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42.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가 그것들의 성질(quality)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며, 그가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 성질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이름을 주는 게 왜 성질(quality)을 아는’ 건가요?
스베덴보리에게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label)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본성과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이름을 안다’, ‘이름을 부른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를 붙이는 행위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떤 성질(quality)을 가지고 있는지를 분별하고 지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름을 거의 임의적 기호처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철수’, ‘영희’라는 이름 자체에는 본질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 특히 말씀의 상응 구조 안에서는 이름이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습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성격, 기능, 상태, 역할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존재를 안다’는 뜻이 됩니다.
이 점은 성경 전체에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단순 개명이 아니라, 존재 상태의 변화입니다. 또 주님께서 ‘내가 너를 이름으로 안다’고 하실 때도, 단순히 호적상 이름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과 상태 전체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142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사자’, ‘말’, ‘양’ 같은 단어를 붙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동물들이 인간 안의 애정들과 성향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아담이 이름을 준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애정과 성향들의 본질과 질서를 분별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름을 준다 = 성질을 안다’는 연결은, 이름이 곧 그 존재의 quality를 표현한다고 보는 성경적, 상응적 사고에서 나옵니다.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는 영적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AC.142의 흐름 속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은 아직 퍼셉션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 안에 들어오는 애정들과 성향들을 즉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감정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본성과 방향을 압니다. 바로 이 상태를 ‘이름을 준다’는 행위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여기서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명칭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나 성향의 본질과 상태, 곧 quality를 지각하고 분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성질을 드러내는 영적 표현입니다.
AC.142, 창2:19-20, ‘이름을 주었으나 여전히 기울어지는’(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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