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44-146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창2:19-20)
144. ‘이름으로 부르다’가 to call by name ‘퀄러티 파악하기’를 to know the quality 상징한다고 하는 이유는 고대인들이 the ancients 어떤 것의 에센스를 the essence of a thing ‘이름’을 가지고 이해했기 때문이며, ‘이름을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를 가지고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퀄러티 파악하기’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기의 아들, 딸들의 이름을 어떤 사물의 상징을 따라 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 주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입니다. 모든 이름은 그 이름 안에 뭔가 고유한 것이 들어 있었고, every name had something peculiar in it,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from which, and by which, 그들 자녀의 뿌리와 본성을 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 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작업을 하다가 나중에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알게 되겠지만, 우리는 앞으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이름들에는 그 이름으로 명명된 것들의 원천과 퀄러티가 들어 있다는 것 the names implied 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 말고는 ‘이름으로 부르다’라는 표현 안에 무슨 다른 건 없습니다. nothing else was understood by calling by name 이것이 그들 가운데 일상 언어생활 모드였습니다. 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그러나 이걸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이름들에 의해 그런 것들이 상징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혼란스러워 할 것입니다.
145. 말씀에서도 역시 ‘이름’을 가지고 어떤 것의 에센스를 상징했고, 그것의 퀄러티 파악하는 것을 ‘이름을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를 가지고 상징했습니다. 이사야입니다.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사45:3-4)
이 구절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과 ‘칭호를 주는 것’은 to call by name and to surname 퀄러티를 미리 아는 것을 to foreknow the quality 상징합니다. 다시,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사62:2)
여기서는 전후 구절들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캐릭터가 될 것을 to become of another character 상징하고 있습니다. 다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이 말씀은 주께서 이스라엘의 퀄러티를 아심을 he knew their quality 가리킵니다. 다시 같은 선지서에서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40:26)
이 역시 주님은 그 모든 만물을 아심을 he knew them all 의미합니다. 계시록입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4-5)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8)
이 구절들에서 ‘이름들’은 단순히 이름들을 의미하는 게 절대 아니고, are by no means meant names 대신 퀄러티들을 의미합니다. 천국에서는 어떤 사람도 지상에서 그가 사용하던 이름이 아닌, 그 사람의 퀄러티로만 알려집니다. nor is the name of anyone ever known in heaven, but his quality.
146. 지금까지 다룬 내용들을 가지고, 그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연결을 해봅니다.
18절에,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고, 그리고 지금 ‘짐승들’과 ‘새들’을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반복하십니다.
이 전체적인 상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비록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 곧 선에 관한 애정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관해 자기 자신의 퀄리티를 알도록 허락을 받았어도, 즉, 사람은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 자신의 어떠함을 가늠할 수 있는 참 황송한 대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것(own)을 향해 기울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지요. 우리는 주님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으면서도 늘 주님의 것보다는 우리 자신의 것에 시선을 향하며 참 철딱서니 없이들 살고 있으니까요... 아담처럼 이렇게 자신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 디자이어하는(to desire) 사람들은, 본의 아닐지는 모르지만 주님의 것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좀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경멸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지요. 분명한 건, 이런 모습, 이런 인간 실존이야말로 정말 인간의 비참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참으로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면 인간은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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