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

 

1486.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Verse 17. And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and his house, because of the word of Sarai, Abram’s wife.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기억-지식들이 파괴되었음을, ‘그 집에’, 그가 모았던,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천적인 것에 인접해 있어야 했던 진리 때문에를 각각 의미합니다.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signifies that the memory-knowledges were destroyed; “and his house” signifies which he had collected; “because of the word of Sarai, Abram’s wife” signifies because of the truth that was to be adjoined to the celestial.

 

※ 주님의 허락으로 영안이 열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영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우리처럼 그 사람의 몸을 보고 있지만 말입니다. 또한 이처럼 우리 안의 천사들은 말씀을 속뜻으로 읽습니다. 비록 우리 눈을 통해 겉 글자로, 사람의 언어로 읽지만 말입니다.

 

※ 말씀의 아케이나에 접근 혹은 도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최대한 쉽게 풀어쓰려고 쓴 것이겠지만...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이 아파트만한 돌더미, 흙더미를 죽을힘을 다해 뒤져 겨우 엄지손톱만 한 금광석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발견이라도 하면, 아니 반드시 발견하게 하시는데, 그때 그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 이제부터라도 라틴어를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입니다. 포츠(Potts, 1888-1902)는 왜 클라우즈(Clowes, 1774-1806)의 초역을 재역했을까요? 그리고 NCE(2010)를 낸 쿠퍼(Cooper)는 왜 바로 라틴 원전(1749-1756)으로 갔을까요? 책 ‘천국과 지옥’을 번역한 김은경은 수많은 영역본이 있었음에도 왜 바로 라틴 원전으로 한(韓)역했을까요? 번역은 가급적 원전을 가지고 직접 해야지 역본을 가지고 하면 아주 엉뚱한 게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 전달 게임’처럼 말이지요. 한글 성경도 개역의 경우, 영역, 한(漢)역을 가지고 한 결과, 많은 오역이 있어 이번 개역개정의 경우는 직접 히브리어, 헬라어 원전으로 번역한 것처럼 말입니다.

 

※ 위 괄호 안 연도들은 스베덴보리의 저술들, 특히 아케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주석) 저술 및 번역에 소요된 기간을 뜻합니다.

 

 

1487.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And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이것이 기억-지식들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함이라는 것은 ‘바로’의 의미가 일반적으로는 기억-지식이며, 결과적으로는 그런 지식에 속한 기억-지식이라는 것을 보면, 그리고 ‘큰 재앙을 내리심’의 의미가 파괴됨이라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memory-knowledges were destroy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haraoh” as being memory-knowledge in general, consequently the memory-knowledges that belong to such knowledge;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being “smitten with plagues” as being to be destroyed.

 

기억-지식들과 관련하여 이 경우는 이렇습니다. As regards memory-knowledges the case is this.

 

어린 시절, 이 기억-지식들은 그저 단순히 알려는 목적 외에 무슨 다른 거 없이 습득되지만, 주님의 경우는 진리에 대한 기쁨과 애정으로 습득되었습니다. In childhood they are acquired for no other end than that of knowing; with the Lord, they were acquired from the delights and affection of truth.

 

어린 시절 습득한 기억-지식들은 그 수가 엄청나지만, 나중에 주님에 의해 쓰임 받기 위해 질서정연하게 배치됩니다. 먼저는, 생각하는 능력이 생기게 하시려고, 두 번째는, 생각의 재료가 될 수 있게 하시려고, 끝으로, 이게 그 원하시는 건데요, 다시 말해서, 삶 자체가 쓰임새로 구성되며, 쓰임새의 삶이 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The memory-knowledges acquired in childhood are very numerous, but are disposed by the Lord into order so as to serve for use; first, to give the ability to think; then that they may be of use by means of thought; and lastly that this may take effect, that is to say that the very life may consist in use, and be a life of uses.

 

※ 쓰임새의 삶을 위해 지식을 습득하는 좋은 예는, 예를 들면,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기 위해 법을 공부하여 판검사가 되고자 하는 경우, 또는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고자 하는 경우 등이 있겠습니다.

 

이것이 어린 시절 습득한 기억-지식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게 없으면, 겉 사람은 결코 속 사람과 상호결합할 수 없으며, 동시에 쓰임 받을 수도 없습니다. These are the things performed by the memory-knowledges that are acquired in childhood; and without them the external man can never be conjoined with the internal, and at the same time become use.

 

사람이 쓰임새의 사람이 될 때, 즉 그가 모든 걸 그 쓰임새에 따라 생각하고, 그 쓰임새대로 행할 때, (만일 대세를 따르지 않고, 대신 그런 쓰임새의 실천을 통해 습득된 성품에서 나오는 조용함 가운데 있다면, 그 처음 용도, 곧 사람으로 하여금 합리와 이성의 사람이 되게 하려던) 기억-지식들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어 파괴됩니다. When man becomes use, that is, when he thinks all things from the end of use, and does all things for the end of use—if not by manifest reflection, still by tacit reflection from a nature acquired by so doing—then the memory-knowledges which have served the first use—that the man may become rational—being no longer of service, are destroyed; and so on.

 

※ ‘대세를 따른다’는 것은 누구나 다 지식의 습득과 추구를 자기 사랑을 위해 한다는 것이며, ‘합리와 이성의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은 그 지식이 머리에만 저장되어 있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 ‘기억-지식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쓰임새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회유와 저급한 시도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 주님으로 말미암은 공동선 앞에서는 세속과 세상의 얄팍한 잔머리는 설 데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여기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들입니다. These are the things here meant by the words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2021-10-15(D6)-매일예배(2212, AC.1486-1487, 창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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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J36PdxDo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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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84a. 16절,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Verse 16. And he did well unto Abram for her sake; and he had flock and herd, and he-asses and menservants, and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camels.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주님의 어린 시절, 기억-지식이 증가하였음을,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일반적으로 기억-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각각 의미합니다. He did well unto Abram for her sake” signifies that memory-knowledges were multiplied with the Lord; “and he had flock and herd, and he-asses and menservants, and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camels” signifies all the things in general that belong to memory-knowledges.

 

 

1485.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And he did well unto Abram for her sake.

 

이 말씀이 주님의 어린 시절, 기억-지식이 증가하였음이라는 것은, ‘후대하다’의 의미가 풍성해짐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memory-knowledges were multiplied with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doing well unto” as being to enrich.

 

이것은 어린 시절 주님의 모습인 아브람을 후대한 ‘바로’, 곧 기억-지식에 관해, 그리고 이것은 또 사래, 즉 주님이 원하셨던 지적 진리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This is said of the memory-knowledge that is signified by “Pharaoh,” that it did well unto Abram, that is to the Lord when a child; and this for her sake, that is, for the sake of the intellectual truth that he desired.

 

이런 풍성함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진리에 대한 욕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It was this desire for truth from which the enriching came.

 

 

1486.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And he had flock and herd, and he-asses and menservants, and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camels.

 

이 표현이 일반적으로 기억-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의미함은, 이것들이 말씀에 나올 때의 의미들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That these words signify all things in general that belong to memory knowledge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ll these things in the Word.

 

하지만 이 모든 걸 하나하나 자세히, 즉, ‘양과 소’, ‘수나귀와 남종’, ‘여종과 암나귀’ 및 ‘낙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드리는 건 너무 지루할 것 같습니다. But it would be too tedious to show what is signified by each in particular, as what by the “flock and herd,” the “he-asses and menservants,” the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the “camels.

 

각각은 그 나름의 고유한 의미들이 있습니다. Each has its own peculiar signification.

 

일반적으로 이들은 지식에 관한 기억-지식 및 기억-지식에 속한 모든 걸 의미합니다. In general they signify all things that belong to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and to memory-knowledges.

 

그 각각을 좀 보면, 기억-지식은 ‘수나귀와 남종’으로, 그 즐거움은 ‘여종과 암나귀’로, ‘낙타’는 일반적으로 섬기는 일을, ‘양과 소’는 소유물을 각각 의미하는 등, 말씀 전반에 걸쳐 그렇습니다. Regarded in themselves, memory-knowledges are “he-asses and menservants”; their pleasures are “maid-servants and she-asses”; “camels” are general things of service; “flock and herd” are possessions; and so in the Word throughout.

 

겉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건 그게 무엇이든 오직 섬김에 관한, 즉, 속 사람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All things whatever that are in the external man, are nothing but things of service, that is, they are for the service of the internal man.

 

그래서 그것은 모두 기억-지식에 관한 것이며, 기억-지식은 오직 겉 사람에게 속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 기억-지식은 몸의 오감을 통해 땅과 세상에서 애써 모은 것들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모은 이유는, 이 기억-지식이 속 사람이나 합리적인 사람을 섬길 수 있도록, 그리고 다시 영적인 사람을, 그리고 다시 천적인 사람, 최종적으로는 주님을 섬기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So it is with all memory-knowledges, which belong solely to the external man; for they are procured from earthly and worldly things by means of sensuous impressions, in order that they may serve the interior or rational man, and this the spiritual man, this the celestial, and this the Lord.

 

그렇게 이 지식은 그 질서대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더 외적인 것일수록 더 내적인 것에 종속된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일반적으로나 구체적으로나 모든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 질서에 종속되어 결국 주님을 향합니다. Thus are they subordinated one to another, as are the more external things to the more internal, in their order; and thus all things whatever,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in their order, subordinated to the Lord.

 

그래서 기억-지식은 가장 낮고,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이며, 그 순서에 따라 거기는 그거보다는 더 내적인 것의 종점입니다. 기억-지식의 위치가 가장 낮고, 가장 바깥이기 때문에, 기억-지식은 봉사와 섬김에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지 싶습니다. Memory-knowledges are therefore the lowest and outermost things, in which are terminated in their order the things that are more interior; and because they are the lowest and outermost things, they must be pre-eminently things of service.

 

누구나 다 이 기억-지식의 쓰임새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거나 자문을 해보면 이 기억-지식이 왜 섬기는 일에 사용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지식의 쓰임새를 깨닫게 되면, 그 쓰임새의 퀄러티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veryone may know for what such knowledges may be serviceable, if he reflects or inquires in himself for what use they are; and when he is thus reflecting upon their use, he can also apprehend the quality of the use.

 

모든 기억-지식은 나름 어떤 쓰임새를 위해 존재해야 하며, 바로 이것이 그것의 존재 이유입니다. Every memory-knowledge must be for the sake of some use, and this is its servic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6절과 그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속뜻)

어린 시절 주님은 천적 진리를 얻기 위해 먼저 자연적, 지적 진리를 구하셨고, 그래서 관련된 모든 것, 곧 기억-지식과 그 즐거움, 그리고 그 지식의 쓰임새 등으로 풍성해지셨다.

 

2021-10-14(D5)-매일예배(2211, AC.1484a-1486, 창12,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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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vo_3UekE6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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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81. 15절,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Verse 15. And the princes of Pharaoh saw her, and praised her to Pharaoh; and the woman was taken to Pharaoh’s house.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의 고관들’로 표현된 중심계율들을,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들이 즐거워하였음을,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그들이 마음의 보다 낮은 부분에 매혹되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The princes of Pharaoh saw her” signifies the primary precepts, which are “the princes of Pharaoh”; “and they praised her to Pharaoh” signifies that they were pleasing; “and the woman was taken to Pharaoh’s house” signifies that they captivated the lower mind [animus].

 

 

1482.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The princes of Pharaoh saw her.

 

이 말씀이 ‘바로의 고관들’로 표현된 중심계율들을 의미함은 ‘고관들’과 ‘바로’의 의미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primary precepts, which are “the princes of Pharao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rinces,” and of “Pharaoh.

 

말씀의 두 가지 측면, 곧 역사서술 및 예언적인 면에서, ‘고관들’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의미하고, ‘바로’는 ‘애굽’과 그 의미하는 바가 같은데, 여기서는 ‘애굽’ 혹은 ‘바로’가 가장 좋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어린 시절, 처음 습득한 지식 중 기억-지식에 대한 서술이기 때문입니다. In both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princes” signify the things which are primary; and “Pharaoh” signifies the same as “Egypt”; and here “Egypt,” or “Pharaoh,” is used in the best sense, because predicated of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hich the Lord first acquired in childhood.

 

이들이 말씀에서는 중심계율들의 의미인 것은, 이런 것들이 그 속뜻 상으로 가지는 상징 때문입니다. That they were primary precepts from the Wor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se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일반적으로, 말씀에서 ‘바로’나 ‘애굽’이나 같은 걸 상징한다는 건 많은 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요, 마치 다른 나라 군주들이 그 나라의 이름으로 불리듯 군주들 또한 그 나라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고관들’은 이사야에서처럼 제일 중요한 걸 상징합니다. That, speaking generally, by “Pharaoh” in the Word is signified the same as by “Egypt” may be confirmed from many passages; as also that by the kings of other kingdoms, who are named, the same is signified as by the names of the kingdoms; but by “princes” are signified their primary things, as in Isaiah:

 

11소안의 방백은 어리석었고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의 책략은 우둔하여졌으니 너희가 어떻게 바로에게 이르기를 나는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이라 나는 옛 왕들의 후예라 할 수 있으랴 13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고 놉의 방백들은 미혹되었도다 그들은 애굽 종족들의 모퉁잇돌이거늘 애굽을 그릇 가게 하였도다 (사19:11, 13) The princes of Zoan are foolish, the wise counselors of Pharaoh; how say ye unto Pharaoh, I am the son of the wise, the son of ancient kings? The princes of Zoan are become fools, the princes of Noph are deceived. (Isa. 19:11, 13)

 

여기 ‘소안의 방백’과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는 가장 중요한 기억-지식을 가리키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애굽에서는 지혜가 가장 번창하였으므로, 지혜를 가리켜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 ‘옛 왕들의 후예’라 부르고 있습니다. Here “the princes of Zoan,” and “the wise counselors of Pharaoh,” denote the primary memory-knowledges; and as wisdom first flourished in Egypt, as before said, it is called “the son of the wise,” and “the son of ancient kings.

 

이렇게 말씀에 자주 나오는 ‘고관(高官)’(프린세스, 백관 (百官), 방백(方伯), 대신(大臣) 등)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So “princes” frequently denote in the Word primary things.

 

 

1483.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And they praised her to Pharaoh.

 

이 말씀은 그들이 기뻐하였다는 건데요, 굳이 무슨 설명이 필요 없지 싶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were pleasing may be seen without explication.

 

 

1484.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And the woman was taken to Pharaoh’s house.

 

이 말씀이 그들은 마음의 더 낮은 부분에 매혹되었다라는 의미임은 ‘여인’의 의미와, ‘’(house)의 의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captivated the lower min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oman,”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house.

 

여인’은 진리, 여기서는 기억-지식들 안에 있었던, 어린 시절 주님이 사로잡히실 정도로 즐거워했던 진리를 의미합니다. A “woman” signifies truth, here the truth that was in the memory-knowledges with the delights of which the Lord was captivated in childhood.

 

진리에 관한 즐거움은 ‘누이’로 상징된 지적 진리(the intellectual truth)로부터 오는 것들입니다. The delights of truth are those which come from the intellectual truth which is signified by a “sister.

 

’은 앞서 710번 글에서 보여드린 대로, 사람, 특히 사람의 의지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마음의 더 낮은 부분, 곧, 앎과 배움에 관한 애정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A “house” signifies the things that are in man, especially those which are of his will, as before shown (n. 710); here therefore those which are of the lower mind, or of the affection of knowing and learning.

 

 

710. 창7:1,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Enter thou and all thy house into the ark.

 

이 말씀이 의지에 속한 것들을 상징하고 있음이 그래서 분명한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things that are of the will is therefore evident.

 

이해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는 전장에서는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데요, 즉, 18절 말씀입니다.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창6:18) In the preceding chapter, where th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re meant, it is expressed differently, namely: “Thou shalt come into the ark, thou and thy sons, and thy wife, and thy sons’ wives with thee.” (verse 18)

 

’이 의지와 의지에 속한 것을 상징함은 말씀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예레미야입니다. That a “house” signifies the will and what is of the will is evident in various places in the Word; as in Jeremiah: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렘6:12) Their houses shall be turned over unto others, their fields and their wives together. (Jer. 6:12)

 

여기 ‘’과 ‘’, 그리고 ‘아내’는 의지에 속한 것들에 관련됩니다. Here “houses” and also “fields” and “wives” relate to things which are of the will.

 

다시 Again: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 (렘29:5, 28) Build ye houses and dwell in them; and plant gardens and eat the fruit of them. (Jer. 29:5, 28)

 

여기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기’는 의지에 관련되고, ‘밭을 일구기’는 이해와 관련됩니다. 다른 구절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Here “building houses and dwelling in them” relates to the will; “planting gardens” to the understanding: and it is the same in other passages.

 

그리고 ‘여호와의 집’은 아주 자주 사랑이 중심원리인 교회를 상징하는 곳으로 언급되는데, 특별히 ‘유다의 집’은 천적 교회를, ‘이스라엘의 집’은 영적 교회를 상징합니다. And the “house of Jehovah” is frequently mentioned as signifying the church wherein love is the principal; the “house of Judah” as signifying the celestial church; and the “house of Israel” as signifying the spiritual church.

 

’이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에, 교회에 속한 사람의 마음 또한 ‘’으로 상징됩니다. (의지와 이해에 속한, 혹은 체어리티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As “house” signifies the church, the mind of the man of the church (wherein are the things of the will and of the understanding, or of charity and faith) is also signified by “hous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5절과 그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세속의 중심계율들도 주님의 진리를 보고 즐거워하며 거기에 매료되어 매혹되었다

 

2021-10-12(D3)-매일예배(2210, AC.1481-1484, 창12,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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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nTdjDDJJc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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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

 

1474. 13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Verse 13. Say, I pray, thou art my sister, that it may be well with me for thy sake, and that my soul may live because of thee.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지적(知的, intellectual) 진리, 이해하기 쉬운(intuitive) 진리를 말하며, 그게 ‘누이’(sister)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그럴 경우, 천적인 것(天的, the celestial)이 해를 입지 않을 것임을,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그럴 경우, 천적인 것이 보존될 것임을 각각 의미합니다. Say, I pray, thou art my sister” signifies intellectual truth which is a “sister”; “that it may be well with me for thy sake” signifies that so the celestial could have no violence done to it; “and that my soul may live because of thee” signifies that so the celestial could be saved.

 

 

1475.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Say, I pray, thou art my sister.

 

이 표현이 지적 진리, 이해하기 쉬운 진리를 상징하며, ‘누이’가 바로 그런 뜻이라는 것은, ‘누이’의 상징, 곧, 천적 진리가 ‘아내’(wife)일 때, ‘누이’는 지적 진리라는, 이후 이 상징에 대한 계속될 내용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intellectual truth, which is a “sist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sister” as being intellectual truth when celestial truth is a “wife,” concerning which hereafter.

 

상황은 이렇습니다. 즉, 기억-지식, 곧, 세속적 지식의 본성은 천적인 것들 속으로 직접 들어가 그저 조사하는 게 전부라는 것, 그러나 이것은 질서에 반(反)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건 천적인 것들에 대한 일종의 폭력, 해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se things stand thus: it is the nature of memory-knowledge to desire nothing more than to introduce itself into celestial things and explore them; but this is contrary to order, for it thus does violence to celestial things.

 

천적인 것, 곧, 천국과 주님에게 속한 것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왕이나 대통령 앞에서는 극진한 예를 갖추듯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곧, 주님 자신이므로 최상의 예를 갖춰야 합니다. 영적 질서, 순서를 우습게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을, 천적인 것을 함부로 여기는 것이며,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질서란 이런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통해 이성적인 것(理性, the rational) [인 스피엔티피쿰 in scientificum]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기억-지식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해서 하늘에 속한 것이 세속적인 것 속에 깃드는 것이며, 이런 순서, 이런 질서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Order itself is that the celestial by means of the spiritual introduces itself into the rational, and thus into the memory-knowledge [in scientificum], and adapts this to itself; and unless this order is observed, there cannot possibly be any wisdom.

 

또 지금 보고 있는 이 본문에는 주께서 어떻게 모든 질서에 따라, 곧, 철저히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으셨는가, 그 다음, 어떻게 주님의 겉 사람은 속 사람과 결합하셨나, 즉, 어떻게 신성(Divine), 곧 속 사람이 되셨나,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신성, 인성 양쪽 다 그 퀄러티에 있어 여호와가 되셨나 하는 아케이나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지식을 통해 일어났으며, 이렇게 지식이라는 것은 일종의 도구인 것입니다. In the passage before us are also contained the arcana as to how the Lord was instructed by his Father according to all order; and thus how his external man was conjoined with his internal, that is, how his external man was made Divine, like the internal; thus how he became Jehovah as to each essence; which was done by means of knowledges, which are the means.

 

도구로서의 지식이 없으면, 겉 사람은 심지어 사람도 될 수 없습니다. Without knowledges as means, the external man cannot even become man.

 

지식은 가장 바깥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이 그릇이 있어야 무슨 출발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476.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That it may be well with me for thy sake.

 

이 표현이, 그러면 천적인 것이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건, 위에서 말씀드린 걸로 분명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질서, 순서라는 건, 먼저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안으로, 영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 안으로, 그리고 끝으로, 이성적인 것은 기억-지식, 곧 실제 지식, 일상 지식의 내용 안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so the celestial could have no violence done to i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above; for as has been repeatedly said, the order is that the celestial flows into the spiritual, the spiritual into the rational, and this into the faculty of memory-knowledge.

 

이런 순서, 질서라야 영적인 것은 천적인 것에, 이성적인 것은 영적인 것에, 그리고 기억-지식은 이성적인 것에 각각 그 목적에 따라 수용됩니다. When there is this order, then the spiritual is adapted by the celestial, the rational by the spiritual, and the memory-knowledge by the rational.

 

그래서 보통 기억-지식, 즉, 사실에 기반을 둔 지식은 가장 바깥 용기가 됩니다. 같은 말이지만, 기억-지식은 개별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이성적인 것, 곧, 생각(ideas)을 담는 가장 바깥 용기가 되며, 그렇게 순서대로 이성적인 생각은 영적인 생각을, 영적인 생각은 천적인 생각을 담는 용기, 그릇이 됩니다. The memory-knowledge in general then becomes the ultimate vessel; or what is the same, memory-knowledges, specifically and particularly, become the ultimate vessels which correspond to rational things, rational things to spiritual things, and spiritual things to celestial things.

 

이런 순서일 때는, 천적인 것이 해를 입을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천적인 것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When this is the order, the celestial cannot suffer any violence; otherwise, it does so suffer.

 

어린 시절, 주님의 훈육, 교육이 여기 본 절에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속뜻으로 본 절은 주님의 성장 과정이 어땠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As in the internal sense the Lord’s instruction is here treated of, the method of his progress therein is here described.

 

 

1477.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That my soul may live because of thee.

 

이 표현이 그렇게 해서 천적인 것이 안전할 것이라는 것은, ‘목숨’(soul)의 상징이 천적인 어떤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적인 것은 생명 그 자체이므로 목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us the celestial could be sav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soul” as being the celestial; for this is the soul itself, because the very life itself.

 

그래서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라는 표현의 의미가 분명해지는데요, 그것은 이어지는 내용, 곧 천적 혹은 신적인 것(Divine things)은, 주님이 영적 시험들을 견디시고, 그래서 어머니로부터 유전하신 악을 떼어내실 때까지는 본성상 하나 되기 위해 주님과 인접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Hence it is evident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that my soul may live because of thee.” It will be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celestial or Divine things were not so adjoined to the Lord that they made one essence, until he endured temptations, and thus expelled the evil heredity from the mother.

 

한편, 본 절과 이어지는 절에서는 천적인 것, 곧 주님의 천적 코어가 어떻게 해를 입지 않고, 보전되는지 하는 내용이 다루어집니다. Here and in the following verses it is described how meanwhile the celestial itself suffered no violence, but was saved.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도 어린 시절, 무엇을 배우실 때, 바로 천적인 단계로 점프하지 않으시고, 대신 이성(理性)과 합리(合理)를 거치셨다. 그래서 여호와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으셨다.

 

2021-10-08(D6)-매일예배(2207, AC.1474-1477, 창12,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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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GicGTv0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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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

 

1471. 12절,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Verse 12.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that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지식들 중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이 기억-지식이 천적 지식을 볼 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즉, 기억-지식의 눈에는 천적 지식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에 대한 묘사입니다.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signifie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hich is described as to what it is when they see celestial knowledges;

 

※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 말은 지식 중 기억-지식을 상징합니다. 기억-지식이 천적 지식을 볼 때, 어떨 것인지 하는 설명이지요. 위 표현이 바로 이런 의미임은 ‘애굽’의 의미를 보면 분명한데요, ‘애굽’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식 중 기억-지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서 또 분명한 건, ‘애굽 사람이 볼 때에’라는 말의 의미가 곧, 이 기억-지식이 본 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로 그런 거라는 말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hich is described as to what it is when they see celestial knowledge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Egypt,” which i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as before shown; and from this it is evident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when the Egyptians see,” namely, that this memory-knowledge is such as is described in this verse.

 

즉, 종교적 개념에 대한 스터디를 상징합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 말씀 공부를 하는 게 아닌, 그저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종교적 추구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천국에 관한 사실들을 접하는 바로 그때 이런 스터디가 발생하는데, 위 표현은 바로 이런 걸 묘사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건, 오래 신앙생활을 해 온 우리 역시 이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 표현이 이런 의미임은 ‘애굽’의 의미가 종교적 개념에 관한 스터디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앞서 글 번호 1164-1165, 1194-1195 및 1462번 글에서 설명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이제 ‘애굽 사람이 볼 때에’라는 말의 의미를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본 절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스터디의 속성,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NCE)

 

기억-지식은 그 안에 뭔가 자연적인 게 있습니다. 어린애들이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할 때, 잘 보면, 뭔가 하나의 흐름, 곧, 더 좋은 게 있으면 더 그걸 원하는, 심지어 그게 천국 및 하나님에 관한 거라는 말을 들어도 여전히 더 원하는 그런 게 있습니다.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is attended with this, and it is something natural in it, as is manifested in children when they first begin to learn, namely, that the higher things are, the more they desire them; and still more when they hear that they are celestial and Divine.

 

그러나 어린애들의 이런 순박한 욕심에도 불구하고, 이런 즐거움은 자연적이며, 겉 사람에 속한 욕망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But this delight is natural, and arises from a desire that is of the external man.

 

종교적 개념들에 관한 지식에는 이런 특성이 내재해 있으며, 이런 특성은 그런 지식에 속한 일종의 땅에 속한 요소입니다. 이런 경향은 어린애들이 배우기를 막 시작할 때 두드러지는데요, 어떤 주제가 확 눈에 띄면 띨수록 그들은 그걸 더욱 알고 싶어 하지요. 그 주제가 천국이나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더 그럽니다. 어린애들의 이런 모습이 얼핏 참 순전해 보이지만 그러나 거기 들어 있는 흥분은 땅에 속한 것이요, 겉 사람에 속한 탐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NCE)

 

주님과 달리 여느 사람들의 경우, 이 욕구로 인해 단지 지식 중 기억-지식에 있는 즐거움만 느끼게 됩니다. 그 이상의 무엇 없이 말이죠. 그리고 설령 무슨 즐거움을 느낀다 하더라도 이 지식 중 기억-지식은 단지 어떤 용도로 사용된다는 목적밖엔 없는, 뭘 전달하는 도구요, 매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지식이란, 하나의 그릇으로서 천적, 영적인 것들을 섬기는 것이며, 그런 때에야 비로소 지식은 처음으로 제대로 쓰임을 받는 것이고, 그런 때에야 비로소 하늘의 참된 기쁨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With other men this desire causes them to feel delight in the mer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ithout any further end; when yet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is nothing but an instrumental agency having for its end a use, namely, that the knowledges may serv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s vessels; and when they are thus serving, they are then for the first time in their use, and receive from the use their delight.

 

주님과 달리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탐욕은 그들로 하여금 그저 종교적 지식 그 자체에 대한 스터디로만 만족하게 합니다. 무슨 다른 좀 더 나은 목적 없이 말이죠. 실상은 이렇습니다. 이런 지식에 대한 학습의 결과, 지식이란 그저 무슨 도구, 곧, 어떤 용도를 수행하기 위해 고안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지식은 천적, 영적인 것들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섬기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지식이 이런 목적으로 쓰임 받을 때, 비로소 지식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사용 가운데 있는 것이며, 지식이 제공하는 모든 참된 기쁨은 이처럼 지식이 올바로, 제대로 쓰임 받을 때 오는 것입니다. (NCE)

 

누구라도 만일 그가 주의만 기울이면 알 수 있는 사실은, 지식 중 기억-지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수단일 뿐이며, 사람은 이것으로 합리적이 되며, 이어 영적이 되고, 마침내 천적이 되는 그런 거라는 걸 말입니다.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겉 사람은 속 사람과 인접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이게 바로 그가 지식의 올바른 용도 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Anyone can see, if he pays attention, that in itself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is nothing but a means whereby a man may become rational, and thence spiritual, and at last celestial; and that by means of the knowledges his external man may be adjoined to his internal; and when this is done, he is in the use itself.

 

신중한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은, 종교적 지식의 축적 그 자체는 그저 이성적이 되며, 영적이 되고, 마침내 천적이 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때 지식은 우리의 겉으로 하여금 우리의 속과 접촉할 수 있게 하며,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지적 탐구는 그 참된 목적을 섬기게 됩니다. (NCE)

 

속 사람은 오직 그 용도, 쓰임새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The internal man regards nothing but the use.

 

결국, 속 사람은 쓰임새 있는 지적 탐구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NCE)

 

또한 이를 위해 주님은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지각하는 기쁨을 기억-지식에 서서히 주입하십니다. For the sake of this end also, the Lord insinuates the delight that childhood and youth perceives in memory-knowledges.

 

같은 이유로, 주님은 어린 시절과 청년기, 사람이 뭔가를 배울 때 즐거움을 느끼게 하십니다. (NCE)

 

하지만 사람이 그의 기쁨을 기억-지식으로만 구성하기 시작할 때, 그런게 바로 육체적 탐욕이며, 그걸로 그는 휩쓸리게 됩니다. 그 휩쓸리는 정도만큼, 즉, 기억-지식에서만 기쁨을 찾으려 하는 만큼, 그에 비례해서 그는 천적인 것으로부터 끊어지며, 그에 정비례하여 그 기억-지식들로 인해 그는 주님을 향하여는 닫히고, 결국 물질적 존재가 되고 맙니다. But when a man begins to make his delight consist in memory-knowledge alone, it is a bodily cupidity which carries him away, and in proportion as he is thus carried away (that is, makes his delight consist in mere memoryknowledge), in the same proportion he removes himself from what is celestial, and in the same proportion do the memory-knowledges close themselves toward the Lord, and become material.

 

하지만 우리가 그저 배우는 데에만 우리의 즐거움을 두기 시작하면, 그것이야말로 육체적 욕망이어서 우리는 거기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가 그저 배움에서만 즐거움을 찾는 한, 그만큼 우리는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천국으로부터 끊어질수록 우리가 아는 사실들은 셔터 내리듯 주님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 물질의 세계에 참여하게 됩니다. (NCE)

 

반대로, 쓰임 받아야지 하는 목적들을 가지고 습득된 기억-지식들, 곧, 인간 사회를 위해, 지상에 있는 주님의 교회를 위해, 그리고 천국에 있는 주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보다도 주님 자신을 위해 쓰임 받아야지 하는 목적에 비례하여 더 많은 지식이 주님을 향하여 활짝 열립니다. But in proportion as the memory-knowledges are learned with the end of use—as for the sake of human society, for the sake of the Lord’s church on earth, for the sake of the Lord’s kingdom in the heavens, and still more for the Lord’s own sake—the more are they opened toward him.

 

또한 이런 이유로 천사들 역시 그 가진 모든 지식에도 불구, 만일 그것이 제대로 된 사용과 거리가 먼 그런 지식이면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여겨지게 됩니다. 천사들의 지식 역시 모든 지식에 관한 기억-지식들로서, 인간과는 차원이 달라 그 만 분의 일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인데도 말입니다. On this account also the angels, who are in the memory-knowledge of all knowledges, and indeed to such a degree that scarcely one part in ten thousand can be presented to the full apprehension of man, yet esteem such knowledge as nothing in comparison with use.

 

지금까지 말씀드린 걸로, 오늘 본문,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may be seen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이런 내용을 말씀드린 건, 어린 시절 주님은 이걸 아셨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셨다는 것, 곧, 만일 주님이 기억-지식 추구에만 관심이 있어 거기에만 골몰하셨다면 이 기억-지식은 더 이상 천적인 것을 위한 지식이 아닌, 즉, 주님은 더 이상 천국에 관한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우리 같은 어린이로 성장하셨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These things were said because the Lord when a child knew this and thought in this way, namely, that if he should be carried away by a mere desire for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this memory-knowledge is of such a character that it would care no more for celestial things, but only for the knowledges [cognitiones] which the desire for memory-knowledge would carry away.

 

이 주제들에 관하여는 뒤에 계속 됩니다. On these subjects more follows. (AC.1472)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그들, 즉, 기억-지식들은 이 지식들을 보고 천적(天的, celestial)이다, 천국에 관한 지식들이다 할 거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아내’가 천적인 것들과 인접한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는 그의 아내라’가 천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And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will call the knowledges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wife” as being the truth that was adjoined to celestial things; hence “this is his wife” signifies that which is celestial. (AC.1473)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하지만 그들, 곧 기억-지식들은 이런 천적인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종교적 개념들에 대한 지적 탐구에만 몰두할 거라는 말입니다. 이게 지금까지 다룬 내용입니다.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would not care for celestial things, but only for mere knowledges is evident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AC.1474)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2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억-지식들도 주님과 함께 있는 진리들이 천적인 것을 알아보지만 그러나 거기엔 관심이 없고, 오직 종교적 지식에 대한 지적 탐구에만 전념할 것이다

 

2021-10-06(D4)-매일예배(2206, AC.1471-1474, 창12,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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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15wX3iXT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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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

 

1471. 12절,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Verse 12.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that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지식들 중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이 기억-지식들이 천적 지식들을 볼 때, 그 모습이 어떨 것인가에 대한 묘사입니다.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signifie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hich is described as to what it is when they see celestial knowledges;

 

※ ‘애굽’은 지식들 중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 말합니다. 말씀에서 이 ‘애굽’, 즉, 기억-지식이 참 많이 나오는데, 이걸 다시 좀 보겠습니다. (AC.1472)

 

※ 사람은 자기가 상정(想定)한 원리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습니다. 심지어 그 원리들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그의 모든 지식과 미루어 짐작하는 모든 생각은 그 원리들에 대해 호의적입니다. 이런 원리들에 대해 호의적이고, 또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런 수많은 생각들을 통해서 결국 이 사람 마음에 이 원리들은 아주 뚜렷해지며, 결국 그는 그런 거짓 안에서 큰 확신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게 돈이다!’ 하는 생각을 자신의 인생철학과 원리 중 하나로 받아들인 사람은 지금 저 ‘대장동 의혹’과 관련된 사람들처럼 분명히 이 ‘돈을 첫 자리에 모시는 생각’은 잘못이요,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삶의 중심원리로 삼아 이후 모든 걸 이걸 가지고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가령, 시장, 도지사, 더 나아가서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이 되는 것까지 말이지요.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다 하여 재판도 돈으로, 선거도 돈으로, 언론, 방송 등 각종 미디어, 여론도 다 돈으로 움직일 수 있다 믿으며, 그래서 돈이 있어야 하고,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만들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 곧 ‘대장동 의혹’ 같은 일을 몇 번만 하면 된다 하는 식이지요. ‘50억을 주겠다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식입니다.

 

이런 세속적 사고는, ‘육안으로 볼 수 없거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절대 믿을 수 없어!’ 하는, 근본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런 생각이 하나의 중심원리가 된 사람은 이후 결코 믿을 수가, 곧, 신앙을 가질 수가 없는데, 그것은 영적, 천적인 것들은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요, 사람의 머리로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순서, 참된 질서는 사람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곧,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는 것이며, 모든 것이 그 뒤를 따르고, 이어 심지어 추론(reason)과 기억-지식에까지, 라틴어로는, 인 라티오날리부스 에 스케엔티피키스 [in rationalibus et scientificis], 확 깨닫는(be enlightened)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 지식, 세속 지식으로 주님과 천국을 추론하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을 하는 것, 과학을 배우는 것이 절대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은 사람에게 유익하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며, 신앙의 사람이라 하여 학자들의 세계에서 하듯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학이라고 하는 자연계의 질서도 그 기원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질서 속에서 주님을 시인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서 문제이지요...

 

다만 이 원리, 곧,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가능한 한, 학자들 세계, 세상, 세속적 지식과 친숙한 용어들을 사용, 영적, 천적 진리들을 자연적 진리들을 가지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식 사고요, 입장입니다. 세상을 세속이라 하여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는 기독교와 달리, 세상 친숙한 것들로 쉽게 비유, 천국 아케이나를 풀어주신 주님처럼 말이지요. 또한 기억-지식도 주님의 빛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즉, 쓰임새의 문제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하지, 절대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전자는 생명이지만, 후자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AC.129)

 

2021-10-01(D6)-매일예배(2203, AC.1471-1472, 창12,12), '애굽, 기억-지식(memory-knowledge)'.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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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I_JpVHNZ3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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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

 

1471. 12절,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Verse 12.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that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지식들 중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이 기억-지식들이 천적 지식들을 볼 때, 그 모습이 어떨 것인가에 대한 묘사입니다.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signifie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hich is described as to what it is when they see celestial knowledges;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그 기억-지식들이 이르기를, 저 지식들은 천적이다 하리라는 뜻입니다. that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signifies that they will call the knowledges celestial;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그들, 그 기억-지식들은 천적인 것들엔 관심이 없고, 대신 오직 단순한 지식들, 그들이 얻었으면 하는 지식들에만 관심을 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signifies that they would not care for the celestial things, but only for the mere knowledges, which they would carry off.

 

2021-09-30(D5)-매일예배(2202, AC.1471, 창12,12), '창12,12 브리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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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3ConurvJ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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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

 

1465. 11절,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Verse 11. And it came to pass, when he drew nigh to come into Egypt, that he said unto Sarai his wife, Behold I pray, I know that thou art a woman beautiful to look upon.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주님이 배우기 시작하셨을 때를 말합니다. ‘애굽’,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식들 중 기억-지식을 [스키엔티아 코그니티오눔] 말합니다. And it came to pass, when he drew nigh to come into Egypt” signifies when he began to learn; “Egypt,” as before said, mean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scientia cognitionum];

 

※ 주님도 어린 시절, 여느 어린이들과 같이 교육을 받으셨습니다. 겉 사람(the external man)은 지식이 아니고서는 속 사람(the internal man)과 상응하고 일치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겉 사람은 유형의 신체를 가진 감각적인 것입니다. 마치 땅에 심기듯 지식이 겉 사람 안에 심기지 않으면 겉 사람은 그 어떤 천적, 영적인 것도 받을 수 없지요. 즉, 이 지식은 천적인 것이 담기는 그릇입니다.

 

이 지식은 반드시 말씀에서 와야 합니다. 말씀에서 오는 지식은 주님 자신으로부터 열린, 즉, 이 지식을 통해서 주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지식이기 때문이며, 말씀 자체가 주님에게서 나와 천국을 두루 통하고, 주님의 생명이 말씀 안 모든 것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그래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린 시절, 말씀 말고 다른 지식으로는 자신을 가득 채우시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향해 열려 있고,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며, 주님이 결합하셔서 하나가 되실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말씀은 그 가장 안쪽, 가장 내적 의미로도 오직 주님에 관한 것뿐이며, 무엇이든지 오직 맨 처음 주님으로부터 온 것뿐입니다. 휴먼 에센스, 곧, 인성이라는 것은 그저 영원부터 계신 디바인 에센스, 곧, 신성에 보태어진 뭔가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AC.1461)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천적인 것들에 인접해 있는 진리에 관하여 주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음을 말합니다. he said unto Sarai his wife” signifies that he so thought concerning the truths to which celestial things were adjoined;사래’, 아내로서의 ‘사래’는 주님 안에 있는 천적인 것들에 인접해 있는 진리입니다. Sarai” as a wife is the truth adjoined to the celestial things that were in the Lord;

 

※ ‘아내’에 대한 말씀의 속뜻은 선과 결합한 진리 말고는 없습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은 정확히 결혼이라는 상황과 같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남편’은 선을, ‘아내’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아닌 ‘사람’을 뜻할 때는 반대로 남편은 진리를, 아내가 선을 뜻합니다. 이것은 말씀 어디에서나 항상 같습니다. (AC.915)

 

여기서는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나오면서 그의 아내 사래가 나오기 때문에, 여기 나오는 사래는 진리입니다.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에게 말한다는 것은, 그래서 속뜻으로는, 진리를 천적인 것과 결합한 진리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갈 때, 아내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실제 사실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말씀의 모든 실제 있었던 일들은 표상이며, 사용된 모든 말은 어떤 의미들을 가집니다. 말씀에 기록된 어떤 일, 사건들도, 그 순서와 말들 모두 이런 아케이나를 표현하기 위한 속뜻을 갖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AC.1468)

 

※ 아내로서의 ‘사래’는 천적인 것에 아주 가까이 있었던 진리이며, 이 천적인 것은 주님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천적인 것에 아주 가까이 있었던 진리’라 하는 것은, 모든 진리는 주님이 그것을 가르치시기 전에 이미 주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적인 것은 늘 함께 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둘 사이를 떼어놓을 수가 없는 것이 마치 빛이 불에서 나오는 것과 같지요. 이 진리는 주님의 속 사람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데, 신성(Divine), 곧 신적 진리였습니다. 주님이 배우신 지식은 진리가 아니었고, 단지 뭘 담아두는 그릇이었습니다. 사람의 기억 속 무엇이 들어 있든 그건 진리가 아닙니다. 비록 그리 불려도 말입니다. 진리는 그 안에, 곧 그릇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릇 자체는 진리가 아니고, 그릇 안의 내용물이 진리인 것입니다. 이 그릇은 말씀 관련 지식의 범주 안에서 주님에 의한 가르침을 통해 형성됩니다. 어쩜 열린다는 게 더 나은 표현이지 싶습니다. 천적인 것이 그 안으로 스며들 수도, 이런 식으로 신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인성 관련된 것들이 신성과 똑같이 될 수 있도록 신성과 인성을 결합하셨기 때문입니다. (AC.1469)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그 출처, 기원이 천적인 진리는 정말 기분 좋다, 정말 마음에 든다는 뜻입니다. Behold I pray, I know that thou art a woman beautiful to look upon” signifies that truth from a celestial origin is delightful.

 

※ 천적이거나 천적인 것에서 나온 모든 진리는 속 사람에게는 행복이요, 겉 사람에게는 정말 기분 좋은 것입니다. 천적 천사들에게도 그렇게 지각됩니다. 그러나 그 근원이 천적이지 않으면 정반대입니다. 속 사람 안에 두 종류의 행복이 있는데 그에 상응하여 겉 사람도 그렇습니다. 하나는 선이요, 다른 하나는 진리입니다. 천적 행복과 즐거움은 선으로 되어 있고, 영적 행복과 즐거움은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진리 자체가 행복과 즐거움을 수반한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습니다. 진리가 오직 천적 기원을 가지려면 이건 필수입니다. 그때 진리 자체가 천적이 되고, 천적 진리라 부르기 때문입니다. 비교해서 말씀드리면, 그때 진리는 마치 봄철 태양 빛과도 같습니다. 그 안에 열이 있어 땅 위 모든 것을 자라나게 하고, 활동하게 하는 빛 말입니다. 이 천적 진리는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의 의미입니다. 이 표현에 담긴 더 많은 아케이나가 이어지는 주된 내용이 될 것입니다. (AC.1470)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1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린 시절, 주님이 말씀에서 오는 지식을 배우기 시작하셨을 때, 주님은 그 지식에 담기는 진리가 천적인 것과 아주 가깝고, 정말 기분 좋은, 매우 마음에 드는 진리라고 생각하셨다

 

2021-09-29(D4)-매일예배(2201, AC.1465-1470, 창12,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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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4rWLBLC-Z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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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

 

1456. 9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Verse 9. And Abram journeyed, going and journeying toward the south.

 

 

점점 옮겨갔더라’, 더 깊이 나아감을 말합니다. And Abram journeyed, going and journeying” signifies further progression;

 

※ 고대인들에게는 ‘여행’(travels), ‘여정’(journeys) 및 ‘체류’(sojournings)는 단순히 단어의 뜻 말고 무슨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도 이들 표현은 단순히 그 단어의 뜻밖엔 무슨 속뜻이 있거나 하지 않습니다. 즉, ‘점점 옮겨갔더라’가 더 깊이 나아감을 상징하는 것은, 단순히 ‘go’와 ‘journey’의 뜻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여느 일반인처럼 지식을 향한 나아감이 시작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1:8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눅2:40)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2:46-49)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2:52)

 

주님도 다른 어린이들처럼 정상적인 교육을 받으시고 배우신 것입니다. (AC.1457)

 

 

남방으로’, 선과 진리 가운데로,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내면이 빛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게 하시려고를 말합니다. toward the south” signifies into goods and truths, and thus into a state of light as to the interiors.

 

※ ‘’(南, the south)은 빛의 상태를 말합니다. 영계에서는 방위(quarters)도, 시간도 없고, 대신 방위와 시간으로 상징되는 ‘상태’(states)가 있습니다. 지적인 것들(intellectual things)의 상태는 날(the day)과 해(the year)의 시간(때)들의 상태 및 방위의 상태들과 같습니다. 날의 상태들은 저녁, 밤, 아침 및 정오의 상태들이 있고, 해의 상태들은 가을, 겨울, 봄, 그리고 여름의 상태들이 있습니다. 방위의 경우는 해(the sun)의 상태들과 같은데, 서(西, the west), 북(北, the north), 동(東, the east) 및 남(南, the south)과 관련된 상태들이 있습니다.

 

지적인 것들의 상태가 이와 유사합니다. 놀라운 것은, 천국에서는 지혜와 지성(intelligence)의 상태 가운데 있는 이들이 곧 빛 가운데 있습니다. 정확히 그들의 상태에 따라 말이지요. 가장 높은 지혜와 지성 가운데 있는 이들은 가장 큰 빛 가운데 있습니다. 지혜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빛 가운데, 지성은 주님 신앙의 빛 가운데 있습니다. 천국의 빛은 지상의 빛 가지고는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빛입니다. (AC.1521-1534, 1619-1625) 천국에는 빛과 지성 사이 이런 상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말씀에 나오는 ‘’은 이것 말고는 무슨 다른 속뜻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은 지식을 사용하여 아주 어렵게 구한 지성을 말합니다. 이 지식은 천적, 영적 진리들인데, 천국에 있는 수많은 빛의 복사(輻射, radiations)가 바로 이것이며, 이지식은 앞서 말한 대로, 천국에서는 빛의 형태로 눈에 보이게 나타납니다. 주님이 지금 이 지식을 가지고 자신을 가득 채우고자 하심은, 나중에 주님의 인성(人性, the human essence)에 대해서도 주님 자신 실제 천국의 빛이 되고자 하심이며, 이것을 일컬어 여기 9절 오늘 본문에서는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하신 것입니다.

 

남방을 향한 아브람의 계속된 여정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선과 진리를 향한 주님의 나아가심, 그래서 자신의 내면을 빛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게 하심에 관한 상징임을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천적, 영적 진리들이므로 천적,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지식을 통해서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며, 여기서 후자는 그것을 받아 담아놓는 그릇입니다. 후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있는 만큼 그 수가 많습니다. 이 지식 안, 곧 이들 진리의 그릇들 안으로 천적인 것들이 흘러들어옵니다. (AC.1458)

 

 

※ 이상으로 오늘 본문 9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은 실제 천국의 빛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시려고 계속해서 천적, 영적 지식으로 자신을 채우셨다

 

2021-09-23(D5)-매일예배(2198, AC.1456-1458, 창12,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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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usKmig78n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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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

 

1449. 8절,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Verse 8. And he removed from thence into the mountain on the east of Bethel, and spread his tent; having Bethel toward the sea, and Ai on the east. And there he built an altar to Jehovah, and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어린 시절 주님의 네 번째 상태, 즉, 사랑의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진행(progression)을 말합니다. ‘벧엘 동쪽 산으로 옮김’이 상징하는 바가 바로 사랑의 천적인 것들입니다. “He removed from thence into the mountain on the east of Bethel” signifies the Lord’s fourth state when a child, namely, the progression of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signified by being transferred to a mountain on the east of Bethel;

 

※ 이 표현이, 어린 시절 주님의 네 번째 상태에 관한 것임은, 앞서 다룬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또한 진행 순서 자체를 보면 분명합니다. 주님은 가장 먼저 유아기 때부터 사랑의 천적인 것들로 채워지셔야 했습니다. 사랑의 천적인 것들이란 여호와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그 사랑 안에 있는 이노센스(innocence)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생명의 더할 나위 없는 근원들이기 때문에,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모든 것이 이 사랑의 천적인 것들로부터 흘러나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단지 그 파생물이지요. 이들 천적인 것들은 사람의 유아기 때, 그에게 집중적으로 스며들기 시작, 어린 시절에 이르기까지 그를 채웁니다. 이때에는 사실 다른 무슨 지식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사람이 사랑이 무엇인지, 어펙션(affection)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주님에게서 나와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그를 감동하기 때문입니다. 유아들의 상태와 조금 시간이 흐른 어린 시절 초기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 안의 이것이 앞서 여러 번 말씀드린 (AC.468, 530, 560-561, 660-661) 리메인스(remains)입니다. 주님도 여느 사람들처럼 태어나셨기 때문에, 순서대로 실제로 유아기를 거쳐 어린 시절까지 서서히 이렇게 천적인 것들로 채워지셨고, 나중에는 지식들 가운데로 인도되셨습니다. 본 절에서는 이런 일이 주님의 경우에는 어떠셨는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AC.1450)

 

※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사랑의 천적인 것들의 진행을 말하는 것임은, ‘’(mountain)이 상징하는 것, 곧, 천적인 것에 관한 내용들(AC.795-796) 및 ‘’(東, the East)이 사랑에 관한 여호와 자신에 관한 상징인 것, 그리고 ‘벧엘’의 상징이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임을 보면 분명합니다. 주님은 앞서 살핀 대로(AC.101 등) ‘’ 자체이십니다. 천적인 것들은 사람 안에 지식 없이도 스며들고, 지식과 함께도 스며듭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천적인 것들은 지식 없이도 유아기로부터 어린 시절에 이르기까지 스며들며, 또한 어린 시절부터 성인까지는 지식과 함께 스며듭니다. 주님은 ‘벧엘’이라고 하는,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 가운데로 곧장 나아가셨기 때문에 본 절에서 표현하길, 아브람이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겼다 한 것입니다. (AC.1451)

 

 

장막을 치니’, 신앙의 거룩한 속성들을 말합니다. and spread his tent” signifies the holy things of faith;

 

※ ‘장막을 치니’, 신앙의 거룩한 속성들을 상징하는 것은, 전에(AC.414) 살핀 대로, ‘장막’(tent)의 상징이 사랑의 거룩한 퀄러티를, 그리고 그 결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거룩한 퀄러티를 상징하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그가 그의 장막을 쳤다’라는 표현은, 이 일이 이제 시작되었음을 상징합니다. (AC.1452)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주님의 상태가 아직 어슴푸레하였음을 말합니다. having Bethel toward the sea, and Ai on the east” signifies that his state was still obscure;

 

※ 주님의 상태가 아직은 어슴푸레, 즉, 천적, 영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 관련, 아직 불투명한 상태임을 말합니다. 천적인 것들 가운데 있는 것과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 가운데 있는 것은 별개이기 때문입니다. 유아 및 어린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천적입니다. 그들은 부모를 사랑하며, 서로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노센스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반면, 어른들은 유아와 어린이들에 비해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 가운데 더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 중 상당수는 사랑의 천적인 것들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아직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을 배우기 전인 사람은 어슴푸레한 상태, 즉, 지식 수준의 상태 가운데 있으며, 이 상태를 가리켜,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한 것입니다. ‘벧엘’은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을, ‘아이’는 세속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을 말합니다.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이 아직 어슴푸레할 때는 ‘서쪽에 있다’ 합니다. 말씀에서, ‘서(西, the west)’는 어슴푸레한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세속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이 명료함 가운데 있을 때는 ‘동쪽에 있다’ 합니다. 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은 명료하기 때문입니다. (AC.1453)

 

※ ‘벧엘’과 ‘아이’가 각각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과, 세속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을 상징하는 것은 아래 말씀들을 보여드리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벧엘’의 경우입니다.

 

3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13:3-4)

 

17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9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창28:17, 19)

 

1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6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창35:1, 6-7)

 

18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26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7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삿20:18, 26-27)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삼상7:16)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삼상10:3)

 

27앗수르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그 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그 곳으로 데려가되 그가 그 곳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니 28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 (왕하17:27-28)

 

12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13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암7:12-13)

 

이 외에도 많지만, 이쯤에서 줄이고, 다음은 ‘아이’의 경우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수7:2)

 

1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2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너는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 (수8:1-2이하 28절까지)

 

3헤스본아 슬피 울지어다 아이가 황폐하였도다 너희 랍바의 딸들아 부르짖을지어다 굵은 베를 감고 애통하며 울타리 가운데에서 허둥지둥할지어다 말감과 그 제사장들과 그 고관들이 다 사로잡혀 가리로다 4패역한 딸아 어찌하여 골짜기 곧 네 흐르는 골짜기를 자랑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재물을 의뢰하여 말하기를 누가 내게 대적하여 오리요 하느냐 (렘49:3-4)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그 상태에서 아버지께 드린 주님의 외적 예배를 말합니다. and there he built an altar to Jehovah” signifies the external worship of his Father from that state;

 

※ ‘제단’에 관한 상징, 곧 예배에 관한 주된 표상에 대해서는 921번 글 참조 (AC.1454)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그 상태에서 아버지께 드린 주님의 내적 예배를 말합니다. and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signifies the internal worship of his Father from that state.

 

※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에 관한 글(AC.440) 참조. 여호와께 제단 쌓는 것은 외적 예배, 여호와의 이름 부르는 것은 내적 예배입니다. (AC.1455)

 

 

※ 이상으로 오늘 본문 8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어린 시절, 네 번째 상태로 계속 진행하셔서 사랑의 천적인 것들로 채우시고, 아직 어린 시절이시라 여전히 어슴푸레하시지만 주님은 그 상태에서, 채우신 사랑의 천적인 것들을 가지고 아버지께 외적, 내적 예배를 드리셨다

2021-09-22(D4)-매일예배(2197, AC.1449-1455, 창12,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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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JIw_avJw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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