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7.심화

2.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 하는가?

 

 AC.37 본문에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없고,  나아가 퍼셉션,  지각될 수도 없습니다.(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진술은  놀랍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천국은,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 삶이  행복, 만수무강하게  ,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알기 때문이지요...

 

 

AC.37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영적·천적인 것들에 교대(alternations) 다양함(varieties)이 있으며, 만일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결국 생명이 전혀 없게 된다고 합니다. 변화가 없으면 단조롭다는 말까지는 쉽게 이해되는데, 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이 없다고까지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기서 말하는 단조롭다는 것을 단순히 지루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원문은 `uniform`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한결같아서 차이와 변화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재미가 없으니 생명이 아니다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에는 본래 상태의 차이와 다양함이 있다는 훨씬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AC.37은 그 이유를 바로 이어서 어느 정도 설명해 줍니다.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선과 진리가 분별되거나 구별될  없고,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가 왜 교대와 다양함을 생명과 연결하는지 중요한 실마리를 얻습니다.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은 선과 진리가 아무런 차이 없이 하나의 평평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분별하고 구별하며 퍼셉션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생명을 생각하면 이해에 조금 도움이 됩니다. 하루에도 빛의 상태가 달라지고, 한 해에도 열과 빛이 달라집니다. 봄의 자연과 한여름의 자연, 가을과 겨울의 자연은 서로 다릅니다. 바로 그 변화 속에서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다시 새로운 때를 준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AC.37에서 자연계의 날과 해의 교대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에 비유하는 이유를 이런 모습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나쁜 상태를 겪어야 한다고 결론 내리면 안 됩니다. AC.37이 말하는 교대와 다양함은 곧바로 선과 악의 반복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를 말합니다. 따라서 악에 빠지는 것 자체가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거나, 신앙이 무너지고 사랑이 식어야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입니다.

 

차이가 있어야 선을   있으니 악을 경험해야 선을 안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37은 악을 경험해야만 선을 퍼셉션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선과 진리가 분별되고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양함 을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생명도 교대가 있다는 뜻일까요? AC.37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교대가 있다고 말하므로, 적어도 영적 생명을 언제나 똑같은 강도의 빛과 사랑과 기쁨이 끝없이 지속되는 정지된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다만 천국에서 그 교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험되는지는 AC.37의 설명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 문제는 스베덴보리가 천국의 상태 변화를 직접 다루는 다른 글들과 함께 살펴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완전함에 대한 생각도 조금 바꾸어 줍니다. 우리는 완전한 영적 상태라면 아무런 변화도 없이 항상 최고조의 사랑과 빛 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37은 영적·천적 생명 자체에 교대와 다양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변화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곧 불완전함이나 실패의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변화를 주님께서 주신 좋은 변화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실제 삶에는 자기 사랑 때문에 생기는 후퇴도 있고, 잘못된 선택의 결과도 있으며,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상태도 있기 때문입니다. AC.37 교대를 이런 모든 상태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면 오히려 자신의 악을 영적 성장 과정으로 합리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가장 안전하게 붙들 수 있는 것은 생명은 획일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생명에는 다양한 상태가 있고, 그 상태들은 서로 구별되며, 바로 그 안에서 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되고 퍼셉션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살아 있는 다양함을 자연계의 날과 해, 빛과 열의 변화에 비유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7 결국 생명이 전혀 없게 된다는 표현도 조금 이해됩니다. 생명은 단순히 어떤 좋은 상태 하나를 얻은 뒤 그것을 영원히 얼려 놓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것은 다양한 상태를 가지며, 그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구별되고 퍼셉션됩니다. 적어도 AC.37이 보여 주는 영적 생명은 변화 없는 정지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을 가진 생명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을 바라볼 때도 이 원리는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내적 상태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변화를 무조건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러 상태 가운데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주님 앞에서 더욱 분명히 분별해 가는 것입니다.

 

결국 AC.37이 말하는 교대와 다양함은 영적 생명이 죽은 평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놀랍게도 바로 그 다양함 속에서 선과 진리가 분별되고 구별되며 퍼셉션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변화가 있으니 생명이 있다는 단순한 말보다, ‘살아 있는 영적 생명에는 선과 진리가 퍼셉션될  있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AC.37의 뜻에 더 가깝겠습니다.

 

 

 

AC.37, 창1:14-17, ‘영적 생명의 리듬 : 낮과 밤, 계절처럼 반복되는 거듭남의 질서’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AC.37, 심화 1,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AC.37.심화 1.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위 AC.37 본문에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7.심화

1. 징조(signs), 계절(seasons), (days), (years)

 

 AC.37 본문에   속에는 지금 당장  펼쳐 보일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의  역량과 상태가, 펼쳐 보여도 아직은 이해할  없는, 감당할  없는 역량이어서 그런  같은데... 그럼에도 혹시 한두 가지만  보여 주실  있나요?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말씀과,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라는 8:22 말씀을   와닿게 이해하고 싶어서입니다.

 

 

1:14에는 징조(signs), ‘계절(seasons), ‘(days), ‘(years)라는 네 표현이 한꺼번에 나옵니다. AC를 읽는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궁금해집니다. ‘그렇다면 징조는 무엇을 뜻하고, 계절은 무엇이며, 날과 해는 각각 어떤 영적 상태를 뜻할까?

 

그런데 뜻밖에도 AC.37은 이 네 단어를 하나씩 풀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현재로서는 말할  있는 것보다  많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네 단어의 개별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존재하는 교대(alternations) 다양함(varieties)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AC.37을 읽으면서 징조는 이것, 계절은 이것, 날은 이것, 해는 이것이라는 네 개의 고정된 정의를 당장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먼저 이 네 표현을 이해하기 위한 더 큰 배경을 보여 줍니다. 영적 생명에는 상태의 변화가 있으며, 그 변화는 자연계에서 날과 해가 변하는 모습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아침, , 저녁, 밤이 교대하고, , 여름, 가을, 겨울이 교대합니다. 그에 따라 빛과 열이 달라지고 자연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인 것들에도 이와 같은 교대가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영적 상태가 자연계의 하루나 계절과 정확히 같은 시간표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의 변화가 영적 상태의 변화를 이해하도록 보여 주는 상응적 모습이라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는 각각 짧은 영적 주기와 긴 영적 주기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해를 돕는 하나의 추측이나 비유로는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AC.37이 그렇게 정의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이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가 날과 해의 교대에 비유된다는 데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정도의 경계를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계절 역시 곧바로 하나의 영적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는 정해진 시점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계에서 계절이 변화와 교대를 보여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AC.37 `seasons`의 속뜻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지금 말할  있는 것보다  많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한 이상, 오히려 독자가 성급하게 하나의 뜻으로 고정하지 않는 것이 본문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징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내가 현재 어느 영적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 주는 표시라고 설명하면 이해하기는 쉽지만, 그것 역시 AC.37의 직접적인 정의는 아닙니다. 더구나 성경에서 징조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으므로, 1:14 `signs`를 하나의 심리적인 자기진단 표지로 좁혀 버리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AC.37은 왜 굳이 징조와 계절과 날과 를 언급하면서 그 뜻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AC를 읽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한 글에서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표현을 먼저 제시하고 그 의미의 큰 틀만 보여 준 뒤, 말씀의 다른 부분에 이르러 다시 돌아와 더 깊이 설명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AC.37 마지막에서 그는 이 주제가 창8:22에서 다시 다루어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지금 AC.37에서 모든 세부를 확정하기보다, 앞으로 말씀의 다른 곳에서 같은 주제가 어떻게 다시 펼쳐지는지를 기다리는 것이 AC를 읽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AC.37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중요한 원리를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영적 생명은 하나의 상태에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런 변화가 없으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생명이라 할 만한 것이 없고, 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원리를 먼저 붙들면 징조와 계절과 날과 를 성급하게 네 개의 공식으로 외우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이 네 표현 전체가 우리에게 영적 생명에는 상태와 상태의 변화가 있다는 더 큰 세계를 열어 주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를 처음 읽을 때 이런 미완성된 설명을 만나면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 여기서 정확히 뜻을 말해 주지 않지?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말씀의 속뜻은 하나의 단어에 하나의 뜻을 붙인 사전처럼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표현들이 말씀의 여러 곳에서 다시 나타나고 서로 연결되면서 점차 더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AC.37에서 징조, 계절, , 의 뜻을 묻는 가장 안전한 답은 이렇습니다. 이 네 표현에는 많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아직 그것들을 각각 상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지금 그가 먼저 가르치는 것은 영적·천적 생명에 교대와 다양함이 있으며, 그것이 자연계의 날과 해의 변화에 비유된다는 사실입니다. 세부적인 뜻을 서둘러 채우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앞으로 그것을 어떻게 펼쳐 가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AC.37, 심화 2, ‘삶은 단조로워지고’

AC.37.심화 2. ‘삶은 단조로워지고’ 위 AC.37 본문에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bygrace.kr

 

AC.37, 창1:14-17, ‘영적 생명의 리듬 : 낮과 밤, 계절처럼 반복되는 거듭남의 질서’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6.심화

2.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나오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22:37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생각해 보면 질문이 생깁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단순히 하나님을 아주 많이 사랑하라는 강조의 반복일까요, 아니면 각각의 말에 서로 다른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일까요?

 

AC.36 자체는 마음’, ‘목숨’, ‘을 각각 따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들을 곧바로 마음=의지, 목숨=행위, =이해라고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 구절에서 AC.36이 직접 붙드는 핵심은 훨씬 분명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며,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으면 신앙 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장 평범한 의미에서 이 말씀을 읽어도 충분히 깊습니다. ‘마음을 다하여는 내 사랑과 애정에서, ‘목숨을 다하여는 내 생명과 삶에서, ‘뜻을 다하여는 내 생각과 이해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스베덴보리가 AC.36에서 각각 그렇게 정의했다고 말하기보다,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 본 설명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쉽게 말하면  삶의  부분만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예배드릴 때의 마음만 주님께 드리고 나머지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며,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 선택과 행동에서는 전혀 다른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과 생각과 삶 전체가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 영역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것을 마음으로 아끼고, 자주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시간과 힘을 사용하고, 중요한 선택을 할 때도 그것을 고려합니다. 물론 주님 사랑을 인간적인 애착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지만, ‘ 존재를 다하여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에는 이런 예가 도움이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결국 삶의 여러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을 다하여라는 말씀은 내가 실제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은 입으로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무엇을 잃을까 가장 두려워하며, 무엇을 얻기 위해 가장 많은 것을 희생하는지를 보면 자기 사랑의 방향이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주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삶의 중심에 두는 것과 연결됩니다.

 

목숨을 다하여라는 말씀은 그 사랑이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은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AC.36이 신앙을 단순한 앎과 인정에 두지 않고 교리가 가르치는 것에 대한 순종까지 말하는 것도 이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이 삶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AC.36이 말하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뜻을 다하여라는 말씀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이해도 주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생각하지 않는 맹목적인 열정이 아닙니다. 무엇이 참인지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며,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진리 앞에서 살피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사랑은 감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참이라고 받아들이며 어떤 기준으로 생각하는가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세 표현을 지나치게 분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막12:30에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AC.36도 바로 이 구절을 함께 인용합니다. 만일 마음, 목숨,  각각을 인간의 세 가지 고정된 기능에 정확히 대응시킨다면 막12의 네 번째 표현인 을 다시 어디에 대응시켜야 하는지 문제가 생깁니다. 오히려 이런 여러 표현이 함께 사용되는 것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부를 강조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를 가장 쉽게 풀면 너의 존재와  전체로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 생각하는 것, 원하는 것, 선택하는 것, 행하는 것 가운데 어느 한 영역만 따로 떼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든 순간에 주님만 생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일하고, 가족을 돌보고, 쉬고,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며 자연계의 수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일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전체가 어떤 사랑의 지배를 받고 있느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의 정상적인 삶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속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선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 합니다.

 

그리고 AC.36은 이 주님 사랑을 이웃 사랑과 떼어 놓지 않습니다. 주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전혀 없다면, 바로 다음 계명과 분리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두 계명으로 함께 말씀하셨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십시오라는 감정적 권면보다 훨씬 깊습니다. ‘당신의  가운데 주님과 무관한 영역을 따로 만들어 놓지 마십시오라는 요청으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랑도, 생각도, 선택도, 실제 삶도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선과 진리를 향하게 하는 것, 이것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라는 말씀을 우리의 삶 가까이에서 이해하는 한 방법입니다.

 

다만 다시 한 번 구별할 것은, 이러한 설명이 AC.36에서 마음은 이것, 목숨은 이것, 뜻은 이것이라고 각각 속뜻을 규정한 결과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AC.36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신앙의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중심을 놓치지 않는 범위에서 이 익숙한 말씀을 나의 일부가 아니라 나의  존재와 삶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AC.36, 창1:14-17, '신앙은 순종이다 : 사랑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