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2(D1)-주일예배(2546, 눅19,28-36), '주가 쓰시겠다'의 속뜻.pdf
0.36MB
성찬.pdf
0.14MB
축도.2024-06-02(D1)-주일예배(2546, 눅19,28-36), '주가 쓰시겠다'의 속뜻.pdf
0.23MB

 

 

 

 

 

주가 쓰시겠다’의 속뜻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눅19:28-36)

 

 

제자들이 자기 옷을 나귀의 등 위에 까는 것은 진리 전체가 가장 높은 재판관이며, 왕이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천국의 비밀 9212:6, 이순철 역) By the disciples putting their garments on the ass and her colt was represented that truths in the whole complex were submitted to the Lord as the highest judge and king; (AC.9212:6, 출22:26)

 

 

※ 아래 에피소드는 설교 원본의 에피소드인데 오늘 설교 도입부로 적절해 보여 그대로 사용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부목사님과 함께 교회 담벼락과 보도블럭 사이의 땅에다 회양목을 100주 정도 사다 심었습니다. 봄이 되니 돌들 사이로 잡초가 올라오고 행인들이 담배꽁초도 버리고 해서 미관상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막상 시작하니 꼬박 이틀이 걸렸습니다. 나무를 심기 전에 땅을 팠는데 그 아래 건축 폐기물들이 잔뜩 묻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건축 공사를 할 때 시공하는 사람들이 시멘트나 벽돌 조각 같은 것들을 거기 묻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걷어낸 건축 폐기물이며 오염된 흙이 폐기물 처리용 마대 자루로 20부대가 넘게 나왔습니다.

 

서두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진리는 관념이 아니라 행동이며 일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주님은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진리가 있는, 진리를 동반한 선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선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주님의 진리는 목적에 맞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 주님과 함께 일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일은 향기가 나고 주변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간 혼자서 하는 일은 오히려 주변을 오염시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어떻게 내적 교회의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28절과 2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므로, 속뜻으로는 교회, 또는 하나님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에 비해 감람산은 하나님의 사랑, 또는 선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감람나무, 즉 올리브나무와 산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감람산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주님이 신적 사랑에서 비롯한 신적 진리로 당신의 교회 안으로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은 사랑이 있는 진리, 사랑을 동반한 진리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며, 그러므로 죽은 진리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있는 진리는 사람의 의지를 움직여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라야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감람산 근처에 오셨을 때, 제자 둘을 부르셨습니다. 내적으로, 즉 속뜻으로 볼 때,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둘이라고 한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진리를 배우는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부르신 제자 둘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진리를 배우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0절 말씀입니다.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맞은편’은 한글 성경 표현이고, 영어로는 ‘against’라고 되어 있는데, ‘against’라는 말은 주님을 대적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을은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있으므로 외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가 있습니다. 외적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과 경건한 예배 의식 같은, 예배의 외적인 것, 외향적인, 외모를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그에 반해 내적인 교회는 예배의 내적인 것, 즉 진리에 따른 삶을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맞은편 마을은 예배의 내적인 것은 없고, 외적인 것만 있는 교회를 뜻하고, 그러므로 주님을 대적하는 교회입니다.

 

※ 현실적으로 이렇게 완전 100% 외적이기만 한 교회는 없습니다. 논지를 또렷이 하기 위해 이런 대비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그리로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귀 새끼의 속뜻은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자연적 진리(natural truth)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포함한 자연적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적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죠. 말씀의 문자적 의미나 세상 지식을 새 교회에서는 ‘기억 지식(knowledge of memory)이라고 부르는데, 본문에서는 그런 지식을 ‘나귀 새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도 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지식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외적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기만 할 뿐 삶에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적 합리성이 닫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국 빛이 차단되고, 그리하여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맞은편 마을에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이런 외적 교회들에 대한 심판을 뜻합니다. 외적 교회들에 대한 심판이란, 외적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말씀 지식이 주님에 의해 내적 교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용하지 않는 진리를 주님께서 걷어 들여 잘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외적 교회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후에 심판받을 때, 주님께서 악한 사람들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모두 빼앗아 선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 오늘 본문 앞 본문인데요, 거기서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눅19:26)

 

라고 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말씀의 지식을 빼앗긴 외적 교회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말씀을 읽어도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외적 교회는 점점 진리에 대해 무지해지고, 내적인 교회는 점점 더 지혜로워집니다.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주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이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매인 것을 푸는데 그 주인들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합니다.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나귀 새끼가 매여 있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 속에 감춰진 내적 의미가 외적 교회 사람들에게 열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에 의해 매여 있는 나귀가 풀리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에 의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나귀의 주인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은 외적 교회들이 새 교회를 통해 밝혀지는 내적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가지고만 있고 쓰지 않는 사람은 결국 진리를 모두 빼앗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위해 진리를 쓰는 사람이라야 진리가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새끼의 등에 덮고 그 위에 주님을 태웠습니다. ‘천국의 비밀’ 9212:6항을 보면,

 

제자들이 자기 옷을 나귀의 등 위에 까는 것은 진리 전체가 가장 높은 재판관이며, 왕이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겉옷(garment)은 내적 교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를 뜻하고, 나귀 새끼는 진리가 감춰져 있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나귀 위에 옷을 깔고, 그 위에 주님을 태우는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깨우친 진리를 가지고 가장 높은 진리이신 주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낮은 진리인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그보다 더 높은 영적 의미(spiritual meaning)를 섬겨야 하고, 영적 의미는 가장 높은 진리인 천적 의미(celestial meaning)를 섬겨야 합니다. 말씀의 영적 의미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관한 진리라면, 천적 의미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에 관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자연계의 지식과 모든 걸 가지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한 애정들은 단절되면 안 되고, 서로 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겉옷을 벗어 나귀의 등에 덮고 그 위에 주님을 태우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는 것은 옷이나 장식처럼 남에게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일까요? 첫째는, 악을 멀리하되 그것이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멀리 해야 합니다. 다른 이유로 악을 멀리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건강을 위해, 또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등등의 이유로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둘째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때는 자기 마음대로 해선 안 되고, 언제나 진리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 일인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님께 여쭤봐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주님께 물어가면서 일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속에 정성이 담기고, 주님의 질서가 담깁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됩니다. 직장의 일이든 교회의 일이든, 아니면 개인의 일이든 모든 일 가운데 나귀 위에 자기의 겉옷을 깔고 그 위에 주님을 모시는 것과 같은 겸손과 정성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삶 가장 낮은 곳까지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며, 각자의 삶을 향기 나는 삶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 위에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아멘

 

2022-04-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6-0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AC.8 설명,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에 관하여 (2024/6/1)

 

그러니까 유형(有形),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진짜라 믿고, 그런 삶을 추구하던 사람이 어떤 일을 계기로 ‘아, 무형(無形), 즉 보다 가치로운 삶, 윤리, 도덕, 사람다움, 더 나아가 영적인 삶이라는 게 있구나!’ 깨닫는 걸 말합니다.

 

저의 경우는 그 첫 계기가 고3 때 모친 교통사고 사망이 아니었나 합니다. 저는 그전까지는 아인슈타인처럼 대학교수가 되어 캠퍼스 내 교수 사택에서 살며, 평생 학자의 길을 걷는 걸 목표로 하였으나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별(死別)로, 그동안 추구하던 삶에 대해 ‘아, 내게 있는 이 모든 것, 내가 꽉 쥐고 있는 이것들은 언제든 갑자기 나를 떠날 수 있는 것들이구나!’ 깨닫게 되었고, 이후 그전까진 한 사람의 흔한 모태(母胎) 신앙인, 그러니까 교회를 그냥 일종의 문화생활, 써클활동 정도로만 다니던 신앙생활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요, 곧 관점의 변화, 전엔 내 삶의 행복을 위해 신앙은 그저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 옵션이었다면, 이후엔 신앙을 이용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옵션을 선택한 후, 그 안에서 내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표현들이 살짝 좀 이상하지요? ‘신앙을 이용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이라... 그러니까 신앙도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이고, 말씀 가까이하는 것도 내가 병 낫고, 복 받고, 내 삶의 형통과 핏줄들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 내 두드러진 활동, 우아하고 세련된 매너 등을 통해서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받는 걸 좋아하면서 하는 신앙생활 말입니다. 물론, 이런 게 다 조금씩은 필요한 거긴 하지만, 뭔가 좀 이상하지요? ㅎㅎㅎ

 

네, 아직 이런 상태가 바로 한 사람의 거듭남 초기 상태이며, 기특하게도 신앙생활이라는 걸 시작은 했지만, 아직은 머리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가슴 신앙으로 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죠.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이 다 그 연약함으로 인해 이런 순서로밖에는 진행될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이런 잘난 체와 실수를 허락하십니다. 제가 선을 넘지 않도록 보살피시면서 말이죠...  

 

고3, 대1 때 시작된 이런 상태변화가 6학년 3반이 된 지금 돌아보면 몇 번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때그때 혹시 필요하면 더 나누겠습니다.

 

오늘 내용대로라면, 저 유명한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 앞부분,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15:11-19)

 

에서, ‘스스로 돌이켜’ 부분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하는 부분들 등이 바로 이 사람 안에 주님이 넣어두신 리메인스를 주님이 이때 꺼내쓰신 예가 아닐까 싶고,

 

또,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이 알려주신 바에 의하면, 아담으로 시작, 나중에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지는 태고교회, 이 교회의 변질과 타락, 황폐화로 인한, 자기 사랑, 세상 사람의 광풍 한 가운데 종말의 때에 등장하는 ‘노아’ 말인데요, 이 노아’가 바로 첫 교회시대인 태고교회의 리메인스라고 합니다. 한 개인에 있어 리메인스가 하는 저런 역할처럼 말입니다.

 

참고로, 창세기 아브라함 전까지는 그 등장하는 모든 인물명은 사실은 신앙명, 교리명, 교회명을 말하는데요, 그러니까 ‘아담’하면 ‘아담’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 ‘’하면 ‘’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 등등 말이죠. ‘노아’ 역시 그 당시 정말 희귀했던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신앙을 끝까지 붙든 사람들과 그 교회, 그 신앙을 말합니다. 그런 신앙의 사람들, 그런 교회를 노아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이지요.

 

 

AC.8, 창1, '본문, 개요, 배경'(AC.6-15)

8두 번째 상태는 주님에게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들 사이 구별이 생기는 때입니다. 주님에게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라 하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신앙 관련 지식

arcanacoelestia.tistory.com

 

Posted by bygracetistory
,

 

AC.7 설명, '혼돈, 공허, 흑암'(창1:2)의 속뜻 (2024/5/31)

 

앞서 창세기 1장은 거듭남에 수반되는 수많은 상태변화를 여섯 단계로 나눈 것이라 말씀드렸는데요, 오늘은 그 첫 번째 단계로 창세기 본문으로는 1장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에 해당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주석은 뒤 17, 18, 19번 글에 나오지만, 혹시 미리 보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들을 찾아가시면 되겠습니다.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AC.17-19)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arcanacoelestia.tistory.com

 

AC.18,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AC.17-19)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arcanacoelestia.tistory.com

 

AC.19,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AC.17-19)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arcanacoelestia.tistory.com

 

모든 사람은 일단 태어나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누구든지 대한민국에 태어나면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나라와 주변의 돌봄이 시작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천국을 사람으로 채우시는 것이며, 이를 위해 그로 하여금 먼저 지상에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 태어난 사람을 천국에 데려가시기 위해 그의 평생, 그와 동행하시며 그를 돌보시는 전 과정이 한 사람의 거듭남 풀코스라 할 수 있는데요, 그 결과 누구는 천국으로, 누구는 지옥으로 가게 되지만, 이는 전적으로 그 사람 본인의 선택이고, 그래서 천국도 그가 원해서, 지옥도 그가 원해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평생에 천국과 지옥 간, 선과 악 간 좌우 균형을 잡아주시는데요, 즉 지옥이 잡아당기는 만큼 천국 또한 같은 힘으로, 악이 잡아당기는 만큼 선 또한, 그래서 마치 저 태양과 지구, 지구와 달 사이 딱 균형 잡힌 위치에서 서로 공전과 자전을 하도록, 누가 다른 쪽으로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시는 일, 사람이 할 수 없는 이런 일을 주님은 신으로서, 사랑의 신으로서 하고 계십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 중 직전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AC.7, 창1, '본문, 개요, 배경'(AC.6-15)

7첫 번째 상태는 선행 상태와 유아기 상태 둘 다를 포함하는 상태, 그리고 중생 직전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혼돈’, ‘공허’, ‘흑암’(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이라고 하며, 그 첫 번

arcanacoelestia.tistory.com

 

Posted by bygracetistory
,

천국과지옥.1.18.162-169.'천국의 시간'.scan.pdf
0.32MB

 

 

Posted by bygracetistory
,

 

AC.6 설명,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2024/5/30)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천지창조의 역사로 읽었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 글을 읽어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아실 수 있는데요, 아래 글은 이 창세기 1장 주석의 마지막 글이지만, 어쩌면 시작 시점인 지금 읽을 필요도 있겠다 싶어 이렇게 링크 달아놓습니다.

 

 

AC.66, 창1 뒤,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AC.66)

66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다음과 같았는데요, 그들은 어떤 지상에 속

arcanacoelestia.tistory.com

 

인류와 지구의 시작과 역사는 우리, 특히 인류학자, 지질학자 등에게는 정말 꼭 알고픈 것일 수 있겠으나, 그러나 주님은 그런 거엔 거의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런 건 사람들의 천국 입국에 필수 불가결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태고교회, 즉 태고시대 언어생활의 특징을 담아 인류의 시작, 지구의 시작을 창세기 1장처럼 마치 무슨 스토리텔링식으로 표현, 사람들의 천국 입국 영순위 조건인 ‘거듭남’에 대하여 그렇게 첫째 날, 둘째 날... 식의 상응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AC.6, 창1, '본문, 개요, 배경'(AC.6-15)

※ 내용은 하단에 나옵니다.  창 1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

arcanacoelestia.tistory.com

 

Posted by bygracetistory
,

 

AC.5 설명, '스베덴보리에게 시작된 첫 영계 체험 이야기' (2024/5/29)

 

다음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일생에 처음 주님이 찾아오신, 스베덴보리 연구회 편역,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천재 과학자의 감동적인 천국 체험기)에 나오는 생생한 간증입니다.

 

 

위대한 선물 | 스베덴보리 - 교보문고

위대한 선물 | 스웨덴 태생의 신비적 신학자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 47세에 심력적 체험을 겪은 후 하늘의 소명을 받고 신비적 신학자로 전향하여 27년간 영계를 자유롭게 오가며 지옥과

product.kyobobook.co.kr

 

 

...1745년 어느 날, 스베덴보리에게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영국 런던에서 여행 중이었다. 그동안 영국 여행이 잦아 단골 여관과 단골식당이 있었다. 스베덴보리는 여느 때처럼 단골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 불가사의한 일이 시작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포크를 테이블 위에 놓고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스베덴보리가 식사를 하던 식당 쪽으로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비치더니 곧이어 태양 빛의 열 배쯤 되는 강렬한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스베덴보리는 눈이 부셔 눈을 뜰 수도 없었고, 기절할 정도로 놀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잠시 후, 그 빛 가운데서 금빛 찬란한 흰색 로브(길고 헐거운 예복으로 예복, 관복, 법복으로 쓰임)를 입은 한 인물이 빛을 발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스베덴보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비한 느낌의 인물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대여!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사라진 뒤로도 식당 안엔 구름과 안개가 자욱했고, 스베덴보리는 그 안개 속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구름과 안개가 사라지고, 스베덴보리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식당에 혼자 서 있었다.

 

스베덴보리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조금 전 식당에서 있었던 기이한 경험을 떠올렸다. ‘내가 헛것을 볼 정도로 몸이 안 좋은가?’ 하고 생각해 봤으나 분명 자신이 본 것이 헛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베덴보리는 잘 알고 있었다. 고심하던 그는 곧 잠이 들었다. 그다음 날 저녁에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다음 날 밤, 스베덴보리가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막 누우려고 할 때였다. 방 안으로 전날 식당에서처럼 갑자기 환한 빛이 비쳐 대낮같이 밝아지더니, 어제 봤던 그 신비한 인물이 또다시 나타나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놀란 스베덴보리는 몸을 떨었다. 그런데 그 신비로운 인물은 준엄한 어조로 스베덴보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놀라지 마시오!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사명을 부여하러 왔습니다. 나는 그대를 사후세계인 영의 세계로 안내할 것입니다. 그대는 그곳에 가서 거기 있는 영인들과 교류하고, 그 세계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그대로 기록하여 이 지상 사람들에게 낱낱이 전하시오. 그대는 이 소명을 소홀히 생각하지 마시오!

 

이 말을 남기고 신비의 인물은 다시 사라졌다.

 

스베덴보리는 그날 이후 그를 다시는 본 적이 없다. 지상에서는 물론이고, 그렇게 많이 드나들던 영계에서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스베덴보리의 생활과 환경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불가사의한 인물을 만난 이후로 그에게 영계의 문이 활짝 열렸다. 영안을 뜨게 된 것이다. 또 영계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신비한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 능력으로 그는 영계를 마치 자기 집과 같이 드나들게 되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불가사의한 인물로부터 소명을 받은 대로 영계에서 보고 들은 모든 체험을 낱낱이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영계 저술’의 출발이었다. 그는 어떤 위대한 힘, 즉 창조주의 소명을 받았음을 추호도 의심치 않게 되었다...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보면 수시로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또는 ‘허락하심’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일거수일투족, 그리고 일점일획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하지 않았는데요, 저 역시 그의 이 점 또한 온전히 본받고 싶습니다.

 

 

AC.5,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5이런 사실은 실제로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런 경우인데요, 그래서 저는 지난 수년간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계속 끊임없이 함께 지내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거나 그

arcanacoelestia.tistory.com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 설명, '말씀의 속뜻이 이제야 계시된 이유' (2024/5/28)

 

오늘 본문에 ‘아직 한 번도 밝혀지지 않은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 heavenly secrets)’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다음은 말씀의 속뜻인 이런 아르카나가 왜 이제서야, 그러니까 지난 18세기 중반인 1750년대에 들어서야 세상에 계시되었나 하는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206번 글 인용입니다. 참고로, 이 책은 스베덴보리(1688-1772)의 마지막 저서로,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지난 30여 년간 밝히신 모든 계시를 정리, 정돈한 일종의 조직신학 같은 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책을 끝으로 그다음 해인 1772년에 영원한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첫째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단순, 그들에게는 이것이 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인데요, 설령, 그럼에도 그랬다면 그들은 그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결과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 쓰임새도, 즉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for the reason that the Christians of the primitive church were too simple to have it disclosed to them, and if it had been it would neither have been of any use to them nor would have been understood.

 

둘째는, 이 초대교회 후 기독교 세계 전반에 어두움이 찾아왔는데, 먼저 많은 이단의 확산과 그 뒤를 이은 니케아 공의회의 심의와 칙령 때문이었습니다. 이 회의는 영원부터 계시다는 세 신적 인격과,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리스도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the deliberations and decrees of the council of Nice respecting three Divine persons from eternity, and respecting the person of Christ as being the son of Mary and not the son of Jehovah God.

 

※ 다음은 위키백과에 있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요약 설명입니다.

 

니케아 공의회(영어: First Council of Nicaea, 라틴어: Concilium Nicaenum Primum)는 325년 5월 20일 니케아(Nicaea, 현재 튀르키예의 이즈니크, 콘스탄티누스 1세의 니케아 별궁)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다. 부활절과 삼위일체 등을 논의했으며,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보편교회(공교회, The Catholic Church)의 정치적 외연을 확대했다.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 기독교 최초 공의회로 인정받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정치적으로는 하나지만, 신학적으로 갈라진 로마 제국의 통일과 화합을 위하여 기독교의 단결이 중요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 내부에는 많은 교리의 대립이 있어 수습이 곤란하였기 때문에 이 대립을 끝내기 위해 비티니아의 니케아에서 주교들을 소집하였다.

 

계속해서, 여기서, 그러니까 이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 ‘칭의’(justification)에 관한 현대적 믿음이 생겨났는데요, 이 믿음은 세 신이 돌아가며 자기 차례가 되면, 그때 사람들이 다가가야 한다는 걸 가르치는, 그러니까 이거 할 때는 아버지 하나님을, 저거 할 때는 아들 하나님을, 그리고 요거 할 때는 성령 하나님을 찾는, 즉 용도에 따라 따로따로 하나님들을 찾는 그런 믿음인데, 이 믿음은 오늘날 교회에 속한 온갖 것이 의존하는, 마치 몸에 속한 것들이 머리에 의존하듯 그렇게 의존하는 믿음입니다. From this springs the modern belief in justification, which teaches that three gods are to be approached in their order, on which faith each and all things of the present church depend as the members of the body depend on the head.

 

그리고 어두움이 임한 두 번째 이유는, 이로 인해 말씀의 모든 것이 이 잘못된 믿음을 확실히 하는 용도로만 사용되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And because all things of the Word have been applied to confirm that erroneous belief,

 

말씀의 영적인 뜻은 열릴 수가 없었는데요, 만일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 뜻을 같은 목적으로 사용할 테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곧 말씀의 거룩함 그 자체를 (본의 아니게) 모독, 즉 더럽히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 the spiritual sense could not be disclosed, for if it had been they would have applied that sense also to the same purpose, and thereby have profaned the very holiness of the Word,

 

그리고 역시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천국을 철저히 닫아버리게 되고, 그 결과 주님을 교회로부터 떼어놓게 되기 때문입니다. and thus have completely closed up heaven against themselves, and have separated the Lord from the church.

 

네, 이런 이유로, 주님 초림 후, 지난 1750년대까지 이 아르카나가 봉인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주님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려주고 계시네요.  

 

우리는 보통 ‘삼위일체(The Divine Trinity)를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 하나님이 계시지만, 이 세 하나님은 하나이시다’라고, 뭐 잘은 모르지만, 그리고 이해는 안 되지만, 이렇게 고백하고, 또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는 뭐 특별히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뭔가 불편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계, 특히 천국에서는 사정이 다른가 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제1장,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나는 자주 이 문제로 천사들과 대화를 나눴다. 천국에서는 신을 셋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천사들은 한결같이 단언했다. 그들은 신이 한 분이심과, 그 한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심지어 지상에서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도, 신이 세 분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천국에 올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세 신 사이를 헤매기 때문이며, 천국에서는 한 분을 생각하면서 셋이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생각을 그대로 말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의 언어는 생각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즉 소리 나는 생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살 때, 신을 셋으로 나누어 그 각각을 별개로 인정한 사람들, 그래서 신관을 주님 한 분으로 모으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각 사람의 생각이 전체에 전달되기 때문에, 만일 입으로는 한 분을 말하면서 셋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드러나고 거부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진리와 선을 분리시키지 않은 사람들,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놓지 않은 사람들은 사후에 영계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주님께 대한 천국의 관념, 즉 주님이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생활이 따르지 않은 신앙인, 참 신앙의 교훈대로 살지 않은 사람은 그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스베덴보리가 알려주는, 그리고 천국 천사들이 고백하는 삼위일체는, ‘사람이 영과 육, 그리고 활동으로 이루어지듯 주님도 영이신, 즉 신성(The Divine)이신 여호와 하나님, 육이신, 즉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활동, 그러니까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이신 성령이 한 분 주님으로 모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해가 되실까요? 이에 대해서는 일단 여기까지만 하지요 ^^

 

 

AC.4,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4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해석하는 동안에는 그 안에 그러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첫 장에서는 세상의 창조와 낙원이라고 불리는 에덴동산, 그

arcanacoelestia.tistory.com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 설명, '사람처럼 말씀도 영과 육으로 되어 있다' (2024/5/25)

 

우리가 영과 육, 즉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되어 있는 존재임을 확실히 믿으신다면, 말씀 또한 동일하게, 즉 우리가 지금 우리말로 읽고 있는 이 겉 글자는 말씀의 육이요, 그 안에는 비록 우리 눈에는 안 보이나 천사들 눈에는 보이는 말씀의 영으로 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산상수훈 주님의 말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5:18)

 

하신 말씀은 그 안에 들어있는 말씀의 영, 곧 주님의 신성을 가리키신 것이며, 이것이 곧 오늘 AC.3번 글의 내용인, 말씀 안에 담긴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 곧 주님의 말씀을 늘 마치 양식 구하듯 찾아야 하며, 또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119:18, 개역한글)

 

해야 할 것이며, 그러다 보면, 우리 내면이 점점 열려 어느덧 천국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 21)

 

천국은 자기 안에 천국이 있는 사람이 가는 곳(상태)이며, 자기 안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자기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 상태와 같아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AC.3,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3그런 생명 없이는, 그저 겉 글자 만이기만 한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기독교계에서 알려진 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된 인간의 경우와 같은데요, 속 사람과 분리된 상태에

arcanacoelestia.tistory.com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 설명, 천국은 '만큼의 나라' (2024/5/24)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 거의 모든 것에 다 해당되는 말이지만, 천국, 특히 주님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의 천국은 무척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요, 그것은 천국은 ‘만큼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만 누릴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이지요. 아는 만큼만, 나의 내면이 열린 만큼만 허락되는 나라...

 

천국의 ‘’ 개념이 여기서 출발하며, ‘능력’도, ‘형통’도 다 여기서 출발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만, 주님을 아는 만큼만 말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영적 역량을 넘어서는 영적 경험은 오히려 그에게 큰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이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량만큼만 허락하시되 그러나 그 안에서는 넘치도록 허락하시는 주님! 그래서 우리 모두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 말씀에 대한 태도 또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만큼만 결정됩니다.

 

주님을 세상 가장 존귀한 분으로, 주님을 온 우주, 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한테는 이 기록된 말씀 하나하나에 대한 태도가 마치 천국 천사들이 말씀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뵈옵고는 어쩔 줄 몰라 하듯 그렇게 말씀 앞에 감동, 감격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주님의 허락으로 영안이 열려 말씀 안에 계신 주님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AC.2,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2그러나 기독교계는 아직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일반적이든 아니든 아니, 가장 작은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一點一劃, the very

arcanacoelestia.tistory.com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 설명, '말씀의 속뜻과 겉뜻' (2024/5/23)

 

창세기 속뜻 주석을 시작하면서 중요한 건, 그렇다고 창세기 겉뜻이 틀렸다, 쓸데없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속뜻을 모르고도 지금까지 수많은 인류가 천국 갈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현재의 천국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며,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고, 육이란, 영이 이 세상에서 옷처럼 입고 생활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무척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겉뜻과 속뜻의 관계는 겉뜻, 곧 겉 글자는 속뜻을 담는 그릇이며, 주님의 거룩한 신적 진리(Divine Truth)이신 속뜻을 보호하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말씀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여기 ‘그룹’의 속뜻이 바로 보호장치이며, ‘생명나무의 길’은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두루 도는 불 칼’은 겉뜻 안에 있는 이런저런 신적 진리를 말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깊이 다루겠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속뜻을 살핀다 하여 겉뜻을 소홀히 여기고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와있는 천사들은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육안을 통해 말씀의 속뜻, 곧 아르카나를 읽는데요, 우리는 말씀을 읽으면서 보통은 그저 그냥저냥 하고 있어도, 이때 천사들은 아르카나에 담긴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을 뵈오며, 형언할 수 없는 감격과 감동으로 온몸을 떤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내면, 자신의 영이 열릴수록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놀라운 광경을 더욱 느끼시며, 또 주께서 허락하시면 목격하실 수 있습니다.

 

아울러 말씀을 지나치게 무슨 원어 공부니 무슨 주석이니 하며 세상 지식 일변도의 접근을 하시지 말 것과, 속뜻을 안다고 겉뜻 가운데 있는 분들을 하찮게 여기신다거나, 겉뜻에 목숨을 거신다고, 속뜻에 힘쓰시는 분들을 이단, 삼단 정죄를 일삼거나 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럴 시간에 전자는 실제 실천에 힘쓰시고, 후자는 사랑에 뿌리내리시는 일에 힘쓰시는 것이 더욱 중요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AC.1,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1구약 말씀을 단순히 그 겉 글자로만(the mere letter of the Word), 즉 기록된 글자 그대로만 읽어서는 아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말씀의 이면(裏面, this part of the Word)에는 천국의 깊은 비밀들(deep se

arcanacoelestia.tistory.com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