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160. ‘부모를 떠나는 것’은 속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겉을 품고 낳는 것은 속이기 때문입니다. To “leave father and mother” is to recede from the internal man, for it is the internal whi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the external;
‘그의 아내와 합하는 것’은 속이 겉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to “cleave unto his wife” is that the internal may be in the external;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그들이 거기서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to “be one flesh,” that they are there together;
앞서는 속사람과 속으로 말미암은 겉이 영이었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그들은 육이 되었습니다.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천적, 영적 생명은 그 own과 하나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own 곁에 있게 되었습니다.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161. 이들 태고교회의 후손은 악하지는 않았고, 여전히 선했습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그들은 겉사람으로나 자신들의 own으로 살아가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그들에게 주님에 의해 허락된 것입니다.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하지만 자비롭게도 영적, 천적인 것은 그 안에 소리 없이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what is spiritual celestial, however, 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속과 겉이 어떻게 하나로 움직이는 것일까, 어떻게 그들은 하나로 보이는 걸까 하는 것은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인플럭스(influx, 入流)를 모르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이것을 좀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 어떤 행위를 하나 보면,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어떤 행위가 그 안에 이웃사랑, 즉 사랑과 신앙이 없으면,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이 안 계시면, 그 행위는 이웃사랑의 일이라고, 신앙의 열매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162. 진리와 옳음에 관한 모든 법들은 천적 기원들로부터, 천적 인간이라는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옵니다. 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천국 전체가 천적 인간인데, 그것은 주님 홀로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천국의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모든 것 되시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천적이다’ 하는 것입니다.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 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 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모든 진리와 옳음의 법이 천적 기원들로부터, 천적 인간이라는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결혼들에 관한 법도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내려옵니다.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지상의 모든 결혼들은 그 기원을 반드시 천적 결혼, 혹은 천국의 결혼에 두어야 하며, 또한 따라야 합니다. It is the celestial (or heavenly) 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
이 결혼은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 혹은 주님이 머리이신 하나의 교회와 같은 그런 것입니다. 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 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이런 기원을 가진 결혼들에 관한 법은 그래서 한 남편에게는 한 아내여야 한다는 것이며, 그 결혼들이 천적 결혼임을 이런 케이스로 표현할 때, 그 결혼들은 천적 인간의 전형이 됩니다.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 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 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이 법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다 잘 아는 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속사람한테는 아예 심비(心碑)에 기록되기까지 한 법이었고, 그래서 그 시대에는 한 남자에 반드시 한 아내요, 그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이 탄생하곤 하였습니다.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 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 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더 이상 속사람 되기를 중단, 겉사람이 되었을 때, 그들은 아내들을 여럿 두었습니다.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 and became external, 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들의 결혼으로 천적 결혼을 표현하였기 때문에, 결혼애를 통해 그들은 천국과도 같은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기울어졌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결혼애로 인한 그 어떠한 행복도 지각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숫자로 만족해야 했는데, 겉 사람의 기쁨이라는 것은 그저 이런 종류의 만족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 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 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 but in pleasure from a number, 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이것을 주께서는 ‘마음의 완악함’이라 하신 것이며, 이런 이유로 모세가 그들에게 여러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라고 친히 가르치십니다. This is called by the Lord “hardness of heart,” 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 as the Lord himself teaches:
5...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For the hardness of your heart Moses wrote you this precept,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막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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