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AC.52

 

사람이 영적일 동안에는, 그의 다스림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그러나 사람이 천적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시편에서 자신을, 그리고 그분의 모양인 천적 인간을 이렇게 묘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So long as man is spiritual,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as is here sai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and does good from love, then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as the Lord, in David, describes himself, and thereby also the celestial man, who is his likeness: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8:6-8) Thou madest him to have dominion over the works of thy hands; thou hast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the flock and all cattle, and also the beasts of the fields,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he fish of the sea, and whatsoever passeth through the paths of the seas (Ps. 8:6–8).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짐승(beasts)이 언급되고, 그다음에 (fowl), 그리고 그 뒤에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가 언급됩니다. 이는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영적 인간과 다릅니다.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에는 이해력과 신앙에 속한 물고기(fishes)(fowl)가 먼저 언급되고, 그다음에 짐승(beasts)이 언급됩니다. Here therefore “beasts” are first mentioned, and then “fowl,” and afterwards the “fish of the sea,” because the celestial man proceeds from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differing herein from the spiritual man, in describing whom “fishes” and “fowl” are first named, which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nd this to faith; and afterwards mention is made of “beasts.”

 

 

해설

 

이 글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다스림의 방향’이라는 관점에서 아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두 사람 모두 다스림을 받으며, 또한 다스림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 다스림이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향하는가’가 전혀 다릅니다. 이 차이가 바로 형상과 모양, 영적 상태와 천적 상태를 가르는 핵심 기준입니다.

 

영적 인간은 아직 겉 사람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이해력과 신앙을 통해 삶을 정돈해 갑니다. 그래서 먼저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다음에 사랑과 행위가 뒤따릅니다. 이 구조에서는 이해력에 속한 것들이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짐승’, 곧 의지와 애정의 영역이 나옵니다. 이 다스림은 위로 올라가려는 다스림이며, 질서를 세워 가는 다스림입니다.

 

그러나 이 다스림의 방향은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겉 사람에서 출발한다는 말은, 여전히 외적 사고와 분별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상태도 거듭남의 실제적이고 필수적인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를 낮추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다스림의 방향이 완전히 바뀝니다. 이제는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다스림이 흘러갑니다.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을 묘사할 때는 ‘짐승’, 곧 애정과 사랑의 영역이 가장 먼저 언급됩니다. 그다음에 ‘’, 그리고 마지막에 ‘물고기’가 나옵니다. 이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모든 것을 이끌고, 이해력과 지식은 그 사랑을 섬기는 위치에 놓였음을 뜻합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의 다스림이 ‘강압이나 통제가 아니라 질서’라는 사실입니다. 시편에서 말하듯, 만물이 ‘발 아래’ 놓인다는 표현은 억압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가장 낮은 것들까지도 사랑의 질서 안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즉 감각, 습관, 기억, 일상의 행동까지도 사랑에서 흘러나온 방향에 맞게 움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통해 인간 삶의 근본 구조를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은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묻고, 천적 인간은 ‘무엇이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가’를 살아냅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에게는 분별과 훈련이 중요하고, 천적 인간에게는 일치와 평안이 특징이 됩니다.

 

결국 이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스림의 완성은, 이해력이 의지를 다스리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이 이해력을 밝히고 인도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닮음’, 곧 ‘모양’의 상태이며, 주님의 형상이 인간 안에서 가장 깊이 실현된 모습입니다.  

 

 

심화

 

1.8:6-8

 

 

AC.52, 심화 1, ‘시8:6-8’

AC.52.심화 1. ‘시8:6-8’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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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을 설명해 주세요. 특히 ‘천적’이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영적’이라는 표현은 익숙한데, ‘천적’이라는 표현은 낯설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는 ‘무엇을 중심으로 사는가’의 차이이며, ‘천적’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늘에 속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의지)이 직접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매우 깊은 개념입니다. 즉, ‘영적 인간’은 진리(이해)를 통해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선(사랑, 의지) 자체로 주님과 직접 결합된 사람입니다.

 

먼저 ‘영적 인간’부터 보겠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해가 먼저 열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듣고, ‘이게 옳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를 먼저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깨달은 진리를 따라 살려고 노력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구조’입니다. 처음에는 의무처럼, 혹은 옳기 때문에 따르다가, 점점 그것이 삶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은 ‘진리 → 삶 → 선’의 흐름을 갖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여전히 생각과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이게 맞는가?’, ‘이렇게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따집니다. 그래서 때로는 갈등도 많고, 선택의 싸움도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점점 질서가 세워지고, 결국 선한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이제 ‘천적 인간’을 보겠습니다. 천적 인간은 이와 정반대의 구조를 가집니다. 이 사람은 ‘사랑이 먼저’입니다. 즉, 무엇이 옳은지를 따지기 전에, 이미 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이게 맞나?’ 고민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옳은 것을 선택합니다. 다시 말해, ‘선 → 삶 → 진리’의 흐름입니다.

 

여기서 ‘천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천적’은 단순히 ‘하늘 같은’이 아니라, ‘천국의 가장 깊은 층위에 속한 상태’, 곧 ‘주님에 대한 사랑이 직접적으로 의지에 심겨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선을 ‘배워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행합니다. 진리는 그 사랑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차이를 아주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게 옳으니까 해야 한다’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힘들고, 갈등도 있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이게 좋다, 이것이 사랑스럽다’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같은 행동을 해도, 그 안에는 억지가 아니라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퍼셉션(perception)이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무엇이 선한지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느끼고 아는 상태’입니다. 반면 영적 인간은 ‘양심(conscience)’을 통해 살아갑니다. 즉, 배운 진리와 원칙에 따라 판단하고 선택하는 상태입니다.

 

이제 왜 ‘천적’이라는 표현이 낯설게 느껴지는지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영적 인간’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영적’이라는 표현은 익숙합니다. 그러나 ‘천적’은 그보다 더 깊은 상태, 곧 ‘이미 사랑이 중심이 된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AC의 흐름에서 보면, 태고교회가 바로 이 ‘천적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따로 배우기 전에, 이미 선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님과 연결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인간은 이 상태를 잃고, ‘영적 인간’의 길, 곧 진리를 통해 다시 올라가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선 자체로 주님과 직접 연결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천적’이라는 표현은 ‘천국의 가장 깊은 차원에 속한 사랑의 상태’, 곧 ‘의지 자체가 주님과 결합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영적 인간은 ‘옳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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