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4(D1)-주일예배(2520, 눅2,8-20, 성탄주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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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4(D1)-주일예배.축도.성탄주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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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vxUaQXqyqoc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2:8-20)

 

 

사람의 영혼과 몸이 하나인 것처럼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된 후, (기독교계의 교리에 따르면) 이 둘은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주님은 신이신 동시에 인간이시라는 점에서 여호와이시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이어집니다. 이런 이유로 이것이 왜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구속주와 구세주라 하는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왜 구속주와 구세주를 여호와라 하는지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에 관한 교리 34:4) As, therefore, after the unition of the human with the Divine in him, which was like that of the soul and body in man, they were no longer two but one person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Christian world), it follows that the Lord is Jehovah and God as to both the Divine and the human. And this therefore is why it is said on the one hand that Jehovah and the holy one of Israel are the redeemer and savior, and on the other that the redeemer and savior are Jehovah, (Doctrine of the Lord, .34:4)

 

 

주님의 탄생을 교우님들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천여 년 전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 주님의 탄생을 12월 25일로 정하고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 무렵이라고 합니다. 본래 12월 25일은 고대 로마 제국에서 지키던 동짓날로서, 일 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날을 기념하던 절기인데 당시 로마 교주가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정복했다는 의미로 이날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제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 정황상, 주님이 오신 가장 성경적인 날은 10월 1일 나팔절이라고 하며, 그 근거의 시작점이 바로 오늘 본문 8절,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에 나오는 ‘밖에서’라고 합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15장, ‘예수님은 언제 태어나셨을까? 나팔절과 크리스마스’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실 당시, 인류는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로 살았던 것처럼 자아와 세상의 노예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자아와 세상의 노예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세상만 바라보며 사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됐을까요?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6373번 글과 ‘주님에 관한 교리’ 61번 글에서는

 

주님이 오실 당시 영계에서는 지옥의 세력이 천국을 압도하고 있었고, 그러므로 천국은 전처럼 순수하거나 강력한 힘을 갖지 못했다.

 

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천국과 지옥의 균형이 지옥으로 기울어 있었고, 그로 인해 천국으로부터 지상의 교회로 흘러들어오는 신성에 속한 것들이 인간을 거듭나게 할 정도로 그렇게 순수하거나 강력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더 타락했고, 인간의 자유의지 또한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의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인간은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됩니다. 영적으로 지옥의 노예가 되는 것이지요. 그때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직접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을 이기신 그 능력으로 영계와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질서를 회복시키셨고 말입니다. 이것이 왜 이천 년 전 그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하셨나 하는 그 배경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의 오심, 주님 성탄 소식을 이렇게 전합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리스도 탄생 소식은 밤새 양을 지키는 목자들에게 처음 전해졌습니다. 말씀에서 ‘목자’는 보통은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을 뜻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양’은 사람의 마음속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仁愛)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는 ‘진리가 무엇이고 선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이 어두울 때에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법도를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오시며, 그래서 천사는 목자들에게 보내심을 받아 주님 탄생의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천사는 놀라서 불안해하는 목자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말합니다. 말씀에는 주님의 환상을 보거나 천사를 만나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요한 사도는 주님께서 계시를 보여 주실 때,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 역시 주님의 환상을 보는 순간 온몸의 힘이 빠지고, 잠든 것처럼 되었습니다. 속뜻으로 볼 때, 주님이 임재하실 때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목자나 요한 사도 또는 다니엘이 느꼈던 두려움은 영적으로 한 단계 거듭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겸손을 나타냅니다. 주님 앞에 겸비함이 없으면 결코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겸손할 때, 주님은 우리들의 내면으로 오시어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는 겸손한 자의 영혼을 그 순간 주께서 소생시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 다니엘에게 허락된 환상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이 사실을 좀 더 깊이 확인하겠습니다.

 

1바사 왕 고레스 제삼년에 한 일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나타났는데 그 일이 참되니 곧 큰 전쟁에 관한 것이라 다니엘이 그 일을 분명히 알았고 그 환상을 깨달으니라 2그 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3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4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 가에 있었는데 5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7이 환상을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환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느니라 8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9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10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11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12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단10:1-12)

 

천사가 목자들에게

 

10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하고 말했습니다. 천사들이 전하는 기쁜 소식이란 구주가 나신 것이며, 그분의 이름은 그리스도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는 주님의 두 가지 본질인 사랑과 진리 가운데 진리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주님을 ‘주’라고 부를 때는 사랑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구주가 나셨다는 것은 사랑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에서는 왜 주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만일 주님이 당신 스스로를 여호와라고 하셨다면 유대인들이 주님을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랬더라면 주님이 오신 목적을 이루지 못하셨을 수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에 오신 주님은 진리 그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천사들이 떠나자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달려갔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강보에 싸인 채 말 구유에 누워 계셨습니다. 말은 총명한 짐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말’은 말씀에 대한 이해력을 나타냅니다. ‘구유’는 말의 양식이 담긴 곳이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교리는 신앙인들을 영적으로 먹이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싸고 있는 강보는 무슨 뜻일까요? ‘강보’는 주님으로부터 처음 나오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뜻합니다.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진리가 가장 순수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자로 표현할 때, 그만큼 순수함이 줄어듭니다. 진리 자체는 무한한 것이지만 문자는 유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는, 주님은 교회의 교리를 통해 오시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장 순수한 진리, 즉 내적 진리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이 천사들에게 들은 것을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들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렸습니다. 말씀에서 ‘보는 것’(seeing)은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믿는다는 뜻이고, ‘듣는 것’(hearing)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이 ‘듣고 본 그 모든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는 것은, 주님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고, 그때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한 단계 더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지금부터 2000년 전 초라한 마구간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이기시고, 인간의 잃어버렸던 자유의지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찾아주신 자유를 통해 이제는 누구나 지옥을 멀리하고 천국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지옥의 유혹을 끊기가 어려우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주님보다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밤에 양을 지키는 목자들은 어둡고 혼탁한 세상 속에서 사랑과 인애의 삶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오셔서 그들과 함께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십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지극히 높은 하늘로부터 낮고 낮은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세상에는 재물이 많은 사람, 똑똑한 사람, 고고한 사람들이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하고는 친구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왠지 주눅이 들고 자꾸 초라해지며 마음의 평화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각 사람의 처지에 맞게 대화하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그렇게 낮아져야 합니다. 이웃을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려 하지 말고 이웃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춰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목자들처럼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탄생을 고대하는 모든 성도들과 가정에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출12:42)

 

아멘

원본

2021-12-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2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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