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4.심화

1.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어떤 상태일까?

 

 AC.34 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가운데 있는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말인데요,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라고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어떤 묘사가 가능할까요? 저렇게만 말하면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해서요...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영계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천적 사랑 가운데 있는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으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가운데 있는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읽으면 오히려 궁금증이 커집니다. ‘말로 표현할 없다니, 도대체 어떤 상태라는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AC.34에서 실제로 말한 범위를 정확히 붙드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 상태를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천적 천사들이 어떤 느낌을 느끼는지, 생각이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 어떤 방식으로 진리를 알아보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빈자리를 상상으로 채워 천적 천사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이런 감정을 느낀다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AC.34 자체가 알려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첫째, 그들은 천적 사랑 가운데있습니다. 둘째, 그 사랑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셋째, 그 사랑으로 인해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있습니다. 넷째, 그 결과 그들에게는 놀라운 생명과 지성의 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를 함께 보면 어느 정도 그 상태의 윤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생명입니다. 바로 앞의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생명을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과 기쁨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4의 천적 천사들이 놀라운 생명가운데 있다는 말은 앞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랑에 따른 생명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지성의 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머리가 매우 좋다거나 지식이 많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4가 강조하는 것은 천적 천사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지성의 빛은 사랑 없는 지적 능력이나 교리 지식의 축적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바로 뒤에 나오는 반대 사례를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지식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 관한 교리적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가운데 있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에게는 생명과 지성의 이 있고, 사랑 없는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에게는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대조가 AC.34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천적 천사들의 지성의 을 이해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사랑에서 분리되지 않은 지성의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에 속한 지식은 차가운 지식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결합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상태를 단순히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생명과 지성의 가운데 있는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의 AC.32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이 사랑에 속한 신앙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4의 천적 천사들을 이해할 때에도 같은 질서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빗대어 조금이라도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아주 제한적인 비유는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하니까억지로 하는 경우와, 진심으로 이웃의 유익을 사랑하여 기쁘게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이라도 후자의 경우에는 무엇이 옳은가라는 앎과 그것을 하고 싶다는 애정이 더 가까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천적 천사들의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연적 수준에서 희미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비유 정도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의 상태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모든 진리를 한순간에 직관적으로 아는 상태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4가 여기서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과 지성의 을 어떤 특별한 황홀감이나 감정 상태로 묘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랑과 신앙의 질서입니다.

 

왜 그 상태를 거의 말로 표현할 없다고 했는지도 여기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경험했다고 말하는 천적 사랑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자연계에 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랑과 지식의 관계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진리에 어긋날 수 있고,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살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신앙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실제 사랑의 삶과 분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에서 천적 천사들의 상태는 바로 그 반대편에 놓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결합되어 있고, 거기에서 생명과 지성의 빛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분리된 상태를 가지고 그 결합의 상태를 온전히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도 거의 말로 표현할 없다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할 없다는 문장을 신비한 황홀경에 대한 묘사로 읽는 것이 아닙니다. AC.34의 문맥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과 신앙의 결합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를 이루며, 사랑 없는 신앙의 지식은 겨울 햇빛처럼 생명을 내지 못하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의 햇빛처럼 생명을 일으킵니다.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은 바로 이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천국에서 얼마나 충만한 생명을 이루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상태를 완전히 묘사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무엇이 그 상태의 핵심인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지식이 살아 있는 상태’,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아 생명과 지성의 빛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설명은 결국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AC.34가 천적 천사들의 놀라운 상태를 보여 주는 목적은 단순히 천국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바로 다음에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의 차갑고 어두운 상태를 대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많은 신앙 지식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지식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삶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은 우리에게 아직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천국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AC.34가 밝혀 주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생명과 빛의 근원은 천사들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으며,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질서가 그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AC.34, 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

AC.34.심화 2.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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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 없는 신앙은 빛이 아니다 : 생명을 가르는 광명체의 본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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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심화

2. 광명체 본문에서 갑자기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말하는가?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풀어 설명해 주세요.

 

1:14-17의 넷째 날 본문은 해와 달과 별, 광명체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AC.30부터 스베덴보리는 이 광명체들을 사랑과 신앙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AC.33에 이르면 갑자기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얼핏 보면 광명체의 속뜻을 설명하다가 잠시 다른 주제로 빠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0-33의 흐름을 함께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AC.33은 앞에서 말한 광명체’, 곧 사랑이 왜 그렇게 근본적인지를 설명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광명체를 사랑과 신앙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광명체는 사랑이고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기 때문에 사랑이 먼저입니다. AC.32에서는 이 질서를 더욱 분명히 하여,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사랑이 그토록 근본적일까요? 왜 사랑이 광명체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것일까요?

 

AC.33은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과 생명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없으며,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단순히 신앙과 나란히 놓이는 하나의 종교적 덕목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의 생명과 직접 관계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의 성질이 달라지고, 그 사람이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도 달라집니다. 이것이 광명체인 사랑을 설명하다가 생명과 기쁨의 이야기가 나오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더욱 강하게 설명하기 위해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이라고 말합니다. 앞의 심화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것은 생각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을 움직이는 더 깊은 생명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생각하고 추구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사랑이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라고 해서 모든 사랑에서 나오는 생명과 기쁨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3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을 구별하여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도 생명과 기쁨의 어떤 모양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서 큰 활력을 느낄 수도 있고, 재물이나 지위나 명예를 얻는 데서 강한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나는 무엇인가를 사랑한다’, ‘나는 이것을 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참된 사랑과 참된 기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사랑은 무엇일까요? AC.33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생명에서 오는 기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랑, 생명, 기쁨이 하나의 질서로 연결됩니다. 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이것이 AC.32와도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AC.32에서 천적 천사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AC.33은 이제 그 원리를 좀 더 일반적인 형태로 설명합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바로 그 생명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AC.33의 사랑·생명·기쁨 이야기는 광명체 본문에서 벗어난 별도의 주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광명체가 사랑이다라는 말의 깊이를 밝혀 주는 설명입니다. 사랑이 큰 광명체라는 것은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더 밝다거나 더 중요하다는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고, 인간의 생명과 기쁨의 성질 역시 사랑의 성질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사랑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점은 광명체를 단순히 진리의 이라고 바꾸어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문맥에서 두 광명체는 각각 사랑과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진리의 빛이 사랑과 결합되어야 참된 빛이 된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보다, AC.30-33이 실제로 말하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그대로 따라가는 편이 정확합니다.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은 더 작은 광명체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에 광명체가 나타난다는 것을 곧바로 이제 참된 기쁨과 행복이 완성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AC.33은 거듭남의 넷째 상태 전체를 여기서 완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광명체 가운데 특히 사랑이 가지는 생명적 성격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거듭남의 과정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AC.33의 흐름은 오히려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 광명체는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이 광명체인가? 사랑은 생명과 분리될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성질에 따라 생명의 성질도, 기쁨의 성질도 달라진다. 그리고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과 참된 기쁨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이런 흐름입니다.

 

결국 AC.33에서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이 등장하는 이유는 광명체 이야기를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광명체의 속뜻을 더 깊이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해가 단순히 밝은 천체가 아니라 사랑을 나타낸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곳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참된 생명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창1의 넷째 날은 단순히 사람 안에 무엇인가 밝은 이 생기는 단계가 아닙니다. AC.30-33의 흐름에서 보면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나타나고,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으며, 그 사랑과 생명의 참된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는 단계입니다. AC.33의 사랑과 생명과 기쁨에 관한 설명은 바로 이 넷째 날의 아르카나를 한층 더 깊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33, 창1:14-17, ‘사랑이 곧 생명이다 : 참된 사랑과 거짓 사랑의 결정적 분별’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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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AC.33.심화 1. ‘생각이 즉시 멈춘다’ 위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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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심화

1.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것을 생생히 적이 있습니다.(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말인데요, 사례에 대한 생생한 얘기를 들을 있을까요? 생각이 즉시 멈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말을 합니다.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나에게 생생하게 보여진 바와 같습니다.여기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표현입니다. 사랑이 없어지면 왜 생각까지 멈추는 것일까요?

 

먼저 한 가지는 정확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3에서 이것이 자신에게 생생하게 보여졌다고 말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것이 어떤 장면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영에게서 사랑을 제거했더니 그 영이 갑자기 생각을 멈추었다는 식의 상세한 사례도 여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장면을 상상하여 구체적인 영계의 실험처럼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3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사랑과 생각의 관계를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제적으로 확인된 사실로 제시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생각이 멈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 말을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없다면 생명도 있을 없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여러 감정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며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를 움직이는 생명의 근본적인 애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은 사랑과 완전히 독립하여 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합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고 싶기 때문에 방법을 궁리하고,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생각하며, 어떤 일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생각이 계속 이어집니다. 생각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생각을 움직이고 방향을 주는 더 깊은 곳에는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는 애정이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이것의 희미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깊은 관심이 생기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그 일에 관한 생각이 계속 떠오릅니다. 반대로 아무런 관심도 목적도 없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오래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AC.33의 말을 완전히 증명하는 사례는 아니지만, 사랑과 관심과 목적이 사고의 방향과 지속성에 깊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AC.33의 말은 단순히 관심 있는 것은 많이 생각한다는 심리적 관찰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인간 생명의 구조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이 생명의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생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그 사랑에 속한 욕망을 모두 제거한다고 가정하면 생각도 즉시 멈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욕망(desires)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욕망이라고 하면 흔히 악하거나 육체적인 욕구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AC.33에서는 더 넓은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욕망은 사랑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향하여 움직이고 원하는 모든 애정적 경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선한 사랑에도 그 사랑에 속한 바람과 목적이 있고, 악한 사랑에도 그 사랑에 속한 욕망과 목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의 유익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사람에게 실제로 도움이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어떤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쓰임을 더 잘 수행할 방법을 생각합니다. 반대로 자기의 명예를 지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인정받고 높아질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서로 매우 다르지만, 각각의 생각 뒤에는 그 생각을 움직이는 사랑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의 핵심은 생각은 아무 가치가 없고 사랑만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이해는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어떤 사랑을 섬기느냐입니다. 참된 사랑에서 나오는 생각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나오는 생각은 겉으로는 똑같이 지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생명의 성질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AC.33의 앞뒤 문맥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성질이 생각의 방향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생각은 그 사랑을 섬기는 방향으로 형성되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생각 역시 그것들을 이루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자기 안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보고 곧바로 이것이 나의 진짜 사랑이다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생각과 충동이 오갈 수 있고,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 사이의 싸움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이고 선택하며,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는가입니다. 그런 지속적인 방향에서 그 사람을 지배하는 사랑의 성질이 점차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말을 뇌의 작동이 물리적으로 정지한다거나 사람이 아무런 의식도 없는 상태가 된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3의 초점은 자연적 생리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생각이 그 자체로 인간 생명의 최초 원인이 아니며, 그 생각을 움직이는 더 깊은 생명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사랑을 제거한 사람을 마치 죽은 사람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원하는 것도, 추구하는 것도, 기뻐하는 것도 없고, 따라서 생각을 움직이는 생명의 동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만이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에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을 살피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나는 무엇을 많이 생각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배후의 사랑과 목적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33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말은 생각을 낮추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는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생각은 고립되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연결되어 있으며,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각이 향하는 방향도 달라집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AC.33이 마지막에 밝히듯 사람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 있습니다.

 

 

 

AC.33, 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AC.33.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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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사랑이 곧 생명이다 : 참된 사랑과 거짓 사랑의 결정적 분별’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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