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3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사랑도 없이는 생명이라는 게 있을 수도, 그리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음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합니다. 만일 사랑(loves), 같은 말이지만 욕망(desires)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것을 생생히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에도 어떤 생명과 기쁨의 모습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참된 사랑과는 전적으로 반대됩니다. 참된 사랑이란 사람이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그만큼 이웃을 미워하게 되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하게 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뿐이므로, 참된 생명도 하나뿐입니다. 그 하나의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참된 행복이 흘러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천국(heavens)의 천사들이 누리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It is in everyone’s power very well to know that no life is possible without some love, and that no joy is possible except that which flows from love. Such however as is the love, such is the life, and such the joy: 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 have in them some resemblance to life and to joy, but as they are altogether contrary to true love, which consists in a man’s loving the Lord above all things, and his neighbor as himself, it must be evident that they are not loves, but hatreds, for in proportion as anyone loves himself and the world, in the same proportion he hates his neighbor, and thereby the Lord. Wherefore true love is love to the Lord, and true life is the life of love from him, and true joy is the joy of that life. There can be but one true love, and therefore but one true life, whence flow true joys and true felicities, such as are those of the angels in the heavens.

 

해설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생명과 사랑의 관계를 매우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원리로 설명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사랑도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33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우리가 흔히 말하는 따뜻한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욕망(desires)을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며 그것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는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도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신이 실제로 생생하게 보았다고 덧붙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생각과 삶을 움직이는 더 깊은 곳에 사랑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먼저 생각하고 그다음 무엇을 사랑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AC.33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을 보여 줍니다. 어떤 것을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생각이 일어나고, 그 사랑에 따라 기쁨도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의 성질을 알려면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서 기쁨을 얻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나옵니다. 사랑이 생명을 움직인다고 해서 모든 사랑이 같은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도 ‘생명과 기쁨의 어떤 모양’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 세상의 것을 얻는 데서 강한 욕망과 활력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 큰 기쁨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것도 분명히 하나의 ‘살아 있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참된 사랑과 분명히 구별합니다. 참된 사랑은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게 되면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미워하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한다고까지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을 단순히 감정적으로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만으로 좁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3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지배적인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이웃과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삶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사랑처럼 보이고 기쁨과 생명까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참된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 구별 때문에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는 첫 문장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문제는 단순히 ‘나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사랑하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사랑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사랑의 성질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과 기쁨의 성질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을 하나의 근원으로 연결합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고, 참된 기쁨은 바로 그 생명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사랑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 사랑이 있는 것처럼 경험되지만, 그 사랑의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은 앞의 AC.30-32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AC.33은 이제 그 원리를 ‘생명과 기쁨’이라는 차원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3이 광명체 본문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사랑과 생명과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은 본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더 큰 광명체’라고 한 사랑이 왜 그렇게 중심적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지 신앙 옆에 놓이는 하나의 종교적 덕목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 사람을 지배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과 기쁨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천사들의 기쁨과 행복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이고, 따라서 참된 생명도 하나이며, 그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이 흘러나옵니다. 천사들의 기쁨과 행복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생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좋은 환경을 얻거나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데서 생기는 행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3은 우리에게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먼저 ‘무엇이 나를 살아 있게 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도 강렬한 활력과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활력이 있다는 사실이나 기쁨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참된 생명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분별의 기준은 사랑의 성질과 그 근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참된 사랑,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을 때 거기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도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AC.33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는 말로 밝히는 핵심입니다.

 

심화

1. 사랑을 제거하면 왜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

 

AC.33, 심화 1, 사랑을 제거하면 왜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

AC.33.심화1. 사랑을 제거하면 왜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위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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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광명체 본문에서 갑자기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을 말하는가?

 

AC.33, 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AC.33.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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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 없는 신앙은 빛이 아니다 : 생명을 가르는 광명체의 본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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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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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2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라 하고, 그다음에는 사랑을 ‘더 큰 광명체’(greater luminary), 신앙을 ‘더 작은 광명체’(lesser luminary)라 합니다. 또한 사랑을 가리켜서는 ‘낮을 다스린다’(rule by day) 하고, 신앙을 가리켜서는 ‘밤을 다스린다’(rule by night)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바로 아르카나(arcana)인데,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숨겨져 있는 것을 이제 제가 설명해도 좋다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가 있었습니다. 이 아르카나가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친히 예고하신 바와 같습니다. 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 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 luminary,” and faith a “lesser luminary”; 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 by 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 by night.” 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 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 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24:29) The sun shall be darkene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nd the stars shall fall from heaven, and the powers of the heavens shall be shaken (Matt. 24:29).

 

여기서 ‘해’(sun)는 사랑, 곧 어두워지는 사랑을, ‘달’(moon)은 신앙, 곧 빛을 내지 못하는 신앙을, ‘별들’(stars)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the knowledges of faith), 곧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을 뜻하며, 이것들이 바로 ‘하늘의 권능들’(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입니다. By the “sun” is here meant love, which is darkened; by the “moon” faith, which does not give light; 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 which fall from heaven, and which are the “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2]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어떤 신앙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떤 신앙도 알지 못합니다. 온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며,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습니다. 모든 천국의 행복이 여기에서 나오는데, 그 크기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어떤 인간의 생각으로도 결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랑과, 그 결과 모든 생명, 곧 사랑에서만 나오는 모든 생명과 모든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perceive). 그들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나 생명이나 행복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은 주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큰 광명체, 곧 ‘해’(sun)로도 표현되었습니다. 기록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 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 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 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 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 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 love the Lord from the heart, but yet know, declare, and perceive, that all love, 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 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 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2) His face did shine as the sun, and his raiment was white as the light (Matt. 17:2).

 

얼굴은 가장 안쪽의 것들을 뜻하고, 옷은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the Lord’s Divine)은 ‘해’(sun), 곧 사랑으로, 그의 인성(his human)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 곧 ‘빛’(light)으로 상징되었습니다. 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 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 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 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해설

AC.32는 넷째 날의 두 광명체를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앞의 AC.30-31에서 사랑과 신앙이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왜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더 작은 광명체’인지, 그리고 왜 이 사실이 자신의 시대에는 특별히 가려진 아르카나였는지를 설명합니다. 핵심은 사랑과 신앙이 서로 독립된 두 요소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하나의 질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 광명체들’이라고 부르지만, 곧 사랑을 ‘더 큰 광명체’, 신앙을 ‘더 작은 광명체’라고 구별합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고 신앙은 밤을 다스립니다. 여기서 크고 작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는 중요하고 다른 하나는 덜 중요하다는 가치 평가가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이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랑이 먼저이며 주된 것이라는 영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AC.30에서 이미 신앙의 마지막 단계가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이라고 설명한 것과 같은 흐름입니다.

 

이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AC.32에서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숨겨져 있던 아르카나’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설명합니다.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순서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얻기 때문에, 사랑이 사라지면 참된 신앙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아는 것 자체가 그 시대에는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24:29을 인용합니다. 여기서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의미를 직접 풀이합니다. ‘해’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어두워지고, ‘달’은 신앙이며 그 신앙이 빛을 내지 못하고, ‘별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며 그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가지고 별도의 복잡한 종말론적 도식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32에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해와 달과 별의 어두워짐이 사랑과 신앙과 신앙에 관한 지식이 무너지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태고교회의 언급은 이 마지막 시대와 정반대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어떤 신앙도 알지 못했다’고 말하며, 천적 천사들도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떤 신앙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역사에 속한 모든 사람이 끝까지 동일한 상태에 있었다거나, 태고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후에 천적 천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본래적인 천적 성격과 천적 천사들의 질서가 나란히 제시되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나아가 ‘온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사랑 자체를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곧이어 그는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모든 사랑과 모든 생명과 모든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고,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사랑이 참된 사랑인 이유는 천사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의 근원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29-31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초기에는 자기가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점차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AC.32의 천적 상태에서는 이것이 더욱 분명합니다. 천적 천사들은 자기에게서 사랑이나 생명이나 행복이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랑하지 않거나 수동적인 존재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 주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 사랑의 생명과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지각합니다.

 

마지막 변화산 사건은 이 모든 설명의 절정을 이룹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이 주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큰 광명체인 ‘해’로 표현되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고 옷은 빛처럼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굴이 가장 안쪽의 것들을 뜻하고, 옷은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은 ‘해’, 곧 사랑으로, 그의 인성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 곧 ‘빛’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여기서도 AC.32가 실제로 말한 만큼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변화산의 모든 세부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얼굴과 옷에 관한 전체 상응 체계를 이 자리에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본문에서 필요한 핵심은 하나입니다. 사랑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으며, 그것이 변화산에서 ‘해’라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1의 더 큰 광명체가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단순한 추상적 상징이 아니라 결국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AC.32의 중심은 ‘해 = 사랑, 달 = 신앙’이라는 대응표 자체보다 더 깊습니다. 사랑과 신앙은 둘이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조차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질서가 사라지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이 떨어지는 상태가 되고, 이 질서가 살아 있을 때에는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경우처럼 사랑 안에 신앙이 살아 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었고, 주님의 신적 자비로 다시 설명하도록 허락되었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입니다. (AC.32 해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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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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