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6.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랑 대해 어디를 보니 charity 쓰던데,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 해도 되는지요? 그리고  주님 사랑 전치사 to  반면, 이웃 사랑 toward 쓰나요?

 

 

AC.36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두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큰 두 계명으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스베덴보리도 신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자주 등장하는 체어리티(charity)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먼저 주님 사랑은 단순히 주님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애정과 고백을 무가치하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살아가는가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가장 높이 여기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살고자 하는 데서 실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점은 AC.36의 문맥에서도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히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있다고 말한 직후, 그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그 사랑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친절한 감정을 가지라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해 행동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언제나 이웃 사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웃의 범위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보다 넓습니다. 가까이 있는 한 사람에서 시작하여 여러 사람의 공동체, 사회와 국가, 교회, 더 나아가 주님의 나라까지 이웃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집니다. 다만 AC.36에서는 이웃의 단계와 질서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우선 이웃 사랑은 이웃의 참된 선을 원하고  선을 행하는 사랑이라고 이해하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 체어리티(charity)는 어떤 관계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 둘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charity`는 흔히 이웃을 향한 사랑과 그것이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영어의 `charity`를 보고 단순히 자선’, ‘기부’, ‘구제라고 생각하면 스베덴보리의 뜻보다 지나치게 좁아집니다. 그에게 체어리티는 훨씬 넓은 영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 번역에서는 `charity`를 문맥마다 곧바로 이웃 사랑으로 바꾸기보다 체어리티라고 살려 두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은 말 그대로 사랑의 대상을 이웃에 두는 표현이고, ‘체어리티는 그러한 이웃 사랑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삶의 원리로 나타나는 것을 폭넓게 가리키는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교리적 용어로 계속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 나눌 필요도 없지만, 언제나 완전히 같은 단어처럼 바꾸어 써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영어 표현 자체로는 가능하며,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도 charity neighbor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원문이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하면 이웃 사랑으로, `charity`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도 독자가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love to the Lord`라고 하면서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했을까요? `to` `toward`가 다르니 여기에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6은 이 전치사의 차이에 별도의 교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to`는 주님과의 직접적인 결합을, `toward`는 주님에게서 나온 사랑이 밖으로 흘러가는 것을 뜻한다고까지 확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것은 영어 표현의 미묘한 차이에서 본문이 직접 말하지 않은 신학적 의미를 끌어내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전치사의 차이보다 두 사랑의 관계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선은 이웃을 향한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반대로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 역시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고 주님께 둡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을 뿌리’, 이웃 사랑을 열매라고 비유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것도 AC.36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기보다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핵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AC.36이 신앙을 설명하다가 결국 이 두 사랑으로 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머리로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이 실제 삶의 선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 ‘이웃 사랑’, ‘체어리티는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계속 만나게 될 서로 깊이 연결된 핵심 개념들입니다.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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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은 순종이다 : 사랑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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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AC.35 마지막의 만일 주님께서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는 말은 짧지만 참으로 큰 위로를 줍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는 지옥을 향할 수 있으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하는 쪽은 의지이므로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사람 전체가 지옥으로 곤두박질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망적인 문장의 끝에 주님의 자비가 등장합니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마지막 말이 인간의 악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비라고 하면 죄를 지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시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자비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AC.35의 문맥에서 자비는 조금 더 근본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람이 자기 악한 의지에 따라 끝까지 떨어지도록 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엄중한 진단과 주님에 대한 그의 신뢰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간의 악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조금 노력하면 자기 힘으로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깊이 자기 사랑과 악으로 기울 수 있는지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자비가 더욱 크게 드러납니다. 사람이 여전히 돌이킬 수 있고,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선을 향하여 움직일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붙들어 주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여기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5은 그 작동 방식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 어떤 일이 뜻밖에 막히는 것, 고통이나 시험을 겪는 것 등을 하나하나 가리켜 이것이 바로 그때 주님께서 붙드신 것이다라고 AC.35만을 근거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와 거듭남에 관한 다른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면 주님의 인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우선 인간이 자기 악에 완전히 내맡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비로 붙드신다고 해서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으며, 악과 싸울 수도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 안에서 선과 진리를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길을 열어 주시는 자비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자비를 공의라면 벌해야 하지만 자비가 그것을 눈감아 주는 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신적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거나 거짓을 진리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 자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그가 악에서 돌이켜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구원을 향해 이끄시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비는 인간의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악에서 건져 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AC.35의 이 한마디는 거듭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다 보면 나는 아직도 이렇지?’, ‘ 알고 있는 것과 실제 삶이 이렇게 다르지?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35처럼 이해는 하늘을 향하면서 의지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말씀을 읽으면 자기 안의 모순이 더욱 크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이 문장의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끝내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말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주님의 자비로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의지가 이미 완전해졌다는 데 있지 않고,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어차피 주님께서 붙드시니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자비를 알수록 우리는 그 자비에 응답하여 악에서 돌아서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기며, 주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을 자유롭게 선택해야 합니다. 자비는 거듭남을 대신해 주는 면허가 아니라 거듭남이 가능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으신 신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고백은 AC.35을 읽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AC.35은 그 자비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든 방식으로 역사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악한 의지의 무게만을 따라 끝없이 떨어지도록 버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짧은 한마디 때문에,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그렇게 엄중하게 말한 AC.35도 결국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바라보며 끝납니다.

 

 

 

AC.35, 창1:14-17, ‘의지와 이해 : 하나의 생명이냐, 둘로 갈라진 마음이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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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심화

2. 도망함(flight) 마지막 때와 사람이 죽을 뜻하는가?

 

 AC.34 본문 인용 구절,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13:18) 나오는 (flight) 기독교, 개신교에서는 휴거 하여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 없는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각각 겨울과 봄의 햇빛에 비유한 뒤, 13:18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그리고 곧바로 여기서 도망함(flight) 마지막 때를 뜻하며, 또한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고, 환난의 날은 저세상에서의 비참한 상태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뜻밖입니다. ‘도망함이라는 말이 어떻게 마지막 를 뜻하고, 더 나아가 사람이 죽을 를 뜻할 수 있을까요? 혹시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 어디론가 날아가는 flight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먼저 이 가능성부터 제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서 영어 flight비행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13의 문맥에서 flight는 위험을 피해 도망함, 피신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해하면서 영어 단어의 다른 뜻인 비행을 끌어올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것을 현대 종말론에서 흔히 말하는 휴거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flight를 휴거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직접 제시하는 속뜻은 마지막 사람이 죽을 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화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그가 실제로 제시한 이 두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왜 도망함마지막 를 뜻할까요? 13의 문자적 문맥에서 도망함은 한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고 결정적인 끝을 향해 가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 적용합니다. AC.32에서도 세대의 종말을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어느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도망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한 교회의 상태가 마지막에 이르는 영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또한 사람이 죽을 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 전체의 마지막과 한 개인의 자연계 삶의 마지막 사이에 대응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그 교회의 마지막 상태가 있고, 개인에게는 자연계에서의 삶을 마치는 때가 있습니다. AC.34는 막13의 말씀을 이 두 차원에 함께 적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을 를 단순히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이동 순간으로 이해하면 AC.34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바로 이어 설명하는 것은 이동의 방식이 아니라 그때의 상태입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을 AC.34의 속뜻에 따라 읽을 때 중심 질문은 죽을 영혼이 어떻게 이동하는가?가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마칠 사람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가?입니다. 그때가 겨울’, 곧 사랑이 없는 삶의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4 전체의 주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이 글의 처음부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며, 사랑 없는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지고 있는 영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그는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을 겨울철 햇빛에 비유합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어서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고 모든 것이 굳어 있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빛과 함께 열이 있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바로 이 겨울과 봄의 대조를 설명한 다음에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따라서 겨울의 의미는 앞의 설명과 분리해서 읽을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람이 죽을 를 언급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연계에서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은 사랑과 신앙이 결합된 삶을 향하여 거듭날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계의 삶을 마칠 때 그 사람의 지배적인 생명이 사랑 없는 겨울과 같은 상태라면, 그것은 단순히 추운 계절에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자연계의 삶을 마쳤다는 뜻이 됩니다.

 

AC.34은 그 뒤의 환난의 저세상에서의 비참한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 역시 자연계의 재난이나 종말 시간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 없는 삶이 사후에 어떤 상태와 연결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인용 전체는 AC.34가 계속 말해 온 사랑 없는 신앙에는 참된 생명이 없다는 원리를 매우 엄중한 방식으로 강조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죽을 라는 표현 때문에 임종 순간의 감정이나 마지막 몇 분의 상태에 지나치게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34가 말하는 겨울은 사랑이 없는 입니다. 즉 문제는 죽는 바로 그 순간 사람이 평안했는가 두려워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연계에서 어떤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아 살아왔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었거나, 의식을 잃은 채 죽었거나, 임종 때 심한 고통과 두려움을 겪었다고 해서 그것을 겨울에 도망한 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겨울은 육체적 임종 상황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이라는 영적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별은 목회적으로도 중요합니다. 13:18AC.34의 설명에 따라 읽으면서 좋은 상태에서 죽어야 한다는 말을 임종의 외적 모습에 적용하면 불필요한 두려움을 만들 수 있습니다. 평안하게 임종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봄인 것도 아니고, 고통스럽게 임종했다고 해서 영적으로 겨울인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보는 것은 자연적 죽음의 외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이루어 온 사랑의 성질입니다.

 

이렇게 보면 도망함이 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하는지도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막13의 종말에 관한 말씀을 교회의 마지막에만 한정하지 않고 개인의 자연계 삶의 마지막에도 적용합니다. 그리고 그때 중요한 것은 마지막이 사랑 없는 겨울의 상태인가, 아니면 사랑과 신앙이 결합된 생명 가운데 있는가입니다.

 

따라서 AC.34에서 flight비행이나 휴거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서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는 이동 자체를 flight라고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주는 열쇠는 마지막 ’, ‘ 사람이 죽을 ’, 그리고 겨울은 사랑이 없는 이라는 세 표현입니다.

 

결국 이 인용의 중심은 어떻게 세상 끝에서 탈출할 것인가?가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마칠 나는 어떤 사랑의 상태에 있는가?입니다. AC.34 전체가 말하듯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사랑 없는 신앙은 겨울의 햇빛과 같습니다. 그래서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은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 삶의 중요성을 마지막 순간의 관점에서 다시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다 : 겨울의 빛과 봄의 빛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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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

AC.34.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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