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492. 여기 ‘’(days)과 ‘’(years, 세)는 위에서처럼 때(횟수)와 상태를, ‘사람의 죽음’은 그런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각각 상징합니다. 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 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493. ‘’과 ‘’가 때(혹은 횟수)와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언급 말고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지 싶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는 실제 수량을 나타내는 숫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숫자들이 그 고유 본성의 끝단, 곧 일상에 필요한 하나하나의 수량을 나타내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면, 달걀 한 판에 얼마, 수도세, 전기세 얼마 등등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는, 이 숫자들이 그 수량에 맞춰 어떤 추상적 상징을 갖습니다. 예를 들면,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20:9),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8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10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레25:8, 10),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주님의 열두 제자, 칠십 인의 장로들, 그리고 주님의 칠십 인의 제자들 및 다른 많은 경우들 모두, 이렇게 구체적 숫자가 적용되었을 때 어떤 특별한 추상적 상징들을 갖게 되는데, 그렇게 갖게 된 추상적 상징이 바로 그 숫자가 상징하는 상태입니다. That by “days” and “year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needs no further explication, except to say that in the world there must needs be times and measures, to which numbers may be applied because they are in the ultimates of nature; but whenever they are applied in the Word, the numbers of the days and years, and also of the measures, have a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imes and measures, in accordance with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as where it is said that there are six days of labor, and that the seventh is holy, of which above; that the jubilee should be proclaimed every forty-ninth year, and should be celebrated in the fiftieth; that the tribes of Israel were twelve, and the apostles of the Lord the same; that there were seventy elders, and as many disciples of the Lord;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where the numbers have a special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and when thus abstracted, then it is states that are signified by the numbers.

 

 

494. 그가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런 퍼셉션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라는 뜻임은 ‘죽다’라는 단어의 상징, 즉, 어떤 것이 이전 상태에 더 이상 있기를 멈추다라는 의미임을 볼 때 분명합니다. That he “died” signifies that there was no longer such percep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die,” which is, that a thing ceases to be such as it has been.

 

요한계시록입니다. Thus in John: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ardis write, These things saith he that hath the seven spirits, and the seven stars; I know thy works, that thou art said to live, but art dead; be watchful, and strengthen the things which remain, that are ready to die; for I have not found thy works perfect before God. (계3:1-2)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I will cast out thy mother that bare thee, into another country where ye were not begotten, and there shall ye die, (렘22:26)

 

여기 ‘어머니’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where “mother” signifies the church.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이 교회의 경우, 처음 상태, 정말 깨끗했던 온전함이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고, 퇴색되며, 잃어갔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악의 세습 및 증가였는데, 역대 모든 부모마다 자기가 타고난 악에다 새로운 악을 더했기 때문입니다. For as we have said, the case with the church is that it decreases and degenerates, and loses its pristine integrity, chiefly by reason of the increase of hereditary evil, for every succeeding parent adds new evil to that which he has inherited.

 

부모의 모든 실제적 악은 일종의 본성을 옷 입습니다. 그리고는 종종 재발 시, 그들의 본성이 되고, 그렇게 그들의 유전 악에 더해집니다. 이런 식으로, 자녀들에게 전이되고, 그렇게 후손에게 전해집니다. All the actual evil in the parents puts on a kind of nature, and when it often recurs, becomes natural to them, and is added to their hereditary evil, and is transmitted into their children, and so to posterity.

 

이런 식으로, 유전 악은 후손들에 이르러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In this way the hereditary evil is immensely increased in the descendants.

 

이것이 그렇다는 것은 아이들의 악한 기질이 정확히 그들의 조상의 것과 똑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is so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vil dispositions of children are exactly like those of their progenitors.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이식되어 유전되어 온 악 외에 다른 유전 악은 없다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완전 거짓입니다. (cf. AC.313) Quite false is the opinion of those who think that there is no hereditary evil except that which they allege to have been implanted in us from Adam (see n. 313).

 

진실은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죄를 실제로 지어 유전 악을 만들며, 그걸 자기가 물려받은 악에다 보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악은 모든 후손들 가운데 축적되며, 남습니다.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한테서만 줄어드는 거 빼고 말입니다. The truth is that everyone makes hereditary evil by his own actual sins, and adds it to the evils that he has inherited, and in this way it accumulates, and remains in all the descendants, nor is it abated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모든 교회마다 이것이 타락, 퇴보의 첫째 원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태고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In every church this is the principal cause of degeneration, and it was so in the most ancient church.

 

 

495. 태고 교회가 어떻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태고 교회는 퍼셉션이 있었던 교회였고, 오늘날엔 그런 교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How the most ancient church decreased cannot appear unless it be known what perception is, for it was a perceptive church, such as at this day does not exist.

 

한 교회의 퍼셉션은 이런 것으로 구성됩니다. 곧, 그 교회의 구성원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마치 천사들처럼 선악을 구별합니다. 이 선악은, 사람들 사는 시민 사회의 선악과 같은 것이 아니고, 주님 사랑과 주님 신앙에 속한 선악을 말합니다. The perception of a church consists in this, that its members perceive from the Lord what is good and true, like the angels; not so much what the good and truth of civic society is, but the good and truth of love to the Lord and of faith in him.

 

생활로 확인되는 신앙고백을 통해 퍼셉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From 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 it can be seen what perception is, and whether it has any existence.

2021-07-05(D2)-매일예배(AC.492-495, 창5,5), '구백삼십 세, 살고 죽었다'.hwp
0.07MB

https://youtu.be/QeqagC_i7nE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