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

 

39. 20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Verse 20.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큰 광명체들이 속 사람 안에 자리를 잡고 불이 켜지면, 겉 사람은 그들로부터 빛을 받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처음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 속 사람 안 두 큰 광명체는 사랑과 신앙입니다. 이렇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준비가 끝난 사람이라야 생명이 시작되었다 말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 되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 알고 살아왔다면, 또 무슨 진리를 말하면서도 역시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다면, 그는 그동안 ‘살아온’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그는 ‘죽은’ 상태이며, 그의 안에는 악과 거짓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그게 무엇이든 사실은 모두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그 자체로 선인 그런 선을 사람이 자신으로 말미암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 오직 주님만이 선하시며, 주님만이 선의 근원이십니다. 달이 해의 빛을 받아 반사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주님의 선을 반사만, 전달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선을 마음먹는 것은 고사하고, 생각하는 것조차 사실은 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선을 행한다는 것은 도저히,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 가르침을 보면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 그만큼 사람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부터 정말 철저히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은 그 유일하신 참 근원 되시는 분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올 수 없습니다. 다른 데서 하신 주님 말씀입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이런 정황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람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를 거듭나게 하셔서 생명을 얻게 하실 때, 주님은 먼저 사람이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때는 사람이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생각할 수도, 무슨 다른 방법으로 인도함을 받아 믿을 수도, ‘아,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말미암는구나!’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 김혜자 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 이름이 생각납니다. 주님은 비록 그것이 옳고 정당하다 하더라도 만일 우리가 그 지적, 그 비판을 힘들어하며, 아파하겠다 여겨지시면, 대신 빙 돌아가며 기다리는 편을 택하십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자원함으로 주님 편으로 돌아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간에 그저 수수방관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불꽃 같은 두 눈으로 늘 우리를 붙드시며, 전능하신 섭리로 영원히 우리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은 그의 선과 진리들은 ‘’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될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은 ‘못 움직이는’(inanimate), 즉 생물은 생물인데 움직이지 못하는 생물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은 사랑과 신앙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말하는 모든 진리를 행하시는 분은 사실은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는 이제는 먼저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들’, 그 다음 ‘땅 위를 나는 새들’, 끝으로 ‘짐승들’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움직이는’(animate) 것들이며, 그래서 언급하기를 ‘생물’이라 하는 것입니다.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생물’은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 뜻합니다. ‘새들’은 보통은 합리적(rational)이고 지성적인(intellectual) 것들을 뜻하는데, 이 중 후자는 속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

 

수중 생물들’이나 ‘물고기들’이 기억-지식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사50:2-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2] 에스겔서를 보면 더 분명합니다. 거기서 주님은 새 성전, 혹은 일반적으로는 어떤 새 교회 및 그 교회에 속한 사람이나 어떤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시는데, 누구든지 거듭난 사람은 다 주님의 일종의 성전이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겔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어부들’은 자연적인(natural)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 주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4:19)

 

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

 

[3]’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상징한다는 것은 예언서들, 가령,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사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예레미야에서는 And in Jeremiah: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서에도 In Ezekiel: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17:22-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호세아서에서는 어떤 새 교회나 거듭난 사람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And in Hosea, speaking of a new church, or of a regenerate man: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 ‘들짐승’은 정말 들짐승을, ‘’는 그냥 새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누가 보아도 분명한 것은, 주님은 이들과 ‘언약을 맺겠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That “wild 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 a new covenant” with them.

 

 

41. 사람에게나 적절한 것들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게 얼핏 보기에 무슨 메인인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저 딱딱한 무슨 뼈나 까만 덩어리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들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적, 천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만일 눈에 보이게 나타날 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Whatever is proper to man has no life in itself, and whenever it is made manifest to the sight it appears hard, like a bony and black substance; but whatever is from the Lord has life, containing within it that which i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when presented to view appears human and living.

 

믿기 어렵겠지만, 그러나 정말 사실입니다. 천사 스피릿을 가진 모든 표현 하나, 모든 아이디어 하나, 그리고 모든 생각의 조각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살아 있으며, 지극히 작은 조각들조차 그 안에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애정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It may seem incredible but is nevertheless most true, that every single expression, every single idea, and every least of thought in an angelic spirit, is alive, containing in its minutest particulars an affection that proceeds from the Lord, who is life itself.

 

※ 사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그 모든 언행에서 주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며, 빛처럼 뿜어져 나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목격하며, 생명력을 경험합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 그것들 안에 주님을 향한 신앙이 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바로 여기서 ‘생물’(living soul)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생물들은 또한 일종의 몸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것이 여기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 ‘기는 것’이 가리키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들 진리들은 사람에게는 아직 너무 심오한 비밀들이어서, 여기서는 단지 ‘생물’, ‘스스로 움직이는 것’ 정도로만 표현되고, 또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And therefore whatsoever things are from the Lord, have life in them, because they contain faith toward him, and are here signified by the “living soul”: they have also a species of body, here signified by “what moves itself” or “creeps.” These truths, however, are as yet deep secrets to man, and are now mentioned only because the “living soul,”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re treated of.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20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속뜻)

우리는 비록 겉 사람의 일일지라도 열심히 기억-지식을 습득하여 그것들로 주님을 향한 신앙의 징검다리들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빛을 구하여 주님 주신 모든 합리와 지성, 이성과 지혜로 우리의 속 사람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 우리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준비되며,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지를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은 기억-지식으로, 속 사람은 합리와 지성으로 채워지며, 번성,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생물’, 곧 주님을 향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어야 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지식, 합리, 지성은 참 지식, 참 합리, 참 지성이 아니며, 거기엔 생명이 없어 사실은 ‘죽은’ 것입니다.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모든 공과 영광을 홀로 오직 주님께만 돌리는 것, 그것이 ‘사는 것’이요, 바로 ‘생명’, ‘생물’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창1,20, 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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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yAklYxDg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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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20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Verse 20.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큰 광명체들이 속 사람 안에 자리를 잡고 불이 켜지면, 겉 사람은 그들로부터 빛을 받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처음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 속 사람 안 두 큰 광명체는 사랑과 신앙입니다. 이렇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준비가 끝난 사람이라야 생명이 시작되었다 말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 되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 알고 살아왔다면, 또 무슨 진리를 말하면서도 역시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다면, 그는 그동안 ‘살아온’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그는 ‘죽은’ 상태이며, 그의 안에는 악과 거짓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그게 무엇이든 사실은 모두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그 자체로 선인 그런 선을 사람이 자신으로 말미암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 오직 주님만이 선하시며, 주님만이 선의 근원이십니다. 달이 해의 빛을 받아 반사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주님의 선을 반사만, 전달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선을 마음먹는 것은 고사하고, 생각하는 것조차 사실은 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선을 행한다는 것은 도저히,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 가르침을 보면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 그만큼 사람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부터 정말 철저히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은 그 유일하신 참 근원 되시는 분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올 수 없습니다. 다른 데서 하신 주님 말씀입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이런 정황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람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를 거듭나게 하셔서 생명을 얻게 하실 때, 주님은 먼저 사람이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때는 사람이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생각할 수도, 무슨 다른 방법으로 인도함을 받아 믿을 수도, ‘아,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말미암는구나!’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 김혜자 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 이름이 생각납니다. 주님은 비록 그것이 옳고 정당하다 하더라도 만일 우리가 그 지적, 그 비판을 힘들어하며, 아파하겠다 여겨지시면, 대신 비록 빙 돌아가며 기다리는 편을 택하십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자원함으로 주님 편으로 돌아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중간에 그저 수수방관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불꽃 같은 두 눈으로 늘 우리를 붙드시며, 전능하신 섭리로 영원히 우리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은 그의 선과 진리들은 ‘’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될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은 ‘못 움직이는’(inanimate), 즉 생물은 생물인데 움직이지 못하는 생물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은 사랑과 신앙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말하는 모든 진리를 행하시는 분은 사실은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는 이제는 먼저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들’, 그 다음 ‘땅 위를 나는 새들’, 끝으로 ‘짐승들’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움직이는'(animate) 것들이며, 그래서 언급하기를 ‘생물’이라 하는 것입니다.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창1,20, 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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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XmDCLgxv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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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18절,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Verse 18.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은 선을, ‘’은 악을 의미하며, 그래서 낮의 활동을 선이라, 밤의 활동을 악이라 합니다. ‘’은 진리를, ‘어둠’은 거짓을 의미합니다. 다음은 주님 말씀입니다. By the “day” is meant good, by the “night,” 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 “light” is meant truth, and by the “darkness” falsity, as the Lord says: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19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Verse 19.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18-19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속뜻)

주님은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사랑과 신앙이라는 두 큰 광명체를 두어, 환히 비추어, 이것으로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인도하며,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선입니다. 거듭남의 전체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은 충만과 결핍, 밝음과 어둠을 번갈아 가며 더욱 탄탄, 강건해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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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41ffcpnyp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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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Verses 14–17.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33. 무슨 사랑이라는 게 전혀 없다면 삶이라는 게 절대 불가능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무엇이 없으면 기쁨이라는 게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정말 누가 안 가르쳐줘도 잘 압니다. It is in everyone’s power very well to know that no life is possible without some love, and that no joy is possible except that which flows from love.

 

사랑이라는 거, 삶이라는 거, 즐거움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겁니다. 만약 누가 사랑이라는 것들을, 같은 말이지만, 무슨 원하는 것들을, 이런 게 다 사랑에 속한 건데요, 이런 걸 만약 제거할 수 있어 정말 그랬다고 하면, 그 즉시 그는 무슨 사고,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게 되어, 그는 마치 제가 저세상에서 보아 온 무슨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말 겁니다. Such however as is the love, such is the life, and such the joy: 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 이런 사실을 믿지 않는 영이 있어 그를 모든 입류(入流, influx, 주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로 흘러드는 어떤 것)로부터 일시 차단된 상태에 있게 하자 그는 그 즉시 마치 무슨 뭍으로 나온 바닷속 해파리처럼 되어 살짝살짝 그저 꿈틀대기만 하더랍니다. 그는 그동안 자기 힘과 능력으로 버젓이 활동도 하며, 이것저것을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입류로 그랬던 것입니다.

 

자기 사랑(the loves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s of the world)은 그 안에 뭔가 삶과 즐거움 비슷한 게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잘 보면 이 둘은 참사랑(true love)하고는 완전 정반대인데요, 참사랑이라는 것은 사람이 주님을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자기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은 사실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움이지요. 사람이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그에 비례해서 이웃을, 그리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하게 됩니다. 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 have in them some resemblance to life and to joy, but as they are altogether contrary to true love, which consists in a man’s loving the Lord above all things, and his neighbor as himself, it must be evident that they are not loves, but hatreds, for in proportion as anyone loves himself and the world, in the same proportion he hates his neighbor, and thereby the Lord.

 

참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참된 삶은 주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며, 참된 기쁨은 참된 삶을 살아갈 때 맛보는 기쁨입니다. Wherefore true love is love to the Lord, and true life is the life of love from him, and true joy is the joy of that life.

 

참사랑은 오직 하나만 존재하며, 그래서 참된 삶도, 그 삶에서 맛보는 참된 기쁨, 더할 나위 없는 행복 역시 그러하며, 바로 이 모든 것을 천국 천사들은 누리고 있습니다. There can be but one true love, and therefore but one true life, whence flow true joys and true felicities, such as are those of the angels in the heavens.

 

 

34. 사랑과 신앙은 분리가 허락된 적이 없습니다. 이 둘은 하나가 되어 같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명체’가 처음 언급될 때, 그들은 하나로 간주되었으며, 그래서 이르기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sit]) 하신 것입니다. Love and faith admit of no separation, because they constitute one and the same thing; and therefore when mention is first made of “luminaries” they are regarded as one, and it is said, “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 우리말 번역은 복수형이지만 라틴 표현은 sit, 즉,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라틴 sum의 현재 능동태 접속법 3인칭 단수형입니다.

 

이런 정황과 관련, 주님의 허락으로 후술되는 다음 내용들은 정말 놀라운 내용들입니다. Concerning this circumstance it is permitted me to relate the following wonderful particulars.

 

천적 천사(天的, the celestial angels)들은 천적 사랑(the celestial love)을 힘입어 모든 것을 주님으로 말미암는 천사들입니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 안에서 이 사랑으로 말미암으며, 지상의 언어로는 표현하기가 여의치 않은 그런 어떤 삶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습니다. The celestial angels, by virtue of the celestial love in which they are from the Lord, are from that love in all the knowledges of faith, 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그러나 이와 달리, 신앙의 교리 관련 지식들은 많이 알면서도, 그러나 사랑은 없는 그런 영들의 경우, 천국 마당의 첫 번째 문턱조차 도저히 넘지 못한 채, 도로 달아나버려야 하는, 어떤 냉기 어린 삶이나 희미한 빛 가운데 있습니다. But, on the other hand, spirits who are in the knowledge of the doctrinals of faith, without love, are in such a coldness of life and obscurity of light that they cannot even approach the first threshold of the court of the heavens, but flee back again.

 

그들 중 더러는 그분의 계명대로 살지 않았으면서도 말하기를, 자기들은 주님을 믿어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Some of them, while not living according to his precepts, say that they have believed in the Lord, and it was of such that the Lord said in Matthew: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1-22, 끝까지) Not every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s, but he that doeth my will: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through thy name. (Matt. 7:21–22, to the end)

 

[2] 그래서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또한 신앙 안에 있으며, 그렇게 해서 또한 천국적 삶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은 신앙 안에 있다 말은 하면서도 사랑의 삶 가운데 있지는 않은 사람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are in love are also in faith, and thereby in heavenly life, but not those who say they are in faith, and are not in the life of love.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열 없는 햇빛과도 같습니다. 겨울, 아무 것도 자라지 못 하는, 만물이 무기력하게 죽은 것 같은 그런 겨울과도 같은 것입니다. 반면, 참신앙은 사랑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그런 건데요, 봄철 햇빛과도 같은 것입니다. 봄이 되면 겨울과 달리 빛 외에도 열이 있어 이 해의 열, 곧 햇볕의 결과, 만물이 소생하여 자라고 번성합니다. 대지로 하여금 열매 맺고 비옥하게 하지요. The life of faith without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without heat, as in the time of winter, when nothing grows, but all things are torpid and dead; whereas faith proceeding from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in the time of spring, when all things grow and flourish in consequence of the sun’s fructifying heat.

 

이것은 영적이고 천국적인 것과 관련하여 정확히 일치하는데요, 말씀에서 세상과 지표면에 존재하는 것들을 가지고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It is precisely similar in regard to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which are usually represented in the Word by such as exist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신앙이 없거나 사랑 없는 신앙을 또한 주님은 ‘겨울’로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이 시대의 끝, 종말, 완성을 미리 말씀하실 때,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막13:18-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하셨는데요, 여기서 ‘이 일’(flight, 비행, 들림, 휴거)은 마지막 때를, 그리고 또한 모든 사람이 자기가 죽는 때를 의미하지요.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 휴거는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본문의 마태복음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24:31)

 

AC.4060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각각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를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갑자기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닙니다.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나중에 쓰신 것입니다.

 

‘겨울’은 사랑이 결핍된 삶을, ‘환난의 날’은 저세상 삶의 끔찍한 상태를 말합니다.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능력이 있는데, 바로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입니다. 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후자가 전자에 의해 다스려질 때, 이 둘은 한 마음이 되며, 그것은 곧 하나의 삶, 겉과 속이 같은 삶이 됩니다. 그때 사람은 자기가 의도하고 생각하는 것을 또한 마음먹고 행하기 때문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그러나 만일 후자, 곧 이해가 의지와 모순되고 서로 상충될 때, 이때가 바로 말로는 신앙을 가졌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신앙과 모순되게 살고 있을 때인데, 이때는 하나였던 마음이 둘로 나뉘게 됩니다. 이때는 마음 하나는, 즉 말로는, 머리로는 천국을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여 천국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하지만, 다른 마음, 곧 의지로는 지옥을 향하는 경향을 띠게 됩니다. 이 경우, 의지가 모든 행위에 있어 행위자(doer)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람은 만일 주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면 지옥으로 곤두박질쳐지는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36.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해 온 사람들,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인 사람들은 사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신앙이라는 걸 떠올릴 때, 어떤 사람들은 그건 단지 생각일 뿐이라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건 주님을 다이렉트로 생각하는 거라고 합니다. 신앙을 생각할 때, 신앙의 교리(the doctrine of faith)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입니다.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신앙이라는 것은, 신앙의 교리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일종의 지식과 인정(認定, acknowledgment) 및 그 교리들이 가르치고 있는 모든 걸 또한 복종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신앙이 가르치고 있는, 그리고 사람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이런 신앙 가운데 있는 게 아니라면 그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마가복음에서 아주 명료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막12:29-31)

 

마태복음에서는, 주님은 이 둘 중 첫째를,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 하셨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1)라고 하셨습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 “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Matt. 22:37–41)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41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22:37-41)

 

‘율법과 선지자’는 신앙 관련 범 우주적 교리, 곧 말씀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The “law and the prophets” 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37. 본문 14절, 광명체들로 하여금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의 경우, It is said that the luminaries shall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여기에는 사실은 현재 수준에서 밝힐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비의(秘義, arcana)가 들어 있습니다. 글자 상으로는 그런 종류의 비의가 전혀 나타나지 않아도 말이지요. 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 although in the literal sense nothing of the kind appears.

 

여기서는 이제 말씀드리는 내용 정도로도 충분하겠습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 교대(alternations), 반복이라는 게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든 세부적으로든 말이지요. 날의 변화, 해의 변화 같은 것입니다. Suffice it here to observe that there ar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which are compared to the changes of days and of years.

 

날의 변화의 경우, 아침, 정오, 그리고 저녁, 밤을 거쳐 다시 아침이지요. 해의 변화도 비슷합니다.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을 거쳐 다시 봄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게 있는 것입니다. The changes of days are from morning to midday, thence to evening, and through night to morning; and the changes of years are similar, being from spring to summer, thence to autumn, and through winter to spring.

 

열과 빛도 그렇고 그래서 그 결과, 땅에서 나는 소산물들도 그렇습니다. Hence come the alternations of heat and light, and also of the productions of the earth.

 

이 모든 것이 영적, 그리고 천적인 것들의 교대, 반복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To these changes are compared th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이런 교대와 변화, 반복, 다양성이 없는 삶은 단일, 획일적이 되며, 그 결과, 그런 삶은 전혀 삶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선과 진리도 전혀 알아차리거나 구분, 심지어 감지조차도 할 수 없게 됩니다. 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

 

이런 교대, 반복을 선지서에서는 ‘법도’(ordinances)라 하셨습니다. These alternations are in the prophets called “ordinances” [statuta], as in Jeremiah: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5-36) Said Jehovah, who giveth the sun for a light by day, and the ordinances of the moon and of the stars for a light by night, . . . these statutes shall not recede from before me. (Jer. 31:35–3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렘33:25) Said Jehovah, If my covenant of day and night stand not, and if I have not appointed the ordinances of heaven and earth. (Jer. 33:25)

 

이 일들에 관해서는, 이 일들은 주님의 신적 자비에 속한 일들인데, 창세기 아래 구절에서 좀 더 깊이 살펴볼 것입니다. But concerning these things, of the Lord’s Divine mercy, at Genesis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8:22)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14-17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속뜻)

주님은 속 사람 안에 사랑과 신앙의 불을 켜시고 이것으로 이후 모든 주님의 질서를 베풀고자 하셨습니다. 사랑으로는 사람의 의지와, 신앙으로는 사람의 이해와 각각, 그리고 함께 연동되어 하나가 되게 하시며, 신앙 관련, 수많은 진리의 교리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두 큰 빛을 사람의 마음에 허락하셨습니다.

 

※ 우리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두 크고 거룩한 빛, 사랑과 신앙의 빛이 환히 켜졌음을 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비록 아직은 지상에 머물며 살고 있지만, 그러나 천적 천사들 못지않게 천국을 경험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창1,14-17, AC.30-37,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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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Tbje8EgJpc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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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30. 14-17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Verses 14–17.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먼저, 신앙의 본질(the essence of faith)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롭게 빚어지는 중인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그것의 진보(progress)가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본문의 ‘큰 광명체’의 의미를 클리어하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What is meant by “great 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 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신앙의 본질과 생명 그 자체는 홀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자신 요한복음에서 선언하신 것처럼 말이지요. 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 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 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2] 새롭게 빚어지는 중인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신앙의 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

 

처음에는 그들에게 생명이라는 게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데요, 먼저는 기억 신앙(faith of the memory)으로입니다. 그저 일종의 지식 신앙(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이지요. 다음은 머리 신앙(faith in the understanding)으로, 곧 일종의 지성 신앙(an intellectual faith)으로입니다. 끝으로, 가슴 신앙(faith in the heart)으로입니다. 사랑 신앙(the faith of love), 구원 신앙(saving faith)이라고도 하지요. At first they have no life, 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 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 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 first by faith of the memory, 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 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 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 lastly by faith in the heart, which is the faith of love, or saving faith.

 

앞 첫 두 종류의 신앙을, 3절로 13절에서 못 움직이는 것으로, 세 번째인 사랑으로 활기찬 신앙은 20절로 25절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각각 설명하고 있습니다. 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 by things inanimate, 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 by animate things.

 

이런 이유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되는 신앙을 여기서 먼저 다루는 것이며, 이르시기를 ‘광명체’(luminaries)라 하셨고, 이때 사랑을 ‘낮을 주관하는 큰 광명체’, 사랑에서 비롯되는 신앙을 가리켜서는 ‘밤을 주관하는 작은 광명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주님은 이들을 언급하실 때 단수로 부르십니다. ‘광명체들이 있으라’ be 동사의 라틴어 표현을 보면 ‘sit luminaria’입니다. 복수 표현인 ‘sint luminaria’가 아닙니다. For this reason love, and faith thence derived, are now here first treated of, and are called “luminaries”; love being “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faith derived from love “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 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 it is said of them, in the singular number, “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 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 속 사람 안의 사랑과 신앙은 육체를 가진(corporeal) 겉 사람에게 있어서는 열과 빛에 해당합니다. 즉, 전자는 후자로 표현되는데요, 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 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

 

이것이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있어’, 곧 속 사람 안에 두신 이유입니다. 큰 광명체는 속 사람의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속 사람의 이해 안에, 마치 해의 빛이 그 빛이 닿는 대상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들 사랑과 신앙은 의지와 이해로만, 즉 의지와 이해가 겉으로 표현될 때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 in the expanse of heaven,” or in the internal man; a great luminary in its will, 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 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의지가 사랑의, 이해가 진리, 신앙의 영향을 각각 받게 된 것은 홀로 주님의 자비로 말미암음입니다. 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 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 주님은 기꺼이 주님 자신의 거룩한 것으로 하여금 사람의 것과 연동되게 하셨는데요, 곧 사랑, 선, 진리, 신앙 같은 신성한 것들로 하여금 사람의 의지, 이해와 연결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자비, 거룩한 신적 자비입니다.

 

 

31. ‘큰 광명체들’이 사랑과 신앙을 의미하며, 또 다른 데서는 이들을 가리켜 ‘해, 달, 별들’이라 한다는 사실은 에스겔서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great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and are also called “sun, moon, and stars,”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Ezekiel: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2:7-8) When I shall extinguish thee, I will cover the heavens and make the stars thereof black; I will cover the sun with a clou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ll the luminaries of the light of heaven will I make black over thee, and I will set darkness upon thy land. (Ezek. 32:7–8)

 

이 구절에 나오는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말씀에서는 일반적으로 감각적이기만, 그리고 지식적이기만 한 원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감각적이고 지식적이기만 한 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끝나버렸음을 말합니다. In this passage Pharaoh and the Egyptians are treated of, by whom are meant, in the Word, 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 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그래서 이사야에서 So in Isaiah: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사13:9-10) The day of Jehovah cometh to set the land in desolation, for the stars of heaven and the constellations thereof shall not give their light; the sun is darkened in his going forth, and the moon shall not cause her light to shine. (Isa. 13:9–10)

 

계속해서, 요엘서에는 Again, in Joel: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욜2:1-2,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the earth trembleth before him, the heavens are in commotion; the sun and the moon are blackened, and the stars withdraw their brightness. (Joel 2:1–2, 10)

 

[2] 이사야서에서 주님은, 주님의 오심과 이방인들의 각성, 곧 결과적으로 새 교회의 도래, 그리고 특별히 어두움에 있다가 빛을 받고, 그리고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한 사람들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Again, in Isaiah,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and the enlightening of the gentiles, consequently of a new church, and in particular of all who are in darkness, and receive light, and are being regenerated: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사60:1-3, 20) Arise, shine, for thy light is come; behold darkness covers the earth, and thick darkness the peoples, and Jehovah shall arise upon thee, and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thy sun shall no more go down, neither shall thy moon withdraw itself, for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Isa. 60:1–3, 20)

 

다윗도 그렇게 노래합니다. So in David: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36:5-9) Jehovah in intelligence maketh the heavens; he stretcheth out the earth above the waters; he maketh great luminaries, the sun to rule by day, the moon and stars to rule by night. (Ps. 136:5–9)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148:3-4) Glorify ye Jehovah, sun and moon, glorify him, all ye stars of light, glorify him, ye heavens of heavens, and ye waters that are above the heavens. (Ps. 148:3–4)

 

[3] 이 모든 구절들에서 분명히 ‘광명체들’은 사랑과 신앙을 상징합니다. In all these passages,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끊임없이 등불이 타오르게 하신 이유는 바로 이것, 곧 ‘광명체들’로 하여금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현하고 상징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교회의 모든 규례는 주님을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It was because “luminaries” represented and signified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at it was ordained in the Jewish church that a perpetual luminary should be kept burning from evening till morning, for every ordinance in that church was representative of the Lord.

 

이 빛에 대하여 기록되기를, Of this luminary it is written: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출27:20-21) Command the sons of Israel that they take oil for the luminary, to cause the lamp to ascend continually: in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ithout the veil, which is before the testimony, shall Aaron and his sons order it from evening even until morning, before Jehovah. (Exod. 27:20–21)

 

이 모든 것이 사랑과 신앙을 상징한다는 사실, 주께서 거기에 불을 붙이셔서 먼저 속 사람에게 빛을 비추시고, 그렇게 속 사람을 통해서 또 겉 사람에게 말이지요. 주님의 이런 신적 자비를 우리는 말씀 곳곳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That these things signify love and faith, which the Lord kindles and causes to give light in the internal man, and through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hown in its proper place.

 

 

32.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큰 광명체들’로 부르시다가, 그 다음엔 사랑은 ‘큰 광명체’, 신앙은 ‘작은 광명체’로 부르시고, 계속해서 사랑에 관해서는 ‘낮을 주관하라’, 신앙에 관해서는 ‘밤을 주관하라’ 하십니다. 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 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 luminary,” and faith a “lesser luminary”; 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 by 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 by night.”

 

이 모든 것이 그동안은 감추어진 하늘의 비의(秘義, 아케이나 arcana)였는데 이제, 특히 종말의 때인 오늘날,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 비의들에 대한 설명이 허락되었습니다. 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 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

 

이들 비의들이 종말인 오늘날, 특히 더 봉인된 이유는, 지금이 시대의 끝,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주 희귀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신앙 또한 아주 희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 자신 복음서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예언하신 것입니다. 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24:29) The sun shall be darkene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nd the stars shall fall from heaven, and the powers of the heavens shall be shaken. (Matt. 24:29)

 

여기서 ‘해’가 의미하는 것은 사랑인데, 그 해가 어두워진다 하시며, ‘달’은 신앙을, 그런데 그 달이 빛을 내지 않는다 하십니다. ‘별들’은 신앙의 지식들인데, 하늘에서 떨어진다 하십니다. 이 ‘별들’이 ‘하늘의 권능들’입니다. By the “sun” is here meant love, which is darkened; by the “moon” faith, which does not give light; 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 which fall from heaven, and which are the “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2] 태고교회는 사랑 밖에는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천적 천사들도 사랑과 관련되지 않은 무슨 다른 신앙을 알고 있지 않습니다.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천국 전체가 사랑입니다. 천국에서 사랑 말고 무슨 다른 삶이라는 건 없습니다. 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 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

 

천국의 모든 행복은 여기, 곧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이 사실은 한 번도 그 설명이 허락된 적도, 심지어 어느 누구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어서 더욱 놀라운 것입니다. 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 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 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

 

사랑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은 주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렇게 알고, 말하고, 지각할 뿐입니다. 모든 사랑, 그리고 그 결과 삶 전체가, 삶은 곧 사랑인데, 그래서 행복이라는 것은 오직 홀로 주님으로부터만 옵니다. 주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로부터는 어떤 사랑도, 삶이나 생명, 행복을 조금도 얻지 못합니다. 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 love the Lord from the heart, but yet know, declare, and perceive, that all love, 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

 

주님은 모든 사랑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을 큰 광명체로, 혹은 주님의 변형 관련 말씀에서, ‘해’로 표현하셨습니다. 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 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2) His face did shine as the sun, and his raiment was white as the light. (Matt. 17:2)

 

얼굴은 내면의 가장 깊은 것들을 비추며, 옷은 그것들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비춥니다. 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 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

 

그래서 주님의 신성은 ‘해’, 혹은 사랑으로 상징되고, 주님의 인성은 ‘빛’, 혹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상징되었습니다. 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 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창1,11-13, AC.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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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29. 11, 12, 13절,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Verse 11, 12, 13.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땅’, 곧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천적(天的, celestial) 씨앗들을 받아 뭔가 선하고 참된 것들을 결실할 준비가 되면, 이제 주님은 먼저 무슨 부드러운 것이 솟아나게 하시는데 그게 바로 ‘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뭔가 좀 더 유익한 것, 자기 안에 씨를 맺을 수 있는 것, 곧 ‘씨 맺는 채소’를, 그리고 끝으로, 열매까지 맺을 수 있는 어떤 선한 것,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각기 종류대로 나게 하십니다. When the “earth,” or man, has been thus prepared to receive celestial seeds from the Lord, and to produce something of what is good and true, then the Lord first causes some tender thing to spring forth, which is called the “tender herb”; then something more useful, which again bears seed in itself, and is called the “herb yielding seed”; and at length something good which becomes fruitful, and is calle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each according to its own kind.

 

※ 천적(天的, celestial)이란, ‘천국적인, 천국에 속한’이란 의미이며, 현대 영어로는 ‘heavenly’ 정도가 되겠습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 곧 주님의 선(善, good)과 진리(眞理, truth)로 이루어지는 나라이므로, 만일 어떤 선과 진리의 결과, 천국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되면, 그것을 가리켜 ‘천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여기 ‘천적 씨앗들’(celestial seeds)이란, 앞서 첫째 날에 관한 구절인 2절로 5절에 나오는 ‘수면 위’, 곧 리메인스를 비롯, ‘빛’, 곧 감각과 육(肉)을 초월하는 뭔가 다른 게 있다는 깨달음, 그리고 둘째 날에 관한 6절로 10절, ‘궁창’ 및 ‘궁창 위의 물’, ‘궁창 아래의 물’, 곧,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흘러들어가는, 주님에게 속한 모든 좋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다음은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게 될 제일 첫 번째 상태입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다 다 아직 참된 신앙을 가진 게 아닙니다. 이런 상황이지만, 그래도 그는 나중에는 이런 참 신앙을 가지게 될 겁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아직은 이런 게 주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는 이제 겨우 신앙생활이라는 걸 시작하는 준비단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The man who is being regenerated is at first of such a quality that he supposes the good which he does, and the truth which he speaks, to be from himself, when in reality all good and all truth are from the Lord, so that whosoever supposes them to be from himself has not as yet the life of true faith, which nevertheless he may afterwards receive; for he cannot as yet believe that they are from the Lord, because he is only in a state of preparation for the reception of the life of faith.

 

이 상태를 여기서는 못 움직이는(inanimate) 생물, 곧 식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이제 이어지는 신앙생활의 네 번째 상태에서는 움직이는 생물, 곧 동물로 설명할 것입니다. This state is here represented by things inanimate, and the succeeding one of the life of faith, by animate things.

 

※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야만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공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으므로 아직 참 생명이 없으며, 그래서 ‘못 움직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2] 주님이 마지못해(deigne) 직접 자신을 드러내신 말씀들을 보면, 주님은 씨를 뿌리는 분이십니다. ‘씨’는 그분의 말씀이고, ‘땅’은 사람입니다. (마13:19-24, 37-39; 막4:14-21; 눅8:11-16) The Lord is he who sows, the “seed” is his Word, and the “earth” is man, as he himself has deigned to declare (Matt. 13:19–24, 37–39; Mark 4:14–21; Luke 8:11–16).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13:19-24)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마13:37-39)

 

같은 취지로, 주님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보태셨습니다. To the same purport he gives this description: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So is the kingdom of God, as a man when he casteth seed into the earth, and sleepeth and riseth night and day, and the seed groweth and riseth up, he knoweth not how; for the earth bringeth forth fruit of herself, first the blade, then the ear, after that the full corn in the ear. (막4:26-28)

 

‘하나님의 나라’는 일반적으로는 천국 전체를, 그보다 덜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참된 교회를, 그리고 특별하게는 참 신앙의 사람들, 신앙생활을 통해 거듭나고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By the “kingdom of God,” in the universal sense, is meant the universal heaven; in a sense less universal, the true church of the Lord; and in a particular sense, everyone who is of true faith, or who is regenerate by a life of faith.

 

그래서 그런 사람을 또한 ‘천국’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 안에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인데요,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친히 이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입니다. Wherefore such a person is also called “heaven,” because heaven is in him; and likewise the “kingdom of God,”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in him,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Luke: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Being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눅17:20-21)

 

이것이 사람의 거듭남 세 번째 연속 스테이지인 뉘우침, 후회, 회개의 단계입니다. 그늘에서 빛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동일한 패턴, 방식이며, 그래서 말씀하시길, 13절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 and in like manner proceeding from shade to light, or from evening to morning; wherefore it is said (verse 13),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11-13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속뜻)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 안에서 첫째 날, 둘째 날, 곧 리메인스와 빛, 그리고 속 사람, 겉 사람 작업을 마치신 주님은 이제 시작되는 거듭남의 손짓, 발짓을 기뻐하십니다. 비록 아직 선행도, 진실한 말도 제 잘난 맛에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것이 셋째 날, 곧 거듭남의 세 번째 단계요, 상태입니다.

 

 

※ 둘째 날, 궁창을 다룰 때,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듭나고 있는 가운데 재미있는 사실은, 겉 사람의 경우, 그 본성상, 사람은 지금 자기가 행하는 선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안다는 것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남이 시작되었어도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주님은 처음부터 감안하고 계십니다. 그는 자기 것으로 이렇게 하는 줄 알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이런 착각까지도, 그의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사용하셔서 결국은 그를 주님 쪽으로 이끄십니다...’

 

아멘, 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올곧고, 마음이 반듯한 사람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살짝 아쉬운 점은,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잘난 체하고 하는 것을 아주 역겨워하며, 못견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 중에 아주 날카롭고 예민한 사람들이 많은가 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의 이런 사랑의 모습, 모든 걸 감안하시고 품고가시는 모습에 주목하고, 우리는 주님 본받아 좀더 품이 넉넉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AC.29, 창1,11-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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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28. 10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Verse 10.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말씀에서, ‘’ 하면 거의 백 프로 지식(라, cognitiones et scientifica, 앎, 인식 및 학문)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바다’는 지식을 모아놓은 곳, 지식을 저장한 곳을 상징하지요. It is a very common thing in the Word for “waters” to signify 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 and consequently for “seas” to signify a collection of knowledges.

 

이사야입니다. As in Isaiah: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9) 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scientia] of Jehovah, as the waters cover the sea. (Isa. 11:9)

 

지식의 결핍을 다루고 있는, 이사야서 다른 데서는 And in the same prophet, where a lack of knowledges [cognitionum et scientificorum] is treated of:

 

5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6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 (사19:5-6) The waters shall fail from the sea, and the river shall be dried up and become utterly dry, and the streams shall recede. (Isa. 19:5–6)

 

학개서에서는, 새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In Haggai, speaking of a new church:

 

6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2:6-7)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the dry [land]; and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 of all nations sha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Hag. 2:6–7)

 

또한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과 관련, 스가랴에서는 And concerning man in the process of regeneration, in Zechariah:

 

7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슥14:7-8) There shall be one day, it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but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and it shall be in that day that living waters shall go out from Jerusalem, part of them toward the eastern sea, and part of them toward the hinder sea. (Zech. 14:7–8)

 

다윗 또한 지금은 황폐해졌으나 앞으로 거듭나 주님을 섬기게 될 사람을 묘사하면서 David also, describing a vastated man who is to be regenerated and who will worship the Lord:

 

33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34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시69:33-34) Jehovah despiseth not his prisoners; let the heavens and the earth praise him, the seas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therein. (Ps. 69:33–34)

 

’은 뭘 담는 것, 곧, 일종의 리시피언트(recipient)인데, 스가랴를 보면 나옵니다. That the “earth” signifies a recipient, appears from Zechariah: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슥12:1) Jehovah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 of the earth, and formeth the spirit of man in the midst of him. (Zech. 12:1)

 

 

※ 이상으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10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속뜻)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 안에서 주님은 궁창, 곧 속 사람을 만드시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분하신 후, 속 사람 안에 두신 주님의 지식을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가게 하십니다. 주님은 이 겉 사람 안에 보관하신 지식으로 나중에 그의 회심(回心)에 사용하실 예정이십니다. 이 지식은 속 사람을 통해서 겉 사람에게 전달된 주님의 선과 진리, 곧 주님의 신성이십니다.

 

※ 주님의 시야는 영원하시며, 무궁하십니다. 주님은 이런 능력으로 섭리하십니다. 우리 역시 타인은 물론, 자신을 향해서도 주님의 이런 시야를 가지고 대해야 하겠습니다. 즉, 사람들의 어떤 표면적인 모습 그 이면에 있는, 주님이 보관하신 주님의 것, 곧 신성을 발견하며, 그 신성에 맞는 예의를 가지고 사람들을, 곧 주님을 대해야, 섬겨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은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뿐이겠습니까?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 주님의 신성이 있으므로 사실은,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마치 주님 대하듯 예의바르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이웃 사랑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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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A4jRifr_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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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27. 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Verse 9.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자기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리고 진리들과 선들이 속 사람으로부터(from), 혹은 속 사람을 통해서(through) 겉 사람 안으로 주님으로부터, 비록 그렇게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흘러들어 온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 그때,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서는 그 진리들과 선들, 혹은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이 그의 기억 안에 쌓이게 되며, 그 지식들 가운데로 분류되어 들어가게 됩니다. 겉 사람의 기억 안으로 밀어넣어지고 있는 게 무엇이든, 그게 자연적이든, 아니면 영적, 혹은 천적이든, 그것은 기억-지식으로 거기에 머무르다가, 나중에 주님에 의해 꺼내어지기 때문입니다. 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이 지식들이 바로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즉, 한곳으로 모인 물이며, 이걸 ‘바다’라 하는 것입니다. 한편, 겉 사람 자신을 가리켜서는 ‘’이라 하고, 이어지는 10절에서는 ‘’이라 하고 있습니다. These knowledges are 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 and are called “seas,” 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 “dry [land],” and presently “earth,” as in what follows.

 

AC.27, 창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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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ptfqFtBg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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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24. 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Verse 6.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혹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가 날(day) 안에 참과 선에 속한 지식을 낳으시고(has brought forth), 빛을 처음으로 주십니다(has given). 이 빛은 곧 주님이시며,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십니다. 주님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그 어떤 선과 진리도 있을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후에,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구별을 두시는데(makes), 그 결과,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들(the knowledges, [cognitiones])과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들(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사이에 일종의 구별이 생깁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

 

속 사람은 ‘궁창’(穹蒼, an expanse),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이라 합니다.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2] 사람은 거듭남이 진행되기 전에는 무슨 속 사람 같은 게 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속 사람 같은 내면세계는커녕 오히려 겉 사람의 본성과 퀄리티 같은 거에 더 익숙해져 있지요. 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그는 생각하기를, ‘속 사람, 겉 사람은 서로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합니다.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그 자신 이미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일에 푹 잠겨 있으므로, 속 사람 같은 내면의 일들 역시 그런 식으로, 혼란스럽고 모호한 그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그런 까닭으로,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 하시고, 이어서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십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라’ 하십니다. 뒤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말이지요.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7-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Gen.1:7–8)

 

[3] 그래서 전체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사람이 이제 다음으로 관찰하게 되는 사실은, 먼저 속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속 사람에게 속한 일들은 선과 진리이며,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이라는 사실 등입니다.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그런데 이렇게 거듭나고 있는 가운데 재미있는 사실은, 겉 사람의 경우, 그 본성상 사람은 지금 자기가 행하는 선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안다는 것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남이 시작되었어도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주님은 처음부터 감안하고 계십니다. 그는 자기 것으로 이렇게 하는 줄 알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이런 착각까지도, 그의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사용하셔서 결국은 그를 주님 쪽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궁창 아래의 물’이 먼저 언급되고, ‘궁창 위의 물’이 뒤를 따르는 이유입니다.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이것이 바로 하늘의 신비입니다. 사람의 미련함, 어리석음, 연약함과 그에 따른 오류 같은 것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인도되어 선과 진리의 일들로 구부려지는 신비,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들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전체적이든 세부적이든, 겉 사람에게서 속 사람까지, ‘땅’에서 ‘하늘’까지 주님의 섭리 아래 한 사람의 거듭남으로 인도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비 중 신비입니다.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25.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예언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공통구와 같은 것입니다. 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As in Isaiah:

 

24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또 주의 오심을 드러내어 말하는 아래와 같은 구절을 보면, 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즉, 주님은 사람들의 오류나 틀린 생각을 바로잡으시지도, 재산이나 권력 등에 대한 탐욕을 끄지도 않으시고 대신, 그것들을 진리와 선 쪽으로 방향을 구부러지게 하십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이지요. 주님은 우리를 아프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5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42:5) 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내용이 같은 구절들은 반복해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26.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저녁’, ‘아침’, ‘날’의 의미는 앞서 5절에서 다룬 것과 같습니다. 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AC.24-26, 창1,6-8,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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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6U5cQiaze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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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22. 5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Verse 5.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저녁’이 의미하는 것과, ‘아침’이 의미하는 것을 이제 설명할 수 있습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 앞서 있었던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그늘진 상태, 거짓의 상태, 아무런 신앙이 없는 상태입니다. ‘아침’은 모든 후속 상태, 앞으로 진행될 상태를 말합니다. 빛의 상태, 진리의 상태, 신앙에 관한 지식의 상태입니다.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저녁’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본성에 속한 모든 걸 의미합니다. 반면에, ‘아침’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 주님께 속한 것을 말합니다. 다윗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아무 신앙이 없는 때를 ‘저녁’이라, 신앙의 때를 ‘아침’이라 하였으므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이 ‘아침’이요, 주님이 떠나가실 때, 그때는 신앙이 없는 때이므로, ‘저녁’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에서처럼 말입니다.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단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같은 식으로, 말씀에서 ‘아침’은 모든 주님의 오심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며,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새 창조에 관한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23. 때 자체를 가리키는데 ‘’(day)이 사용되는데, 말씀에서 이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이사야에서처럼,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사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사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이 때를 가리키는데 사용되기 때문에, 이 표현은 또한 그 때의 상태를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에서처럼 말입니다. 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렘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25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렘2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2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AC.22-23,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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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e8_HjwMR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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