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1(D2)-신년신정가정예배(2523, 마25,31-46),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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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xlRHSsTi6Q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25:31-46)

 

새해에 부모님께 세배 올리듯 새해 첫날인 오늘 우리는 또한 하늘의 아버지께 첫 예배 올림이 합당하지요. 주께서 오늘 예배에 함께하시고, 올 한 해 필요한 사랑과 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신정 예배를 마음에 둘 때 주신 올 한 해 마음의 본문으로서, 사실 너무나 완전한 본문이어서 그냥 마음을 다하여 귀 기울이기만 하면 될 뿐 딱히 무슨 인간의 설명이 필요 없지 싶은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은 시대의 완성과 주님의 오심, 그리고 그 결과 이어지는 교회의 연속적 황폐함과 최후의 심판(the consummation of the age and His coming, and the consequent successive vastation of the church and the final judgment)을 예언하신 마태복음 24장, 25장의 대미를 장식하는 말씀입니다만, 저는 오늘 한 가지, 이 중차대한 말씀의 하이라이트로서 주님은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라고 하는, 삶의 실천을 강조하셨다는 말씀을 꼭 좀 드리고 싶습니다.

 

다음은 오늘 본문 중 35절, 36절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주석입니다.

 

4955. 이들 본문에 들어있는 속뜻은 이제 이어질 내용을 보시면 되는데요,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여기 순서대로 주욱 나열된 행위들은 바로 체어리티의 행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건데요, 즉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신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게 뭔지를 말입니다. 이런 행위들을 그저 겉 글자의 뜻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이 행위들은 겉보기에 그냥 평범한 선행일뿐 거기 무슨 다른 비밀이 있을 수 있나 합니다만, 그러나 이 하나하나의 행위에는 어떤 비의(秘義, secret), 곧 신성(神性, Divine)이 들어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이 비의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 여기 ‘오늘날’(at this day)은 이 주석이 기록되던 1,750년대 유럽을 말합니다.

 

오늘날엔 체어리티의 교리가 없기 때문인데요, 사람들이 신앙(faith, 믿음)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해 온 이래 이들 교리는 사라졌고, 이 교리들이 있던 자리를 신앙(믿음)의 교리가 대신 고안되어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 후자의 교리는 체어리티가 무엇이며, 이웃이 무엇인지를 전혀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교리들은 체어리티의 모든 종(種, species)과 속(屬, genera)을 가르쳤고, 체어리티가 베풀어져야 할 이웃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어느 정도로, 그리고 어떤 면에서 어떻게 이웃인지를, 그리고 그 결과 체어리티의 실천이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양하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이 주석을 기록할 때, 주님의 직접 계시, 곧 그 어떤 천사나 영들을 통하지 않고, 주님이 친히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풀어 주실 때, 세상 그 어떤 서적도 참고하지 않고, 성경과 종이, 그리고 펜만 가지고 딕테이션, 곧 받아적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알 수 없는, 이런 태고, 고대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교리들은 또한 이웃을 여러 클래스로 그룹지어 이름들을 주었는데요, 부르기를 가난한 사람들(the poor), 궁핍한 사람들(needy), 불행한 사람들(miserable),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afflicted)로, 또 어떤 그룹들은 앞 못 보는 사람들(the blind), 다리 저는 사람들(lame), 장애를 가진 사람들(halt), 고아들(fatherless), 과부들(widows)로, 또 어떤 그룹은 굶주린 사람들(the hungry), 목마른 사람들(thirsty), 나그네들(strangers), 헐벗은 사람들(naked), 병든 사람들(sick), 옥에 갇힌 사람들(bound) 등으로 불렀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이 사람과 저 사람을 향해 자신들이 어떤 의무를 지고 있는지를 알았는데요,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듯, 이들 교리들이 이젠 사라졌고, 그와 함께 말씀에 대한 이해도 사라져서, 즉 말씀을 속뜻으로 볼 줄 아는 능력이 사라져서, 오늘날은 말씀에 나오는 이 ‘가난한 자들’, ‘과부들’, ‘고아들’이라는 표현들이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 말고 무슨 다른 의미, 즉 비의가 있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실정입니다. 오늘 본문, ‘주린 자들’, ‘목마른 자들’, ‘나그네들’, ‘헐벗은 자들’, ‘병든 자들’ 및 ‘옥에 갇힌 자들’ 역시 그 비의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체어리티는 그 본질 그대로 설명되어야 하며, 그 실천 역시 실천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4956.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본질은 선과 진리에 관한 애정(the affection of good and truth)이며, 자아를 악과 거짓으로 인식하는 것(the acknowledgment of self as being evil and false)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웃은 선과 진리 그 자체이며, 선과 진리에 의해 영향받는 것이 곧 체어리티를 갖는 것입니다.

 

※ ‘이웃은 선과 진리 그 자체’라는 말은 아마도 천국은 주님의 신성, 곧 선과 진리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이웃’이기 때문이지요. 즉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한 천국에서의 태도를 지상에서는 체어리티라고 한다는 것으로 저는 이해가 됩니다.

 

이웃의 반대는 악과 거짓이며, 이 악과 거짓은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은 선과 진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데요, 이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며, 또한 악하고 거짓된 것을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악과 거짓은 자아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것을 하면, 곧 체어리티의 사람이 되어 자아로 말미암는 악과 거짓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면 그는 자인(自認)으로 인한 굴욕 가운데(in humiliation from self-acknowledgment) 있게 되는데, 바로 그때 그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과 진리를 받는 상태가 됩니다.

 

※ ‘자인(自認)으로 인한 굴욕 가운데 있게 된다’는 건, 원래 사람은 그 본성상 자아를 부인하는 걸 좋아하는 존재가 아니기에 ‘제 안에는 선과 진리가 없어요. 저는 본질적으로 악하고 거짓된 존재입니다.’ 이렇게 시인하는 건 어찌 보면 참 굴욕적이라는, 그런 말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람이 주님 앞에 이렇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는 주님의 모든 좋은 것을 받을 수 있게 되지요.

 

이런 것이 다음 주님의 말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에 들어있는 체어리티의, 속뜻으로 본 특징들입니다. 이 말씀들이 그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속뜻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체어리티의 교리들을 갖고 있었던 고대인들은 이런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오늘날 이런 사실은 너무도 엉뚱해 보여 그 안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는 말을 들으면 다들 어리둥절해할 것입니다. 게다가 천사들, 사람한테 와있는 천사들은 이 말씀들을 다른 방식으로는 지각조차 못 하는데요,

 

※ ‘사람한테 와있는 천사들’(the angels who are with man), 모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 말미암는 건데요, 먼저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있어 사람이며, 둘째, 천국은 두 나라, 곧 천적(天的, celestial, 의지, 선, 사랑 등) 나라와 영적(靈的, spiritual, 이해, 진리, 신앙 등) 나라로 되어 있고, 지옥 역시 그에 대응하는 두 지옥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천적 천국과 그에 대응하는 지옥에서 각각 천사 하나, 악령 하나, 영적 천국과 그에 대응하는 지옥에서 각각 천사 하나, 악령 하나, 이렇게 둘씩 와있는 것이며, 천사들은 와서 그 사람의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악령들은 와서 그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사람은 천사들을 통해서는 주님 및 천국과, 악령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고로, 각 사람에게 와있는 천사들과 악령들은 그 사람의 기억과 생각을 자기 걸로 압니다. 모든 피조물은 누구나 자기 걸 소중히 여기므로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 또한 저들에게 보호받게 하시려는 주님의 배려라고 합니다.

 

천사들은 ‘주린 사람들’(the hungry) 하면, 애정을 가지고 선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로 지각하고, ‘목마른 사람들’(the thirsty) 하면, 애정을 가지고 진리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로, ‘나그네’(a stranger) 하면, 기꺼이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을, ‘헐벗은 사람들’(the naked) 하면 자신들 안에 아무런 선과 진리가 없음을 시인하는 사람들을, ‘병든 사람들’(the sick) 하면, 자신들 안에 악밖에 없음을 시인하는 사람들을, ‘결박, 즉 옥에 갇힌 사람들’(the bound or those who are in prison) 하면, 자신들 안에 거짓밖에 없음을 시인하는 사람들로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 바로 위에 주욱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주님이 특별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신 것은 우리의 선행이 진정성 있게 하시기 위해서인데요, 왕이나 대통령 등 높은 사람에게 선대하며 예의를 갖추는 걸로는 그 진심이 명료하지 않아서입니다. 비슷한 걸로는 우리가 예배 중 경배와 찬양 같은 시간에 짐짓 거룩한 표정과 마음가짐으로 나름 정성을 다해 진정성 있게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한다고 하지만 주님은 그런 일종의 겉모습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오늘 본문과 관련된,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주인공 마르틴은 구두를 만들고 고치는 제화공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그가 절망에 빠졌습니다. 5년 전, 자식 두 명과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근래 하나 남은 막내아들까지 병으로 그만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며, 자신도 빨리 죽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성경을 접하고는 읽기 시작하였는데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감동받은 그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새로운 희망을 찾아 성경 읽기에 열중했습니다.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마르틴, 내가 내일 찾아갈 테니 창밖을 보아라.” 마르틴은 그날 하루 종일 창밖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언제쯤 오시려나..." 중얼거리며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겠다는 하나님은 오지 않고, 마침 창밖에 늙은 청소부가 눈을 맞으며, 청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은 그를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따뜻한 차를 대접하였습니다. 청소부를 보내고 두어 시간이 지나 창밖을 보니, 이번엔 아기를 안은 여인이 눈보라 속에서 떨고 있네요. 그는 여인을 가게 안으로 맞아들여 먹을 것을 대접하고, 옷을 한 벌 장만해 주었습니다. 또 시간이 흘러 거의 해가 질 무렵, 창밖을 바라보니 이번엔 또 사과를 파는 노파가 사과를 훔친 소년을 붙잡고 야단치고 있는 겁니다. 마르틴은 밖으로 나가 소년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사과값을 대신 갚아주며, 노파가 소년을 용서하시도록 권하여 원만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마르틴은 날이 어두워지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마르틴은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요, 그때 어둠 속에서 자신이 낮에 대접했던 늙은 청소부와 아기 안은 여인, 그리고 노파와 소년이 나타나 미소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데요, “마르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이후 마르틴은 꿈에서 깨어나 펼쳐져 있는 성경을 보니,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라는 이 톨스토이 단편은 뒤늦게 구원의 감격을 깨닫게 된 마르틴이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하루 동안 겪는 이야기입니다.

 

네,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온 우리가 이런 걸 모르겠습니까? 다 아는 내용이지요. 그럼에도 신년에 이런 체어리티의 메시지를 준비한 것은 이것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앞서도 말씀드렸듯 마24, 25, 시대의 완성과 주님의 오심, 그리고 그 결과 이어지는 교회의 연속적 황폐함과 최후의 심판 등 대하드라마 같은 앞날을 예언하시는 가운데 하신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주님의 지혜와 복, 생명은 평소엔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관한 지식으로 우리 안에 머무르다가 우리가 여기 마르틴처럼 용기를 내어 실천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 안에 흘러들어옵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고, 부디 올 한 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신앙으로 진입하는 우리 모두 되게 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아멘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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