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양 한 마리, 잃은 드라크마 하나’의 속뜻
1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15:1-10)
천사들은 사람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불러내 악령들이 선동하는 악과 거짓에 맞서게 한다. 그때 사람은 선으로도 악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자유의 상태에 있게 된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천사들을 통해 사람을 이끄시고 또한 보호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매 순간, 그리고 순간의 순간마다 이루어진다. (AC.5992:3) Especially do the angels call forth the goods and truths that are with a man, and set them in opposition to the evils and falsities which the evil spirits excite. Thus the man is in the midst, and does not perceive either the evil or the good; and being in the midst, he is in freedom to turn himself either to the one or to the other. By such means do angels from the Lord lead and protect a man, and this every moment, and every moment of a moment; (AC.5992:3)
누가복음 18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주님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였고, 세리는 자기를 낮추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 앞에 나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 주님 말씀에 따라 회개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광경을 보고,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립니다. 앞에서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며 기도했던 바리새인들이 지금은 그들의 기도의 대상이셨던 그 주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양 아흔아홉 마리’는 스스로 거룩한 것처럼 행세하는 바리새인들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양’은 누굴까요?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 주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듣기 원하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세리이며 죄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자주 거역, 때로는 부정한 재물을 탐내며, 그러다가도 후회하고 반성하며 다시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주님께 나아온 세리와 죄인을 닮았습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양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양은 후미진 도랑에 빠졌을 수도 있고, 가시덤불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슬피 웁니다. 목자가 이끄는 대로 왜 순진하게 따르지 않았는가 하고 후회를 합니다. 목자이신 주님은 당연히 당신의 양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당신을 찾고 있는지를 잘 아십니다. 주님은 전지하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왜 양을 찾지를 못하실까요? 찾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을 때는 우리를 바로 구해내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양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그러다가 회개의 진정성이 보일 때, 당신의 양을 도랑에서, 또는 가시덤불에서 건져내십니다. 본문 5절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신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주님을 떠났던 사람이 주님 앞에 돌아와 진심으로 회개할 때, 주님은 그를 어깨에 메고 기뻐하십니다. ‘양을 어깨에 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때부터는 주님이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말씀에는 능력이나 힘을 나타낼 때 주로 손이나 팔, 어깨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중에서도 어깨가 가장 큰 힘을 나타냅니다. 잃어버렸던 양을 어깨에 메신다는 말씀에서 다시는 양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주님의 각오가 느껴집니다. 계속해서 본문 6절과 7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안의 병든 진리와 선이 주님에 의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때 주님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십니다. 벗과 이웃은 우리 안에 있는 건강한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즐긴다는 것은 그때 주님이 다른 건강한 선과 진리들과 더불어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기뻐할까요? 신앙인들의 마음은 수많은 진리와 선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들은 각기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인체의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된 것처럼 그렇게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진리, 또는 선이 병이 들면 그것과 연결된 다른 진리와 선이 병이 들고, 그로 인해 마음 전체가 병이 들거나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는 것은 주님에 의해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하나의 진리가 고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나머지 진리와 선들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깊이와 색깔이 다른 수많은 교인이 그들의 애정에 따라 서로 연결이 되고, 그런 연결들이 모여 교회 전체를 이룹니다. 그때 하나의 교인이 영적으로 길을 잃게 되면 그와 연결된 다른 교인들이 길을 잃고, 그렇게 해서 교회 전체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마리 양이 길을 잃지 않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본문 말씀에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진정한 회개는 주변의 이웃들과 천국의 천사들을 기쁘게 합니다. 다음 8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8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앞에서 말한 잃어버린 양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영적인 병자, 또는 병든 진리를 뜻합니다. 드라크마는 주님 당시 통용되던 화폐 단위인데, 영적으로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잠깐, ‘드라크마’라는 화폐 단위 말씀을 좀 드리면, 예수님 당시 통용되던 화폐는 좀 복잡했는데요, 로마 화폐와 로마 이전부터 쓰던 헬라 화폐, 그리고 이 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자체 화폐가 뒤엉켜 쓰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또 화폐, 즉 동전의 재료에 따라 달라지는데요, 먼저 구리 재료로는 로마의 ‘앗사리온’과 ‘고드란트’로 음역된 콰드란스, 헬라 구리 동전은 ‘렙돈’, 그리고 ‘호리’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로마 동전인 콰드란스인지, 헬라 동전인 렙돈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은의 경우, 로마는 ‘데나리온’, 헬라는 ‘드라크마’가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열 드라크마는 당시 여인의 결혼지참금, 그러니까 혹시 이혼당할 때 보험용, 비상용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열 드라크마밖에 갖고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이 여인은 형편이 넉넉치는 않아 보입니다만, 그러나 숫자 ‘열’(10)의 속뜻은 ‘전부’(all)인 걸 보면 말씀을 겉뜻으로만 읽을 경우, 상당히 엉뚱한 곁길로 나갈 수도 있음을 또 한 번 확인합니다. 그밖에 이스라엘 화폐, 즉 동전은 ‘세겔’이 있습니다.
따라서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진리 가운데 하나가 병이 든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가 병이 들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자아와 세상의 욕망으로 인해 진리가 오염되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힘을 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병이 들면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해도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이 등불을 켜고 집을 쓴다고 했습니다. ‘등불을 켜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들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빗자루로 집을 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비로 방바닥을 쓰는 것처럼 자신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객관적으로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동안 시험에서 왜 자주 넘어졌는지, 왜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해도 뜻대로 잘 안됐는지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읽다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과 제자들을 비방하는 장면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주님과 제자들을 비방했을까요? 주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이웃들 앞에서 또는 주님 앞에서는 세상 누구보다 의롭고 경건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때 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신랄하게 나무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이렇게 완곡하게 타이르셨습니다.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5:31-32)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비난을 받으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양인 줄 아는 자, 의로운 줄 아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길 잃은 양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으로 거듭나기를 원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 앞에 나온 세리와 죄인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매일 기도하는데도 영적인 성장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입으로는 죄인이지만 마음으로는 언제나 바리새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는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에서 건짐을 받아도 다시 죄의 구덩이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항상 자신의 내면의 상태에 집중해서 주님 앞에 충분히 낮아져야 합니다. 인간에 속한 것을 비우고, 또 비워야 합니다. 주님을 대할 때 진실하게 나아가는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회개의 진정성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를 들어 올리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어깨 위에 안전하게 메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자기가 주님 앞에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15:10)
아멘
원본
2021-04-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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