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과 내게 돌아올 분깃’의 속뜻(1)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15:11-21)
진리를 진리 자체의 빛으로 보는 것은 영적 마음이라 하는, 인간의 내적 마음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것이다. 이 마음은 체어리티에 의해 열린다. 이 마음이 열릴 때, 빛과 진리를 이해하는 애정이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흘러들어오는데 그것이 깨달음이다. (AR.85) to see truths from their own light is to see them from man’s interior mind, which is called the spiritual mind, and this mind is opened by charity; and when it is opened, light and the affection of understanding truths flow in out of heaven from the Lord. Thence is enlightenment. (AR.85)
오늘은 2023년 올 한 해 마지막 날이며, 그래서 마지막 주일 설교입니다. 오늘 같은 날은 보통은 한 해를 마감하는 설교를 준비하지만, 지난주를 성탄 주일예배로 드려 2주 연속, 아니 다음 주인 1월 7일 신년 첫 주일예배 역시 공주농아교회에서 드리게 되어 3주 연속 누가복음 강해를 쉬게 되어 고민, 마침 오늘 본문이 어쩌면 그 깊이와 메시지에 있어 한 해를 마감하는 귀한 메시지일 수도 있겠다 싶어 그대로 준비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인생에 있어 거의 비슷한 패턴을 통해 회심을 경험하는, 그래서 거듭남의 일반적 이야기이기도 하여 오늘 같은 송년 주일예배 본문으로도 아주 적절하다 생각되오니 부디 깊이 경청하셔서 그 가운데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꼭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아버지께 받은 상속 재산을 집을 나가 먼 나라에 가 허랑방탕 모두 탕진한 아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주님 앞에 탕자이고, 탕자가 겪게 될 운명은 어떤 것이며,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회개란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의 의미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여기서 아들이 둘이라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있는 두 가지 마음을 뜻합니다. 즉 큰아들은 속 사람이라는 마음이고, 작은아들은 겉 사람이라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재산은 주님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에게로 보내주시는 선과 진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작은아들, 곧 둘째가 재산을 나눠달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를 넣어주실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걸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누구나 처음 진리를 배울 때는 그것이 자기 것인 줄 압니다. 주님이 주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주님은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하되 스스로 거듭나는 것처럼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절과 14절에서는 자기 몫의 재산을 받은 둘째 아들의 방탕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둘째 아들이 재물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갔다는 것은, 겉 사람이 진리를 행하지는 않고, 머리에 쌓아 두기만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주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걸 뜻합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마치 진리를 모르는 사람처럼 세상 즐거움을 좇아 살게 되며, 그러면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진리와 선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세상 욕심에 빠져 살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끊어져 더 이상 속 사람으로부터 진리와 선이 흘러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천국을 향해, 주님을 향해 항상 열려있어야 할 내면의 창문이 닫히는 것이며, 그래서 이런 이유로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늘 세상일에 몰두, 몰입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저지른 악과 거짓들로 인해 선과 진리들이 파괴됩니다. 그것이 둘째 아들이 재산을 허랑방탕 탕진하는 것이고, 크게 흉년이 들어 비로소 궁핍해지는 것입니다.
흉년 상태, 즉 선과 진리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15절과 16절에서는,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044:4항을 보면, ‘돼지는 간통자들의 지옥에 사는 사람들의 불결한 사랑을 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돼지를 친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잃게 되면 점점 더 간음의 욕망에 깊이 빠져든다는 뜻입니다. 물욕에 빠질 수도 있고, 명예욕에 빠질 수도 있는데, 최종적으로는 간음의 욕망에 깊이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음의 악은 부부의 순결한 사랑이라는 가장 고결한 선과 대척점에 있는 악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의미로 부부의 순결한 사랑은 선과 진리의 순수한 결합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간음은 선과 악, 또는 진리와 거짓이 섞이는 것이고, 그러므로 거룩한 것에 대한 모독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음은 가장 가증스러운 악입니다. 실제로 천국에 3층천이 있다면, 그에 대한 가장 깊은 지옥 역시 있는데 그 지옥이 바로 이 간음자들의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돼지를 키우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지켜내지 못하면 나중에는 가장 나쁜 상태, 즉 선과 진리를 모독하는 상태로까지 떨어질 수도 있음을 나타냅니다.
본문에는 또 그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했으나 그것마저 주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 영어 성경에는 그가 곡식의 껍질로 배를 채우려 했으나 주는 자가 없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곡식의 속살은 본래 선을 뜻하고, 그것을 덮고 있는 껍질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돼지가 먹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라 간음의 욕망과 결탁한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면 배를 채운다고 할 때, 배(belly)는 무슨 뜻일까요? 배는 사람의 내면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돼지가 먹는 곡식 껍질로 배를 채우고자 했다는 것은 내면의 욕망을 감추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하려 하는 것을 뜻하고,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은 그럼에도 진리가 없기 때문에 거짓으로 속내를 감출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 참고로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식물 이야기’ 14장, ‘탕자는 왜 하필이면 쥐엄 열매를 먹었을까? 가난한 자의 식량, 쥐엄 열매’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흥미로운 내용들이 더 있으니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떠난 먼 나라는 분명 유대인 마을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대인 마을에서는 돼지를 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에 요단 동편의 베뢰아는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린 유대인 지역이었다. 그 북쪽에 있는 데가볼리 지역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둘째 아들이 떠난 먼 나라는 아마도 데가볼리에 속한 열 개의 이방인 도시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돼지의 사료로 가장 값싸고 영양소가 풍부한 쥐엄 열매를 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땅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떨어졌다. 둘째 아들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놓고 돼지와 쟁탈전을 벌여야 했다.
유대인들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돼지와 쥐엄 열매가 오버랩되면서 둘째 아들의 비참한 상태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콩과에 속하는 쥐엄 열매는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사람이 정말 먹을 것이 없을 때 마지막에 먹는 식량이었다. 보통 끓는 물에 쥐엄 열매를 넣어서 죽을 만들어 먹었다. 그 안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필수 영양분들이 고루 들어 있었다.
새 교회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이 거짓을 말하고 거짓된 행동을 하는 것은 선과 진리의 지식을 안 다음부터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지식이 없으면 그나마 거짓된 말이나 행동을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 요즘 특히 어느 야당 대표의 여러 가지 사법 리스크와 그런 그를 향후 대통령 삼기 위해 끝까지 몰염치한 짓을 서슴치 않는 그 야당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누구에게나 그 옳고 그름이 불 보듯 뻔한 일을, 그러나 그들은 두 눈 꾹 감고 애써 외면하면서 버젓이 국회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는데요, 이 역시 진리를 모두 잃어버려 분별력과 수치심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속내를 감출 만큼의 분별력이나 수치심도 없는 것이지요.
탕자가 그렇게까지 추락할 때, 비로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회개가 올라옵니다. 진리와 선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회개를 할 수 있을까요? 내면의 추악한 것들이 온 세상에 드러나고, 그로 인해 자기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갈 때, 비로소 그동안의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됐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생각하며 회개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 아마도 그 야당 대표도, 그리고 그 야당 소속 많은 국회의원들도 나중에 사법처리 되어 감방에 갇혀 그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때에야 비로소 이런 순간들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탕자의 회개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본문 17절에는 탕자의 첫 번째 회개의 고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여기서 품꾼의 영어 성경 표현은 품삯을 받는 종(hired servant)입니다. 말씀에서 종은 속 사람을 섬기는 겉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할 때는 선과 진리를 풍족하게 소유하지만, 속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선과 진리의 유입이 끊어져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탕자가 주님 앞에 드리는 첫 번째 회개의 고백입니다.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탕자의 두 번째 고백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속 사람을 뜻하고, 아버지는 속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탕자의 두 번째 고백은, ‘제가 속 사람의 말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해서 주님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탕자의 세 번째 고백은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입니다. 말씀에서 아들은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품꾼은 속 사람에게 복종하는 겉 사람을 뜻하는데, 주님과 이웃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복종하는 겉 사람입니다. 품꾼으로 상징되는 겉 사람은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나를 품꾼으로 보소서’라는 말은, 속 사람과 단절되었던 겉 사람이 회개하여 속 사람에게 복종할 때, 처음에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처음에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속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밑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절박함에서 비롯되는 복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온 탕자의 회개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자신에 대한 연민, 주님을 향한 죄스러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들이 일어나 드디어 아버지를 만나러 갑니다. 그 모습을 2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일어난다는 것은 세상만 바라보며 살던 탕자가 주님을 향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거리가 먼데도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오십니다. 거리가 멀다는 것은 회개의 노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전 시간에 주님은 우리의 적은 노력을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것은 탕자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진 회개가 얼마나 진정한 회개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그의 절박한 마음을 보시고, 멀리서 달려오십니다. 멀리서 달려오시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적은 노력을 귀하게 여기시고, 부족한 회개를 받아들이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그의 목을 안으셨습니다. 목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통로를 뜻합니다. 그래서 목을 안는 것은 그동안 막혀있던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통로를 주님께서 열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그곳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선과 진리가 흘러들어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는데, 그렇게 해서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됩니다. 그것이 주님이 입을 맞추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속 사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신앙인들이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지, 그리고 바닥까지 떨어진 다음에 어떻게 다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지를 배웠습니다. 계시록 2장 5절에도 회개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가끔 자신을 돌아보면서 처음 진리를 알았을 때의 순수한 열정으로부터 멀리 떠내려왔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은 아주 복잡해서 과거의 상태와 현재의 상태를 어느 하나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어떤 부분은 더 단단해졌을 것이고, 어떤 부분은 해이해진 부분도 있겠지요. 또 어떤 부분은 문제가 많아서 거듭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께 고백하여 그 걸림돌을 필히 제거해야 합니다. 계시록 2장에서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하신 것은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면 부끄럽고 죄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드는 것 자체가 주님 앞에 감사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서는 그런 마음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회개해야 할까요? 먼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회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어떤 행위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는지를 찾아내 그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홍수가 났을 때 급류에 휩쓸리게 되면 처음 출발한 지점보다 한참 아래쪽으로 떠내려가게 됩니다. 그것처럼 아주 작은 잘못된 실수 하나로 인해 나중에는 주님으로부터 아주 멀어집니다. 미국 새 교회도 처음에는 하나의 교파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교리에 대한 작은 이견 때문에 둘로 갈라졌고, 그로 인해 많은 차이가 생겼습니다. 결과적으로 한쪽은 크게 부흥하고, 다른 쪽은 쇠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는 어떤 행위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는가를 찾아내어 주님 앞에 그것을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거듭남을 위해 회개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달려와 우리의 목을 안아주시고 입을 맞춰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또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촛대는 교회를 의미하고, 가장 큰 의미로는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시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로부터 배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안전하고 행복한가 하는 것은 교회 안에 있을 때는 모릅니다. 탕자처럼 교회를 떠나 있을 때 절실히 느낍니다. 주님의 말씀을 두렵게 받아들여 회개하고, 또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
아멘
원본
2021-04-2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3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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