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

 

The Internal Sense

 

14. 후속 작업에서, 주(主, the Lord)라는 이름은 온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이름 앞뒤로 무슨 다른 형용 없이 오직 ‘’로만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 “the Lord” 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온 천국에 걸쳐 그분은 주(主)로 시인 및 흠모의 대상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오직 그분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다음과 같이 부르라 명하셨습니다.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요13:13)

 

그래서 부활 후, 제자들은 그분을 ‘’라 하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 “the Lord.

 

※ 다음은 ‘주님의 교리’ 1번 글 참조 본문입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1-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19)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46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12:36, 46)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5)

 

 

15. 천국 전체가 주님 아닌 다른 아버지는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이 사실을 주님은 다음과 같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요14:6,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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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21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The Contents

 

6. 육 일, 또는 기간들은, 사람의 거듭남 관련, 수많은 일련의 상태들인데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7. 첫 번째 상태는 선행 상태인데, 두 가지, 유아기부터 거듭남 바로 직전까지의 상태를 포함합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이 상태를 일컬어 ‘혼돈’, ‘공허’, 그리고 ‘흑암’이라 합니다. This is called 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이때 첫 움직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자비인데요,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가 그것입니다. 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 “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8.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의 것과 사람의 것 사이, 하나의 구분이 생기는 때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주님의 것은 이름하여 말씀에서 ‘리메인스’라 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특별히 신앙 관련 지식이며, 이 지식은 유아기부터 배워 온, 그래서 차곡차곡 쌓인, 그러나 사람이 이 두 번째 상태에 이를 때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지식입니다.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혹은 슬픔 없이는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데요, 이런 일이 일어나면 몸과 세상, 즉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일은 마치 죽은 것처럼 휴면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그렇게 겉 사람에게 속한 일은 속 사람에게 속한 일로부터 분리됩니다.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속 사람에게 있는 것이 '리메인스'이며, 주님이 이렇게 쓰시려고 이때까지 보관해 오신 것입니다.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9. 세 번째 상태는 뉘우침의 상태입니다. 이때 사람은 그의 속 사람으로 말미암아 신앙적인 말, 종교적인 말도 하고, 체어리티(charity, 선행, 이웃 사랑)의 일 같은 선한 일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은 활력,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가 이런 일이 자기한테서 나오는 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이런 선을 가리켜 ‘’, 그리고 ‘씨 맺는 채소’, 나중에는 ‘열매 맺는 나무’라 합니다.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10. 네 번째 상태 때, 사람은 애정 어린 사랑의 사람, 조명받은 신앙의 사람이 됩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그는 앞서 실제로 경건하게 담론하고 선을 행했지만 그건 그가 수고한 시험과 엄격함의 결과로 그런 것이지, 신앙이나 체어리티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의 속 사람 안에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불이 켜진 까닭에, 이를 가리켜 ‘두 큰 광명체’라 합니다.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11. 다섯 번째 상태 때, 사람은 신앙으로 담론을 하며, 그래서 자기가 지금 진리 안에, 선 안에 있음을 확실히 압니다.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이제 활력, 곧, 생명력이 있으며, 그래서 이를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 그리고 ‘하늘의 새’라 합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12. 여섯 번째 상태 때, 사람은 신앙으로, 그리고 그래서 사랑으로 진실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합니다. 이제부터 그가 행하는 일들을 가리켜 ‘생물’이라, ‘짐승’이라 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이렇게 그가 즉시, 그리고 신앙과 사랑, 둘 다로 행하기 때문에, 그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으며, 그를 가리켜 ‘형상’이라 합니다.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그의 영적 삶은, 신앙의 지식이 속한, 그리고 체어리티의 일이 속한 그런 것, ‘먹을거리’라고 하는, 그런 것으로 밝아지고, 지속되며, 그의 자연적 삶 역시 몸과 감각에 속한 것으로 밝아지고, 지속됩니다. 그래서 사랑이 우위를 점하여 그가 천적 인간(天的, a celestial man)이 될 때까지 둘 사이엔 전투가 일어납니다. 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 “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13. 거듭남 가운데 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이 상태에까지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오늘날 절대다수가 겨우 첫 번째 상태에, 일부가 겨우 두 번째, 그리고 그렇게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이 여섯 번째 상태는 아주 소수, 일곱 번째 상태까지 도달하는 경우는 그야말로 희귀한 경우입니다.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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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y_qjGrKO_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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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58. 4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Verse 4. Unto the place of the altar which he had made there in the beginning; and there Abram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제단이 있는 곳으로’, 예배(worship)에 관한 거룩한 것들을, ‘그가 처음으로 쌓은’, 주님의 어린 시절, 주님이 가지고 계셨던 것을, ‘아브람이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 상태에서 드린 내적 예배를 각각 의미합니다. Unto the place of the altar” signifies the holy things of worship; “which he had made in the beginning” signifies which he had when a child; “and there Abram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signifies the internal worship in that state.

 

 

1559. 제단이 있는 곳으로 Unto the place of the altar.

 

이것이 ‘예배에 관한 거룩한 것들’에 관한 의미임은 ‘제단’의 의미가 예배에 관한 주된 표상(principal representative)인 점을, 제단하면 예배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AC.921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e holy things of worship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n “altar” as being the principal representative of worship (concerning which, see n. 921).

 

 

1560. 그가 처음으로 쌓은 Which he had made in the beginning.

 

이것이 ‘주님이 아이였을 때 가지셨던’이라는 의미임은 앞장 8절의 내용을 보시면 됩니다. That this signifies which he had when a child,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in the preceding chapter at verse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12:8)

 

여기서는 ‘처음으로’(in the beginning)라 하고, 앞절에서는 ‘전에’(at the first)라 하는 이유는, 그때가 주님이 지식으로 가득 채워지시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It is here said, “in the beginning,” and in the preceding verse, “at the first,” because that was before the Lord had been imbued with knowledges.

 

사람이 가르침을 받기 이전 모든 상태를 ‘’(the first)[라. 이니티움 initium]이라 하고, 그가 가르침을 받기 시작할 때를 ‘처음’(the beginning)[라. 프링치피움 principium]이라 합니다. All the state before a man is instructed, is “the first” [initium]; and when he begins to be instructed, it is “the beginning” [principium].

 

 

1561. 아브람이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here Abram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이것이 ‘그 상태에서 드린 내적 예배’라는 의미임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의 의미를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AC.440, 1455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e internal worship in that stat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alling on the name of Jehovah” (explained above, n. 440, 1455).

 

여기서도 역시, 그 유사한 상태들 때문에, ‘제단’이 언급되고 있으며, 이르기를,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하고 있습니다. 앞장 8절의 경우처럼 말이지요. 다만 그 차이가 있다면, 앞장 8절이 뿌연 상태였다면 지금 여기는 또렷한 상태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Here too, because of the similarity of the states, mention is made of an “altar,” and it is said that he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as was the case in the preceding chapter, verse 8; but there is this difference, that as compared with the former, the state here described is a lucid one.

 

위에 묘사된 상태에서 지식이 이식되어 뿌리를 내리면, 그 지식은 상태를 명료하게 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선이 지식을 통해 먼젓번 천적 상태와 조인이 될 때, 그때 그 활동이 지금 우리 앞에 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배 자체가 어떤 활동으로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천적인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When knowledges are implanted in the state described above, they make it lucid; and when truth and good are conjoined with the former celestial state by means of knowledges, its activity is then described as in the words now before us; for worship itself is nothing but a certain activity coming forth from the celestial which is within.

 

천적인 것 그 자체는 활동 없이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The celestial itself cannot possibly exist without activity.

 

예배는 그 첫 번째 활동입니다. 천적인 것은 그 자신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천적인 것은 이런 것, 곧 주님을 예배하는 데서 기쁨을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Worship is its first activity; for it puts itself forth in this way, because it perceives joy in it.

 

모든 사랑의 선과 체어리티의 선은 그 자체가 본질적, 필수적 활동입니다. All the good of love and of charity is essential activity itself.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4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속뜻)

지식을 통해 이젠 명료한 상태가 되신 주님은 어린 시절 주님이 가지고 계셨던 그 천적인 것들과 결합, 참된 예배의 기쁨을 맛보셨다

 

※ 창세기 12장부터는 표상교회의 시작입니다.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대신 표현’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이후 주님의 초림 때까지의 모든 말씀(The Word)은 표상으로 읽어야 합니다. 즉,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주님의 어린 시절을 표상합니다. 하란을 출발, 가나안을 거쳐 애굽에 내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오는 이 일련의 여정은, 주님의 어린 시절, 주님의 지식과 이성, 지성이 어떻게 발전하셨는지, 어떻게 세상 여느 어린이들처럼 시작하셨는지, 그러나 또 다른 점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빠른 성취를 이루실 수 있었는지 등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2021-11-07(D1)-주일예배(2228, AC.1558-1561, 창13,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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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28_G2FGsP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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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53. 3절,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Verse 3. And he went according to his journeys, from the south and even to Bethel, unto the place where his tent was at the first, between Bethel and Ai.

 

그가 길을 떠나’, 질서(order)를 따라, ‘네게브(남쪽, the south)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며’, 총명의 빛(the light of intelligence)으로부터 출발, 지혜의 빛(the light of wisdom) 안으로,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어린 시절 주님이 지식으로 채워지시기 전, 가지고 계셨던 거룩한 것들에, ‘벧엘과 아이 사이’, 여기, 곧 앞 내용처럼, 지식의 천적(天的, celestial)인 것들,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을 각각 의미합니다. He went according to his journeys” signifies according to order; “from the south and even to Bethel” signifies from the light of intelligence into the light of wisdom; “unto the place where his tent was before” signifies to the holy things which there were before he was imbued with knowledges; “between Bethel and Ai” signifies here, as before, the celestial things of knowledges, and worldly things.

 

 

1554. 그가 길을 떠나 He went according to his journeys.

 

이것이 ‘질서를 따라, 순서대로’라는 의미임은, ‘’(journeys)의 의미가 다음 단계들로 더욱 나아감이라는 사실에서(관련, AC.1457 참조) 비롯됩니다. 그리고 이 일들이 질서를 따라, 순서대로 일어났기 때문에 여기 ‘’은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according to ord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journeys” as being further progressions (concerning which, see n. 1457); and as these were made according to order, “journeys” here signify nothing else.

 

아주 어린 시절부터 주님은 모든 신적 질서(Divine order)를 따라 천적인 것들을 향해 나아가셨으며, 아브람에 관한 기록을 통해 이런 질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그 속뜻입니다. From his earliest infancy the Lord advanced according to all Divine order to celestial things, and into celestial things; and in the internal sense, the nature of this order is described by what is said concerning Abram.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지음 받는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질서를 따라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질서는 사람마다 매우 다양한데요, 그것은 각 사람의 성정과 타고남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According to such order also are all led who are being created anew by the Lord; but this order is various with men, according to the nature and genius of each one.

 

그러나 사람이 거듭날 동안 이 질서가 사람을 어떻게 인도하는지는 그 어떤 사람한테도, 심지어 천사들한테도 대략적으로만 허락됩니다. 오직 주님만 홀로 아십니다. But the order by which a man is led while being regenerated is known to no man, and not even to the angels, except obscurely, but to the Lord alone.

 

 

1555. 네게브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며 From the south and even to Bethel.

 

이것이 ‘총명의 빛으로부터 출발, 지혜의 빛 안으로’라는 의미임은, ‘네게브’의 의미가 총명의 빛, 혹은 같은 말이지만, 내면을 비추는 빛의 상태(AC.1458번 글 참조)라는 점과, ‘벧엘’의 의미가 지식들로 말미암아 열리는 천적인 빛(AC.1453번 글 참조)이라는 점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from the light of intelligence into the light of wisdom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south” as being the light of intelligence, or what is the same, a state of light as to the interiors (spoken of before, n. 1458);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el” as being celestial light arising from knowledges (concerning which before, n. 1453).

 

이것을 총명의 빛이라 하는데, 이 빛은 신앙에 관한, 선과 진리의 지식으로 얻어지는 빛입니다. 반면, 지혜의 빛은 그렇게 살 때, 즉, 총명의 빛으로 살 때 생기는 생명의 빛입니다. That is called the light of intelligence which is procured by means of the knowledges of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but the light of wisdom is that of the life which is thence acquired.

 

총명의 빛은 지적(intellectual) 파트, 혹은 이해(the understanding)에 관한 것이지만, 지혜의 빛은 의지(the will) 파트, 혹은 생명(삶)에 관한 것입니다. The light of intelligence regards the intellectual part, or the understanding; but the light of wisdom regards the will part, or the life.

 

[2] 거의 없지만, 만약 있다면, 극소수의 사람만이 사람이 어떻게 참된 지혜에 이르게 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Few, if any, know how man is brought to true wisdom.

 

총명은 지혜가 아니며, 지혜로 인도되는 그 어떤 것입니다. 무엇이 참이요 선인지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곧 참되고 선한 사람인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건 실제로 그렇게 되어야, 실제로 지혜로와야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Intelligence is not wisdom, but leads to wisdom; for to understand what is true and good is not to be true and good, but to be wise is to be so.

 

지혜는 오직 삶으로만, 사람이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만, 지혜롭다 할 수 있는 겁니다. Wisdom is predicated only of the life—that the man is such.

 

사람은 아는 거, 곧, 지식을 통해서 지혜나 생명을 접하게 됩니다. A man is introduced to wisdom or to life by means of knowing [scire et nosse], that is, by means of knowledges [scientiae et cognitiones].

 

※ 그렇다고 지적 추구, 지식 습득이 소용 없다거나 무슨 저급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지혜에 이르려면 일단 뭘 배워 아는 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지식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해 천적 지혜, 주님의 지혜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식의 쓰임새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 파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지(the will), 즉, 마음먹는 능력, 결심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the understanding), 즉, 이해하는 능력, 배우는 능력입니다. 의지가 메인 파트고, 이해는 보조입니다. In every man there are two parts,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the will is the primary part, the understanding is the secondary one.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사후 삶(死後, life after death)은 그의 의지 파트를 따른다는 겁니다. 지적(intellectual) 파트가 아니고 말입니다. Man’s life after death is according to his will part, not according to his intellectual part.

 

의지는 사람 안에서 그의 유아기부터 어린시절까지 주님에 의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밀어넣으시는 이노센스(innocence, 순진)에 의해, 그리고 부모, 보모(保姆, nurse) 및 같은 연령대 어린이들을 향한 체어리티(charity, 자선, 관용, 너그러움)에 의해, 그리고 사람이 전혀 알 수 없는, 천적인, 다른 많은 일들에 의해 일어납니다. The will is being formed in man by the Lord from infancy to childhood, which is effected by means of the innocence that is insinuated, and by means of charity toward parents, nurses, and little children of a like age; and by means of many other things that man knows nothing of, and which are celestial.

 

사람이 유아 및 어린이일 동안, 먼저 사람 안에 이들 천적인 것들이 주입되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Unless these celestial things were first insinuated into a man while an infant and a child, he could by no means become a man.

 

첫 번째 면(plane)은 이렇게 형성됩니다. Thus is formed the first plane.

 

[3] 그러나 사람은 또한 이해하는 능력이 부여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의지만으로도 그렇습니다. 반드시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이 함께 해야 사람입니다. 또 이해하는 능력은 지식 없이는 생기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어린 시절 주님은 서서히 지식으로 가득 채워져나가야만 하셨습니다. But as a man is not a man unless he is endowed also with understanding, will alone does not make the man, but understanding together with will; and understanding cannot be acquired except by means of knowledges [scientiae et cognitiones] and therefore he must, from his childhood, be gradually imbued with these.

 

두 번째 면은 이렇게 형성됩니다. Thus is formed the second plane.

 

이 지적 파트가 학습을 통해 지식들, 특별히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을 얻게 되는 이때가 일단은 사람의 거듭남의 시동이 걸릴 수 있는 때가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그의 안에서 거듭남이 시작이 되고, 진행이 되면, 이때 주님에 의해 진리와 선이 이식(移植, implant)됩니다. 이 이식은 주님에 의해 그의 유아 시절부터 무상으로 공급되어 온 천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가지고 일어나며, 이 이식의 결과, 그의 지적인 것들과 그의 천적인 것들이 하나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이 그것들과 결합하시면서, 사람은 이번에는 체어리티를 무상으로 공급받으며, 드디어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이 체어리티는 양심에 속하게 됩니다. When the intellectual part has been instructed in knowledges [scientiae et cognitiones], especially in the knowledges of truth and good, then first can the man be regenerated; and, when he is being regenerated, truths and goods are implanted by the Lord by means of knowledges in the celestial things with which he had been endowed by the Lord from infancy, so that his intellectual things make a one with his celestial things; and when the Lord has thus conjoined these, the man is endowed with charity, from which he begins to act, this charity being of conscience.

 

이런 방법으로, 사람은 처음으로 새 생명을 받습니다. 이 일은 이렇게 차근차근 일어납니다. In this way he for the first time receives new life, and this by degrees.

 

이 생명의 빛을 지혜라 하며, 첫 자리를 차지하고, 총명 위에 자리를 잡습니다. The light of this life is called wisdom, which then takes the first place, and is set over the intelligence.

 

이렇게 세 번째 면이 형성됩니다. Thus is formed the third plane.

 

사람이 몸 안에 있을 동안 이렇게 되면, 사후에도 계속해서 완벽해지는 가운데 있게 됩니다. When a man has become like this during his bodily life, he is then in the other life being continually perfected.

 

이상의 내용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총명의 빛이 무엇이며, 지혜의 빛이 무엇인지 하는 것입니다. These considerations show what is the light of intelligence, and what the light of wisdom.

 

 

1556.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Unto the place where his tent was before.

 

이것이 ‘어린 시절 주님이 지식으로 채워지시기 전 주님 안에 있었던 거룩한 것들에’라는 의미임은, ‘장막’(tent)의 의미가 신앙의 거룩한 것들인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 AC.414, 1452 및 방금전까지 말씀드린 것 참조). 그래서 이것의 의미가 ‘지식으로 채워지시기 전 주님이 가지고 계셨던 천적인 것들에’임은 앞 장에서 말씀드린,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창12:8) 내용으로 분명합니다. 이때는 애굽으로 출발하시기 전, 그러니까 주님이 지식으로 채워지시기 전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o the holy things which there were before he was imbued with knowledge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tent,” which is the holy things of faith (concerning which, n. 414, 1452, and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it thus signifies to the celestial things which the Lord had before he was imbued with knowledges, as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in the preceding chapter: “and Abram removed from thence unto the mountain on the east of Bethel, and pitched his tent” (verse 8); which was before he departed into Egypt, that is, before the Lord was imbued with knowledges.

 

 

1557. 벧엘과 아이 사이 Between Bethel and Ai.

 

이것이 ‘지식의 천적인 것들과,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을 의미함은 ‘벧엘’의 의미, 곧 지식으로 말미암은 지혜의 빛인 점(AC.1453 참조)과, ‘아이’의 의미가 세속적인 것들에서 나오는 빛인 점을(AC.1453 계속 참조) 볼 때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celestial things of knowledges, and worldly thing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el,” which is the light of wisdom by means of knowledges (see n. 1453);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Ai,” which is the light from worldly things (also spoken of in n. 1453).

 

거기 언급된 걸 보면, 그때 주님의 상태는 아이같은 순진한 상태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이의 상태는 세속적인 것들이 섞여있는 상태인데요, 세속적인 것들은 진리와 선이 지식을 통해 천적인 것들에 심기기 전까지는 사라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사람은 천적인 것이 무엇인지, 세속적인 무엇인지를 알 때까지는 천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From what is there said, it may be seen what the Lord’s state then was, namely, that it was childlike; and the state of a child is such that worldly things are present; for worldly things cannot be dispersed until truth and good are implanted in celestial things by means of knowledges; for a man cannot distinguish between celestial and worldly things until he knows what the celestial is, and what the worldly.

 

지식은 평범하고 흐릿한 아이디어를 또렷하게 하며, 지식으로 그 아이디어를 더 또렷하게 할수록 세속적인 것들이 더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Knowledges make a general and obscure idea distinct; and the more distinct the idea is made by means of knowledges, the more can the worldly things be separated.

 

[2] 하지만 아이같은 상태는 여전히 거룩합니다. 순진하기(純眞, innocent) 때문이지요. But still that childlike state is holy, because it is innocent.

 

무지(無知, ignorance) 안에 순진이 있을 때, 무지하다고 해서 결코 거룩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거룩은 순진한 무지 안에 거주하기 때문입니다. Ignorance by no means precludes holiness, when there is innocence in it; for holiness dwells in ignorance that is innocent.

 

주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경우, 거룩은 무지 안에서 홀로 거주할 수 있습니다. 무지가 아니면 그들은 절대 거룩할 수 없습니다. With all men, except with the Lord, holiness can dwell solely in ignorance; and if not in ignorance, they have no holiness.

 

가장 높은 총명과 지혜의 빛 안에 있는 천사들 본인의 경우에도 거룩은 여전히 무지 안에 거주합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자기들이 무엇을 알고 있든지 그것은 다 주님으로 말미암았음을 알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With the angels themselves, who are in the highest light of intelligence and wisdom, holiness also dwells in ignorance; for they know and acknowledge that of themselves they know nothing, but that whatever they know is from the Lord.

 

그들은 또 알고 인정하기를, 그들의 모든 기억-지식과 총명, 그리고 지혜는 주님의 무한하신 지식과 총명, 그리고 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런 것이 무지입니다. They also know and acknowledge that all their memory-knowledge, intelligence, and wisdom, is as nothing in comparison with the infinite knowledge, intelligence, and wisdom of the Lord; thus that it is ignorance.

 

자기가 습득한 것들을 초월하는, 자기가 미처 습득하지 못한 것들이 무한히 존재한다, 무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천사들의 상태인 거룩한 무지 가운데 있을 수 없습니다. He who does not acknowledge that there are infinite things with which he is not acquainted, beyond those with which he is acquainted, cannot be in the holiness of ignorance in which are the angels.

 

[3] 거룩한 무지라는 건 남들보다 더 무지, 무식해지는 걸로 되는 게 아니고, 대신 몇 가지, 곧 사람이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자기가 아는 것에 비해 모르는 것은 무한하고, 특히 자기가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들은 천적인 것들에 비하면, 즉 이해에 속한 것들은 생명에 속한 것들에 비하면 정말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그런 걸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The holiness of ignorance does not consist in being more ignorant than others; but in the acknowledgment that of himself a man knows nothing, and that the things he does not know are infinite in comparison with those he does know; and especially does it consist in his regarding the things of the memory and of the understanding as being of but little moment in comparison with celestial things; that is, th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in comparison with the things of the life.

 

주님의 경우, 주님은 인성(things human)을 신성(things Divine)과 결합해나가실 때, 질서를 따라 진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은 처음 어린시절 가지셨던 그 천적 상태에 도착하셨습니다. 이 상태는 세속적인 것들도 있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As regards the Lord, as he was conjoining things human with things Divine, he advanced according to order; and he now for the first time arrived at the celestial state such as he had had when a child; in which state worldly things also were present.

 

이 상태에서 여전히 더욱 더 천적 상태로 나아기심으로써, 주님은 마침내 유아기 천적 상태에 이르셨고, 이 상태에서 주님은 그 인성(the human essence)을 신성(the Divine essence)과 온전히 결합하셨습니다. By advancing from this into a state still more celestial, he at length came into the celestial state of infancy, and in this he fully conjoined the human essence with the Divine essenc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3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속뜻)

어린 시절 주님은 부지런히 접하신 모든 지식으로 총명해지시고, 그 총명의 빛으로 지혜의 빛, 곧 어린 시절 간직하신 천적인 것들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셔서 마침내 도달, 인성과 신성을 하나되게 하셨다

 

※ 주님 안에서 지식, 곧 세상 지식과 종교적 지식이 바른 쓰임새 가운데 있음을, 즉, 주님을 지성에서 영성으로, 총명에서 지혜로 인도하도록 사용됨을 봅니다. 우리도 거듭남 가운데 있는 동안 주님이 허락셔서 접하게 되는 많은 지식들을 그렇게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듭 반복되지만, 주님은 한눈팔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이미 인성과 신성의 결합에 이르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본받아 거룩한 집중, 신성한 몰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021-11-05(D6)-매일예배(2226, AC.1553-1557, 창13,3),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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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4sly6atn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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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49. 2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Verse 2. And Abram was very rich in cattle, in silver, and in gold.

 

아브람에게 가축이 풍부하였더라’, 그때 주님에게 풍부하셨던 선(goods)을, ‘’, 진리(truths)를, ‘’, 진리로 말미암는 선을 각각 의미합니다. Abram was very rich in cattle” signifies the goods with which the Lord was then enriched; “in silver” signifies the truths; “and in gold” signifies the goods from truths.

 

 

1550. 아브람에게 가축이 풍부하였더라 Abram was very rich in cattle.

 

이것의 의미가 선인 것은 ‘가축’(cattle)과 ‘양 떼’(flock)의 의미가 선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good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attle,” and of “flock,” as being good (concerning which above, n. 343, 415).

 

 

1551. 은이 In silver.

 

이것의 의미가 진리인 것은 ‘’의 의미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ruth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silver” as being truth.

 

태고인(太古人)들은 사람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금속에 비유했습니다. 가장 내적, 천적 선은, 이것은 주님 사랑에 속한 선인데, 금(金, gold)에, 이 선으로 말미암는 진리는 은(銀, silver)에, 가장 낮은, 자연적 선은 동(銅, copper)에, 더 낮은 진리는 철(鐵, iron)에, 그들은 그저 단순히 비유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the goods and truths in man to metals; the inmost or the celestial goods, which are of love to the Lord, to gold; the truths which are from these, to silver; but the lower or natural goods, to copper; and the lower truths, to iron; nor did they simply compare them, but they likewise called them so.

 

그래서 기간들, 시대들 역시 같은 금속으로 비유되었는데, 각각 황금, 은, 동, 그리고 철 시대라 했습니다. 이 순서는 시대들이 이 순서로 다른 것의 뒤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Hence periods of time were also likened to the same metals, and were called the golden, the silver, the copper, and the iron ages; for the ages followed one another in this order.

 

황금 시대는 태고 교회 때를 말하는데, 태고 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습니다. 은 시대는 고대 교회 때를 말하며, 고대 교회는 영적 인간이었습니다. 동 시대는 그 다음 교회 때였으며, 그 다음이 철 시대였습니다. The golden age was the time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a celestial man; the silver age was the time of the ancient church, which was a spiritual man; the copper age was the time of the succeeding church; and to this succeeded the iron age.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이 본 우상도 유사한 걸 상징하고 있습니다. Similar things are also signified by the statue seen by Nebuchadnezzar in a dream, whose “head was of good gold, the breast and arms of silver, the belly and thighs of brass, the legs of iron” (Dan. 2:32–33).

 

32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단2:32-33)

 

이런 것이 시리즈로 전개되는 거나, 교회의 기간들, 시대들이 이 순서로 서로 이어지는 것이 같은 선지자, 같은 장을 보면 거기에 나옵니다. That this was to be the series, or that the periods of the church succeeded one another in this order, is evident from the same prophet, and in the same chapter.

 

[2] 말씀에서 ‘’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 속뜻은 진리를, 그 반대는 거짓을 각각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 구절들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That in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silver,” wherever named, signifies truth, and in the opposite sense falsity,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passages.

 

이사야에서 In Isaiah:

 

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사60:17) For brass I will bring gold, and for iron I will bring silver, and for wood brass, and for stones iron; I will also make thine officers peace, and thine exactors righteousness; (Isa. 60:17)

 

이 본문에서 각 금속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where it is evident what each metal means.

 

거기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곧, 주님의 오심과 주님의 천적 나라, 그리고 교회입니다.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자연적 선 대신 천적 선을,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자연적 진리 대신 영적 진리를,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육(肉)적 선(corporeal good) 대신 자연적 선을, ‘철로 돌을’, 감각적 진리(sensuous truth) 대신 자연적 진리를 각각 의미합니다. The Lord’s coming, and his celestial kingdom and church, are there treated of; “gold for brass” is celestial good instead of natural good; “silver for iron” is spiritual truth instead of natural truth; “brass for wood” is natural good instead of corporeal good; “iron for stones” is natural truth instead of sensuous truth.

 

같은 데서 In the same: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Ho, everyone that thirsteth, go ye to the waters; and he that hath no silver; go ye, buy and eat; (Isa. 55:1)

 

돈 없는 자’, 교회 내 많은 사람들처럼, 그리고 교회 밖 나라들처럼 진리에 대해선 무지하지만 체어리티의 선(the good of charity, 이웃 사랑의 선, 즉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he that hath no silver” is he who is in ignorance of truth, and yet in the good of charity, like many within the church, and the nations outside the church.

 

[3] 이번에도 같은 데서 In the same: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 (사60:9) The isles shall wait for me, and the ships of Tarshish in the beginning, to bring thy sons from far, their silver and their gold with them, unto the name of Jehovah thy God, and to the holy one of Israel. (Isa. 60:9)

 

여기서는 새 교회, 특별히는 이방인의 교회를, 보편적으로는 주님의 나라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스의 배들’, 지식을, ‘’, 진리를, ‘’, 선을 각각 가리킵니다. 이들은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Here a new church, or that of the gentiles, is treated of specifically, and the Lord’s kingdom universally; “the ships from Tarshish” denote knowledges; “silver,” truths; and “gold,” goods; for these are the things which they shall “bring to the name of Jehovah.

 

에스겔에서 In Ezekiel:

 

네가 또 내가 준 금, 은 장식품으로 너를 위하여 남자 우상을 만들어 행음하며 (겔16:17) Thou didst take the vessels of thine adorning of my gold and of my silver, which I had given thee, and madest for thee images of a male. (Ezek. 16:17)

 

여기 ‘’은 천적인 것에 관한 지식을, ‘’은 영적인 것에 관한 지식을 각각 가리킵니다. Here “gold” denotes the knowledges of celestial things; “silver,” those of spiritual things.

 

같은 데서 In the same: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모시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올랐느니라 (겔16:13) Thou wast adorned with gold and silver, and thy raiment was fine linen and silk, and broidered work. (Ezek. 16:13)

 

이는 예루살렘에 관한 내용인데, 예루살렘은 주님의 교회를 상징하며, 그 꾸밈, 단장이 여기 묘사되고 있습니다. This is said of Jerusalem, by which the Lord’s church is signified, and the adornment of which is thus described.

 

다시 Again:

 

3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4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겔28:3-4) Behold, thou art wise, there is no secret that they have hidden from thee; in thy wisdom and in thine intelligence thou hast gotten thee riches, and hast gotten gold and silver into thy treasures. (Ezek. 28:3–4)

 

이 본문은 두로에 관한 것인데, 여기서 ‘’은 지혜의 풍부함을, ‘’은 많은 총명을 가리킴이 명백합니다. This is said of Tyre, and it is plain that here “gold” is the wealth of wisdom, and “silver” the wealth of intelligence.

 

[4] 요엘에서 In Joel:

 

곧 너희가 내 은과 금을 빼앗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전으로 가져갔으며 (욜3:5) Ye have taken my silver and my gold, and have carried into your temples my goodly desirable things. (Joel 3:5)

 

이 본문은 두로와 시돈, 그리고 블레셋에 관한 겁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신전으로 옮긴 ‘은과 금’은 지식을 의미합니다. This is said concerning Tyre, Zidon, and Philistia; by which are signified knowledges, which are “the gold and the silver” that they have carried into their temples.

 

학개에서 In Haggai:

 

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2:7-9) The choice of all nations sha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the silver is mine, and the gold is mine; the glory of this latter house shall be greater than that of the former; (Hag. 2:7–9)

 

이 본문은 주님의 교회에 관한 건데, 특별히 ‘’과 ‘’에 대해 서술된 부분이 그렇습니다. where the Lord’s church is treated of, concerning which “gold” and “silver” are predicated.

 

말라기에서 In Malachi: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말3:3) He shall sit as a smelter and purifier of silver, and shall purify the sons of Levi; (Mal. 3:3)

 

이 본문은 주님의 오심에 관한 본문입니다. where the Lord’s coming is treated of.

 

다윗의 글에서 In David: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12:6) The discourses of Jehovah are pure discourses, silver smelted in a crucible of earth, smelted seven times; (Ps. 12:6)

 

일곱 번 단련한 은’, 신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the “silver purified seven times” denotes Divine truth.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갈 때, 그들에게 내리신 명령에 관하여 In respect to the command given to the sons of Israel, when they were to go out of Egypt: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출3:22); 2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3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출11:2-3); 35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36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출12:35-36) Every woman shall borrow of her neighbor, and of her that is a guest in her house, vessels of silver and vessels of gold, and garments; and ye shall put them upon your sons, and upon your daughters, and shall spoil the Egyptians; (Exod. 3:22; 11:2–3; 12:35–36)

 

이 말씀에 몇 가지 아케이나가 들어 있지 않았으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훔치고, 취했다는 말을 듣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는데, 그래서 보면, 아케이나라 할 수 있는 것이, ‘’, ‘’ 및 ‘의복’, 그리고 ‘애굽’의 의미이지 싶고, 또 알 수 있는 게, 여기 묘사된 것과 너무나 똑같은 정황이, 아브람이 애굽에서 얻은 은금이 풍부하였다는 오늘 본문에서도 반복되는 걸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everyone can see that the sons of Israel would by no means have been told thus to steal, and to spoil the Egyptians, unless some arcana were thus to be represented; but what the arcana are may be seen from the signification of “silver,” of “gold,” and of “garments,” and of “Egypt”; and it may also be seen that much the same was there represented as is here represented by Abram, who was rich in silver and gold from Egypt.

 

[5]’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래서 정반대로는 거짓을 의미합니다. 거짓의 사람들은 거짓을 진리라 여기는데, 예언서들을 보면 나옵니다. As “silver” signifies truth, so in the opposite sense it signifies falsity; for they who are in falsity think that falsity is truth; as is also evident in the prophets.

 

신명기에 In Moses:

 

25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26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신7:25-26) Thou shalt not covet the silver and the gold of the nations, nor take it unto thee, lest thou be snared therein; for it is an abomination to Jehovah thy God; detesting thou shalt detest it; (Deut. 7:25–26)

 

그들의 금’은 악을, 그들의 ‘’은 거짓을 각각 가리킵니다. the gold of the nations” denotes evils, and their “silver” falsities.

 

다시 Again: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출20:23) Ye shall not make with me gods of silver, and gods of gold shall ye not make unto you; (Exod. 20:23)

 

속뜻으로 이 본문은 거짓과 광적 갈망(狂的, yearnings) 말고 다른 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은 신상’, 거짓을, ‘금 신상’, 광적 갈망을 각각 의미합니다. by which in the internal sense nothing else is signified than falsities and yearnings; “gods of silver” are falsities; and “gods of gold” are yearnings.

 

이사야에서 In Isaiah:

 

너희가 자기 손으로 만들어 범죄한 은 우상, 금 우상을 그 날에는 각 사람이 던져 버릴 것이며 (사31:7) In that day shall they cast away every man his idols of silver and his idols of gold, which your own hands have made unto you for a sin; (Isa. 31:7)

 

은 우상, 금 우상’, 앞에 나오는 것과 유사한 것을, ‘자기 손으로 그들을 만들었다’, 그런 것이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각각 의미합니다. idols of silver and idols of gold” denote similar things as before; “your own hands have made them” means that they are from man’s own.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8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 9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었나니 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이거니와 (렘10:8-9) They are become brutish and foolish; a teaching of vanities is that stock; silver beaten out is brought from Tarshish, and gold from Uphaz, the work of the artificer and of the hands of the founder; blue and crimson are their clothing, it is all the work of the wise; (Jer. 10:8–9)

 

이 역시 같은 걸 가리킨다는 것은 너무나도 확실합니다. denoting the like things, as is very evident.

 

 

1552. And in gold.

 

이것의 의미가 진리로 말미암는 선이라는 것은 ‘’의 의미가 천적 선, 혹은 지혜의 선, 사랑의 선임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방금 막 본 것과, 또 전에 본 것을 보면 말이지요. (AC.113) That this signifies goods from truth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gold” as being celestial good, or the good of wisdom and of love, as is evident from the things just shown, and also from those shown before (n. 113).

 

여기, 선이 진리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앞 장에서 말씀드린 것, 곧 주님이 지성적 진리들과 천적인 것들을 결합하셨다는 내용에 이어집니다. That the goods here are from truths follows from what was said in the foregoing chapter, that the Lord conjoined intellectual truths with celestial things.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2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속뜻)

어린 시절 주님은 선과 진리, 그리고 그 진리로 말미암는 선이 풍부하셨다

 

※ 비록 어린 시절이었어도 주님은 영적, 천적 목표가 뚜렷, 한눈팔지 않으신 결과, 선과 진리, 그리고 그 진리에 따른 선이 풍부하신 것을 보며, 우리도 주님 주신 어떤 영적 목표를 붙들고 망설임 없이, 거침없이 직진, 시간과 세월을 아껴 무슨 쓰임새의 삶을 살다 가야 하겠습니다.

 

2021-11-02(D3)-매일예배(2225, AC.1549-1552, 창13,2),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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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And Abram went up out of Egypt, he and his wife, and all that he had, and Lot with him, toward the south. 2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And Abram was very rich in cattle, in silver, and in gold. 3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And he went according to his journeys from the south and even to Bethel, unto the place where his tent was at the first, between Bethel and Ai. 4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Unto the place of the altar which he had made there in the beginning; and there Abram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5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6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And the land was not able to bear them that they might dwell together, for their substance was great, so that they could not dwell together. 7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And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and the Canaanite and the Perizzite were then dwelling in the land. 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And Abram said unto Lot, Let there be no contention, I pray, between me and thee, and between my herdmen and thy herdmen, for we are men brethren.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Is not the whole land before thee? Separate, I pray, from me; if to the left hand, then I will go to the right; or if to the right hand, then I will go to the left.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And Lot lifted up his eyes, and saw all the plain of Jordan, that it was all well watered, before Jehovah destroyed Sodom and Gomorrah, like the garden of Jehovah, like the land of Egypt in coming to Zoar. 11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And Lot chose him all the plain of Jordan; and Lot journeyed from the east; and they were separated, a man from his brother. 12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Abram dwelt in the land of Canaan, and Lot dwelt in the cities of the plain, and pitched his tent as far as Sodom. 13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And the men of Sodom were wicked and sinners against Jehovah exceedingly. 14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And Jehovah said unto Abram, after that Lot was separated from him, Lift up now thine eyes, and look from the place where thou art, northward, and southward, and eastward, and westward. 15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For all the land which thou seest, to thee will I give it, and to thy seed, forever. 16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And I will make thy seed as the dust of the earth; so that if anyone can number the dust of the earth, then shall thy seed also be numbered. 17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Arise, walk through the land, in the length of it and in the breadth of it; for unto thee will I give it. 18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And Abram pitched his tent, and came, and dwelt in the oak groves of Mamre, which are in Hebron, and built there an altar unto Jehovah.

 

내용

The Contents

 

1535. 이 장은 주님 안에 있는 겉 사람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겉 사람은 그분의 속 사람과 합쳐질 예정이었습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external man in the Lord which was to be conjoined with his internal man.

 

겉 사람은 인성(人性, the human essence), 속 사람은 신성(神性, the Divine essence)입니다. The external man is the human essence, the internal is the Divine essence.

 

전자가 여기서 롯(Lot)으로, 후자는 아브람(Abram)으로 각각 표상(表象)되고 있습니다. The former is here represented by Lot, but the latter by Abram.

 

 

1536. 여기서는 겉 사람의 상태, 곧 어린 시절, 처음 지식[시엔티피카 에 코그니시오네스, scientifica et cognitiones, 학문과 지식]을 흠뻑 접하신 후, (1-4절) 속 사람과 함께 하시고자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심에 관한 설명입니다. There is here described the state of the external man such as it was in childhood, when first imbued with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that it thence advanced more and more to conjunction with the internal man (verses 1 to 4).

 

 

1537. (5-7절) 그러나 그의 겉 사람 안에는 결합을 지연시키는 것들이 여전히 많았습니다. (8-9절) 주님은 이런 것들에게서 분리되기를 원하셨습니다. But that there were still many things in his external man that impeded the conjunction (verses 5 to 7); from which, however, he desired to be separated (verses 8, 9).

 

 

1538. (10-13절) 겉 사람이 주님에게 나타났습니다. 속 사람과 결합했을 때는 아름답게, 결합하지 못했을 때는 그땐 또 그렇게 말이죠. That the external man appeared to the Lord such as it is in its beauty when conjoined with the internal; and also such as it is when not conjoined (verses 10 to 13).

 

 

1539. (14-17절) 겉 사람이 속 사람과 결합했을 때, 즉 주님의 인성이 주님의 신성과 결합했을 때, 모든 힘과 권세[포테스타스 potestas]가 주님에게 주어지리라는 약속 A promise that when the external man was conjoined with the internal, that is, when the Lord’s human essence was conjoined with his Divine essence, all power and authority [potestas] should be given to him (verses 14 to 17).

 

(18절) 주님의 내적 퍼셉션에 관하여 Concerning the Lord’s interior perception (verse 18).

 

속뜻

The Internal Sense

 

1540.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앞장인 12장 말씀부터는 실제 역사의 시작,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The true historicals of the Word began, as before said, with the foregoing chapter—the twelfth.

 

그 시점까지, 그러니까 에벨까지는 꾸민 역사, 스토리 텔링입니다. Up to that point, or rather to Eber, they were made-up historicals.

 

※ 지금까지 밝혀진 지질학적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 전후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6천 년 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지구의 시작, 곧 이 행성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아브라함 전까지 일어난 일을 모두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역사책일 필요가 있나요? 이런 몇 가지 이유로, 이 긴 역사를 짧게 스토리 텔링 식으로 요약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속뜻으로는, 여기 계속되는 아브람 관련 실제 기록은 사실은, 주님, 특히 주님의 일생 중 처음 시절을 의미하는데, 이때는 주님이 아직 겉 사람이 속 사람과 하나로 결합하시기 전, 그러니까 겉 사람이 천적(celestial), 신적(Divine)이 되는 것과 비슷한,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 기록입니다. In the internal sense, the historicals here continued respecting Abram are significative of the Lord, and in fact of his first life, such as it was before his external man had been conjoined with the internal so as to make one thing; that is, before his external man had been in like manner made celestial and Divine.

 

이 실제 기록들은 주님에 관한 표현입니다. 기록들 자체는 표현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의미입니다. The historicals are what represent the Lord; the words themselves are significative of the things that are represented.

 

그러나 실제 기록이기 때문에, 마치 무슨 과거 일지를 읽는 것 같기 때문에, 읽는 사람의 마음이 속뜻을 생각할 수 없으며, 오늘날은 특히나 더 사람들 대부분이,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거기에 속뜻이, 심지어 모든 단어에도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나 명백히 보여드린 대로, 속뜻이 있다는 것은 사실임에도 불구,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의 존재를 인정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속뜻이 글자의 뜻으로부터 너무 물러가 거의 인식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며, But being historical, the mind of the reader cannot but be held in them; especially at this day, when most persons, and indeed nearly all, do not believe that there is an internal sense, and still less that it exists in every word; and it may be that in spite of the fact that the internal sense has been so plainly shown thus far, they will not even now acknowledge its existence, and this for the reason that the internal sense appears to recede so f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as to be scarcely recognized in it.

 

※ 이것은 마치 길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가 그 안의 영은 못 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의 겉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하여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아 버리기 때문인데, 이처럼 성경 말씀도 그 이야기가 너무나 생생하고 재미있어 그만 그 겉모습에 푹 빠져들고 말지, 예를 들어, 요셉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속에 속뜻도 함께 읽기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겉 이야기는 말씀의 몸, 속뜻은 말씀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 실제 기록들이 그들에게 말씀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은 그저 다음과 같은 사실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성경 구절이 속뜻으로부터 분리되면 거기엔 더 이상 무슨 신성이 들어 있지 않아 여느 실제 있었던 일과 다를 바 없는 단순한 일지 수준의 기록물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사실 말입니다. 성경 구절을 성언(聖言)으로 만드는 것은 속뜻, 내적 의미(internal sense)이기 때문입니다. And yet that these historicals cannot be the Word they might know from the mere fact that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sense there is no more of the Divine in them than in any other history; whereas the internal sense makes the Word to be Divine.

 

[2] 속뜻이 말씀 그 자체라는 사실은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마2:15)와 같은, 지금까지 밝혀진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합니다. 이 말고도 다른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That the internal sense is the Word itself is evident from many things that have been revealed, as “out of Egypt have I called my son” (Matt. 2:15); besides many others.

 

또 주님 자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모세와 선지자의 글에 자기에 관하여 어떻게 기록하였는지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걸 볼 때, 말씀에 기록된 내용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 그리고 교회에 관한 게 아니면 말씀이라 할 수 없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The Lord himself also, after his resurrection, taught the disciples what had been written concerning him in Moses and the prophets (Luke 24:27); and thus that there is nothing written in the Word that does not regard him, his kingdom, and the church.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7)

 

말씀에는 영적, 천적인 것들이 있습니다만 글자의 뜻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대부분 세속적, 육체적, 그리고 땅에 속한 것들이어서 절대로 주님의 말씀을 만들 수 없습니다. These are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of the Word; but the things contained in the literal sense are for the most part worldly, corporeal, and earthly; which cannot possibly make the Word of the Lord.

 

이 시대 사람들은 그런 것 밖에 무슨 다른 걸 지각하지 못하며, 그래서 영적, 천적인 것들의 경우, 그들에게는 거의 금시초문, 듣도 보도 못 한 것들입니다. At this day men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perceive nothing but such things; and what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re, they scarcely know.

 

하지만 반면,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 사람들의 경우, 그들도 그 시대에 살면서 말씀을 읽었지만 오히려 겉 글자의 뜻에 대해서는 전혀, 마치 허공을, 무(無)를 쳐다보듯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반면, 속뜻에 대해서는 정반대였습니다. It was otherwise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and of the ancient church, who, had they lived at this day, and had read the Word, would not have attended at all to the sense of the letter, which they would look upon as nothing, but to the internal sense.

 

그들은 누군가는 말씀을 다른 식으로 지각한다는 사실에 까무러칠 듯 놀랍니다. They wonder greatly that anyone perceives the Word in any other way.

 

그래서 고대인들의 책들은 모두 그 속뜻 안에 겉 글자의 뜻과는 다른 의미를 갖도록 기록되었습니다. All the books of the ancients were therefore so written as to have in their interior sense a different meaning from that in the letter.

2021-10-29(D6)-매일예배(2223, AC.1535-1540, 창13), '창13, 내용, 속뜻'.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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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QYnGWzsg5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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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98. 20절,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Verse 20. And Pharaoh commanded the men concerning him; and they sent him away, and his wife, and all that he had.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를 보내었더라’, 기억-지식들이 주님을 떠났음을, ‘그의 아내와’, 천적인 것들과 결합한 진리들로부터도 떠났음을, ‘그의 모든 소유를’, 천적 진리들에 속한 모든 것으로부터도 떠났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Pharaoh commanded the men concerning him; [and they sent him away]” signifies that memory-knowledges left the Lord; “and his wife” signifies that they also left the truths that were conjoined with celestial things; “and all that he had” signifies that they left all things that belonged to celestial truths.

 

※ 창12부터는 실제 역사요, 이후 끝장인 50장까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이지만 이들 모두 한 분 주님을 표상하며, 특히 아브라함은 천적 인간, 이삭은 영적 인간, 그리고 야곱은 자연적 인간을 각각 표상합니다.

 

특히, 창12 아브람은 주님의 어린 시절 상태를 표상합니다. 표상이란, 대신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치 무대 위 배우들처럼, 실제 모습이 어떠하든 무대 위에서는 주어진 배역에 충실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1499.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를 보내었더라 And Pharaoh commanded the men concerning him; [and they sent him away].

 

이 표현이, 기억-지식들이 주님을 떠났다는 의미인 것은, 기억-지식들이라는 ‘바로’의 의미와, 또한 지성적인 것들이라는 ‘사람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합니다. (앞서 보여드린 158번 글처럼) That this signifies that memory-knowledges left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haraoh,” as being memory-knowledge; and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men,” as being intellectual things (as before shown, n. 158).

 

여기 ‘사람들’은 바로(Pharaoh) 혹은 기억-지식의 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거기서 비롯되는 지성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The men” here, because attributed to Pharaoh, or to memory-knowledge, signify intellectual things adapted thereto.

 

기억-지식들이 주님을 떠났다는 것은 이런 얘깁니다. As regards memory-knowledges leaving the Lord, the case is this.

 

천적인 것들과 지성적인 진리들 사이에 결합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래서 후자가 천적이 되어갈 때, 비어 있는 모든 것, 즉 결합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은 스스로 소멸됩니다. 천적인 것의 본성에는 이런 특성도 있습니다. When celestial things are being conjoined with intellectual truths, and these are becoming celestial, then all things that are empty are dissipated of themselves; this is in the nature of the celestial.

 

※ 지성적인 진리들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들어 있어야 천적인 것들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얼핏 지성적인 진리인 줄 알았으나 나중에 보니 겉만 그런 건 알아서 사라지게 됩니다.

 

 

1500. 그의 아내와 And his wife.

 

이것이, 그들이 천적인 것들과 결합한 진리들을 떠났음에 대한, 즉 기억-지식들이 그들을 떠났음에 대한 의미라는 것은, ‘아내’의 의미가 천적인 것과 결합한 진리인 것과(위에서 언급한), 방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left the truths that were conjoined with celestial things, that is to say, that memory-knowledges left them,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ife” as being truth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spoken of above), and also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속이 텅빈 기억-지식들이 천적인 것들을 떠나가는 것은 마치 무익한 것들이 늘 지혜를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마치 알아서 떨어져 나가는 굳은살과 피부 딱지들 같습니다. Empty memory-knowledges leave celestial things, as vain things are wont to leave wisdom; they are as crusts and scales that separate themselves of their own accord.

 

 

1501. 그의 모든 소유를 And all that he had.

 

이것의 의미가 그들이 천적 진리들에 속한 모든 것들을 떠났다라는 것임이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left all things that belonged to celestial truths follows in the series.

 

 

1502. 이 모든 것으로부터 이제 분명한 건, 아브람의 애굽 체류는 주님, 실제로는 주님 어린 시절 배움 말고 다른 걸 표현하거나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From all this it is now evident that Abram’s sojourn in Egypt represents and signifies nothing else than the Lord, and in fact his instruction in childhood.

 

이것은 또한 호세아 및 마태복음의 말씀으로도 확인이 되는데요, This is also confirmed by what is said in Hosea: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호11:1)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2:15) Out of Egypt have I called my son; (Hos. 11:1; Matt. 2:15)

 

또 출애굽기 말씀에서도 and again from what is said in Moses:

 

40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41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출12:40-41) The dwelling of the sons of Israel who dwelt in Egypt was thirty years and four hundred years; and it came to pass at the end of the four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it came to pass on the selfsame day, that all the armies of Jehovah went out from the land of Egypt; (Exod. 12:40–41)

 

위 사백삼십 년이라는 햇수는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부터가 아닌, 아브람의 애굽 체류 때부터 센 기간입니다. which years were not reckoned from Jacob’s going down into Egypt, but from the sojourning of Abram in Egypt, counting from which the years were four hundred and thirty.

 

그래서 ‘애굽에서 불러낸 아들’(호11:1)은 그 속뜻으로는 주님을 의미합니다. Thus by the “son out of Egypt” (in Hosea 11:1) in the internal sense is signified the Lord.

 

이것은 말씀에서는 ‘애굽’의 의미가 기억-지식이라는 사실(AC.1164-1165, 1462에서 보여드린 대로)로 더욱 확실해집니다. This is further confirmed by the fact that in the Word “Egypt” signifies memory-knowledge (as shown, n. 1164–1165, 1462).

 

[2] 이런 아케이나가 들어 있음은, 아브람의 경우, 이번엔 블레셋 체류 때 또 아내를 누이라 한 사례(창20:1-18)와, 이삭의 경우도 그가 블레셋에 체류할 동안 그 역시 아내를 누이라 한 사례(창26:6-13)들로부터도 분명합니다. And that these arcana are contained is also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same is said of Abram during his sojourn in Philistia, namely, that he called his wife his sister (Gen. 20:1–18); and similar things are said of Isaac when he also was sojourning in Philistia, in that he too called his wife his sister (Gen. 26:6–13).

 

1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2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3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4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7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8아비멜렉이 그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9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10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11아브라함이 이르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3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14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15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16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17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18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창20:1-18)

 

6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7그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8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창26:6-13)

 

이런 일들은 그 안에 아케이나가 들어 있지 않았으면 말씀과 관련되는 대신 거의 유사 상황들로 정리되었을 겁니다. These things would not have been related in the Word, and with almost the same circumstances, unless these arcana had been concealed within them.

 

게다가 이건 주님의 말씀입니다. 만일 그 안에 주님에 관한 어떤 내적 의미, 속뜻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코 어떤 생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Moreover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which can in no wise have any life, unless there is an internal sense that has regard to him.

 

[3] 이런 일들 안에 보관되어 있는 아케이나는, 블레셋 체류 시절, 아브람과 이삭에 관한 내용에도 있는 것처럼, 주님의 인성이 신성과 어떻게 결합하였는지, 또는 같은 말이지만, 주님이 어떻게 인성에 대하여까지도 여호와가 되셨는지, 그리고 이런 일이 주님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고,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등의 내용입니다. The arcana which lie stored up in these things, as also in those said concerning Abram and Isaac in Philistia, are—how the Lord’s human essence was conjoined with his Divine essence, or what is the same, how the Lord became Jehovah as to his human essence also; and that his inauguration went on from childhood, which inauguration is here treated of.

 

여기에 더해 더 엄청난 것들, 곧 사람의 믿음조차 초월하는 심오한 아케이나가 들어 있는데, 그 내용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어서 아예 아무 내용도 없다 할 정도입니다. Moreover these things also involve more arcana than man can ever believe; but those which can be told are so few as to be almost nothing.

 

주님에 관한 가장 심오한 아케이나 외에도 거기엔 사람을 가르치고, 사람으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여 천적 인간이 될 수 있게 하는 아케이나도, 또한 마찬가지로 사람을 가르치고 거듭나게 하여 이번에는 영적 인간이 될 수 있게 하는 아케이나도, 그리고 보통은 각 사람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를 가르치는 것도 포함됩니다. Besides the most profound arcana concerning the Lord, they also involve arcana concerning the instruction and regeneration of man, that he may become celestial; as also concerning his instruction and regeneration, that he may become spiritual; and not only concerning the instruction of the individual man, but also concerning that of the church in general.

 

그리고 더 나아가 거기에는 천국에 있는 어린이들에 대한 커리큘럼 아케이나 등 한 마디로, 주님의 이미지와 형상을 닮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 관한 커리큘럼 아케이나가 포함됩니다. And, further, they involve arcana concerning the instruction of little children in heaven; in a word, concerning the instruction of all who become images and likenesses of the Lord.

 

이런 것들은 겉뜻, 글자 상으로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역사 서술이 이런 아케이나를 베일로 가려 흐릿하게, 모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케이나는 오직 속뜻, 내적 의미로만 나타납니다. These things do not at all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for the reason that the historical narrative veils them over and obscures them; but they appear in the internal sens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20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속뜻)

주님이 질서를 따라 어린 시절에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시려 하자 그동안 함께 했던 세상 지식들이 주님도, 주님과 함께 해야 하는 진리도, 그리고 천국과 관련된 모든 것도 다 떠났다

 

※ 즉, 얼핏 보기에는 유익할 것 같았던 세상 기억-지식들이 그러나 주제가 영적으로 옮겨지면 본색이 드러나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마6:24 참조)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2021-10-27(D4)-매일예배(2221, AC.1498-1502, 창12,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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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eIBSeGl-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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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94. 19절,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Verse 19. Why saidst thou, She is my sister? And I might have taken her to me for a woman. And now behold thy wife; take her and go.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그때 그는 자기가 지성적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게 없었음을, Why saidst thou, She is my sister?” signifies that he then knew no otherwise than that he had intellectual truth;

 

※ 즉, 자기에게는 오직 지성적 진리만 있는 줄 알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자기는 어린 시절 주님입니다. 그리고 참고로, 지성적 진리(知的, intellectual truth, 포츠 역, 1888-1902)를 최근 쿠퍼 역에서는 직관적 진리(intuitive truth)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그는 그래서 천적인 것하고만 결합해야 하는 진리를 하마터면 욕보일 뻔했다는 것, and I might have taken her to me for a woman” signifies that so he might have done violence to the truth that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 여기 ‘천적인 것’(what is celestial)이란 쿠퍼 역에 의하면 ‘천국 퀄러티’(a heavenly quality), 즉, 쿠퍼는 이 진리를 세상이 아닌, 천국에 어울리는 진리라고 보았습니다. 참고로, 여기 아브람은 어린 시절 주님 및 남편으로서의 선을,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남편인 선과 함께 하는, 아내로서의 진리를 의미하며, 그래서 이 진리는 아주 특별한 진리, 곧 선이신 주님하고만 있어야 하는 그런 진리인데, 어린 시절 주님은 그 사실을 천진난만하게 모르신 것입니다 ^^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진리는 천적인 것하고만 결합해야 함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now behold thy wife; take her and go” signifies that truth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1495.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Why saidst thou, She is my sister?

 

이 표현이, 그때 그는 자기가 지성적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게 없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이’의 의미가 지성적 진리인 것과, 또 아브람이 그렇게 (13절을 보면 분명한 것처럼) 말한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것은 진리의 천적인 것이 욕을 당하고 해를 입는 대신 보호를 받고 보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he then knew no otherwise than that he had intellectual trut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sister” as being intellectual truth; and also from the fact that Abram had said so (as is evident from verse 13), which was done to the end that the celestial might not suffer any violence, but might be saved.

 

※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7:6) 말씀처럼 세상 지식과 학문이 천적인 것을 중간 연결고리들 없이 바로 접하게 되면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 주님이 기억-지식들을 배우셨을 때, 주님은 그저 아시기를, 이 지식들은 오직 지성적 인간을 위해서만 있는 줄, 즉, 이 지식들을 가지고 있으면 바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줄 아셨다는 것과, 그러나 나중에 밝혀지기를, 그게 아니고 지식들은 그로 하여금 천적인 것들을 얻게 하려고 존재한다는 것과, 그래서 천적인 것들이 해를 입지 않고 대신 보호받을 수 있도록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From all this it is evident that when the Lord as a child learned memory-knowledges, he first of all knew no otherwise than that those knowledges were solely for the sake of the intellectual man, that is, in order that he might get to know truths from them; but it was afterwards disclosed that they had existed in order that he might attain to celestial things; and this took place to prevent celestial things from suffering violence, and in order that they might be saved.

 

※ 우리 역시 처음엔 세상 학문과 지식이 풍성하면 바로 무슨 경지에 이른 듯하여 천국의 비밀과 신에 대하여 다 알게 될 것 같지만, 그러나 시간이 흘러 철이 들고 정신을 차리게 되면 그게 아니고, 세상 학문과 지식은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향하게 하려고, 그래서 한 단계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내게 주어진 것이라는, 실상을 깨닫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바로 천국에 대한 지식에 뛰어들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불행해지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여 우리로부터 아케이나를 분리, 보호하시는 것은, 마치 유대인으로부터 아케이나를 철저히 봉하신 이유가 그들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케이나를 접하게 되면 반드시 신성모독으로 멸망할 것을 아셨기 때문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교육을 받는 동안 어떤 진보, 나아감이 있는데요, 먼저 기억-지식에서 이성적 진리(rational truth)로, 이성적 진리에서 지성적 진리(intellectual truth)로, 지성석 진리에서 이윽고 천저 진리(天的, celestial truth)의 순이며, 이 천적 진리가 여기서 말하는 ‘아내’인 것입니다. When man is being instructed, there is a progression from memory-knowledges to rational truths; further, to intellectual truths; and finally, to celestial truths, which are here signified by the “wife.

 

※ 포츠 역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 쿠퍼 역에서는 ‘사실’(fact)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 ‘이성적’으로 번역한 ‘rational’은 역자마다 번역이 다양한, 즉 번역이 쉽지 않은 표현입니다. 사전에는 ‘합리적인’, ‘이성적인’으로 나와 있습니다. 저는 ‘이성적인’(理性)으로 번역하겠습니다.

 

이 진행에서 만일 지성적 진리가 중간 매체 역할을 하지 않고 기억-지식과 이성적 진리에서 바로 천적 진리로 가게 되면, 천적 진리는 욕을 당하게 되는데요, 중간 연결 매체인 지성적 진리가 없으면 천적 진리와, 기억-지식을 써서 얻어지는 이성적 진리 간 연결고리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If the progression is made from memory-knowledges and rational truths to celestial truths without intellectual truths as media, the celestial suffers violence, because there can be no connection of rational truths—which are obtained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with celestial truths, except by means of intellectual truths, which are the media.

 

※ 그래서 제가 지인들께 무슨 사전 준비나 친절한 설명 없이 바로 아케이나를 말씀드리면 다들 어리둥절 못 알아들으시고, 경계하시거나 반감을 품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케이나 입장에서는 욕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복음서 주님의 여러 비유들처럼 사람들 눈높이에 맞춰 사례를 들어가며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해야 합니다. 공용복 선생이 이런 걸 참 잘하셨습니다.

 

천적 진리가 무엇인지, 지성적 진리가 무엇인지는 곧 아시게 됩니다. What celestial truths are, and what intellectual truths are, will be seen presently.

 

[2]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아실 수 있도록, 질서(order)라는 것에 관해 뭔가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That it may be known how these things stand, something shall be said respecting order.

 

질서란,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안으로 흘러들어 그것을 그 자체에 맞추는 것이며, 그렇게 이번에는 영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 안으로, 이성적인 것은 기억-지식 안으로 흘러들어 각각 그 자체에 맞추는 것입니다. The order is for the celestial to inflow into the spiritual and adapt it to itself; for the spiritual thus to inflow into the rational and adapt it to itself; and for the rational thus to inflow into the memory-knowledge and adapt it to itself.

 

※ ‘그것을 그 자체에 맞추다’, 즉, ‘영적인 것으로 하여금 그 본래의 목적에 맞추게 하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것 안으로 천적인 것이 흘러들어갈 때 일어나는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 영적인 것 본래의 목적, 곧, 영적인 것의 순기능인 주님께 나아가는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감당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 차례대로 영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 안으로, 이성적인 것이 기억-지식 안으로 흘러들어 갈 때 저마다 그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회복하게 되어 올바른 쓰임새들이 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질서’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주 어린 시절 막 배움을 시작했을 때는, 그때도 질서는 동일하지만, 그러나 보이기는 정반대인 것처럼, 즉, 먼저 기억-지식에서 이성적인 걸로, 이성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그렇게 해서 최종 천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But when a man is being instructed in his earliest childhood, the order is indeed the same, but it appears otherwise, namely, that he advances from memory-knowledges to rational things, from these to spiritual things, and so at last to celestial things.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가장 내적인 천적인 것을 향한 어떤 길이 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it so appears is that a way must thus be opened to celestial things, which are the inmost.

 

모든 가르침은 단순히 어떤 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열릴 때, 같은 말이지만, 그릇들이 열릴 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질서대로 그 안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이 있는데, 천적, 영적인 것에서 오는 이성적인 것이, 그리고 이 이성적인 것에는 천적, 영적인 것이, 그리고 이 천적, 영적인 것에는 천적인 것이 차례대로 흘러들어 옵니다. All instruction is simply an opening of the way; and as the way is opened, or what is the same, as the vessels are opened, there thus flow in, as before said, in their order, rational things that are from celestial spiritual things; into these flow the celestial spiritual things; and into these, celestial things.

 

이들 천적, 영적인 것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주고 있으며, 또 앞으로 열릴 그릇들을 위해 자신을 준비하고 형성합니다. 이런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요, 그들 안에서 보면 기억-지식과 이성적인 것은 죽은 상태라는 사실과, 그러면서도 그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들 안으로 흘러들어 온 내적 생명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Thes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re continually presenting themselves, and are also preparing and forming for themselves the vessels which are being opened; which may also be seen from the fact that in themselves the memory-knowledge and rational are dead, and that it is from the inflowing interior life that they seem to be alive.

 

※ 우리가 더 이상 세상 지식과 인간 이성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대신 자유롭게 영적, 천적 사고를 할 수 있다면, 그 상태가 바로 세상 지식과 인간 이성이 힘을 다한,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죽은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 실제로 우리의 사후(死後), 우리가 세상에서 습득한 모든 지식과 경험은 휴면상태에 들어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위와 같은 일이 사후에는 이렇게 구현됩니다. 세상 지식과 경험, 겉 사람의 이성은 그 역할과 기능을 다 하였으므로 이제는 쓸데가 없어져 따로 보관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고와 판단력에 있어 누구에게나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This can become manifest to anyone from the thought, and the faculty of judgment.

 

※ 위 문장은 아래 단락 [3]에 포함되어야 할 듯...

 

[3] 이런 것들 안에 모든 예술과 과학의 심오한 아케이나가 감추어져 있으며,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그 만분의 일도 탐구 불가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꼭 성인들만의 일도 아닙니다. 어린아이들한테도 해당되며, 그 모든 사고와 거기서 나오는 모든 언어표현도 그들로 가득가득합니다. (이것은 사람은, 심지어 가장 위대한 학자라 할지라도 못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안의 천적, 영적인 것들이 이 모든 것을 향해 나오며, 흘러들고, 만들지 않는 한, 도저히 해당되지 않을 것입니다. In these lie hidden all the arcana of analytical art and science, which are so many that they can never explored even as to the tenthousandth part; and this not with the adult man only, but also with children, whose every thought and derivative expression of speech is most full of them (although man, even the most learned, is not aware of this), and this could not possibly be the case unless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within were coming forth, flowing in, and producing all these things.

 

※ 즉 이 세상 모든 일에 하늘로부터 천적, 영적 흐름이 있어 겉으로 보이는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 지성은 물론, 만물의 생장 등 모든 일상 활동의 배경에는 이런 천적, 영적 배경이 있다는 말입니다.

2021-10-22(D6)-매일예배(2217, AC.1494-1495, 창12,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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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ASC6cud4X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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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90. 18절,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Verse 18. And Pharaoh called Abram,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Why didst thou not tell me that she is thy wife?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주께서 생각에 잠기셨음을,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그것이 그를 슬프게 하였음을,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천적인 것과 결합하려는 진리 말고 다른 그 어떤 진리도 가질 필요가 없었음을 그가 알고 있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Pharaoh called Abram” signifies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signifies that it grieved him; “Why didst thou not tell me that she is thy wife?” signifies seeing that he knew that he ought not to have any other truth than that which would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1491.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And Pharaoh called Abram.

 

이 표현이 주님이 생각에 잠기셨음을 의미함이라는 것은 ‘바로’(Pharaoh)의 의미가 기억-지식이라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haraoh” as being memory-knowledge.

 

기억-지식 자체, 즉, 기억-지식의 일들을 일컬어, 이 지식은 주님이 어린 시절에 습득하신 것인데, 여기서 ‘바로’라 하고 있습니다. 주님에게 말을 거는 건 기억-지식입니다. 즉, 그 지식을 통해서 그렇게 말을 거시는 분은 여호와이시지요. The memory-knowledge itself, that is, the matters of memory-knowledge, which the Lord acquired when a child, are here called “Pharaoh”; thus it is that knowledge itself which thus addresses the Lord, that is, it is Jehovah who does so by means of that knowledge.

 

※ 지식이 말을 건다는 건, 그 지식이 생각났다, 기억이 났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바로라는 지식이 기억이 나 생각에 잠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표현의 의미는 주님이 생각에 잠기셨다라는 것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se things signify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정신적 관찰, 곧 생각에 잠기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식, 즉, 바로라고 하는 지식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Mental observation comes by means of memory-knowledge, thus by means of Pharaoh, by whom, as before said, this knowledge is signified.

 

 

1492.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이 표현을 보고, ‘아, 주님이 그걸 생각하고 무척 슬퍼하셨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이 표현 전반에 실린 분(忿)이 느껴지는 분위기를 볼 때 분명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큰 슬픔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it grieved him is also evident from the very indignation in which this is said: the grief itself is thus expressed.

 

속뜻이라는 게 이런 겁니다. 어펙션(affection) 자체는 말 속에 숨어 겉으로는 안 보이지만 사실은 말을 구성하는 것이지요. 겉 글자로 되어 있는 단어들은 속뜻을 아는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The internal sense is such that the affection itself that lies hidden in the words is what constitutes it; the words of the letter are not attended to, but are as if they had no existence.

 

이 말 속 어펙션은 말하자면, 기억-지식의 분(忿)이요, 주님의 큰 슬픔입니다. 이 슬픔은, 주님이 어린 시절 즐거움과 큰 기쁨으로 배우셨던 그 기억-지식들과 이젠 이별해야 한다,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그런 슬픔입니다. The affection in these words is the indignation as it were of the memory-knowledge, and the Lord’s grief; and in fact grief from this, that the memory-knowledges which he had learned with pleasure and delight should be thus destroyed.

 

이 경우는 다음과 같은 건데요, 아이들이 뭘 좋아하길래 그 부모들이 보니 너무 위험해 보여 아이들에게서 그걸 빼앗을 때, 그때 아이들이 느끼는 큰 슬픔 같은 그런 것입니다. The case herein is like that of little children who when they love something their parents see to be hurtful to them, and it is taken away from them, are thereby grieved.

 

※ 어린 시절에 배운 세상 지식 하나 단절한다는 게, 헤어진다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슬퍼하시나 싶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많이 사랑하지 않았으면 헤어질 때도 별로 서운하지 않은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무덤덤함은 사실은 우리의 냉정함을, 우리가 처음 무엇을 배울 때, 우리는, 주님과 달리 우리는 무슨 그리 큰 고마움도, 기쁨도, 반가움도 없이 그저 태어났으니까 산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으니 등교한다, 수업시간이 되었으니 교실에 앉아 있다... 등과 같은 수동적 삶을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린 시절에도 확실히 다르셨습니다. 여느 어린이들은 우리와 같이 저랬다면 주님은 비록 세상 지식, 바로와 애굽을 배우실지라도 그 지식으로 지성을 접하고, 그 지성으로 영적, 천적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아셨기에 정말 소중히 여기시고 정성을 다해 배우셨음을, 세상 학문과 지식에 대하여도 주님은 정말 기뻐하고 사랑하셨음을 오늘 본문에서 보면서, 나는 어땠나, 나는 그동안 무슨 공부를 할 때 어떤 태도로 임했나를 돌이키게 됩니다.

 

비록 세상 학문이라 하더라도 그걸 통해 영적, 천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성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선용(善用)을 통한 주님의 질서와 순서 가운데 머무를 수만 있다면, 그래서 세상 학문과 지식이 그 쓰임새를 다하고 마침내 헤어질 때가 오더라도 냉냉함과 무덤덤함 대신 오늘 본문 주님처럼 저렇게 큰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슬퍼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에 잠겨 봅니다.

 

무엇 또는 누구와 헤어질 때, 평소 많이 사랑하였으면 크게 슬퍼할 것이요, 적게 사랑하였으면 덤덤할 것입니다. 사람은 헤어질 때 모습을 보고 그는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493. 그를 네 아내라고 That she was thy wife.

 

이것이 상징하는 건, 그는 천적인 것과 결합했어야 할 진리 아닌 다른 진리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은 ‘아내’의 의미가 천적인 것과 결합해야 하는 진리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위 12절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at he ought to have no other truth than that which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wife” as being the truth that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concerning which above, at verse 12).

 

여기서는 주님이 지성을 향해,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지혜를 향해 나아가신 순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성에 대하여 지혜 자체가 되신 것처럼 인성에 대하여도 지혜 자체가 되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There is here described the order in which the Lord advanced to intelligence, and thus to wisdom; so that, as he was wisdom itself as to his Divine essence, so he should become wisdom itself as to his human essenc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8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속뜻)

주님은 이제 세상 학문과 헤어지실 때가 되어 깊이 생각에 잠기셨고 많이 슬퍼하셨다. 주님의 천적 진리를 향한 여정에 더 이상 세상 지식은 함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이제 우리는 어른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성장, 성숙한 어른이면, 우리는 천국과 주님을 향하는데 별 도움 안되는 것들하고는 마땅히 결별해야 합니다. 주님과 결합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하면서 스마트폰과 인터넷, 유튜브와 세상 뉴스는 또 붙들고 놓지 않는 사람... 본인도 참 괴롭겠지만 타인 보기에도 참 민망한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2021-10-20(D4)-매일예배(2216, AC.1490-1493, 창12,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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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e7MTCObb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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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90. 18절,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Verse 18. And Pharaoh called Abram,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Why didst thou not tell me that she is thy wife?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주께서 생각에 잠기셨다는 뜻입니다.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그것이 주님을 슬프게 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천적인 것과 결합하려는 진리 말고 다른 그 어떤 진리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And Pharaoh called Abram” signifies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signifies that it grieved him; “Why didst thou not tell me that she is thy wife?” signifies seeing that he knew that he ought not to have any other truth than that which would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1491.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And Pharaoh called Abram.

 

이 표현이 주님이 생각에 잠기셨음을 의미함이라는 것은 ‘바로’(Pharaoh)의 의미가 기억-지식이라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haraoh” as being memory-knowledge.

 

기억-지식 자체, 즉, 기억-지식의 일들을 일컬어, 주님 어린 시절 습득하신 것인데, 여기서 ‘바로’라 하고 있습니다. 주님에게 말을 거는 것은 기억-지식 자체입니다. 즉, 그 지식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지요. The memory-knowledge itself, that is, the matters of memory-knowledge, which the Lord acquired when a child, are here called “Pharaoh”; thus it is that knowledge itself which thus addresses the Lord, that is, it is Jehovah who does so by means of that knowledge.

 

※ 지식이 말을 건다는 건, 그 지식이 생각났다, 기억이 났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바로라는 지식이 기억나 생각에 잠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표현의 의미는 주님이 생각에 잠기셨다라는 것이지요. Hence it is evident that these things signify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정신적 관찰, 곧 생각에 잠기는 것은 지식, 즉, 바로라고 하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지식을 의미하는 바로를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Mental observation comes by means of memory-knowledge, thus by means of Pharaoh, by whom, as before said, this knowledge is signified.

 

2021-10-19(D3)-매일예배(2215, AC.1490-1491, 창12,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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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eCX88Jd_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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