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0(D1)-주일예배(2534, 눅17,11-1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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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17:11-19)

 

주님께서 치유하신 모든 자연적 질병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영적 질병들을 의미한다. 영적 질병은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즉 주님의 신적 전능함을 바라보는 일과 삶의 회개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계시록 해설 815:5, 이순철 역) all the diseases healed by the Lord represented and thus signified the spiritual diseases that correspond to these natural diseases; and spiritual diseases can be healed only by the Lord, and in fact by looking to His Divine omnipotence and by repentance of life. (AE.815.5)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그동안 살면서 은혜를 입은 많은 분들 생각이 났습니다. 가깝게는 부모님과 형제들, 처가, 그리고 고등학교 동기들, 서울침례교회 청년부 형제자매들, 지구촌교회를 비롯, 침신대 신대원 동기들, 늘사랑교회 성도들과 그 외 개척 시절 물심양면 많은 도움을 주신 평책사 목회자 부부들, 그리고 수도원이나 4014 금식 운동 등으로 알게 된 많은 지인들 등, 제가 지난 4, 5년 꾸준히 틈틈이 글 공유를 하는 카카오톡 명단이 있는데, 그중 거의 대부분이 바로 한 번이라도 저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분들을 대상으로 초창기 처음 명단을 선정했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무슨 대신 갚을 것 없는 때여서 제가 받은 은혜와 감사의 글 나누는 것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제가 하는 이 스베덴보리의 낯설고 생소한 말씀 풀이와 이질적 교리로 그마저 많이들 소원해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한 분 한 분 저희를 기억하시고 사랑과 은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푸신 기억들은 두고두고 고맙고 감사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다 제 일지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러나 정작 실제로 그 고마움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일에는 저희가 너무 서툴러 본의 아니게 섭섭함과 서운함을 드리는 경우들도 가끔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 한분 한분이 사실은 그분들 모습으로 저희를 도우신 주님이셨을 텐데 말입니다. 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제 경우였지만... 이처럼 우리는 왜 보통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을 모를까요? 그리고 주님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주님이 갈릴리를 출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러나 영적으로는, 즉 그 속뜻으로는, 이 말씀은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의 과정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이 지옥의 시험을 이기시고, 점차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이 되시는 과정을 의미하지요. 이에 대해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조금 어려우실 듯 합니다만... 주님이 빛을 더하사 이해를 더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갈릴리는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하고, 사마리아는 이방인 가운데서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주님도 처음에는 교회 밖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계시다가, 그러니까 아주 어린 영유아 시절이셨겠지요, 점차 진리의 인도를 받아 내면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가신 것을 뜻하며, 그러므로 전반적으로는 주님의 영화의 과정을 의미하는데요,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주님의 영화, 즉 주님이 입으신 인성과 주님 안의 신성이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거기서 부활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뜻하고, 부활은 시험에서 이기심으로 해서 신성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주님의 영화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그렇게 한편으로는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아직 신성과 완전히 결합하지 않으신 주님이 그러면 어떻게 병자들을 고치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영화롭게 되시는 과정을 보면,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서로 결합되어 있을 때도 있었고, 분리된 상태일 때도 있었는데요, 전자의 상태, 즉 인성과 신성이 결합한 상태를 주님의 영화의 상태라 하고, 후자의 상태, 즉 인성과 신성이 분리된 상태를 겸비(humiliation)의 상태라고 합니다. 겸비라는 것은 주님의 인성이 신성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은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 하나가 된 상태일 때, 즉 영화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인데요, 그때 신성의 능력이 인성을 거쳐 병자들에게 전해져 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이 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을 12절과 13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영적 의미로 나병환자는 진리를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진리를 더럽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역시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영적 나병환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인정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까지 인정하지는 않는 걸 의미하는데요, 왜냐하면 본문을 보면, 그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예수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주님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병환자의 경우, 시대적으로, 즉 유대 정결법이 우선되는 당시 상황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지만, 속뜻으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는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거나 세상 재물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 주님 앞에 나오면 영적인 복과 자연적인 복을 주님께 구합니다. 나병환자가 멀리서 주님께 병의 치유를 구하는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것입니다.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십니다. 레위기 1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나병환자가 생기면 먼저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를 통해 나병의 유무와 그 상태를 판단 받도록 했습니다. 주님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지요. 그렇다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말씀에서 제사장은 선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보이라 할 때, 몸은 겉 사람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선의 관점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걸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돌아서서 악을 행하는지, 아니면 아직 선의 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진리의 상태에 있다가 악을 행하는지 스스로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상태가 후자보다는 내적인 나병이고, 그러므로 위중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속까지 병드는 게 겉만 병든 것보다 더 치명적이기 때문이지요. 상한 양파나 감자, 사과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나병환자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간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그러니까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은 나병환자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병의 상태를 진단한 후, 악에서 돌아설 때 병이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저들처럼 주닙의 말씀대로 하면, 일상 가운데 이런 일이 고스란히 그대로 우리에게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15절과 16절에는 병이 치유된 나병환자 중 한 사람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나병환자 가운데 한 사람이 주님을 찾아와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발아래 엎드리는 것은 그가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발아래 엎드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77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힘과 지혜에 있어 하나님은 모든 것이고 그에 비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때, 또는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인간으로부터는 악 외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그때 그는 하나님 앞에 굴복한다. 사람이 이러한 것을 마음으로 인정할 때, 그는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처럼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때 또한 그에게서 자아가 제거된다. (이순철 역) when man thinks that the Divine in respect to power and wisdom is everything, and man in comparison is nothing, or that from the Divine is all good and from man nothing but evil. When man is in this acknowledgment from the heart he comes as it were out of himself, and thence falls upon his face, and when he is thus out of himself he also is removed from the proprium [what is his own], which in itself is wholly evil; when this is removed, the Divine fills him and raises him up; (AE.77)

 

주님께 감사드리는 나병환자는 자신은 아무 힘도 없고, 오로지 주님의 도우심으로 고침을 받았음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주님께서 발아래 엎드린 그 사람을 향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물으십니다. 여기서 열 사람은 그 속뜻으로는 주님께 병 고침을 받은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열이라는 숫자는 모든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홉은 결합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주님과의 결합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과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아홉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인애(仁愛, charity)의 신앙을 버리고, 자아에서 나오는 신앙으로 자기 자신 및 세상과 결탁, 결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세상의 부귀를 좇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아 겨우 숨통이 트여 살만하게 되면 금방 또 제힘을 의지하여 세상 가치관으로 돌아서는 그런 버릇이 우리 안에 여전히 있는 것을 보는데요,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이는 들어가는데 이루거나 모아놓은 건 전혀 없이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를 맴맴 도는, 어처구니없는 인생을 살게 되지요. 이런 못된 버릇이나 습관은 아주 단호하게 끊어내야 할 줄 믿습니다.

 

아, 그리고 참고로, 이 9:1 비율은 의외로 많은 곳에서 발견되거나 경험할 수 있는데요, 가령, 제가 몇 년째 대략 100여 분께 받은 바 은혜를 나누어 오지만, 그 가운데 꾸준히 답신을 보내오시거나 무슨 반응을 보이시는 분은 대략 열 분 정도밖에 안 됩니다. 처음엔 좀 서운함이 있었으나 ‘아, 원래 이런 거구나...’ 하는 걸 알게 되고 나선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로 돌아와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에는 그를 사마리아인 또는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교회 밖의 이방인이지만 그럼에도 진리를 사랑하여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의 믿음은 자신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먹는 개에 비유하신 주님의 비유에 기꺼이 동의한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겸손한 믿음이며, 부잣집 문 앞에서 음식을 구걸하듯 진리에 갈급했던 거지 나사로와 같은 믿음입니다.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주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습니다. ‘일어나는 것’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으로 그의 신앙이 자아의 이기적 신앙에서 주님이 주시는 이타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는 것’은 신앙의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걷는 것이나 가는 것은 삶의 행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는데요, ‘구원하였다는 것’은 그의 병이 일시적으로 치유된 게 아니라 영원히 치유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가 구원을 받은 이유는 그의 신앙이 인간의 이기적 신앙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인애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신앙이라고 모두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구원과 세상에서의 영달(榮達)을 위한 그런 신앙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전자의 신앙, 즉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신앙이라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후자의 신앙, 즉 이기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오히려 그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악을 끊고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을 고치기를 원하는 병자들에게 언제나 ‘네가 나를 믿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물으실 때의 그 믿음은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신앙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타적인 신앙입니다. 겸손한 사마리아인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에 따라 자아의 신앙을 버리고, 주님이 주신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고질병인 나병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었고, 주님의 발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반대로 나머지 아홉 사람의 나병환자들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을 통해 일시적으로 병을 고칠 수는 있었지만, 곧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시는 이타적인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기적인 신앙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영적인 질병을 근본적으로 고칠 수 없고, 주님 앞에 겸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에게로 돌아온 한 사람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리에 따라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자신의 신앙이 어떤 상태인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통찰력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이 잘못된 것이라면 과감히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신앙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17:6)

 

아멘

 

 

 

원본

2021-09-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맞춤 설교

2024-03-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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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원리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김은경 역) 총 63장 목록 중 앞부분입니다.

 

1. 주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시다 (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2. 주님의 신성이 천국을 이룬다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3. 천국 안의 주님의 신성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In Heaven the Divine of the Lord Is Love to Him and Charity toward the Neighbor)

 

4.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 (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

 

5. 세 천국이 있다 (There Are Three Heavens)

 

6. 천국은 무수한 공동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The Heavens Consist of Innumerable Societies)

 

7. 각 공동체는 더 작은 천국이며, 각 천사는 가장 작은 천국이다 (Each Society Is a Heaven in a Smaller Form, and Each Angel in the Smallest Form)

 

8.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 (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

 

9. 천국의 각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 (Each Society in Heaven Reflects a Single Man)

 

10. 천사는 완전한 사람 형태로 있다 (Therefore Every Angel Is in a Complete Human Form)

 

11. 천국이 사람 모습임은 주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 (It Is from the Lord’s Divine Human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Reflects Man. Extracts from Arcana Coelestia relating to the Lord and His Divine Human)

 

12.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 (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

 

13. 천국은 지상의 모든 것과 상응한다 (There Is a Correspondence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the Earth)

 

33.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 (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Human Race)

 

등의 내용들, 그리고 악한 영들이 자기 위장 근처로 오니 우울증이 시작되다가 떠나니 회복되는 걸 보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여러 증상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는 그의 진술,

 

또 사람은 그 내면에 두 개의 창이 있는데, 하나는 천국을, 하나는 지옥을 향한 창이 있어 어느 한 쪽이 열리면 다른 쪽은 닫히게 되어 한 쪽의 것만 흘러들어올 수 있다는 것과, 이 창문을 열고 닫는 건 본인의 선택이라는 것, 마치 창문 밖 햇볕이 아무리 따스하고 환해도 정작 본인이 커튼을 쳐버리면 방안으로 못 들어오는 것과 같다는 것,

 

천국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건데, 그런 거처럼 지상의 사람도 천국, 곧 주님을 향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며, 그래야 천국을 향한 창이 열려 천국의 모든 좋은 것과 능력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와 비로소 내가 그걸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래서 사람의 내면이 열리지 않으면, 즉 사람이 천국을 향하지 않으면, 아무리 누가 기도를 해 주거나, 안수해 주거나 예언 기도, 치유 기도, 무슨 기도, 무슨 기도를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그래서 저는 영육 간에 무슨 연약함이나 비정상이 시작될 때, 의도적, 의식적으로 천국하고의 연결을 생각합니다. 만일 몸 특정 부위의 연약함, 아픔이 시작되면, 의식적으로 천국 해당 공동체들하고의 연결을 생각하고, 주님이 해당 공동체들을 통해 제게 그 인플럭스(influx, 入流)를 더욱 흘려보내 주시기를 구합니다. 저는 제 온 몸이 늘 천국과 상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인플럭스란 주님으로부터 나와 피조세계에 더하여지는 어떤 영원한 영적 흐름인데요, 그러면 대부분은 상태가 호전되며,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영육 간에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복음서에 나오는 수많은 치유의 원리가 아닌가 하는데요, 늘 군중에 둘러싸이셨지만 정작 주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소수였는데, 그 소수만 그 내면이 열려, 아니 정확히는 ‘열어’ 주님의 능력, 곧 치유하시는 인플럭스가 자기 안에 흘러들어오도록, 즉 심령의 커튼을 확 열어젖힌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믿습니다!’, ‘주여!!!’ 소리소리 지르더라도 이 원리를 모르고 애를 쓰는 사람한테는 대부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 봅니다. 이 자기 내면을 여는 거, 곧 내면의 창문을 여는 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을 사랑하고 지상의 삶, 겉 지향적이고 세속적 가치관으로부터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라야만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815번 글 5번 항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는 계시록 13장 11절,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를 속뜻으로 주석한 내용 일부입니다.

 

주님께서 치유하신 모든 자연적 질병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영적 질병들을 의미한다. 영적 질병은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즉 주님의 신적 전능함을 바라보는 일과 삶의 회개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계시록 해설 815:5, 이순철 역) all the diseases healed by the Lord represented and thus signified the spiritual diseases that correspond to these natural diseases; and spiritual diseases can be healed only by the Lord, and in fact by looking to His Divine omnipotence and by repentance of life. (AE.815.5)

 

즉, '주님의 신적 전능함을 바라보는 일과 삶의 회개', 이럴 수 있는 사람이 곧 위에서 말씀드린, '자기 내면을 여는 사람, 곧 내면의 창문을 여는 사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천국을 사랑하고 지상의 삶, 겉 지향적이고 세속적 가치관으로부터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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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의 속뜻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17:7-10)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천국으로부터 하는 것,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 하는 것은 무슨 일이든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이다. (계시록 해설 794:3, 이순철 역) whatever man does 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he does from heaven, that is, through heaven from the Lord; but anything that a man does 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this he does from self. (AE.794:3)

 

 

다음은 마태복음에 실린 주님의 산상수훈 말씀입니다.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5:1-4)

 

주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할 때는 생색을 내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말씀이지요. 누구나 자기를 자랑하고픈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지 말라 하십니다. 왜일까요?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높이는 건 자아에 대한 사랑이며, 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대신 자신만을 사랑하면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문이 닫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선(善, Divine Good)과 진리(眞理, Divine Truth)의 유입이 끊어집니다. 그런 상태가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서 살아가는 상태인데, 그때 우리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할 뿐 이웃에게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장 39절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눅11:39-40)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바리새인들은 겉만 번지르르한 위선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41절) 하십니다.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는’ 건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는 겉 사람으로부터 하지 말고,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행동이라도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고,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전자는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속 동기는 주님 보시기에 불순하고 악합니다. 반면, 후자, 즉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순수하고 선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웃을 구제할 때는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익한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님 앞에 스스로 무익한 종이 되는 건 겉 사람의 마음으로는 어렵고, 속 사람의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 앞에서 무익한 종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해 오늘 본문의 말씀들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7절입니다.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종이 밭에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종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건 말씀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배워 익숙해지는 걸 의미합니다. 밭을 가는 건 진리의 지식을 배워 믿음이 자라가는 걸 의미하고, 양을 치는 건 그 믿음에 따라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면 밭은 무엇일까요? 밭은 교회를 뜻합니다. 신앙인은 교회를 통해 매일 선과 진리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묵상, 실천하는데요, 그것이 종이 밭을 일구고, 양을 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종이 밭에서 돌아와 앉아 누군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려고 합니다. 말씀에서 앉는 건 의지의 상태를, 먹는 건 진리와 선을 실천하는 거, 즉 삶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 종의 상태는 어떤 겁니까?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주님과 이웃을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진리에 대해 아는 걸 자랑하고, 진리를 이용해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 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상태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종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물으신 겁니다. 그러면 종은 어떻게 처신하는 게 옳을까요? 그에 대해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8절 말씀입니다.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종은 자기가 먹기 전에 마땅히 주인의 먹을 것을 먼저 준비하고, 주인이 먹는 동안 곁에서 수종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들이 진리를 가지고 선을 행할 때는 자기 자신보다 먼저 주님과 이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기쁨과 행복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주인이 먹은 다음, 종이 먹고 마실 음식은 바로 그런 천국의 것, 곧 천국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 된 사람은 허리에 띠를 두르고 먼저 주인을 수발해야 합니다. 말씀에서 허리는 생식능력과 관련이 있는데요, 그래서 영적으로는 선한 열매를 생산하는 것, 즉 선을 행하는 걸 뜻합니다. 그리고 띠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띠를 두르고 주인을 수종, 수발하는 건 선을 행함에 있어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진리에 따라 행하는 걸 의미합니다.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할 때, 주님과 이웃을 위한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걸 가지고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평화와 자유를 주십니다. 주님은 그걸 위해 종더러 먼저 주인을 수발하고, 그다음에 먹고 마시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에는 이와 같은 반전의 미학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육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영광을 얻으신 것이나, 신앙인들이 자아라는 생명을 버림으로 주님으로부터 참 생명을 얻는 건 겉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반전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인들 가운데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과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기보다 이웃들로부터 섬김받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주인보다 먼저 먹고 마시려는 종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잠깐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행복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믿고, 그것에 따라 살 수 있음에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그걸로 추앙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걸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는 주님 앞에 스스로 무익한 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잘나거나 총명해서 참된 진리 안에 들어온 게 아닙니다. 내가 선해서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로는 아주 작은 선도 스스로 행할 수 없고, 아주 작은 악도 스스로 끊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악하고 거짓된 것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하고 진실한 모든 게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걸 인정할 때,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고백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한 일들에 대해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겸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아시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속 사람이라는 마음과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속 사람 안에는 주님이 계시고, 겉 사람 안에는 인간의 자아가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만 오고, 사람으로부터는 아니라는 건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선한 행위는 겉 사람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보기에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하고, 성실하고 공정하게 행동하더라도 그 동기가 주님과 이웃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서 하는 일이며, 그러므로 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속 사람이 열리고, 속 사람으로부터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주님과 이웃 앞에 겸손’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겸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주님과 함께’라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많은 것입니다. 시험을 잘 견디고 이김으로써 속 사람은 열립니다. 그리고 그때 무슨 일을 하든 자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매일 같이 띠를 두르고, 정성껏 주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에게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107:15)

 

아멘

 

원본

2021-08-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3-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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