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5(D2)-매일예배(2345, 눅2,22-27), '시므온이 예수를 만나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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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이 예수를 만나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2:22-27)

 

 

그렇게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10월이 왔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2장 22절에서 27절까지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아기 예수의 부모가 관례에 따라서 첫아기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내용입니다. 본문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아기를 데리고 가는데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데리고 갔다”고 말했습니다. 정결 예식의 날이란 레위기 12장 6절과 7절에 나오는 규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아기를 출산한 여인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6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7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레12:6-7)

 

이 말씀에서 아기를 낳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선과 진리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있는 선한 애정 안으로 진리로 오실 때, 속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가 되는데, 그때 그것은 다시 겉 사람 안에 새로운 선과 진리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 안에 태어나는 새로운 선과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악한 습관을 끊는 것이고요. 이웃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 태어나는 아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그렇게 순수하지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겉으로 보면 경건하고 사랑이 넘치는 것 같은 행위 안에 사실은 아직은 자아에 속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순수한 선과 진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자아에 속한 불순한 것들이 사라질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 시간이 바로 출산한 여인이 견뎌야 하는 정결의 기한입니다. 말씀에는 그 기간을 아들을 낳을 경우 7일로 정하고 있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말씀에서 7일이란 물리적인 7일이 아니고요, 불결한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 그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삶의 행위 가운데 있는 불순한 것들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정결의 기한이 찬 다음에 당신께 속죄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속죄제란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동안 자아에 속한 불순한 것으로 주님을 예배한 것에 대한 반성을 담아 순수한 진리와 선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속죄제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내아이를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시켰다는 것과 아들을 낳은 여인이 7일의 정결의 기한 후에 속죄제를 드리는 것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23절입니다.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주의 율법에 쓴 바”라고 했는데, 주의 율법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출애굽기 22장 29절에 나오는 말씀, 즉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출22:29)

 

라고 하신 말씀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장자를 거룩하다고 하시고, 또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장자 즉 “태에서 처음 난 것”은 사랑이 있는 믿음, 또는 인애(charity)를 바탕으로 한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태는 사랑 또는 인애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나 인애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나옵니다.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악이며,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한 악들은 주님의 신성한 빛이 흘러들어 올 때, 그냥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마치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흩어집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빛이지, 어둠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은 사랑과 인애로부터 태어납니다. 그래서 태는 사랑이요 인애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인애에서 태어난 진리와 믿음, 그것이 장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에게 있던 믿음, 또는 진리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없는 믿음이고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 생긴 믿음은 사랑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장자라고 하고,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신앙인들이 이제 새로 생긴 믿음, 즉 사랑이 있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예배드리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는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왜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릴까요? 예루살렘은 천적 영적 교회(celestial spiritual church)를 나타냅니다. 천적 영적 교회란 사랑이 있는,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란 뜻입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사랑과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24절에서는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일반적으로 새는 진리나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둘기는 선과 진리를 모두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 한 쌍으로 드리는 예배는 진리와 선 또는 믿음과 인애의 삶을 한데 묶어 드리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왜 그런 규례를 정해주셨는지는 할례 시킨 아이와 정결의 기한이 지난 여인의 영적 의미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할례를 받고, 정결의 기한이 지나야 비로소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들은 비둘기 한 쌍을 가지고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예배는 이제 진리만 가지고 드리는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외적인 것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규례를 아주 세세한 것까지 잘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가 없는 외적인 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장 28절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회의 교리를 만든 사람들은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를 인애의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해를 한 것이죠. 그래서 믿음만의 교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구원은 인애의 삶이 아니라 오직 믿음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내적 의미와 동떨어진 율법의 모든 외적 행위를 부정했을 뿐, 인애의 삶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할례는 모세 율법에서 가르치는 아주 중요한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행위를 모르는 상태에서 할례받는 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이 중요하다고 합니까? 믿음만 중요하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주장하는 믿음은 그냥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고요, 이웃 사랑에 근거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을 믿음만의 교리의 근거로 삼는 것은 그의 의도를 철저히 왜곡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게 되면 주님이 주시는 규례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리고 그것을 삶 가운데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를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25절에서는 이제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데, 그곳에 시몬(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예루살렘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인들의 내면에 세워진 천적 영적 교회입니다. 즉 사랑과 믿음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예루살렘을 천적 영적 교회라고 말씀드린 까닭은 사람의 내면으로 주님이 오시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인애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회는 믿음만 있는 교회가 아니고요, 사랑과 믿음에 기초한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제사를 드리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있다는 시몬은 누구를 말할까요? 전 시간에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야곱의 아들 요셉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특정인과 연관 짓지 않고, 이름 자체가 가지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므온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의 시므온은 야곱의 아내 레아가 낳은 둘째 아들 시므온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시므온의 영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 레아가 시므온을 낳았을 때 말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29장 3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레아가 말하기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이 말씀에서 “내가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은 믿음은 있는데 그에 따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에 따라 살지 못할 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죠. 그런 상태가 바로 시므온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아들을 주신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실천하지 못하는 믿음을 붙들고 힘겨워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새로운 믿음을 주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새로운 믿음을 뜻합니다. 새로운 믿음이란 전처럼 이성에 속한 믿음이 아니고요, 의지에 속한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머릿속에만 있던 믿음을 의지 가운데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믿음에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그렇지 못했죠. 이성에 속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머리로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행동하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의지 가운데 믿음을 심어주실 때, 우리는 그 새로운 믿음에 따라 능동적으로 진리를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시므온이란 의미는 의지에 속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이라는 새로운 믿음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련이 있습니다. 시험에서 이기지 못할 때도 있었고,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야 지혜롭고 강단 있게 주님의 뜻을 받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했습니다. 그런 고민을 오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말은 시므온에 대해 하는 말입니다. 즉 영적 교회의 사람들이 기다리던 주님의 위로가 곧 시므온이라는 새로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며 주님이 이스라엘에 주시는 위로는 어떤 것입니가? 새로운 믿음을 통해 지혜 안에 있는 것이고, 사랑의 기쁨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까지 우리가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위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 시므온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2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시므온에게 계시하시기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주님이 우리 속에 오시면 그때부터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합니다. 성령은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나오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의 시므온이라는 믿음이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이 그냥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주의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주의 그리스도”는 그냥 진리로 오신 주님이 아니고요, 부활하셔서 당신 안에 여호와의 신성(The Divine)과 인성이 하나 되신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주라는 말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주님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부터 주라는 말을 썼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주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의 그리스도는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에 대해 주라고 부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면 주님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수도 없었을 것이고, 병자를 고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 여호와라는 말을 하자마자 바로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라고 부르셨습니다. 공연히 당시 유대인들을 격동케 하기보다는 그들 눈높이에 맞춰 그들을 돕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주 그리스도라는 말은 신적 진리가 당신 안의 신적 선이신 여호와와 하나 되신 주님, 즉 신적 진리로부터 신적 선이 되신 주님을 나타내고요, 그러므로 주님의 신적 인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또 “주의 그리스도를 보았다” 했는데, 보았다는 말은 주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시므온에게 하신 말씀, 즉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너의 영이 죽지 않고 결국 주님의 신적 인성을 믿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입니다. 생각해 보면 신앙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만 믿고, 그분 안에 여호와의 신성이 계심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또 이 진리를 아는 많은 분들 가운데도 그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이 여호와이심을 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믿음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삶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신적 선으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분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주님이세요. 그리고 인애 역시 주님이세요. 그러므로 믿음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내면에 주님을 온전히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신 주님과 사랑이신 주님을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주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고요, 영적으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영으로 주님의 인성 안에 신성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시므온에게 “네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은 “네가 주님의 신적 인성을 너의 영으로 반드시 인정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27절에서는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만나는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이 말씀은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통해 아기 예수를 만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믿음, 즉 의지에 속한 믿음 가운데 있는 신앙인들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그의 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예수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신적 선이신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율법의 관례대로 행해진다”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일들이 신적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마음의 할례를 받는 일이나, 내면의 교회 안에 불순한 것들이 제거되는 일이나, 그의 믿음이 이성에 속한 믿음에서 의지에 속한 믿음으로 바뀌는 일이나, 그리고 새로운 믿음을 통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나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질서에 따라 잘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내면에 주님이 오신 사람들의 거듭남의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가 할례를 받는 것과 아기 어머니가 정결의 기한을 채우는 것은 모두 주님이 오신 다음에 삶의 행위 가운데 있는 불순한 것들이 제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 생기는 믿음, 즉 의지에 속한 믿음을 본문에서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이 머리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인애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서 그것이 의지에 심어질 때 비로소 인애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본래 시므온은 레아의 첫 번째 아들 르우벤 다음에 태어난 두 번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영적 의미로 이성에 속한 믿음을 뜻합니다. 즉 머리에 들어있는 믿음이라는 것이죠. 처음에 믿음은 그렇게 사람의 이성 가운데 씨가 떨어지듯 떨어집니다. 그런 다음 우리가 믿음에 따라 살기를 간절히 원할 때 주님께서는 이성 가운데 있는 믿음을 의지라는 밭으로 마치 모종을 옮기듯 옮겨주십니다. 그것이 레아가 낳은 두 번째 아들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이 그런 뜻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이름도 시므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시므온의 상태일 때 우리는 비로소 영으로 주님을 믿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인애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레아는 세 번째 아들 레위를 낳죠. 레위는 인애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시험 가운데서 불안을 느낍니다. 자신의 영이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도 시험이 많고, 일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시험이 깊어지면, 자신이 영적으로 죽은 자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세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주님의 예언입니다. 주님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주께서 “네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우리들의 영으로 믿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주님의 그러한 가호(加護)가 우리 교우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시89:26)

 

아멘

 

2016-10-02(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2-12-05(D2)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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