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2:8)
AC.101
‘동쪽’(east)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에스겔에 이르기를,That the Lord is the “east” also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1그 후에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2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겔43:1-2, 4)He brought me to the gate,even the gate that looketh the way of the east,and behold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came from the way of the east;and his voice was as the voice of many waters,and the earth shone with his glory(Ezek. 43:1–2, 4).
주님께서‘동쪽’(east)이시기 때문에,성전을 짓기 이전의 표상적인 유대 교회에서는 기도할 때,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는 거룩한 관습이 널리 행해졌습니다.It was in consequence of the Lord’s being the “east” that a holy custom prevailed in the representative Jewish church, before the building of the temple, of turning their faces toward the east when they prayed.
해설
이 글은 앞서AC.98–100에서 확립된 ‘동쪽은 주님’이라는 상응을, ‘명시적 성경 본문과 실제 교회 관습’을 통해 확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상응을 추상 개념으로 제시하지 않고, 언제나 말씀과 교회의 실제를 통해 뿌리내리게 합니다. 여기서 ‘동쪽’은 더 이상 상징적 방향이 아니라, ‘신적 임재가 나타나는 방향’입니다.
에스겔의 장면은 매우 장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으로부터 오고, 그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영광으로 땅이 빛납니다. 이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와 선의 충만한 유입’을 묘사한 것입니다. ‘많은 물소리’는 풍성한 진리의 울림을, ‘땅이 빛났다’는 것은 겉 사람까지도 그 영광의 영향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이 장면은 왜 ‘동쪽’이 주님을 의미하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 줍니다. 빛은 동쪽에서 떠오르고, 생명은 그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동쪽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사랑과 생명의 근원’입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며, 그 사랑이 처음 비추는 방향이 곧 동쪽입니다.
이 상응이 교회의 실제 관습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이전, 유대 교회에서 사람들이 기도할 때 얼굴을 동쪽으로 향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무의식적으로라도 ‘기도의 방향을 주님께 맞추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한 전통이나 형식이 아니라, 표상적 교회의 핵심 태도였습니다.
이 관습은 또한 외적 행위가 내적 인식을 담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는 것은, 몸의 방향을 바꾸는 행위이지만, 그 내적 의미는 ‘사랑과 생명의 근원을 향해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표상적 교회에서는 외적 행위 하나하나가 내적 실재를 담고 있었기에, 이런 관습은 살아 있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AC.101은 이렇게 말합니다. 동쪽은 단순한 방향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방향이며, 사람의 지성과 사랑이 열리는 출발점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이 동쪽에 심어졌고, 그래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언제나 동쪽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51:3)Jehovah will comfort Zion,he will comfort all her waste places,and he will make her wilderness like Eden,and her desert like the garden of Jehovah;joy and gladness shall be found therein,confession and the voice of singing(Isa. 51:3).
이 대목의 핵심은 예언서의 반복 표현이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천적, 즉 사랑과, 영적, 즉 이해의 이중 구조를 동시에 드러내는 언어’라는 점입니다. 곧 동일한 사실을 두 번 말하되, 첫 번째는 사랑의 차원에서, 두 번째는 이해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막–광야’, ‘기뻐함–즐거워함’, ‘감사함–창화하는 소리’가 나란히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층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먼저 ‘사막’과 ‘광야’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는 같은 의미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는 다릅니다. ‘사막’은 ‘사랑이 메마른 상태’, 곧 의지의 황폐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것은 천적인 것, 곧 사랑과 직접 연결됩니다. 반면 ‘광야’는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 곧 지성의 황폐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적인 것, 곧 이해와 연결됩니다. 같은 황폐이지만, 하나는 사랑의 결핍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의 결핍입니다.
이 대응은 다음 단어들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기뻐함’은 사랑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내적 기쁨입니다. 이것은 이유를 따지지 않는 기쁨이며, 존재 자체에서 솟아나는 평안에 가깝습니다. 반면 ‘즐거워함’은 이해가 열릴 때 생기는 기쁨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질서가 보일 때 생기는 밝은 즐거움입니다. 전자는 깊고 고요하며, 후자는 밝고 표현적입니다. 그래서 둘은 비슷하지만 동일하지 않습니다.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의 구분은 더 분명합니다. ‘감사함’(confession)은 단순한 감사 표현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고백이며, 천적인 것입니다. 반면 ‘창화하는 소리’는 진리가 열릴 때 나오는 찬양, 곧 이해가 빛을 받을 때 표현되는 외적 기쁨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내면의 고백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 표현입니다.
이 모든 구분이 결국 ‘에덴’과 ‘동산’으로 모입니다. ‘에덴’은 사랑 그 자체, 곧 천적 상태이고, ‘동산’은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지성과 지각, 곧 영적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사막을 에덴 같게,광야를 동산 같게’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회복이 단순히 이해의 회복이 아니라, ‘먼저 사랑이 살아나고,그다음에 이해가 살아나는 질서’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원리가 드러납니다. 회복은 항상 ‘사랑이 먼저,이해가 나중’입니다. 사랑이 살아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해만 열리면, 그것은 빛이 아니라 오히려 왜곡이 됩니다. 그래서 말씀은 반드시 두 번 말합니다. 먼저 천적인 것으로, 그다음에 영적인 것으로. 이 반복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하늘의 질서가 그대로 반영된 표현 방식’입니다.
이 구조를 알고 보면, 예언서 전체가 새롭게 읽힙니다. 반복처럼 보이던 구절들이 사실은 하나의 깊은 질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창2의 에덴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덴은 사랑이고, 동산은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지성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진정한 회복은 지식을 쌓는 데 있지 않고, ‘사랑이 다시 살아나는 데’ 있으며, 그때 비로소 이해도 빛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2:8)
AC.100
‘동산’(garden)이 지성(intelligence)을 의미하고, ‘에덴’(Eden)이 사랑(love)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에서도 드러납니다.That a “garden” signifies intelligence, and “Eden” love, appears also from Isaiah: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51:3)Jehovah will comfort Zion,he will comfort all her waste places,and he will make her wilderness like Eden,and her desert like the garden of Jehovah;joy and gladness shall be found therein,confession and the voice of singing(Isa. 51:3).
이 구절에서‘사막’(wilderness), ‘기뻐함’(joy),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곧 사랑에 속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들이고, ‘광야’(desert), ‘즐거워함’(gladness), ‘창화하는 소리’(the voice of singing)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들입니다.앞의 것들은‘에덴’(Eden)과 관련되고,뒤의 것들은‘동산’(garden)과 관련됩니다.왜냐하면 이 예언자에게서는 같은 사물을 두 표현으로 말하는 경우가 계속해서 나타나는데,그중 하나는 천적인 것을,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garden in Eden)이 더 무엇을 의미하는지는,뒤에 나오는10절의 설명에서 볼 수 있습니다.In this passage, “wilderness,” “joy,” and “confession” are terms expressive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relate to love; but “desert,” “gladness,” and “the voice of singing,” of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belong to the understanding. The former have relation to “Eden,” the latter to “garden”; for with this prophet two expressions constantly occur concerning the same thing, one of which signifies celestial, and the other spiritual things. What is further signified by the “garden in Eden,” may be seen in what follows at verse 10.
해설
이 글은 앞서AC.98–99에서 제시된 정의를, ‘말씀 자체의 내부 구조’를 통해 확증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자신의 해석을 설명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이사야서의 문체 자체가 이미 ‘에덴 = 사랑’, ‘동산 = 지성’이라는 구조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아르카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의미는 해설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는 질서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이사야51장3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황폐함이 회복되는 과정이 두 겹의 언어로 묘사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사막을 에덴 같게’라는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라는 표현입니다. 겉으로 보면 반복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반복을 ‘천적 차원과 영적 차원의 병행 서술’로 읽습니다.
‘사막’(wilderness), ‘기뻐함’(joy),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다시 말해 ‘사랑에 직접 속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막은 비어 있는 상태이지만, 동시에 주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기쁨과 감사는, 이해를 거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바로 흘러나온 반응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에덴’, 곧 사랑과 연결됩니다.
반면 ‘광야’(desert), ‘즐거워함’(gladness), ‘창화하는 소리’(the voice of singing)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와 지성의 차원’에 속합니다. 광양 역시 메마른 곳이지만, 질서가 회복될 때 그곳은 ‘동산’이 됩니다. 즐거움과 노래는 감정과 표현의 형태를 띠며, 이는 사랑 자체라기보다는, 사랑에서 흘러나온 인식과 이해의 반향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동산’, 곧 지성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이 서로 분리된 두 종류의 인간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같은 회복의 과정이 ‘두 차원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랑의 차원에서는 에덴이 회복되고, 이해의 차원에서는 동산이 회복됩니다. 이 둘은 경쟁하지 않고, 질서 안에서 함께 작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사야의 문체를 하나의 규칙으로 설명합니다. 같은 사물을 두 표현으로 말하되,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수사 기법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구조를 동시에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층위를 동시에 열어 줍니다.
이 글은 또한, 왜 ‘에덴동산’이라는 결합 표현이 필요한지를 설명합니다. 에덴만 있으면 사랑은 있으되 이해가 드러나지 않고, 동산만 있으면 지성은 있으되 생명의 근원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는, 사랑과 지성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질서로 결합된 상태이기에, 반드시 ‘에덴동산’으로 불려야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독자를 다음 글로 이끕니다. ‘에덴동산’이 더 무엇을 의미하는지는10절에서 다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금까지의 설명이 결론이 아니라, ‘더 구체적인 전개를 위한 토대’임을 알려 줍니다. 곧 강들과 흐름, 그리고 지성의 세부 구조로 이어질 준비가 된 것입니다.
AC.100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은 이미 스스로를 해석하고 있으며,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질서는 예언서의 문체 속에 고요히, 그러나 정밀하게 새겨져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6, ‘구세주를 아는 이들’, 찬70, ‘피난처 있으니’입니다.
오늘은창2 두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2절로 8절, AC 글 번호로는 85번에서 99번입니다. 그 주간 진도에 맞추는 본문이다 보니 절과 절 사이가 중첩될 수 있습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2-8)
이 본문을
‘안식 안에서 열리는 에덴, 사랑에서 나오는 지성’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본문 및 해설,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시작합니다.
AC.99는 인간 안에 작용하는 ‘생명의 질서’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대비로 설명합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은 실제로 이해와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시지만,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 유입의 출처가 가려집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이 마치 자기 자신, 곧 자신의 이성과 기억 지식에서 나온 것처럼 느끼며, 이것이 ‘거꾸로 된 질서’입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사랑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을 통하여 주님의 유입을 받으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 출처를 그대로 퍼셉션합니다. 즉 지성과 생명의 흐름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압니다. 이때 질서는 회복되며, 이 상태 자체가 ‘동방의 에덴동산’이라 불립니다.
이 ‘에덴동산’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으로 흐르는 살아 있는 질서이며,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 가장 내적인 의미에서는 주님의 나라와 천국을 뜻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동시에 이 질서 안에 있을 수 있으며, 이때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 전체는 주님으로부터 열려, 그 안에 천적이고 영적인 생명이 흐르게 됩니다.
결국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지성과 삶은 겉으로는 자기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은 주님께 있으며, 그 흐름이 가려져 있느냐 드러나 있느냐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가르는 본질적 차이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과 자비, 붙드심의 은혜가 돌아오는 한 주간에도 여전히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위AC.99본문에‘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으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여기‘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게 뭔가요?선행 내용에‘그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라고 하는데,이런 것들이‘열려 있다’는 건 어떤 건지,그리고 그것이 왜‘주님으로부터’인지요?
AC.99에서‘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표현은 단순히‘허락을 받는다’거나‘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정도를 넘어서,사람 안의 모든 기능,즉 생각,관념,말,행동 등이‘닫힌 자기중심의 회로’가 아니라‘위로 연결된 상태’에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이것은‘인플럭스(influx)가 통하는 상태’,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막힘없이 들어와 그 사람의 내부 질서를 형성하고,그 질서가 그대로 바깥 표현으로 흘러나오는 상태입니다.그래서‘열림’(opened)은 문 하나가 열린다는 이미지보다,전체 구조가 위를 향해 정렬되고 소통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먼저‘생각과 생각의 관념들이 열려 있다’는 것을 보겠습니다.보통 우리는 생각이 내 머리에서 만들어진다고 느끼지만,스베덴보리는 생각의‘형식’은 우리 것이지만‘생명’은 위에서 온다고 봅니다.사람이 자신과 세상 중심으로 살 때는 그 생각이 주로 감각,기억 지식,자기 이익의 논리에서 구성됩니다.이때는 생각이 닫혀 있습니다.반대로 사람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방향으로 자신을 둘 때,같은 기억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더라도 그것들이 위에서 비추는 빛을 받습니다.그러면 생각의 배열이 달라지고,관념들이 서로 충돌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며,무엇이 더 본질적인지 자연히 드러납니다.이것이‘생각이 열려 있는’상태입니다.겉으로는 같은 주제를 말해도,한쪽은 방어와 정당화의 논리로 흘러가고,다른 쪽은 진리와 선을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차이가 생깁니다.
다음으로‘말이 열려 있다’는 것은,그 사람의 말이 단순한 정보 전달이나 자기표현을 넘어,안에 형성된 질서가 그대로 밖으로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스베덴보리는 말이 생각의 외적 형태라고 보는데,생각이 주님으로부터 비치고 정렬되면 말도 그 질서를 따르게 됩니다.그래서 필요 없는 말이 줄고,과장이나 왜곡이 줄며,상대를 살리는 방향으로 말이 나옵니다.중요한 것은 이것이‘억지로 조심해서’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안에서부터 그렇게‘열려 있기 때문에’자연히 그렇게 된다는 점입니다.
‘행동이 열려 있다’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행동은 의지의 외적 표현인데,의지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영향 아래 있을 때,그 사람의 선택과 행위는 점점 일관된 방향을 갖게 됩니다.겉으로는 아주 평범한 일,그러니까 말 한마디,선택 하나일지라도 그 안에는 이미 위에서 내려온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그래서 이런 상태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중심의 계산만으로 움직이지 않고,더 깊은 기준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이것이‘행동이 열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주님으로부터’라고 말하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스베덴보리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는‘생명은 오직 주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사람은 그 생명을‘받는 그릇’이지,스스로 생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따라서 사람이 진리와 선을 실제로 생각하고,말하고,행할 수 있다면,그 능력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다만 평소에는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처럼 느낄 뿐입니다.그래서‘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말은,그 사람이 특별한 환상을 보거나 비범한 체험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근원’을 바르게 두고,실제로 그 근원으로부터 오는 흐름이 막히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이‘열림’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앞서AC.99에서 계속 강조되는 것처럼,사람이 지성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두기 시작할 때,그리고 진리를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할 때,그때 비로소 이 통로가 열립니다.반대로‘내가 이해하고 판단한다’는 자리에 계속 서 있으면,겉으로는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이 흐름은 막혀 있습니다.그래서 같은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점점 살아나고,어떤 사람은 점점 더 자기 확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정리하면, ‘그의 모든 생각과 관념들,심지어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것은,그 사람의 내적 질서가 위를 향해 정렬되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생각–말–행동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겉으로는 평범한 인간 활동이지만,그 근원과 흐름이 달라진 상태이며,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천적 인간’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위AC.99본문에‘가장 내적인 의미,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왜‘가장 내적인 의미’가‘보편적 의미’가 되는 건가요?이어지는 내용인‘이것은 주님의 나라,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을 의미합니다’처럼 천적 인간의 올바른 질서가 곧 천국의 보편적 질서라는 말인가요?
핵심을 정확히 짚으셨습니다.다만 한 걸음 더 분명히 하자면,스베덴보리가‘가장 내적인 의미’(inmost sense)를 동시에‘보편적 의미’(universal sense)라고 부르는 이유는,그 의미가 단순히‘더 깊다’는 차원을 넘어‘모든 것을 안에서부터 지배하고 포함하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다시 말해 가장 내적인 것은 가장 좁은 것이 아니라,오히려 모든 것을 통일하는 가장 넓은 근원입니다.이 점이 직관과는 반대로 느껴지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낯설게 다가옵니다.
사람의 구조를 예로 들면 이해가 훨씬 쉬워집니다.몸 전체를 움직이는 것은 손발 같은 바깥 부분이 아니라,보이지 않는 심장과 폐입니다.이 심장과 폐는 위치로 보면‘가장 안쪽’이지만,기능으로 보면 온몸을 살리는‘가장 보편적인 것’입니다.손 하나,발 하나는 부분적이지만,심장은 모든 세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그래서‘가장 내적’인 것이 동시에‘가장 보편적’인 것입니다.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구조를 의미의 차원에서도 동일하게 보고 있습니다.
말씀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문자적 의미는 특정 사건,특정 인물,특정 상황을 다루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더‘넓어’보일 수 있습니다.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제한적입니다.반면 가장 내적인 의미는‘주님과 그분의 나라’,곧 사랑과 진리의 질서 자체를 다루기 때문에,모든 사람,모든 시대,모든 상태에 적용됩니다.그래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보편적 의미’가 됩니다.결국‘내적일수록 좁다’가 아니라‘내적일수록 근원적이어서 모든 것을 포함한다’가 스베덴보리의 관점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문장,곧‘이것은 주님의 나라,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을 의미합니다’와의 연결을 보겠습니다.목사님께서 이해하신 대로,천적 인간의 올바른 질서가 곧 천국의 질서라는 이해는 매우 정확합니다.다만 여기서 한 가지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은,이것이 단순한‘유사성’이 아니라‘동일한 질서의 다른 표현’이라는 점입니다.천국은 어떤 공간이기 이전에‘질서’이며,그 질서는 사랑이 주가 되고,진리가 그 사랑을 섬기는 상태입니다.이 질서가 그대로 사람 안에 형성되면 그 사람이 바로‘천적 인간’입니다.
그래서 가장 내적인 의미에서 말씀은 언제나 이 하나를 말합니다. ‘주님이 어떻게 자신의 나라를 이루시는가’,그리고‘그 나라가 어떻게 사람 안에 형성되는가’입니다.이보다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는 없습니다.역사 이야기든,족보든,율법이든,전쟁 이야기든,가장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 이 한 가지 질서로 수렴됩니다.그러니 그 의미가‘보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는 단순히 깊은 해석이 아니라,모든 의미를 낳는 근원적 중심이기 때문에‘보편적 의미’입니다.그리고 그 내용은 언제나 동일하게,주님의 나라와 그 나라가 사람 안에 세워지는 질서,곧 천적 인간의 상태를 가리킵니다.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천적 인간의 올바른 질서가 곧 천국의 보편적 질서’라는 이해는 정확할 뿐 아니라,바로 그 표현이AC.99의 핵심을 잘 붙잡고 있다고 보셔도 됩니다.
위AC.99본문에‘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이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속 사람이 원하는 걸 겉 사람은 원치 않는다는 말인 것 같은데,이것하고‘지성은 주님이 아닌,자기 자신,곧 자신의 이성과 기억 지식으로부터 나온다고 보는 것’하고 서로 무슨 상관이 있나요?
AC.99에서‘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는 말은 단순한 성격 충돌이나 기분의 갈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사람 안에 있는 두‘생명의 방향’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스베덴보리의 구조로 말하면,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는 자리이고,겉 사람은 세상과 감각,기억 지식 속에서 형성된 자리입니다.원래 질서대로라면,속 사람이 위에서 이끌고 겉 사람이 순종해야 합니다.그런데 거듭남 이전의 상태에서는 이 질서가 뒤집혀서,겉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속 사람의 요구를 거부하거나 왜곡합니다.그래서 겉 사람이 속 사람과‘싸운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실제로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예를 들어 속 사람은 어떤 진리를 보고‘이렇게 사는 것이 옳다’는 방향을 느끼지만,겉 사람은‘그건 현실적으로 손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 ‘다들 이렇게 사는데 왜 나만?’같은 식으로 반응합니다.혹은 말씀을 들을 때,속에서는‘이건 참이다’라는 조용한 확증이 일어나는데,겉에서는 즉시 분석과 의심,반론을 만들어 냅니다.이때 겉 사람의 무기는 바로‘이성’과‘기억 지식’입니다.이미 알고 있는 정보,경험,세상적 기준을 총동원해서 속 사람에서 오는 것을 무력화하려고 합니다.이것이 싸움의 실제 모습입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곧‘지성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곧 자신의 이성과 기억 지식에서 나온다고 보는 것’과의 관계를 보면,이 둘은 사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 표현입니다.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울 수 있는 이유 자체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사람이 자기 지성의 근원을‘주님’이 아니라‘나 자신’에게 돌리는 순간,그는 이미 겉 사람의 편에 서게 됩니다.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위에서 들어오는 것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아래에서 축적된 것,곧 자기 경험과 지식과 논리를 최종 기준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속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 들어와도 그것을‘받아들이는’것이 아니라‘검열하고 심판하는’구조가 됩니다.다시 말해‘주님이 이것을 주신다’는 태도가 아니라‘이게 내 기준에 맞나?’를 먼저 따집니다.이때 이미 질서가 완전히 뒤집힌 것입니다.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기준이고,이성과 기억 지식은 그것을 이해하고 섬기는 도구여야 합니다.그런데 반대로 이성과 기억 지식이 왕이 되어 버리고,위에서 오는 것은 그 앞에서 시험을 받아야 하는 것이 됩니다.이 상태 자체가 바로‘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지성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순간,겉 사람이 주도권을 잡게 되고,그 결과 속 사람과의 싸움이 시작된다’입니다.그리고 반대로 말하면,사람이‘내가 아는 것,내가 이해하는 것조차도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할 때,싸움의 양상이 달라집니다.겉 사람은 여전히 반응하고 저항하지만,더 이상 절대 기준이 아니게 되고,점점 속 사람의 빛 아래로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스베덴보리가 이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문제는‘이성을 쓰느냐’가 아니라‘이성을 어디에 두느냐’입니다.이성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자리로 있을 때는 그것이 참된 지성이 됩니다.그러나 이성이 스스로를 근원으로 삼고,위에서 오는 것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그것은 곧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는 도구가 됩니다.그래서 같은‘이성’이라도 한쪽에서는 빛을 받는 창이 되고,다른 쪽에서는 빛을 막는 벽이 됩니다.
결국AC.99의 이 두 표현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하나의 상태를 안과 밖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운다’는 것은 현상이고, ‘지성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는다’는 것은 그 원인입니다.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은 이 질서를 다시 바로잡아,속 사람이 이끌고 겉 사람이 따르는 상태로 회복되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위AC.99본문에 나오는‘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이성,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신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가요?그냥 깨달아지고 납득되는 걸 이렇게 표현한 건가요?
좋은 질문입니다.결론부터 말씀드리면,AC.99에서 말하는‘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이성,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신다’는 것은 단순히‘아,이해가 된다’, ‘납득이 된다’는 인지적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그런 측면이 포함될 수는 있지만,그보다 훨씬 더 깊고 본질적인,곧‘생명 쪽에서부터 이해가 열리는 사건’을 말합니다.스베덴보리 식으로 표현하면 이것은‘정보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생명이 안에서부터 질서를 잡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이해한다고 할 때,일반적으로는 바깥에서 정보를 받아 머리로 정리하는 과정을 떠올립니다.책을 읽고,설명을 듣고,비교하고 판단해서‘이게 맞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지요.이건‘기억 지식→이성→이해’로 올라가는 흐름입니다.그런데AC.99에서 말하는 것은 그 반대 방향입니다.주님으로부터 먼저 어떤‘생명의 흐름’,곧 선과 진리의 감각이 들어오고,그것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이해,이성,기억 지식의 영역을‘안에서부터 밝히고 배열하는 것’입니다.그래서 같은 내용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전혀 못 알아듣고,어떤 사람은‘이게 이거였구나’하고 열리는 일이 생깁니다.
여기서‘신앙을 통하여’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스베덴보리에게서‘신앙’은 단순히 교리를 받아들이는 지적 동의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는 통로’입니다.다시 말해 사람이 어떤 진리를‘살려고 할 때’,곧 체어리티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려 할 때,그때 그 사람 안에 주님과 통하는 길이 열립니다.그러면 그 통로를 따라‘인플럭스’(influx),즉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옵니다.이 흐름이 바로 이해를 밝히는 실제 원인입니다.그래서 어떤 진리는 머리로 백 번 설명을 들어도 닫혀 있다가,삶이 조금 바뀌는 순간 갑자기 선명해지기도 합니다.
이걸‘그냥 깨달아지는 것 아닌가요?’라고 느끼신 것은 아주 정확한 감각입니다.맞습니다,겉으로는‘깨달음’처럼 나타납니다.그런데 차이는 그 깨달음의‘출처’에 있습니다.단순한 지적 깨달음은 비교,추론,논증에서 나옵니다.반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사랑에서 비롯된 빛’이 이해를 비추는 것입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인간은‘먼저 사랑하고,그다음에 안다’고 하지요.이때의 앎은 판단의 결과라기보다 퍼셉션의 확장에 가깝습니다.
조금 더 와닿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어떤 말씀이나 아르카나 구절을 읽을 때,평소에는 그냥 문장으로만 보이던 것이 어느 날은 이상하게 마음에 와닿고, ‘이게 이런 뜻이었구나’하면서 동시에‘이건 이렇게 살아야겠구나’까지 함께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이때는 이해와 의지가 동시에 움직입니다.단순히‘맞는 말이네’가 아니라‘이게 진짜다’라는 느낌이 옵니다.바로 그때가‘이해,이성,기억 지식 속으로 주님이 흘러들어오신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인지 작용의 설명’이 아니라‘영적 작용의 설명’입니다.이해가 열리는 것은 결과이고,그 원인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입니다.그리고 그 인플럭스는 아무 때나 임의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사람이 신앙 안에서,곧 진리를 살려는 방향으로 자신을 둘 때 그 통로가 열립니다.이 점이 핵심입니다.
정리하면,AC.99의 이 표현은‘이해가 잘 된다’는 말보다 훨씬 깊은 뜻입니다.그것은‘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신앙이라는 통로를 통해 들어와,사람의 생각 구조 전체를 안에서부터 밝히고 정렬시키는 것’을 말합니다.그래서 겉으로는 깨달음처럼 보이지만,실제로는‘생명이 이해를 만들어 내는 사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심에도 불구하고,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 자신으로부터, 곧 기억 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다릅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이와 같이, 영적 인간한테는 거꾸로 되어 있던 질서가, 이제 천적 인간한테 있어서는 회복된 것으로 묘사되며, 이 질서, 곧 이 사람을 ‘동방의 에덴동산’(garden in Eden in the east)이라 부릅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은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은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이때 그의 상태는, 그가 천국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동시에 천국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으며, 그 안에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Life, or the order of life, with the spiritual man, is such that although the Lord flows in, through faith,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in ejus 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yet as his external man fights against his internal man, it appears as if intelligence did not flow in from the Lord, but from the man himself, through the things of memory and reason [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But the life, or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is such that the Lord flows in through love and the faith of love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and as there is no combat between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he perceives that this is really so. Thus the order which up to this point had been inverted with the spiritual man is now described as restored with the celestial man, and this order, or man, is call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the supreme sense, 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 is the Lord himself. In the inmost sense, which is also the universal sense, it is the Lord’s kingdom, and the heaven in which man is placed when he has become celestial. His state then is such that he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and is as it were one among them; for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while living in this world he may at the same time be in heaven. In this state all his thoughts and ideas of thoughts, and even his words and actions, are open, even from the Lord, and contain within the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for each one [of these] has the Lord’s life within it, which enables him to have perception.
해설
이 글은 AC.98에서 제시된 ‘에덴동산’의 구조를, ‘생명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정밀하게 해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도덕성이나 경건의 정도로 설명하지 않고, 오직 ‘유입이 어떻게 인식되는가’라는 문제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깊고도 실제적인 구분입니다.
먼저 영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주님은 실제로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이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식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이 유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걸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마치 자신이 기억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즉, 유입은 있지만, 출처가 가려져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영적 인간은 지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 지성은 항상 ‘내가 이해했다’, ‘내가 판단했다’는 감각을 동반합니다. 이는 교만의 문제라기보다, 아직 질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이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흐름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꾸로 된 질서’입니다.
이에 반해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는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은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는 ‘아,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 하고 즉각적으로 압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은 더 많은 정보를 갖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차이는 오직 하나, ‘질서가 회복되었는가’입니다. 생명은 위에서 아래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거쳐 지성으로 흘러갑니다. 천적 인간은 이 흐름을 막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회복된 질서, 혹은 그 사람 자체를 ‘동방의 에덴동산’이라고 부릅니다. 동쪽은 주님,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으로 흘러드는 생명의 질서가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의미의 층위를 한 단계씩 올립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이 동산이 주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생명과 질서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이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은 개인 안에도 있고, 교회 전체 안에도 있으며, 천국 전체 안에도 있습니다.
이제 놀라운 진술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은 천국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동시에 천국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본래 목적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말과 행동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습니다. 이는 무의식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습니다. 사람이 퍼셉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각 생각과 말과 행동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생명이 올바른 질서로 흐를 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AC.99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더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출처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 곧 그 질서 자체가 바로 ‘동방의 에덴동산’입니다.
위AC.98해설에,‘그러나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에서 출발합니다.그는 먼저 기뻐하고,그다음에 압니다.그의 이해는 판단이 아니라‘퍼셉션의 확장’입니다.’라고 하는데요,여기‘그의 이해는 판단이 아니라‘퍼셉션의 확장’입니다’라는 이 표현,무슨 뜻인가요?
핵심을 바로 짚어 드리면, ‘그의 이해는 판단이 아니라 퍼셉션의 확장’이라는 말은‘천적 인간의 앎은‘따져서 결론 내리는 과정’이 아니라,이미 안에서 주어진 퍼셉션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 넓어지는 과정’이라는 뜻입니다.다시 말해,영적 단계의 이해가‘판단’(judgment)이라면,천적 단계의 이해는‘확장’(expansion)이라는 말입니다.
먼저‘판단’이 무엇인지부터 대비해 보겠습니다.판단은 보통 이런 구조입니다. ‘이것이 맞나?’에서 시작,근거를 찾고,비교하고,결론을 내는 것이죠.여기서는 아직‘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해서,사고 과정을 통해‘아는 상태’로 갑니다.그래서 이때는 이성이 주인이고,퍼셉션은 없거나 약한 상태입니다.
반면‘퍼셉션의 확장’은 완전히 다른 출발점입니다.이미 안에서‘이것이 선하다’, ‘이것이 옳다’는 것이‘느껴지고 보입니다.’이 상태에서는‘맞나 틀리나 따지는 과정’이 중심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걸 더 깊이,더 넓게 이해하는 과정’이 일어납니다.그래서‘확장’이라는 표현이 정확합니다.처음에는 한 점처럼 보이던 것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더 많은 경우에 적용되고,더 깊은 의미로 열리는 것입니다.
이걸 실제적인 예로 보시면 더 분명합니다.예를 들어‘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선하다’는 걸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적 단계에서는‘왜 사랑해야 하지?어디까지가 사랑인가?나도 손해 보지 않아야 하는데...’등,이런 판단과 비교가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나 천적 상태에서는 이미‘사랑하는 것은 선하다’라는 것이 안에서 분명합니다.그래서 더 이상 그걸‘판단’하지 않습니다.그 대신,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맞을까?’, ‘이 사람에게는 어떤 방식이 가장 선한 걸까?’등,이렇게‘같은 선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더 풍성하게 열립니다.’
이것이 바로‘퍼셉션의 확장’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이것입니다.
판단은‘맞다/틀리다’를 가르지만,퍼셉션의 확장은‘더 깊다/더 넓다’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이해는‘논쟁적이지 않고’, ‘방어적이지 않으며’, ‘점점 더 조화롭게 됩니다.’왜냐하면 출발이‘옳음을 증명하려는 마음’이 아니라‘선을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판단은 모르는 데서 시작해 결론에 이르지만,퍼셉션의 확장은 이미 아는 데서 시작해 더 깊이 열립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인간의 이해는‘생각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사랑 안에서 보이고,그 보임이 점점 넓어지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옳음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이미 안에서 보이기 때문에,그 보임이 삶 속에서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질 뿐입니다.’
‘퍼셉션의 확장’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지성과 사랑의 질서가 완전히 바뀐 상태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앎의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