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4:25)

 

AC.434

 

여기 ‘아담’(man)과 그의 ‘아내’(wife)는 위의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로 상징된 새 교회를, 이름이 셋(Seth)인 그녀의 ‘아들’(son)은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신앙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라는 표현은, 체어리티, 곧 가인이 분리, 소멸시킨 것을 이제 주님이 다시 이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and by her “son,” whose name was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ight be obtained. By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is signified that charity, which Cain had separated and extinguished, was now given by the Lord to this church.

 

해설

 

AC.434에서 스베덴보리는 창4:25의 문장을 교회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담이 자기 아내와’는 단순히 한 부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앞서 상세히 해석된 새 교회 전체를 뜻합니다. 곧 ‘아담’과 ‘그의 아내’는 AdahZillah로 표상된 교회, 다시 말해 천적, 영적, 자연적 차원이 모두 회복되어 질서를 갖춘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교회는 사랑(천적)과 신앙(영적), 그리고 삶의 실천(자연적)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결합된 상태로 서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태어난 ‘아들’, 곧 Seth은 ‘새 신앙’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가인의 신앙처럼 사랑과 분리된 교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으로 규정합니다. 즉, 이 신앙은 스스로 목적이 되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이자 수단입니다. 이는 신앙의 자리를 바로잡는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다시 가능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은, 단순한 대체나 보충이 아닙니다. Abel은 체어리티 자체를 표상했고, 그는 Cain—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중심에 섰던 비극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체어리티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같은 방식으로 즉각 되돌려 놓지 않으시고, 새 질서로 다시 주셨습니다. 그 새 질서가 바로 셋으로 표상된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가 회복되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깊은 섭리가 드러납니다. 태고 교회처럼 사랑이 즉각적으로 살아나는 상태는 더 이상 인류에게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신앙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신앙의 자리를 ‘수단’으로 재배치하셨습니다. 셋은 아벨의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아벨이 다시 살 수 있도록 길을 여는 신앙입니다. 이로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경쟁이나 대체가 아니라, 질서 있는 협력으로 재정립됩니다.

 

또한 ‘다른 씨(seed)라는 표현은 교회의 보존과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씨는 즉각적인 열매가 아니라, 미래를 담은 시작입니다. 주님은 체어리티를 씨로 다시 주셔서, 시간이 지나 자라고 열매 맺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와 성장을 존중하는 방식이며, 동시에 체어리티가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하는 길입니다. 셋의 계보가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씨로 보존되어, 황폐의 시대를 지나 새 교회의 근간이 됩니다.

 

결국 AC.434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새 교회는 체어리티를 잃지 않았고, 다만 얻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사랑이 곧바로 지각되던 시대에서, 이제는 신앙을 통해 사랑에 이르는 시대로 전환되었습니다. 셋은 이 전환의 이름이며,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다시 주셨다는 은혜의 표지입니다. 이로써 말씀은 선언합니다. 체어리티는 제거될 수 없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살리기 위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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