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5 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위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神)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AC.35 마지막의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는 말은 짧지만 참으로 큰 위로를 줍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는 지옥을 향할 수 있으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하는 쪽은 의지이므로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사람 전체가 지옥으로 곤두박질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망적인 문장의 끝에 ‘주님의 자비’가 등장합니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마지막 말이 인간의 악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비’라고 하면 죄를 지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시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자비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AC.35의 문맥에서 자비는 조금 더 근본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람이 자기 악한 의지에 따라 끝까지 떨어지도록 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엄중한 진단과 주님에 대한 그의 신뢰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간의 악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조금 노력하면 자기 힘으로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깊이 자기 사랑과 악으로 기울 수 있는지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자비가 더욱 크게 드러납니다. 사람이 여전히 돌이킬 수 있고,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선을 향하여 움직일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붙들어 주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여기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5은 그 작동 방식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 어떤 일이 뜻밖에 막히는 것, 고통이나 시험을 겪는 것 등을 하나하나 가리켜 ‘이것이 바로 그때 주님께서 붙드신 것이다’라고 AC.35만을 근거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와 거듭남에 관한 다른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면 주님의 인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우선 ‘인간이 자기 악에 완전히 내맡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비로 붙드신다고 해서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으며, 악과 싸울 수도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 안에서 선과 진리를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길을 열어 주시는 자비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자비를 ‘공의라면 벌해야 하지만 자비가 그것을 눈감아 주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신적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거나 거짓을 진리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 자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그가 악에서 돌이켜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구원을 향해 이끄시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비는 인간의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악에서 건져 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AC.35의 이 한마디는 거듭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다 보면 ‘나는 왜 아직도 이렇지?’, ‘왜 알고 있는 것과 실제 삶이 이렇게 다르지?’ 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35처럼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 의지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말씀을 읽으면 자기 안의 모순이 더욱 크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 문장의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끝내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주님의 자비로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의지가 이미 완전해졌다는 데 있지 않고,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어차피 주님께서 붙드시니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자비를 알수록 우리는 그 자비에 응답하여 악에서 돌아서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기며, 주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을 자유롭게 선택해야 합니다. 자비는 거듭남을 대신해 주는 면허가 아니라 거듭남이 가능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으신 신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고백은 AC.35을 읽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AC.35은 그 자비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든 방식으로 역사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악한 의지의 무게만을 따라 끝없이 떨어지도록 버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짧은 한마디 때문에,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그렇게 엄중하게 말한 AC.35도 결국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바라보며 끝납니다.

 

 

 

AC.35, 창1:14-17, ‘의지와 이해 : 하나의 생명이냐, 둘로 갈라진 마음이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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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심화

2. 왜 ‘도망함’(flight)이 ‘마지막 때와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하는가?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막13:18)에 나오는 ‘일’(flight)을 기독교, 개신교에서는 ‘휴거’라 하여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 없는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각각 겨울과 봄의 햇빛에 비유한 뒤, 막13:18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그리고 곧바로 ‘여기서 도망함(flight)은 마지막 때를 뜻하며, 또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고, 환난의 날은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뜻밖입니다. ‘도망함’이라는 말이 어떻게 ‘마지막 때’를 뜻하고, 더 나아가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할 수 있을까요? 혹시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을 flight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먼저 이 가능성부터 제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서 영어 flight는 ‘비행’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막13의 문맥에서 flight는 위험을 피해 ‘도망함, 피신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해하면서 영어 단어의 다른 뜻인 ‘비행’을 끌어올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것을 현대 종말론에서 흔히 말하는 ‘휴거’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flight를 휴거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직접 제시하는 속뜻은 ‘마지막 때’와 ‘각 사람이 죽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화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그가 실제로 제시한 이 두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왜 ‘도망함’이 ‘마지막 때’를 뜻할까요? 막13의 문자적 문맥에서 도망함은 한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고 결정적인 끝을 향해 가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 적용합니다. AC.32에서도 ‘세대의 종말’을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어느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도망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한 교회의 상태가 마지막에 이르는 영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또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 전체의 마지막과 한 개인의 자연계 삶의 마지막 사이에 대응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그 교회의 마지막 상태가 있고, 개인에게는 자연계에서의 삶을 마치는 때가 있습니다. AC.34는 막13의 말씀을 이 두 차원에 함께 적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을 때’를 단순히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이동 순간으로 이해하면 AC.34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바로 이어 설명하는 것은 이동의 방식이 아니라 그때의 ‘상태’입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을 AC.34의 속뜻에 따라 읽을 때 중심 질문은 ‘죽을 때 영혼이 어떻게 이동하는가?’가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마칠 때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가?’입니다. 그때가 ‘겨울’, 곧 사랑이 없는 삶의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4 전체의 주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이 글의 처음부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며, 사랑 없는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지고 있는 영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그는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을 겨울철 햇빛에 비유합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어서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고 모든 것이 굳어 있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빛과 함께 열이 있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바로 이 겨울과 봄의 대조를 설명한 다음에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따라서 ‘겨울’의 의미는 앞의 설명과 분리해서 읽을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각 사람이 죽을 때’를 언급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연계에서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은 사랑과 신앙이 결합된 삶을 향하여 거듭날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계의 삶을 마칠 때 그 사람의 지배적인 생명이 사랑 없는 겨울과 같은 상태라면, 그것은 단순히 추운 계절에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자연계의 삶을 마쳤다는 뜻이 됩니다.

 

AC.34은 그 뒤의 ‘환난의 날’도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 역시 자연계의 재난이나 종말 시간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 없는 삶이 사후에 어떤 상태와 연결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인용 전체는 AC.34가 계속 말해 온 ‘사랑 없는 신앙에는 참된 생명이 없다’는 원리를 매우 엄중한 방식으로 강조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죽을 때’라는 표현 때문에 임종 순간의 감정이나 마지막 몇 분의 상태에 지나치게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34가 말하는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입니다. 즉 문제는 죽는 바로 그 순간 사람이 평안했는가 두려워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연계에서 어떤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아 살아왔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었거나, 의식을 잃은 채 죽었거나, 임종 때 심한 고통과 두려움을 겪었다고 해서 그것을 ‘겨울에 도망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겨울은 육체적 임종 상황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삶’이라는 영적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별은 목회적으로도 중요합니다. 막13:18을 AC.34의 설명에 따라 읽으면서 ‘좋은 상태에서 죽어야 한다’는 말을 임종의 외적 모습에 적용하면 불필요한 두려움을 만들 수 있습니다. 평안하게 임종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봄인 것도 아니고, 고통스럽게 임종했다고 해서 영적으로 겨울인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보는 것은 자연적 죽음의 외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이루어 온 사랑의 성질입니다.

 

이렇게 보면 ‘도망함’이 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하는지도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막13의 종말에 관한 말씀을 교회의 마지막에만 한정하지 않고 개인의 자연계 삶의 마지막에도 적용합니다. 그리고 그때 중요한 것은 ‘그 마지막이 사랑 없는 겨울의 상태인가, 아니면 사랑과 신앙이 결합된 생명 가운데 있는가’입니다.

 

따라서 AC.34에서 flight를 ‘비행’이나 ‘휴거’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서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는 이동 자체를 flight라고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주는 열쇠는 ‘마지막 때’, ‘각 사람이 죽을 때’, 그리고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라는 세 표현입니다.

 

결국 이 인용의 중심은 ‘어떻게 세상 끝에서 탈출할 것인가?’가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마칠 때 나는 어떤 사랑의 상태에 있는가?’입니다. AC.34 전체가 말하듯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사랑 없는 신앙은 겨울의 햇빛과 같습니다. 그래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은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 삶의 중요성을 마지막 순간의 관점에서 다시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다 : 겨울의 빛과 봄의 빛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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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

AC.34.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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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심화

1.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어떤 상태일까?

 

위 AC.34 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말인데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어떤 묘사가 좀 가능할까요? 저렇게만 말하면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해서요...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영계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천적 사랑 가운데 있는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으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읽으면 오히려 궁금증이 커집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니, 도대체 어떤 상태라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AC.34에서 실제로 말한 범위를 정확히 붙드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 상태를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천적 천사들이 어떤 느낌을 느끼는지, 생각이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 어떤 방식으로 진리를 알아보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빈자리를 상상으로 채워 ‘천적 천사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이런 감정을 느낀다’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AC.34 자체가 알려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첫째, 그들은 ‘천적 사랑 가운데’ 있습니다. 둘째, 그 사랑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셋째, 그 사랑으로 인해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습니다. 넷째, 그 결과 그들에게는 놀라운 ‘생명과 지성의 빛’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를 함께 보면 어느 정도 그 상태의 윤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생명’입니다. 바로 앞의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생명을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과 기쁨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4의 천적 천사들이 놀라운 ‘생명’ 가운데 있다는 말은 앞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랑에 따른 생명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지성의 빛’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머리가 매우 좋다거나 지식이 많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4가 강조하는 것은 천적 천사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지성의 빛은 사랑 없는 지적 능력이나 교리 지식의 축적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바로 뒤에 나오는 반대 사례를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지식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 관한 교리적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에게는 ‘생명과 지성의 빛’이 있고, 사랑 없는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에게는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대조가 AC.34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천적 천사들의 ‘지성의 빛’을 이해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사랑에서 분리되지 않은 지성의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에 속한 지식은 차가운 지식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결합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상태를 단순히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의 AC.32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이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4의 천적 천사들을 이해할 때에도 같은 질서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빗대어 조금이라도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아주 제한적인 비유는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하니까’ 억지로 하는 경우와, 진심으로 이웃의 유익을 사랑하여 기쁘게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이라도 후자의 경우에는 ‘무엇이 옳은가’라는 앎과 ‘그것을 하고 싶다’는 애정이 더 가까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천적 천사들의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연적 수준에서 희미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비유 정도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의 상태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모든 진리를 한순간에 직관적으로 아는 상태’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4가 여기서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과 지성의 빛’을 어떤 특별한 황홀감이나 감정 상태로 묘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랑과 신앙의 질서입니다.

 

왜 그 상태를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는지도 여기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경험했다고 말하는 천적 사랑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자연계에 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랑과 지식의 관계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진리에 어긋날 수 있고,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살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신앙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실제 사랑의 삶과 분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에서 천적 천사들의 상태는 바로 그 반대편에 놓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결합되어 있고, 거기에서 생명과 지성의 빛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분리된 상태를 가지고 그 결합의 상태를 온전히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도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문장을 신비한 황홀경에 대한 묘사로 읽는 것이 아닙니다. AC.34의 문맥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과 신앙의 결합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며, 사랑 없는 신앙의 지식은 겨울 햇빛처럼 생명을 내지 못하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의 햇빛처럼 생명을 일으킵니다.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바로 이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천국에서 얼마나 충만한 생명을 이루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상태를 완전히 묘사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무엇이 그 상태의 핵심인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지식이 살아 있는 상태’,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아 생명과 지성의 빛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설명은 결국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AC.34가 천적 천사들의 놀라운 상태를 보여 주는 목적은 단순히 천국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바로 다음에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의 차갑고 어두운 상태를 대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많은 신앙 지식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지식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삶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우리에게 아직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천국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AC.34가 밝혀 주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생명과 빛의 근원은 천사들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으며,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질서가 그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AC.34, 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

AC.34.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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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 없는 신앙은 빛이 아니다 : 생명을 가르는 광명체의 본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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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심화

2. 왜 광명체 본문에서 갑자기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을 말하는가?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설명해 주세요.

 

창1:14-17의 넷째 날 본문은 해와 달과 별, 곧 ‘광명체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AC.30부터 스베덴보리는 이 광명체들을 사랑과 신앙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AC.33에 이르면 갑자기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얼핏 보면 광명체의 속뜻을 설명하다가 잠시 다른 주제로 빠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0-33의 흐름을 함께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AC.33은 앞에서 말한 ‘더 큰 광명체’, 곧 사랑이 왜 그렇게 근본적인지를 설명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큰 광명체’를 사랑과 신앙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더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더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기 때문에 사랑이 먼저입니다. AC.32에서는 이 질서를 더욱 분명히 하여,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사랑이 그토록 근본적일까요? 왜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것일까요?

 

AC.33은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과 생명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으며,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단순히 신앙과 나란히 놓이는 하나의 종교적 덕목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의 생명과 직접 관계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의 성질이 달라지고, 그 사람이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도 달라집니다. 이것이 ‘더 큰 광명체’인 사랑을 설명하다가 생명과 기쁨의 이야기가 나오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더욱 강하게 설명하기 위해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앞의 심화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것은 생각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을 움직이는 더 깊은 생명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생각하고 추구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사랑이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라고 해서 모든 사랑에서 나오는 생명과 기쁨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3은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을 구별하여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도 ‘생명과 기쁨의 어떤 모양’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서 큰 활력을 느낄 수도 있고, 재물이나 지위나 명예를 얻는 데서 강한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나는 무엇인가를 사랑한다’, ‘나는 이것을 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참된 사랑과 참된 기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사랑은 무엇일까요? AC.33은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오는 기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랑, 생명, 기쁨이 하나의 질서로 연결됩니다. 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이것이 AC.32와도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AC.32에서 천적 천사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AC.33은 이제 그 원리를 좀 더 일반적인 형태로 설명합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바로 그 생명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AC.33의 사랑·생명·기쁨 이야기는 광명체 본문에서 벗어난 별도의 주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광명체가 사랑이다’라는 말의 깊이를 밝혀 주는 설명입니다. 사랑이 큰 광명체라는 것은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더 밝다거나 더 중요하다는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고, 인간의 생명과 기쁨의 성질 역시 사랑의 성질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사랑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점은 ‘광명체’를 단순히 ‘진리의 빛’이라고 바꾸어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문맥에서 두 광명체는 각각 사랑과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진리의 빛이 사랑과 결합되어야 참된 빛이 된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보다, AC.30-33이 실제로 말하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그대로 따라가는 편이 정확합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더 작은 광명체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에 광명체가 나타난다는 것을 곧바로 ‘이제 참된 기쁨과 행복이 완성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AC.33은 거듭남의 넷째 상태 전체를 여기서 완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광명체 가운데 특히 사랑이 가지는 생명적 성격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거듭남의 과정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AC.33의 흐름은 오히려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더 큰 광명체는 사랑이다. 그런데 왜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인가? 사랑은 생명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성질에 따라 생명의 성질도, 기쁨의 성질도 달라진다. 그리고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과 참된 기쁨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 이런 흐름입니다.

 

결국 AC.33에서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이 등장하는 이유는 광명체 이야기를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광명체의 속뜻을 더 깊이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해가 단순히 밝은 천체가 아니라 ‘사랑’을 나타낸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곳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참된 생명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창1의 넷째 날은 단순히 사람 안에 무엇인가 ‘밝은 것’이 생기는 단계가 아닙니다. AC.30-33의 흐름에서 보면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나타나고,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으며, 그 사랑과 생명의 참된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는 단계입니다. AC.33의 사랑과 생명과 기쁨에 관한 설명은 바로 이 넷째 날의 아르카나를 한층 더 깊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33, 창1:14-17, ‘사랑이 곧 생명이다 : 참된 사랑과 거짓 사랑의 결정적 분별’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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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AC.33.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위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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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심화

1. 사랑을 제거하면 왜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

 

위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것을 생생히 본 적이 있습니다.’(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말인데요,이 사례에 대한 좀 더 생생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말을 합니다.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나에게 생생하게 보여진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표현입니다. 사랑이 없어지면 왜 생각까지 멈추는 것일까요?

 

먼저 한 가지는 정확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3에서 이것이 자신에게 ‘생생하게 보여졌다’고 말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것이 어떤 장면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영에게서 사랑을 제거했더니 그 영이 갑자기 생각을 멈추었다는 식의 상세한 사례도 여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장면을 상상하여 구체적인 영계의 실험처럼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3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사랑과 생각의 관계를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제적으로 확인된 사실로 제시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생각이 멈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 말을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여러 감정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며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를 움직이는 생명의 근본적인 애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은 사랑과 완전히 독립하여 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합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고 싶기 때문에 방법을 궁리하고,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생각하며, 어떤 일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생각이 계속 이어집니다. 생각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생각을 움직이고 방향을 주는 더 깊은 곳에는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는 애정이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이것의 희미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깊은 관심이 생기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그 일에 관한 생각이 계속 떠오릅니다. 반대로 아무런 관심도 목적도 없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오래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AC.33의 말을 완전히 증명하는 사례는 아니지만, 사랑과 관심과 목적이 사고의 방향과 지속성에 깊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AC.33의 말은 단순히 ‘관심 있는 것은 많이 생각한다’는 심리적 관찰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인간 생명의 구조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이 생명의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생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그 사랑에 속한 욕망을 모두 제거한다고 가정하면 생각도 ‘즉시 멈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욕망’(desires)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욕망’이라고 하면 흔히 악하거나 육체적인 욕구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AC.33에서는 더 넓은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욕망은 사랑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향하여 움직이고 원하는 모든 애정적 경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선한 사랑에도 그 사랑에 속한 바람과 목적이 있고, 악한 사랑에도 그 사랑에 속한 욕망과 목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의 유익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이 사람에게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어떤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쓰임을 더 잘 수행할 방법을 생각합니다. 반대로 자기의 명예를 지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인정받고 높아질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서로 매우 다르지만, 각각의 생각 뒤에는 그 생각을 움직이는 사랑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의 핵심은 ‘생각은 아무 가치가 없고 사랑만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이해는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어떤 사랑을 섬기느냐입니다. 참된 사랑에서 나오는 생각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나오는 생각은 겉으로는 똑같이 지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생명의 성질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AC.33의 앞뒤 문맥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성질이 생각의 방향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생각은 그 사랑을 섬기는 방향으로 형성되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생각 역시 그것들을 이루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자기 안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보고 곧바로 ‘이것이 나의 진짜 사랑이다’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생각과 충동이 오갈 수 있고,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 사이의 싸움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이고 선택하며,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는가입니다. 그런 지속적인 방향에서 그 사람을 지배하는 사랑의 성질이 점차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말을 뇌의 작동이 물리적으로 정지한다거나 사람이 아무런 의식도 없는 상태가 된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3의 초점은 자연적 생리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생각이 그 자체로 인간 생명의 최초 원인이 아니며, 그 생각을 움직이는 더 깊은 생명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사랑을 제거한 사람을 ‘마치 죽은 사람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원하는 것도, 추구하는 것도, 기뻐하는 것도 없고, 따라서 생각을 움직이는 생명의 동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만이 아니라 ‘사랑하고, 그 사랑에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을 살피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나는 무엇을 많이 생각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배후의 사랑과 목적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33의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말은 생각을 낮추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는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생각은 고립되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연결되어 있으며,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각이 향하는 방향도 달라집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AC.33이 마지막에 밝히듯 사람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 있습니다.

 

 

 

AC.33, 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AC.33.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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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사랑이 곧 생명이다 : 참된 사랑과 거짓 사랑의 결정적 분별’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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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읽으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도 결국 쇠퇴하고 황폐해져 종말을 맞았는데 어떻게 태고교회 전체를 두고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또 바로 이어 천적 천사들을 언급한다고 해서 태고교회 사람들 모두가 천적 천사가 되었다는 뜻일까요?

 

먼저 첫 번째 질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한 ‘교회’를 그 교회의 고유한 영적 성격에 따라 말하는 경우와, 그 교회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쇠퇴해 가는 과정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AC 전체에서 ‘천적 교회’로 설명됩니다. 그 교회의 고유한 질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중심에 있고, 신앙이 그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말은 태고교회의 역사에 속한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언제나 동일한 사랑의 상태에 있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태고교회 역시 쇠퇴했고, 마침내 그 본래의 천적 상태를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AC.32의 표현은 그 교회를 특징짓는 고유한 영적 질서, 곧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천적 교회의 성격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여기서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진리가 필요 없었다거나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사랑과 신앙이 오늘날 흔히 생각하듯 서로 독립된 두 요소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신앙에 속한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랑에서 분리된 별도의 신앙을 그들은 참된 신앙으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2의 전체 논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사랑은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더 작은 광명체’입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세대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졌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사랑과 신앙이 분리된 상태와 대조되는 예로 태고교회를 제시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이어서 ‘천적 천사들’을 언급할까요? 스베덴보리의 문장을 자세히 보면 ‘태고교회 사람들이 모두 천적 천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태고교회에 관한 진술에 이어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즉 두 집단의 모든 개인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나타나는 같은 천적 질서를 나란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라고 불리는 것과 천국에 ‘천적 천사들’이 있다는 것은 서로 관련되지만, 그렇다고 태고교회의 모든 구성원의 사후 운명이 자동으로 천적 천국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교회의 영적 성격을 말하는 것과 그 교회에 속했던 모든 개인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특히 태고교회가 후대로 가면서 쇠퇴하고 황폐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구별은 더욱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천적 천사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오히려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어서 ‘온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며,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고, 모든 천국의 행복이 거기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은 그 사랑과 생명과 행복을 자기 자신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얻는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2의 관심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사후 분류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심은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입니다. 태고교회라는 지상의 천적 교회의 고유한 상태에서도, 천적 천사들의 천국적 상태에서도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사랑에 속하며,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말을 태고교회의 쇠퇴와 모순되는 절대적인 역사 진술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태고교회를 그 고유한 천적 성격에 따라 말하고 있으며, 그 성격을 오늘날 천적 천사들의 상태와 나란히 놓아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구별을 줍니다. 어떤 교회를 말할 때 그 교회가 나타내는 고유한 영적 성격과, 그 교회에 속한 모든 개인의 실제 상태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였다고 해서 그 역사의 모든 사람이 천적 인간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며, 천적 천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태고교회가 후에 쇠퇴했다는 이유로 그 교회의 본래 천적 성격까지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AC.32에서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이 나란히 등장하는 까닭은 둘을 동일한 집단으로 보기 때문이 아니라, 양쪽에서 같은 천적 질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는 바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 속하며, 그 모든 사랑과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AC.32가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을 함께 언급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AC.32 심화 3)

 

 

 

AC.32, 창1:14-17,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다 : 마지막 시대에 드러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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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심화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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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다는 것,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라는 것, 그리고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으며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읽으면 ‘사랑이 적은 것과 아르카나가 가려지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을 이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AC.32가 말하는 ‘아르카나’의 내용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추어져 있었다는 아르카나는 추상적인 비밀 지식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랑과 신앙의 질서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 광명체들’이라 하고, 사랑을 더 큰 광명체, 신앙을 더 작은 광명체라 하며, 사랑은 낮을, 신앙은 밤을 다스린다는 것이 그 아르카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를 이해하려면 신앙을 사랑과 독립된 별도의 종교적 능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30부터 계속되는 논리는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더 작은 광명체인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신앙도 살아 있으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본래의 생명을 잃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사랑 자체가 거의 사라지면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진리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신앙을 교리의 인정, 지적 동의, 종교적 주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워지고, 사랑은 신앙과 나란히 놓이는 하나의 덕목 정도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질서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르카나가 가려져 있음’과 ‘사랑이 거의 없음’이 연결됩니다. 아르카나가 말씀 안에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의 참된 관계가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알려지거나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던 것을 이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설명하도록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는 표현에서 순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어서 사랑이 없다’고 하지 않고, 사랑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30부터 이어진 광명체의 질서와 정확히 같습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더 작은 광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2에서 세 가지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세대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졌고, 사랑이 거의 없으므로 살아 있는 신앙도 거의 없어졌으며, 그 결과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 자체가 교회에서 가려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시대에 ‘해는 사랑이고 달은 신앙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아르카나를 다시 밝혀야 했다는 것이 AC.32의 논리입니다. (AC.32 심화 2)

 

 

 

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 심화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가리켜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라고 말합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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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가리켜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AC가 쓰인 때로부터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세계와 기독교회는 계속 존재하고 있으니,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 질문은 ‘세대의 종말’을 현대적인 시간 개념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영적 상태로 읽을 것인가와 관계됩니다.

 

우선 AC.32 자체가 ‘세대의 종말’을 무엇과 연결하는지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종말’의 핵심은 몇 년 뒤 세상이 사라진다는 시간표가 아니라, 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랑과 신앙을 거의 잃어버린 영적 상태에 있습니다.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살아 있는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를 스베덴보리는 ‘세대의 종말’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세대’(age)를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 인간 세대, 곧 20년이나 30년 정도의 기간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복음서의 ‘consummation of the age’ 역시 한 사람의 세대가 끝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교회적 시대의 완결과 관계된 표현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18세기에 ‘세대의 종말’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몇십 년 안에 지상 세계가 끝난다’는 예언을 한 것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종말’이라는 말을 어떤 상태가 마지막 단계에 이른 것으로 이해하면 시간이 오래 흐른다는 사실 자체가 곧 모순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랑과 신앙을 잃었다고 해서 지상의 조직과 제도, 예배와 교리, 교회 건물과 이름이 그 즉시 모두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형태는 남아 있으면서도 그 교회의 내적 생명은 크게 쇠퇴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AC.32의 관심은 바로 그 내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2026년이라는 현재 시점에서 ‘왜 아직 종말이 끝나지 않았는가?’라고 묻기 전에,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종말’이라고 불렀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32에서 그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물리적 소멸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질서가 소진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이 단락의 문맥에 가장 잘 맞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는 최후의 심판과 새 교회에 관하여 훨씬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수백 년의 교회사를 정확히 어떤 단계의 ‘과도기’라고 이름 붙일 것인지, 또는 현재가 그 과정의 어느 지점인지를 AC.32만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자기 시대의 교회를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종말 상태’로 보았다는 사실까지만 분명히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세대의 종말’이 수백 년 동안 계속된다고 생각하기보다, 먼저 ‘종말’이 달력상의 짧은 기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AC.32에서 그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은 매우 분명합니다. 사랑이 살아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2 심화 1)

 

 

 

AC.32 심화 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심화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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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다 : 마지막 시대에 드러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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