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6

‘쇠’(iron)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은 에스겔이 두로에 관해 말한 다음 말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That “iron” signifies natural truth is further evident from what Ezekiel says of Tyre:

 

12다시스는 각종 보화가 풍부하므로 너와 거래하였음이여 은과 철과 주석과 납을 네 물품과 바꾸어 갔도다, 19워단과 야완은 길쌈하는 실로 네 물품을 거래하였음이여 가공한 쇠와 계피와 대나무 제품이 네 상품 중에 있었도다 (겔27:12, 19) Tarshish was thy trader by reason of the multitude of all riches; in silver, iron, tin, and lead, they gave thy traffickings. Dan, and Javan, and Meusal furnished bright iron in thy tradings; cassia and calamus were in thy mart. (Ezek. 27:12, 19)

 

이 말씀과 같은 장의 앞뒤에 나오는 내용에서 천적·영적 부요함을 뜻한다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각각의 표현은 물론 언급된 이름들까지도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문자적인 말이 아니라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From these words, as well as from what is said both previously and subsequently in the same chapter, it is very evident that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are signified; and that every particular expression, and even the names mentioned, have some specific signification,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piritual, and not verbal.

 

[2]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Jeremiah:

 

12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13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렘15:12-13) Can one break iron, even iron from the north, and brass? Thy substance [facultates] and thy treasures will I give for a spoil without price, and this for all thy sins, (Jer. 15:12–13)

 

여기서 ‘쇠’(iron)와 ‘놋’(brass)은 자연적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그것들이 ‘북방’(north)에서 왔다고 한 것은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천적인 것에 비하면 짙은 어둠이 빛에 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곧 ‘북방’이 ‘남방’(south)에 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그늘이 빛에 비하는 것과도 같은데, 여기서는 ‘어머니’(mother)인 ‘씰라’(Zillah)도 이러한 그늘을 나타냅니다. ‘재산’(substance)과 ‘보물’(treasures)이 천적·영적 부요함을 뜻한다는 사실도 매우 분명합니다. where “iron” and “brass” signify natural truth and good; that it came from the “north”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natural; for what is natural, relatively to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is like thick darkness (that is, the “north”) relatively to light or the “south”; or like shade, which is also signified here by “Zillah,” who is the “mother.” That the “substance” and “treasures” are celestial and spiritual riches is also very evident.

 

[3] 에스겔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gain in Ezekiel: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겔4:3) Take thou unto thee a pan of iron, and set it for a wall of iron between thee and the city, and set thy faces toward it, and let it be for a siege, and thou shalt straiten against it, (Ezek. 4:3)

 

여기서도 ‘쇠’가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진리에는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으므로, 힘은 진리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진리, 곧 신앙의 진리를 뜻하는 쇠에 관해 ‘산산이 부순다’(breaks in pieces), ‘짓부순다’(crushes)고 말합니다. 다니엘서에서도 그러하며(단2:34, 40), 계시록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here also it is evident that “iron” signifies truth. Strength is attributed to truth, because it cannot be resisted, and for this reason it is said of iron—by which is signified truth, or the truth of faith—that it “breaks in pieces” and “crushes”; as in Daniel (2:34, 40), and in John:

 

34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40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찧을 것이며 (단2:34, 40)

 

26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계2:26–27) He that overcometh, to him will I give sovereign power over the nations, that he may pasture them with a rod of iron; as the vessels of a potter shall they be broken to shivers. (Rev. 2:26–27)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계12:5) The woman brought forth a man child, who should pasture all nations with a rod of iron. (Rev. 12:5)

 

[4] ‘쇠 지팡이’(rod of iron)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라는 사실은 계시록의 다음 말씀에서 설명합니다. That a “rod of iron” is the truth which is of the Word of the Lord, is explained in John: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5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계19:11, 13, 15) I saw heaven open, and behold a white horse, and he that sat upon him was called faithful and true, and in righteousness he doth judge and fight; He was clothed with a vesture dipped in blood, and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out of his mouth goeth a sharp sword, that with it he should smite the nations; and he shall pasture them with a rod of iron. (Rev. 19:11, 13, 15)

 

해설

AC.426은 앞의 AC.425에서 밝힌 금속의 속뜻 가운데 특별히 ‘쇠’에 집중합니다. 앞 번호에서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했다면, 이번 번호에서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살펴봅니다. 스베덴보리는 에스겔과 예레미야, 다니엘과 계시록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쇠가 나타내는 진리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자연적 진리와 영적·천적 부요함의 관계,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차이, 그리고 진리가 지닌 힘입니다.

 

먼저 겔27:12, 19는 두로의 무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다시스는 은과 쇠와 주석과 납을 가져오고, 단과 야완과 므우살은 빛나는 쇠와 향료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뿐 아니라 같은 장의 앞뒤 내용을 함께 살펴보면, 이 모든 것이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앞의 AC.425에서도 두로는 영적·천적 부요함을 지닌 사람들을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두로의 무역품 가운데 등장하는 쇠 역시 단순한 금속을 넘어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주석과 납, 향료, 각각의 지명에 대한 구체적인 속뜻까지 밝히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각각의 표현뿐 아니라 이름들까지도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은 영적이며, 단순히 문자적인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말씀의 문자적 기록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로의 무역에 관한 기록은 문자적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속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을 때 특정한 단어나 이름 하나만 떼어 내어 의미를 정하기보다, 앞뒤 문맥과 함께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렘15:12-13에서는 쇠와 놋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북방의 쇠’라는 표현에 주목하여, 북방이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천적인 것에 비하면 짙은 어둠이 빛에 비하는 것과 같으며, 북방이 남방에 비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둠은 자연적 진리가 곧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천적인 것의 관계를 밝음의 차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창4장의 씰라와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인 씰라가 그늘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앞의 AC.421에서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씰라의 의미를 북방과 그늘의 이미지에 연결하여, 자연적인 것이 영적·천적인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적인 차원에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씰라가 그늘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근거로 씰라 자체가 악이나 거짓을 뜻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재산’과 ‘보물’은 천적·영적 부요함을 뜻합니다. 예레미야의 문자적 말씀에서는 죄로 인해 재산과 보물이 노략물로 넘어간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 재산과 보물이 단순한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천적·영적 부요함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그 부요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상실되는지까지 상세히 풀이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쇠와 놋, 북방, 재산과 보물의 의미를 함께 살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겔4:3에서는 에스겔이 쇠판을 가져다가 자신과 성읍 사이에 쇠벽으로 세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쇠가 진리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으므로 힘은 진리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은 이번 번호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쇠가 어떤 차원의 진리를 나타내는지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왜 쇠가 진리를 나타내는지, 특히 진리의 힘이 말씀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단2:34, 40을 언급합니다. 다니엘의 신상 환상에서 쇠는 부수고 깨뜨리는 힘을 지닌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표현을 진리의 힘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는 다니엘의 네 나라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손대지 않은 돌과 쇠와 진흙이 섞인 발이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직접적인 목적은 다니엘의 환상 전체를 풀이하는 데 있지 않고, 쇠에 ‘부수고 깨뜨리는’ 힘이 부여되는 이유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계2:26-27과 계12:5에서는 ‘쇠 지팡이’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을 진리가 지닌 힘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인용한 영어 본문이 ‘다스린다’는 표현을 ‘목양한다’(pasture)고 옮긴다는 사실입니다. 쇠 지팡이는 문자적으로 강한 통치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지만, 스베덴보리가 이 번호에서 밝히는 속뜻은 진리의 힘에 관한 것입니다. 다만 ‘토기장이의 그릇’이나 계12장의 ‘남자아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번 번호에서 따로 풀이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계19:11, 13, 15는 앞의 철장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백마를 타신 분은 ‘충신과 진실’이라 불리고,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명시됩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예리한 검이 나오며, 그분은 쇠 지팡이로 민족들을 목양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통해 ‘쇠 지팡이’가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라는 사실이 설명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마지막 인용은 단순히 쇠가 강하다는 사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주님의 말씀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AC.426의 핵심은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하며, 진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로의 무역은 자연적 진리가 천적·영적 부요함에 관한 말씀 안에 등장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 북방의 쇠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천적인 것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쇠벽과 다니엘의 쇠는 진리의 힘을 드러내며, 계시록의 쇠 지팡이는 그 힘이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두발가인이 다루는 쇠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자연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AC.426 해설)

 

심화

1. ‘철장은 왜 주님의 말씀의 진리를 의미하는가?’

 

AC.426 심화 1, ‘놋뱀은 왜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하는가?’

AC.426 심화1. ‘철장은 왜 주님의 말씀의 진리를 의미하는가?’ AC.426에서 스베덴보리는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진리에는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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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7, 창4:23, ‘라멕은 왜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고백하는가?’ (AC.427-431)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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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5, 창4:22, ‘놋은 왜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놋’(brass)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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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놋’(brass)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말씀에 등장하는 모든 금속이 속뜻으로는 각각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도 알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금’(gold)은 천적 선을, ‘은’(silver)은 영적 진리를, ‘놋’(brass)은 자연적 선을, ‘쇠’(iron)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다른 금속들도 마찬가지이며, ‘나무’(wood)와 ‘돌’(stone) 역시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닙니다. 궤와 성막과 성전을 만드는 데 사용한 ‘금’, ‘은’, ‘놋’, ‘나무’도 이러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예언서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t is unknown to the world at the present day that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and also that every metal mentioned in the Word has a specific signification in the internal sense—as “gold,” celestial good; “silver,” spiritual truth; “brass,” natural good; “iron,” natural truth; and so on with the other metals, and in like manner “wood” and “stone.” Such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gold,” “silver,” “brass,” and “wood,” used in the ark and in the tabernacle and in the templ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at such is their signification is manifest from the prophets, as from Isaiah:

 

16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17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사60:16, 17) Thou shalt also suck the milk of the gentiles, and shalt suck the breast of kings. For brass I will bring gold, and for iron I will bring silver, and for wood brass, and for stones iron; I will also make thy tribute peace, and thine exactors righteousness, (Isa. 60:16–17)

 

이 말씀은 주님의 오심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천적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놋 대신 금’(for brass gold)은 자연적 선 대신 천적 선을, ‘쇠 대신 은’(for iron silver)은 자연적 진리 대신 영적 진리를 뜻합니다. ‘나무 대신 놋’(for wood brass)은 육체적 선 대신 자연적 선을, ‘돌 대신 쇠’(for stones iron)는 감각적 진리 대신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reating of the Lord’s advent, of his kingdom, and of the celestial church. “For brass gold,” signifies for natural good celestial good; “for iron silver,” signifies for natural truth spiritual truth; “for wood brass,” signifies for corporeal good natural good; “for stones iron,” signifies for sensuous truth natural truth. In Ezekiel:

 

야완과 두발과 메섹은 네 상인이 되었음이여 사람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상품을 바꾸어 갔도다 (겔27:13) Javan, Tubal, and Meshech, these were thy merchants, in the soul of man, and vessels of brass they gave thy trading, (Ezek. 27:13)

 

이 말씀은 두로에 관한 것입니다. 두로는 영적·천적 부요함을 지닌 사람들을 뜻하며, ‘놋그릇’(vessels of brass)은 자연적 선을 가리킵니다. speaking of Tyre, by which are signified those who possess spiritual and celestial riches; “vessels of brass” are natural goods.

 

신명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Moses: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신8:9) A land whose stones are iron, and out of whose mountains thou mayest hew brass, (Deut. 8:9)

 

여기서도 ‘돌’(stones)은 감각적 진리를, ‘쇠’(iron)는 자연적 진리, 곧 이성적 진리를, ‘놋’(brass)은 자연적 선을 뜻합니다. 에스겔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where also “stones” denote sensuous truth; “iron,” natural, that is, rational truth; and “brass,” natural good. Ezekiel saw:

 

5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6그들에게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 (겔1:7) Four living creatures, or cherubs, whose feet sparkled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Ezek. 1:7)

 

여기서도 ‘놋’은 자연적 선을 뜻합니다. 사람의 ‘발’(foot)이 자연적인 것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다니엘에게도 다음과 같은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where again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for the “foot” of man represents what is natural. In like manner there appeared to Daniel,

 

5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단10:5, 6) A man clothed in linen, whose loins were girded with gold of Uphaz, his body also was like the beryl, and his arms and his feet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Dan. 10:5–6)

 

‘놋뱀’(brazen serpent, 민21:9)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That the “brazen serpent” (Num. 21:9) represented the sensuous and natural good of the Lord may be seen above.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21:9)

 

해설

AC.425는 두발가인이 다루는 ‘놋과 쇠’의 속뜻을 더 넓은 말씀의 문맥에서 확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금속들이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각각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금은 천적 선, 은은 영적 진리, 놋은 자연적 선,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 구별은 금속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나무와 돌에도 각각 고유한 의미가 있으며, 궤와 성막과 성전을 만드는 데 사용한 재료들 역시 그러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모든 재료의 속뜻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두발가인과 직접 관련된 놋과 쇠의 의미를 밝히는 데 집중합니다.

 

먼저 사60:16-17은 금속과 재료들의 의미를 서로 비교하여 보여 줍니다. ‘놋 대신 금’은 자연적 선 대신 천적 선을, ‘쇠 대신 은’은 자연적 진리 대신 영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어 ‘나무 대신 놋’은 육체적 선 대신 자연적 선을, ‘돌 대신 쇠’는 감각적 진리 대신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이 주님의 오심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천적 교회에 관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재료 교체는 단순히 값싼 물건을 값비싼 물건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의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구절을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거듭남의 단계표로 곧바로 바꾸어 읽지 않는 것입니다. AC.425는 각각의 재료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밝히지만, 사람이 육체적 선에서 자연적 선으로, 다시 천적 선으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과정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자연적 선을 단순한 도덕적 의무감으로, 천적 선을 특정한 감정 상태로 정의하지도 않습니다. 우선 말씀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다른 차원으로 구별되어 표현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겔27:13에서는 ‘놋그릇’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두로의 무역에 관한 기록이며, 스베덴보리는 두로가 영적·천적 부요함을 지닌 사람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 문맥에서 ‘놋그릇’은 자연적 선을 나타냅니다. 앞의 AC.424에서 세공업자가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그 기억지식과 관련되었다면, 이번 번호에서는 두로의 상품 가운데 등장하는 놋그릇을 통해 자연적 선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다만 ‘그릇’이라는 말에 별도의 의미를 더하여 인간의 마음이나 교리의 그릇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이번 번호가 직접 제시한 설명은 아닙니다.

 

겔27:13에 등장하는 ‘두발’이라는 이름도 창4장의 ‘두발가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AC.425는 이 두 이름의 관계를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름이 비슷하고 놋이 함께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두 인물이 동일한 속뜻을 지닌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히는 것은 두로의 의미와 ‘놋그릇’이 자연적 선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신8:9에서는 ‘돌’, ‘쇠’, ‘놋’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돌을 감각적 진리로, 쇠를 자연적 진리, 곧 이성적 진리로, 놋을 자연적 선으로 풀이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자연적 진리를 ‘이성적 진리’라고도 표현합니다. 앞에서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고 설명한 내용을 이 구절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돌은 쇠’라는 표현을 감각적 진리가 실제로 이성적 진리로 변화하는 과정에 관한 상세한 설명으로 확대하기보다는, 본문이 밝힌 두 진리의 구별에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겔1:7은 놋의 의미를 ‘발’과 연결하여 보여 줍니다. 에스겔이 본 네 생물, 곧 그룹들의 발은 광낸 놋처럼 빛났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발이 자연적인 것을 표상하므로, 그 발에 나타난 놋 역시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놋이 자연적 선이라는 설명과 발이 자연적인 것을 표상한다는 설명이 서로 맞물립니다. 그러나 ‘광낸 놋’이 정결하게 된 자연적 선의 특정한 상태를 뜻한다거나, 이 환상의 모든 신체 부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이번 번호에서 밝히지는 않습니다.

 

단10:5-6도 비슷한 방식으로 인용합니다. 다니엘이 본 사람은 세마포 옷을 입고 우바스의 금띠를 띠었으며, 팔과 발은 광낸 놋과 같았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금과 놋이 한 형상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금이 천적 선을,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환상은 놋이 자연적 선을 나타낸다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됩니다. 다만 이 번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팔과 허리와 몸의 각 부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풀이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민21:9의 ‘놋뱀’을 언급합니다. 그는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했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고 말합니다. 앞의 인용들이 놋의 의미를 여러 말씀에서 확인하는 사례였다면, 놋뱀은 그 의미가 주님과 직접 관련되는 사례입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설명을 반복하지 않고 앞선 해설을 가리키므로, 놋뱀의 의미는 별도의 심화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결국 AC.425는 금속과 재료의 속뜻을 통해 선과 진리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특히 이사야와 에스겔, 신명기와 다니엘의 말씀은 ‘놋은 자연적 선, 쇠는 자연적 진리’라는 앞선 설명을 뒷받침합니다. 그리고 놋뱀에 관한 마지막 언급은 자연적 선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주님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창4장의 두발가인이 다루는 놋과 쇠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AC.425 해설)

 

심화

1. ‘놋뱀은 왜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하는가?’

 

AC.425 심화 1, ‘놋뱀은 왜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하는가?’

AC.424 심화1. ‘놋뱀은 왜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하는가?’ 민21:9에서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이 그 놋뱀을 바라보면 살아났습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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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6, 창4:22, ‘쇠는 왜 자연적 진리를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6‘쇠’(iron)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은 에스겔이 두로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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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4, 창4:22, ‘세공업자는 왜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을 뜻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말씀에서 ‘세공업자’(artificer)는 지혜롭고 총명하며 지식을 갖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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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

말씀에서 ‘세공업자’(artificer)는 지혜롭고 총명하며 지식을 갖춘 사람을 뜻합니다. 여기서 ‘놋과 쇠를 다루는 모든 세공업자’(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By an “artificer” in the Word is signified a wise, intelligent, and well-informed [sciens] man, and here by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re signified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natural good and truth. As in John:

 

21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계18:21, 22) With violence shall that great city Babylon be thrown down, and shall be found no more at all. And the voice of harpers, and musicians, and of pipers, and trumpeters, shall be heard no more at all in her; and no artificer, of whatsoever craft, shall be found any more in her. (Rev. 18:21–22)

 

여기서 ‘거문고 타는 자들’(harpers)은 앞에서와 같이 진리들을, ‘나팔 부는 자들’(trumpeters)은 신앙의 선들을 뜻합니다. ‘어떠한 종류의 세공업자’(artificer of any craft)는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지식을 가리킵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Harpers” here as above signify truths; “trumpeters,” the goods of faith; an “artificer of any craft,” one who knows, or the memory-knowledge of truth and good. In Isaiah:

 

19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사40:19, 20) The artificer melteth a graven image, and the smelter spreadeth it over with gold, and casteth silver chains; he seeketh unto him a wise artificer, to prepare a graven image that shall not be moved, (Isa. 40:19–20)

 

이 말씀은 자기 상상으로 거짓, 곧 ‘새긴 우상’(graven image)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진리처럼 보이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speaking of those who from fantasy forge for themselves what is false—a “graven image”—and teach it so that it appears true. In Jeremiah:

 

1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8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 9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었나니 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이거니와 (렘10:1, 8-9) At the same time as they are infatuated they grow foolish, the doctrine of vanities, it is but a stock. Silver beaten out is brought from Tarshish, and gold from Uphaz, the work of the artificer, and of the hands of the smelter; blue and raiment; they are all the work of the wise, (Jer. 10:1, 8–9)

 

이는 거짓을 가르치면서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을 꾸미기 위해 말씀에서 여러 내용을 모아들이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것을 ‘헛된 것들의 교훈’(doctrine of vanities)이자 ‘지혜로운 자들의 작품’(work of the wise)이라고 부릅니다. 고대에는 이러한 사람들을 우상을 만드는 세공업자들로 표상했습니다. 그들은 우상, 곧 거짓을 만들어 놓고 금으로 장식하여 선처럼 보이게 하며, 은으로 장식하여 진리처럼 보이게 합니다. 또한 청색 실과 옷으로 꾸미는데, 이는 겉으로 보기에 그 거짓과 일치하는 듯한 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signifying one who teaches falsities, and collects from the Word things with which to forge his invention, wherefore it is called a “doctrine of vanities,” and the “work of the wise.” Such persons were represented in ancient times by artificers who forge idols, that is, falsities, which they adorn with gold, that is, with a semblance of good; and with silver, or an appearance of truth; and with blue and with raiment, or such natural things as are in apparent agreement.

 

해설

AC.424는 앞의 AC.421-423에서 설명한 두발가인의 의미를 ‘세공업자’라는 말에 집중하여 밝힙니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나타내며, ‘놋’은 자연적 선을,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세공업자’가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놋과 쇠를 다루는 모든 세공업자’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세공업자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계시록과 이사야, 예레미야의 말씀을 차례로 인용합니다.

 

먼저 계18:21-22는 바벨론이 무너진 뒤 거문고와 퉁소와 나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세공업자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 ‘거문고 타는 자들’을 진리들로, ‘나팔 부는 자들’을 신앙의 선들로 풀이합니다. 이어 ‘어떠한 종류의 세공업자’는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지식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앞의 AC.420에서 악기들이 선과 진리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과 세공업자가 함께 등장하는 말씀을 통해 ‘세공업자’의 의미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예언 전체를 해설하지 않으므로, 이 인용만으로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지식이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서 사40:19-20은 세공업자가 ‘새긴 우상’을 만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앞의 계시록 인용에서 세공업자는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그 기억지식을 나타냈지만, 이사야에서는 세공업자가 거짓을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우상을 사람이 자기 상상으로 만들어 낸 거짓이라고 설명합니다. 세공업자는 그렇게 만든 것을 진리처럼 보이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핵심은 세공 기술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만든 거짓을 지식과 이해를 동원하여 그럴듯하게 꾸미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장인’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참된 지혜에 대한 칭찬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의 장인은 흔들리지 않을 우상을 만들기 위해 불려 온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거짓을 만들어 진리처럼 보이게 하는 사람들에 관한 말씀으로 풀이합니다. 이는 사람이 지식을 갖추고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가르치는 내용의 참됨까지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흔들리지 않는 우상’이 어떤 특정한 교리 체계나 논증 방식을 뜻한다고까지 이번 번호가 세부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렘10:1, 8-9는 이 문제를 한층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말씀에는 ‘헛된 것들의 교훈’, ‘나무토막’,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 세공업자와 금을 다루는 자, 청색 실과 옷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을 꾸미기 위해 말씀에서 여러 내용을 모아들이는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말씀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내용들을 가져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거짓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모습을 고대의 우상 제작에 연결합니다. 세공업자들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금으로 장식하여 선처럼 보이게 하며, 은으로 장식하여 진리처럼 보이게 합니다. 청색 실과 옷은 그 거짓과 겉으로 일치하는 듯한 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금과 은은 거짓 자체를 뜻한다기보다, 거짓에 선과 진리의 외관을 입히는 데 사용됩니다. 특히 청색 실과 옷에 관해서는 이번 번호가 ‘겉으로 보기에 일치하는 듯한 자연적인 것들’이라고 설명하는 데 그치므로, 이를 근거 없이 특정한 영적 상태나 교리로 더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 인용을 함께 읽으면 ‘세공업자’라는 표현이 왜 중요한지 분명해집니다. 세공업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과 이해를 나타내지만, 그 지식을 사용하는 사람이 언제나 참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계시록의 인용은 세공업자가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지식과 관련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인용은 사람이 그러한 지식과 이해를 동원하여 거짓을 만들어 내거나 꾸밀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세공업자’라는 단어 하나에 고정된 도덕적 평가를 붙이기보다, 그가 무엇을 만들고 가르치는지에 따라 문맥을 살피게 합니다.

 

이 설명은 두발가인을 이해하는 데도 필요합니다. AC.421에서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나타냈고, AC.423에서는 이전부터 있던 자연적인 것들이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그를 ‘아버지’가 아닌 ‘스승’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스승’이 가르치는 대상인 세공업자들이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이와 동시에 말씀에 관한 지식이 있다는 사실과 그 지식을 참되게 사용한다는 사실을 구별하게 합니다. 말씀의 내용을 모아 설명하더라도, 그것이 이미 정해 놓은 거짓을 꾸미는 데 사용된다면 ‘헛된 것들의 교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424의 중심은 ‘세공업자’가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갖춘 사람을 뜻하며, 두발가인과 관련해서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우상 제작 장면은 지식이 거짓을 진리처럼 보이게 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지식을 많이 갖추었는가뿐 아니라, 그 지식으로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가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24 해설)

 

심화

1.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어떻게 거짓을 가르칠 수 있는가?’

 

AC.424 심화 1,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어떻게 거짓을 가르칠 수 있는가?’

AC.424 심화1.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어떻게 거짓을 가르칠 수 있는가?’ 렘10:8-9에서 우상은 다시스의 은과 우바스의 금, 청색 실과 옷으로 화려하게 꾸며집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4에서 이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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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5, 창4:22, ‘놋은 왜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놋’(brass)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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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3, 창4:22, ‘두발가인은 왜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이라고 불리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두발가인은 야발과 유발의 경우처럼 ‘아버지’(father)가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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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

두발가인은 야발과 유발의 경우처럼 ‘아버지’(father)가 아니라 ‘온갖 기구를 만드는 자의 스승’(instructor of every artificer)이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는 이전에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 곧 내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발과 유발에게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러한 내적인 것들이 그때 처음 생겨났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자연적인 것들, 곧 외적인 것들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으므로 두발가인을 ‘아버지’가 아니라 ‘온갖 기구를 만드는 자의 스승’이라고 부릅니다. Tubal-Cain is called the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and not the “father,” as was the case with Jabal and Jubal; and the reason is that before there were no celestial and spiritual or internal things. And the term “father” is applied to Jabal and Jubal, to denote that such internal things then first began to exist; whereas natural or external things did exist before, but were now applied to internal things, so that Tubal-Cain is not called the “father,” but the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해설

AC.423은 창4:20-22에서 야발과 유발에게는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두발가인에게는 ‘스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21에서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교리가 왜 새로운 것의 ‘아버지’가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표현되는지 밝힙니다. 핵심은 내적인 것들이 처음 생겨나는 일과, 이전부터 있던 외적인 것들이 그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는 일의 차이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야발과 유발에게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들이 나타내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 곧 내적인 것들이 그때 처음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처음’이라는 말은 인류 역사상 사랑과 신앙이 그때 비로소 생겨났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23은 앞에서 설명해 온 ‘이 새 교회’의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그 교회에 내적인 것들이 생겨나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반면 자연적인 것들, 곧 외적인 것들은 그전에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두발가인이 나타내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는 내적인 것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외적인 것들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 때문에 두발가인을 ‘아버지’가 아닌 ‘스승’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적용되었다’는 표현을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AC.423은 자연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적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앞의 AC.422에서 내적 교회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로, 외적 교회는 자연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밝힌 내용을 함께 읽으면, 이번 번호가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계속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적인 것들이 이전부터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자연적인 것들을 무조건 낮게 보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해석도 경계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들이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자연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만 자연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의 모든 외적인 것이 이미 온전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가 직접 설명하는 범위는 두발가인에게 ‘스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입니다.

 

결국 AC.423에서 ‘아버지’와 ‘스승’의 차이는 단순한 호칭의 차이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 새 교회에서 천적·영적인 내적 요소들이 처음 생겨났음을 나타내고, ‘스승’은 이전부터 존재하던 자연적·외적 요소들이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두발가인이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는 앞 번호의 설명도 이 구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23 해설)

 

 

 

AC.424, 창4:22, ‘세공업자는 왜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을 뜻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말씀에서 ‘세공업자’(artificer)는 지혜롭고 총명하며 지식을 갖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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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2, 창4:22, ‘레아와 라헬은 왜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를 나타내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2이 새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는 유대교회를 통해 알 수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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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창4:22)

 

AC.421

앞서 말했듯이, ‘씰라’(Zillah)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놋과 쇠로 온갖 기구를 만드는 자의 스승’(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인 ‘두발가인’(Tubal-Cain)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놋’(brass)은 자연적 선을, ‘쇠’(iron)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두발가인의 누이’(the sister of Tubal-Cain)인 ‘나아마’(Naamah)는 그와 비슷한 교회, 곧 그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By “Zillah” is signified, as previously stated, 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 by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brass” denoting natural good, and “iron” natural truth. By “Naamah, the sister of Tubal-Cain” is signified 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

 

해설

AC.421은 창4:22에 등장하는 씰라와 두발가인, 나아마의 속뜻을 설명합니다. 앞서 야발과 유발을 통해 사랑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자연적인 것들’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두발가인을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로 해석하고, 놋과 쇠가 각각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이로써 라멕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은 교회의 서로 다른 측면을 설명하는 흐름을 이어갑니다.

 

먼저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자연적인 것들은 앞서 다룬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에 비해 사람의 외적인 삶과 관련된 차원을 가리킵니다. 다만 자연적이라는 말이 곧 악하거나 영적인 것과 무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자연적인 것들 안에도 선과 진리가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것을 단순히 극복하거나 버려야 할 대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두발가인’은 ‘놋과 쇠로 온갖 기구를 만드는 자의 스승’이라는 설명과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를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발가인을 단순히 금속을 다루는 기술자로 풀이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의 문자적 기록은 그가 놋과 쇠를 다루는 기술과 관련된 인물임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기록의 속뜻에서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읽어 냅니다. ‘스승’이라는 표현 역시 이번 번호의 해석이 단순한 기술이나 물건이 아니라 교리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번 번호는 두 개념의 구체적인 사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놋과 쇠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만 밝힙니다. 따라서 자연적 선을 특정한 선행 하나로, 자연적 진리를 특정한 지식 하나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우선 자연적인 차원에도 선과 진리의 구별이 있으며, 두발가인이 그 둘에 관한 교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놋’은 자연적 선을,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두 금속은 문자적으로는 기구를 만드는 재료이지만, 속뜻에서는 자연적인 차원의 선과 진리를 구별하여 나타냅니다. 앞의 AC.419에서 수금과 퉁소가 각각 영적 진리와 영적 선을 나타냈던 것처럼, 이번 번호에서는 놋과 쇠가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악기와 금속의 의미를 하나의 기계적인 대응표로 만들기보다는, 각각의 말씀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뜻을 따라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아마’는 두발가인의 누이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나아마가 ‘그와 비슷한 교회, 곧 그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 교회 밖’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두발가인과 나아마가 모두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련되지만, 스베덴보리는 둘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나아마는 앞서 말한 교회 밖에 있는, 그와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다만 이번 번호만으로 그 교회가 역사적으로 어떤 집단인지, 왜 교회 밖에 있다고 표현하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교회의 삶이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관한 가르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차원에도 선과 진리가 있으며, 그것들에 관한 교리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이번 번호가 자연적인 선과 진리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라멕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이 교회의 어떤 측면을 나타내는지 밝히는 데 초점을 둡니다.

 

결국 AC.421의 핵심은 두발가인이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놋과 쇠가 각각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하고, 나아마는 그 교회 밖에 있는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 짧은 번호를 통해 자연적인 것들 역시 교회의 선과 진리에 관한 설명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AC.421 해설)

 

 

 

AC.422, 창4:22, ‘레아와 라헬은 왜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를 나타내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2이 새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는 유대교회를 통해 알 수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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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창4:21, ‘말씀에 여러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언급되며, 각 악기에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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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곧이어 등장하는 아다와 씰라, 그리고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후의 AC를 읽다 보면 이들이 단순히 악과 거짓만을 표상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가인 계열은 이미 라멕에서 끝난 것 같은데 왜 그 뒤에 유용해 보이는 것들이 다시 나타나는가?’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내적인 교회의 생명이 소멸되었다’는 것과 ‘그 계열에서 모든 외적인 것까지 즉시 쓸모없어졌다’는 것이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내적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어도 그 안에서 형성된 지식과 기술, 예배와 교리의 외적 형식 가운데 후대에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 남을 수 있습니다.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사회와 교회의 쇠퇴 가운데서도 후대에 쓸 수 있는 것들을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설명하는 AC에서는 천적인 것,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관련된 여러 외적 형식과 기능이 구별되어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용한 외적인 것이 나타났다’는 사실과 ‘가인으로 시작된 교회적 상태가 다시 본래의 생명을 회복했다’는 것을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멕에서 신앙의 내적 생명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설명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 이후에 유용한 것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가인 계열이 다시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내적인 것이 약해지거나 사라진 뒤에도 외적인 지식과 기술, 형식은 한동안 남을 수 있고 오히려 크게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올바른 내적 생명과 결합될 때 좋은 쓰임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종말’도 모든 외적 종교 활동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생명인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의 결합이 더 이상 그 교회적 상태 안에서 유지되지 못할 때 내적으로는 종말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 형식과 교리적 지식과 여러 유용한 외적 요소는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창4와 창5를 읽을 때에도 ‘가인 계열은 악한 사람들, 셋 계열은 선한 사람들’이라는 단순한 두 혈통의 대립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심 관심은 각각의 계보가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와 그 변화에 있습니다. 창5의 계보 역시 언제까지나 동일하게 순수한 상태로 유지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는 결국 쇠퇴하고 종말을 향해 갑니다.

 

그러므로 홍수 역시 단순히 ‘악한 가인 혈통은 멸망하고 선한 셋 혈통은 살아남았다’는 구조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속뜻과 맞지 않습니다. 노아는 단순한 ‘셋 계열의 착한 생존자’라기보다 새로운 교회적 상태, 곧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거듭나는 영적 교회의 시작을 표상합니다.

 

후속 AC 전체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는 인간의 의지 자체가 깊이 부패하면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이해와 진리를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며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노아는 바로 그 전환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아다와 씰라 계열에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종말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 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보존하시고, 후대의 교회와 인간 사회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쓰임을 위해 남겨 두십니다.

 

따라서 이 심화가 보여 주는 중요한 원리는 ‘종말 가운데서의 보존’입니다. 내적 생명이 쇠퇴해도 모든 외적인 유용성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쇠퇴한 것 가운데서조차 후대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건져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만나면서 우리는 ‘가인 계열이 다시 살아났구나’라고 보기보다, ‘내적인 교회적 생명이 종말을 향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어떤 외적인 것들을 보존하여 이후의 쓰임을 준비하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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