소통하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신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시몬의 집을 방문, 열병을 앓고 있는 그의 장모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그런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 역시 거듭나는 과정에서 수많은 병치레를 합니다. 때로는 죽을 것 같은 열병을 앓기도 합니다. 그때 주님은 병의 치유를 위해서 우리의 의지 속으로 오십니다. 영적 질병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고,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주님께 소상하게 고(告)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자신의 문제를 소상하게 고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그냥 ‘주님, 도와주세요’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자세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님께 구체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자기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 질병을 치유 받으려고 주님께 구체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시몬의 집에 있던 사람들이 장모의 병을 낫게 해달라 주님께 간청하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위에 손을 얹으시니 질병의 원인인 악한 영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신앙인의 질병은 각자의 애정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고,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그 문제를 그동안 어떻게 다루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주님께 말씀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할 때 주님께서 그 질병들 위에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렘17:14)

 

아멘

 

원본

2017-09-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5. 2023-03-26(D1)-주일예배(2442, 눅4,38-44), '우리의 질병과 주님의 병 고치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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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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