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 본문,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말인데요,  ,  Arcana Coelestia 작성 시기가 1749-1756임을 생각하면, 지금은 2026년이니 대략 270년이 흘렀어요. 세대의 종말 이렇게 길게 몇백 년씩 계속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랑이 ‘ 광명체’이고 신앙이 ‘ 작은 광명체’라는 아르카나가 특별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감추어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Arcana Coelestia’가 18세기 중엽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때가 ‘세대의 종말’이었다면,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떻게 세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세상의 종말’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AC.32에서 이 표현은 바로 이어지는 설명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는 ‘이때에는 사랑이 없고, 따라서 신앙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뒤 마24:29의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해는 사랑, 달은 신앙, 별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세대의 종말’은 지구가 사라지거나 인류 역사가 끝나는 물리적 종말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영적 종말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AC.32를 읽을 때 ‘스베덴보리가 18세기에 세계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예측이 빗나갔다’고 이해하면 그의 말뜻을 놓치게 됩니다. 그가 말하는 종말은 자연계의 시간표에 따른 지구의 파괴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그래도 종말이라면 언젠가는 끝나야 하지 않는가? 18세기의 종말을 21세기인 지금까지 계속되는 상태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여기서는 오히려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2가 기록되던 당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그 교회의 종말 상태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기 저작에서는 그 뒤에 일어난 사건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최후의 심판은 자연계에서 지구가 불타 없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입니다. 그는 그 최후의 심판이 1757년에 영계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의 저작 전체의 시간 흐름을 따르면, AC.32의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라는 말은 수백 년 동안 끝없이 계속되는 종말을 뜻한다고 볼 필요가 없습니다. AC가 기록되던 시기는 그가 말하는 종말의 국면에 있었고, 이후 최후의 심판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을 거쳐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갔다고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종말’의 의미도 조금 더 정확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한 교회의 종말은 달력상의 어느 날 교회 조직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외적인 형태와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당도 있고, 성경도 읽고, 교리도 가르치며,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계속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내적인 생명,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참된 신앙이 소멸되면 그 교회는 내적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습니다.

 

AC.32가 바로 이 점을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므로 신앙도 없고, 그 상태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으로 말씀에 표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대의 종말’은 먼저 이러한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지상에 여전히 기독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종말’과 모순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교회론에서 어떤 교회의 영적 종말과 그 교회에 속한 외적인 조직들의 역사적 존속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기존 교회 안에 속해 있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개인에게 사랑과 신앙이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보편적인 상태에 대한 판단과 개개인의 영적 상태에 대한 판단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회의 종말’이라는 말을 듣고 오늘날의 모든 기독교인과 모든 교회를 일괄적으로 영적으로 죽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시대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지상에서 특정 교단에 속한 모든 개인의 내면을 한꺼번에 판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는 그가 어떤 이름의 교회에 속했느냐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또한 새 교회의 시작 역시 기존 교회 조직들이 어느 날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조직 하나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새 교회의 핵심은 새로운 교리적 빛과 주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가 다시 세워지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영계에서 이루어진 최후의 심판과 지상에서 새로운 교회의 진리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확산되는 과정 역시 구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2의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라는 표현 때문에 ‘ 종말이 270 동안 계속되고 있는가?’라고 물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 문장의 ‘지금’은 우선 AC.32가 기록되던 당시의 ‘지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기독교회의 내적 상태를 종말로 보았고, 이후 자신의 저작에서 1757년 영계에서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AC.32의 한 문장만을 떼어 18세기의 ‘종말’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연장하기보다, 그의 저작 전체에서 이어지는 계시의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AC.32의 본래 주제로 다시 돌아가게 합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세대의 종말’을 여기서 언급했을까요? 종말론 자체를 자세히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사랑과 신앙의 참된 관계가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무엇인지도 알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는 사랑이고 달은 신앙이다’라는 단순해 보이는 상응 안에 당시에는 감추어진 하나의 아르카나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AC.32에서 ‘세대의 종말’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언제 지구가 끝나는가?’가 아니라 ‘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어떤 상태에 이르렀는가?’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 자신의 저작 흐름을 따르면, AC가 기록되던 종말의 시대에서 1757년의 최후의 심판을 거쳐 새 교회가 시작되는 새로운 국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18세기의 ‘세대의 종말’을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하나의 긴 종말 기간으로 늘여 설명하기보다, 당시의 영적 상태와 그 이후에 이어진 사건들을 구별하여 읽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AC.32, 심화 2, ‘아르카나,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AC.32.심화 2. ‘아르카나, 세대의 종말, 사랑도 신앙도 거의 없는’ 위 AC.32 본문, ‘이 아르카나가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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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다 : 마지막 시대에 드러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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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있었을까?

 

 AC.31 [3]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키고자 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이 규례의 상응, 상징, 그 내적 의미는 몰랐다고 어디서 읽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요?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출27:20-21에는 순수한 감람유를 가져다가 등불을 켜고 회막 안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것을 보살피도록 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등불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로 지켰지만, 그 규례가 표상하는 천국의 내적 의미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하는 행위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행위를 통하여 거룩한 것을 표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표상’과 ‘ 표상을 행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자신도 그 거룩한 상태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제사,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 직무와 의복 등은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표상의 거룩함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깊은 영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느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제도와 말씀에 부여하신 표상적 질서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제사장이 등불의 내적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해서 등불의 표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 제물과 제단과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표상의 의미는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표상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의미를 몰라야 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를 아는 것 자체가 표상을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더 오래된 교회들에서는 자연계의 사물들이 무엇을 상응하고 표상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해야 표상이 가능하다’는 것이 영적 원리는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특별한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많은 사람이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강하게 기울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율법과 규례를 주셨고, 그 외적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질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정해진 규례를 수행하는 동안 그 외적 행위는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미를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지킬 있었는가?’라는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명령의 모든 깊은 의미를 알아야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외적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의 무지를 그 자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표상 교회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그 자체로 더 높은 영적 상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상태 속에서도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시고,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천국의 것들이 표상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상적이어야만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십니다. 유대교회의 외적 예배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를 통하여 주님과 천국에 관한 표상들이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AC.31에서 말하는 ‘항상 타는 등불’은 무엇을 표상했을까요?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만큼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상의 세부적인 의미는 ‘적절한 곳에서’ 설명하겠다고 여기서 유보합니다. 그러므로 AC.31만을 가지고 ‘저녁은 반드시 이런 상태이고, 등불이 밤새 타는 것은 반드시 이런 교회사적 보존을 뜻한다’는 식으로 세부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밝힌 만큼과 우리가 그 원리를 따라 추론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심화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이렇습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이 모든 규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만 그 규례가 표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상의 근거는 인간의 이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영적 질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의미를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표상을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내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외적 예배까지 사용하여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고 보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타는 등불’은 유대인들이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보다, 그 규례를 통하여 주님께서 무엇을 표상하도록 하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31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이며, 주님께서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고 다시 겉 사람의 삶에까지 나타나게 하시는 질서입니다.

 

 

 

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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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위 AC.31 [2]에서 사60:1-3, 20을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이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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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2. 60  교회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2]에서 사60:1-3, 20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회라고 하는데, 만일 이 교회를 말하는 거라면, 어휴, 그 시기가 너무도 앞서는 것 같아요...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교회에 관한 ’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 교회’라는 표현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가 훗날 말하는, 현 기독교회의 뒤를 잇는 ‘ 교회(New Church)’, 곧 ‘ 예루살렘’을 벌써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는 먼저 AC.31의 문맥 자체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60을 인용하면서 세 가지를 서로 연결합니다. ‘주님의 강림’, ‘이방인들의 밝아짐’, 그리고 ‘ 교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가 우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주님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빛이 임하고, 이전에 어둠 가운데 있던 이방인들이 밝아지며, 그 결과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사60의 인용 내용과도 잘 맞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위에 임하실 것이며’, ‘나라들은 빛으로 나아오리라’는 말씀은 어둠 가운데 새로운 빛이 임하고 그 빛으로 사람들이 나아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교회’와 연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1의 ‘ 교회’를 곧바로 스베덴보리가 훗날 ‘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새 교회만을 가리키는 전문 명칭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31 자체는 그렇게 특정하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교회사의 시대 구분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해와 달과 빛이 사랑과 신앙에 관계된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매우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이 말씀은 ‘특별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관한 ’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AC.31에서 사60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교회에 관한 것인 동시에 한 사람의 거듭남에도 적용됩니다.

 

이것은 창1의 속뜻 전체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창조 이전의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여 ‘빛이 있으라’ 하시고, 마침내 넷째 날에는 하늘의 궁창에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가 놓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연계 창조의 역사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주님에게서 빛을 받아 사랑과 신앙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그 사람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영적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 교회’와 ‘거듭나는 사람’이 함께 언급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는 단지 건물이나 조직의 이름이 아닙니다. 교회의 생명은 결국 사람들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새롭게 되는 것과 한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규모는 다르지만 서로 대응되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어둠 가운데 빛이 임하고, 사랑과 신앙이 새롭게 일어난다는 점에서는 같은 영적 원리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훗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 예루살렘’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후기 저작에서 ‘ 교회’와 ‘ 예루살렘’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신다는 주제는 그의 교회론 전체를 관통합니다. 다만 그 후대의 교회론을 AC.31의 짧은 ‘ 교회’라는 표현 안에 미리 모두 집어넣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31에서 사60의 ‘ 교회’가 너무 이른 시기에 등장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 교회’라는 말을 보자마자 곧바로 스베덴보리의 후기 저작에서 말하는 ‘ 예루살렘’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먼저 ‘주님의 강림으로 새로운 빛이 임하고, 이방인들이 밝아지며, 그로 인해 일어나는 교회’라는 AC.31 자체의 설명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 말씀을 우리 각 사람에게 돌립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주님에게서 빛을 받아 거듭날 때, 그 사람 안에서도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가 새롭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60을 인용한 AC.31의 핵심은 ‘ 교회가 교회사에서 정확히 번째 교회인가?’를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가운데 빛이 일어나고, 그 빛으로 교회가 새로워지며, 동시에 한 사람도 새롭게 창조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1의 표현을 훗날의 ‘ 교회’ 교리와 억지로 분리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그 후기 교리를 이 짧은 구절에 모두 소급하여 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AC.31이 여기서 실제로 밝힌 만큼만 먼저 읽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이후 스베덴보리가 전개하는 교회론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됩니다.

 

 

 

AC.31, 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AC.31.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위 AC.31 [3]의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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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위 AC.31 본문,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and here, that by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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